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순종하라 -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2025.03.23.(주일예배). 부르심에 순종하라. 열왕기상 19:19~21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열왕기상 19:19~21)
엘리야 하면 갈멜산 전투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요. 엘리야 한 명이 절대다수의 바알 추종자들을 상대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영적으로 대승을 거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던 땅에 간절한 기도를 통해 큰비를 내렸던 그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여전히 홀로 남겨져 있었어요. 세상적으로 보면 이 정도 기적을 일으키면 소문도 나고 추종자들도 생겨서 명예나 권세, 심지어는 물질적 이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엘리야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세벨에 쫓겨서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마저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만다면 이세벨의 나라가 판을 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중단될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영적 근심에 엘리야는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세밀한 손길을 통하여 일하고 계셨어요. 하나님의 사람들을 은밀한 방식으로 준비하고 계셨던 겁니다. 하나님 일하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요란하지 않아요. 조용하세요. 그리고 급격하고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아주 답답할 정도로 은밀하게 조용하게 천천히 이루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의 심장부 즉, 아합 궁궐의 가장 중심부에 오바댜를 통하여 선지자 백 명을 살려놓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바알에게 입술을 맞추지 않은 무려 칠천 명의 사람들을 준비하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뒤를 이어 시대의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엘리사까지도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고 계셨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는 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이 시대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준비하고 계세요.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의 예언대로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로 부름받는 극적인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단순히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가 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는 이 혼합주의 신앙으로 인하여 완전히 무너져버린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다시 한번 되살릴 다음 세대 영적 지도자로 엘리사가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만큼 아주 결정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엘리사가 어떻게 순종하는지 우리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사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 정보를 제공해 주는 말씀이 19절에 나오는데요.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 즉, 열두 쌍의 소가 갈아야 하는 크기의 밭에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나름 살 만한 사람이죠.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 그 당시에 큰 부자는 아니었더라도 자신의 어떤 미래나 가족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부를 누렸던 사람으로 판단이 됩니다. 그냥 가만히 놔둬도 평안하게 안정적으로 살았던 그런 사람입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대한 엘리야가 나타나 엘리야의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 위에 던졌더니” (열왕기상 19:19)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갑자기 엘리야가 나타나서 겉옷을 벗어서 소를 몰고 있는 사람한테 집어던진 겁니다. 성경에서 겉옷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지위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 당시에는 그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직업뿐만 아니라 지위와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집어던졌다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하나님 나라의 지위와 능력, 그 하나님 나라의 특권을 엘리사에게 떠넘겼다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따른 엘리사의 반응이 무엇인가 보겠습니다.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데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열왕기상 19:20)
엘리사는 즉시 몰던 소를 버려요. 그리고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겠다고 말을 하게 됩니다. 지체없이 소 한쌍을 가져다가 그 자리에서 잡아버려요. 그리고 그 소 기구를 불살라서 그것으로 고기를 삶아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엘리야를 곧장 따라나섭니다. 이게 끝이에요. 이 단 세 구절의 말씀으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신의 영적 사명을 전수하게 됩니다. 오늘 엘리사가 반응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즉각성이에요. 주저함이 없어요. 뭐 생각해 보고요. 내년에 오세요. 저 이것 좀 마무리하고 좀 나도 정리할 시간을 주셔야죠. 이런 게 없고 과감합니다. 즉각성입니다. 주저함이 없어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곧바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일상을 부모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즉각적으로 공식적으로 완전히 정리하고 뒤따라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굉장히 과감하죠. 마치도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의 생계 수단인 그물을 완전히 던져버리고 즉각적으로 따랐던 제자들을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 엘리사는 나중에 스승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 소원을 묻는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이제 요구를 하게 되죠.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열왕기하 2:9)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엘리사! 내가 이제 이 땅을 떠나야 되는데 스승으로서 너한테 마지막으로 해줘야 될 게 뭐가 있겠니? 그랬더니 그 제자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에게 이걸 요구한 겁니다. 당신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갑절로나 나에게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 소원대로 됩니다. 엘리사는 실제로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의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위대한 선지자가 됩니다.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열왕기하 2:15)
