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2)
N 글럽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무법의 영역에서 벋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리하시는 초보적인 영역이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분리된 영역이었으며, 율법과 무법의 영역이었다. 우리는 이제 오직 선(善)만 있는 영역으로 은혜에 의하여 올라가게 되었으며, 그것은 예수님이 전부이시고, 모든 것 심지어는 악한 것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곳이다. 그곳에는 분리된 마음이 없다. 한편으로는 선을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을 사랑하는 것이 없으며, 한 편은 율법, 다른 한 편으로는 무법이 되는 경우가 없다. 다만 옛 사람들처럼 온전한 심령으로 와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능력으로 그를 사랑하고, 살앙계신 율법이 자기 의를 우리 속에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이 로마서 7장의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로마서 8장의 자유와 승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말하는 것 같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율법과 죄는 오직 독립적인 자아의 영역에서만 작용한다. 이는 독립적인 자아가 곧 원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독립적인 자기 활동의 생활 습성 가운데 젖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가운데로 다시 떨어지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 가운데라 함은 로마서 7장을 의한다. 우리는 조용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와 함께 생활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일에 대해 걱정하고, 가정과 사회와 교회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율법 가운데로 다시 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 문제나, 두려움이나, 잘못된 일이나, 우리를 거스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말아야 됨은 뻔히 알고 있고 또 노력도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정죄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는 율법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율법 아래는 죄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했고,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기 때문이다. 죄와 율법의 싸움에 있어서 죄는 백발백중 이긴다.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이는 죄가 독립적인 자아인 육신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처소를 잊어버리고 나의 독립적인 자아의 상태로 되돌아감으로써 율법의 소용돌이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의 정반대되는 죄는 나의 육신을 통하여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다시 한 번 노예가 되고 만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정상적인 거처는 그곳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롬 8:9).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을 주시는 분과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서 자기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반복하겠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세상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수밖에 없고 율법 아래 있는 세상은 초보적인 단계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예배나, 가정과 사회와 사업과 국가에 대한 일을 통하여, 혹은 일반적인 생활을 통한 유혹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영역 가운데로 떨어지기 쉽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다시 육신 가운데 있게 되고 로마서 7장 가운데로 돌아와서 헛된 갈등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오직 자기 스스로 있고, 그리스도 없이 활동하려는 사람만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되면 비록 순간적이나마 육신이 나타나게 되고 육신 가운데는 죄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명확히 이해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는 없어졌다. 주님 안에서 구속된 자아는 원래 창조된 목적대로, 원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태도로 자기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용기(그릇)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은혜와 몸의 부활로써 연합하게 될 마지막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기의뢰의 세상과 섞여 살고 있다. 그리고 주님을 의뢰하는 새로운 자아는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자기 의뢰의 형태로 빗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또 다시 율법과 자아에 대한 율법의 요구의 해묵은 싸움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율법에 대항하는 육신의 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또 한번 싸우고 갈등하고 실패하는 영역 가운데 처하게 된다. 그래서 새 사람을 좇아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새로운 "나"는 자기의 창조의 법칙에 따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완전히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을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나의 피난처되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탈하는 순간 완전한 패배를 맛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배우고 또 깊이 배워야 할 사실은, 새로운 "나" 곧, 선한 "나"도 옛날 "나"와 똑같이 무기력하여 자기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하려고 할 찰나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은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다. 죄인들 속에 있는 죄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그가 죄인임을 선포한다(롬 3장). 또 성도들 가운데 작용하는 죄의 권능을 드러내 주고, 그가 무기력함을 나타내 준다(롬 7장).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왔으며, 죄인들과 성도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사역을 했고, "더 큰 영광"이 왔을 때에는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율법을 왜 그처럼 강조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심판받을 죄인으로 우리를 몰아(롬 3:19)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를 씻게 한다. 그 다음은 실패하는 성도로 우리를 몰아(롬 7:18), 내주하시는 성령 가운데 사는 새로운 생활로 곤고함을 우리 속에서 몰아낸다(롬 7:24, 8:2-4). 그래서 우리도 역시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므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