부르심에 순종하는 그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적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스승인 엘리야의 뒤를 이어 실제로 하나님 나라 그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주인공이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본문에 나오는 것에 의하면 이 엘리사의 분명한 삶의 방향 전환, 그에 따른 완전한 생각의 전환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통로가 되었다 하는 거예요. 물론 이 전환도 성령이 하신 일이다라고 말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진짜 분명한 건 뭐냐 하면 이 사람에게 앞으로 성령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는 그 전조 그 출발점이 어디에 있었느냐! 분명한 삶의 방향 전환이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삶의 방향 전환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의 떠남을 의미하죠.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잖아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고 있던 곳에서 떠나야 돼요. 하나님의 일은 언제 시작되는가? 사람의 일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니 목사님! 사람이 일하는 건데 어떻게 사람의 일을 떠납니까? 잘 새겨 들으셔야 돼요. 나의 일, 내가 그동안 추구했던 일, 내가 이루고자 했던 어떤 욕망의 일들을 먼저 떠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나의 욕망, 우리의 욕망을 신앙적으로 투영해서 아주 나쁘게 말하면 그 욕망을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죠. 그러면 겉으로 볼 때는 그것이 아주 거룩해 보이는 종교적인 신앙적인 일이라고 보여도 그건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죠. 자신이 잡고 있던 열두 쌍의 소와 그 소 기구를 완전히 버리고 심지어는 부모까지도 떠나버리고 성령이 하시는 일에 갑절을 바랐던 엘리사처럼 분명한 삶의 전환과 생각의 전환, 즉 소망의 전환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죠. 생각의 전환이란 무엇인가? 내가 소망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는 거예요. 즉, 자아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세상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완전히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엘리사처럼 다 버리고 다 목사 되고 다 선교사 되라 그런 말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어요. 가정과 일터 다 팽개치고 오직 교회 일만 하고 지금 당장 짐 싸서 선교지로 떠나라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평신도라 할지라도 일반 성도라 할지라도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내가 예수를 믿어 예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땅을 살아가는 날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죠. 나와 내 가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몸부림은 있어야 된다. 어떠한 시점에서 단호한 결심과 결단 실천은 있어야 한다 하는 것이죠.
왜냐? 중립은 없기 때문이죠. 그냥 내가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저절로 잘 되어지고 내가 헌신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헌신할 터이니 그 사람의 헌신을 통하여 나도 거기에 그냥 편승해서 갈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앙의 세계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주저앉아 있으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듣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따라서 살아가다 보면 그것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역행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그러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시대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어쩌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욕망을 따라 그렇게 살다가 사라질 존재들입니다. 불쌍히 여겨야 하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들입니다. 꼭 목사가 아니라도 꼭 선교사가 아니라도 특별히 어떤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아니라도 평신도라 할지라도 초신자라 할지라도 분명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은 도대체 나에게 무슨 뜻을 가지고 이 시간에 나를 부르셨는가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고민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건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잘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나를 엘리사처럼 부르시면 어떡하나!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나 부르시지 않으세요. 별 걱정을 다 해요. 그중에 또 이런 분도 있는 것 같아요. 혹시나 나는 아니라도 똑똑한 내 아이, 너무 예쁜 내 아들 내 딸을 하나님이 엘리사처럼 부르시면 어떡하나!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만약에 부르신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마도 이 지점이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지점인 것 같아요. 하나님을 상당히 나쁜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어요. 나를 불러서 실컷 고생시키고 저기 구석으로 몰아가서 그냥 빛도 없이 값도 없이 고생만 하다가 그냥 사라지게 할 존재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두렵게 만드는 거죠. 혹시 내가 부르심을 받을까 봐! 하나님 적당히 불러주옵소서! 여기까지만 부르시면 족하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신 분입니까? 성경이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그저 육으로 살면 육의 노예가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육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막 쾌락을 누리고 방탕하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남들처럼 똑같이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답게 평범하게 살다 보면 그 몸의 노예가 돼서 지배당하고 살다가 사라지는 인생이 되고 만다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부르심 즉 그 영적 부르심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육에는 죽지만 영으로 살아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잖아요. 누가 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잖아요.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영적인 존재 영으로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한낮 미물에 불과한 이 몸뚱아리 그저 견디고 버티다가 길게는 백 년만 살고 사라질 이 먼지 같은 존재를 하나님은 또 다른 영적인 존재로 불러주신다고 하는 것이죠.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로마서 8:10)
여러분! 바울이 이것을 책상에 앉아서 성경 연구하다 발견한 게 아니에요. 기도하고 묵상하다가 아 이런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에요. 실제로 이와 같은 역사가 바울의 삶에 일어난 겁니다. 내 안에 예수가 계셔요. 내 안에 예수의 영이 계셔요. 그러면 나는 죄에 대해서는 이미 내 몸은 죽었다. 그러나 영으로 다시 살아난다. 의로운 존재가 된다. 여러분! 몸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겁니까? 이 살이 나쁜 거예요. 성경에 그걸 말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이 몸이라고 하는 것, 육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육의 자아를 말하는 거죠. 본질적 자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아, 더 쉽게 말하면 내가 하나님 되려고 하고 언제든지 내가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인생을 망하더라도 내가 책임진다라고 하는 내가 하나님 되는 우상숭배 그것을 육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에 대해서 죽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시면 육에 대해 죽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육에 대한 지배를 더 이상 받지 않고 육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 말이잖아요. 믿으십니까? 바울이 그걸 체험한 거예요. 체험한 것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이론적인 말이 아니에요. 교리적인 말이 아닙니다. 사역 훈련할 때 쓰는 말이 아니에요. 실제로 예수를 받은 성도들 안에 일어나는 실제적 현실입니다. 사탄이 공격하는 지점이 어디예요? 우리 육을 공격하는 거잖아요. 우리의 영을 공격합니까? 절대 안 그래요. 육을 공격해요. 육적 자아를 자꾸 부추기면서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그 육이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으면 사탄이 더 이상 공격할 지점이 없어요. 나는 십자가와 함께 내 욕을 못 박았다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사탄이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왜요? 영으로 사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사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이 땅의 신령한 복, 하늘의 신령한 복, 기름진 복, 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어요. 이 부르심을 확신하고 이 부르심을 감사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는 늘 성령의 역사를 구하며 살아가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잖아요. 왜냐? 지금이 성령 시대 아닙니까?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 곁에 예수님이 계세요. 그럼 그 예수님께 도움을 안 구하시겠습니까? 그분이 예수님이신데?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예수님 대신 성령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감동을 주시니까 예배의 자리에 나옵니다. 산에 안 가고 낚시터 안 가고 친구 안 만나고 이 시간을 구별해서 오는 건 성령의 이끄심이 맞아요. 이미 성령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하는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성령님을 또 초대하잖아요. 그죠? 성령님 오세요. 내 안에 충만하게 오세요. 성령님 강권적으로 역사해 주세요. 말씀이 이해되게 해 주세요. 그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대로 실천하며 살아가게 해 주 주세요라고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구합니다. 맞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오늘 엘리사처럼 주여 이왕이면 성령의 갑절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이 뭡니까? 이왕이면 그냥 성령을 맛보다가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성령을 조금 느끼다가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성령의 역사에 주인공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요구가 욕구가 우리 안에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이왕이면 신앙생활할 때 능력 있는 신앙생활 하고 싶어요? 안 하고 싶어요? 누군가를 좀 살리는 사람이 돼야 될 거 아닙니까? 엘리사처럼 병든 사람도 살려내고 병든 땅도 살려내고, 내적으로 외적으로 영적으로 쳐들어오는 모든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 심지어는 죽었던 자도 살려낼 수 있는 이 엘리사처럼 우리도 영적인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고 싶잖아요. 그러나 그 갑절의 성령의 역사 앞에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하느냐? 성령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신앙적으로 반드시 점검해 봐야 할 대목이 뭐냐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가? 하는 거예요. 부르심 받으셨습니까? 그러면 또 한 가지 질문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부르심에 따라 내 삶과 내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는가? 아멘이십니까? 다 성령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왜요? 성령 안 받으면 예수 못 믿어요. 예수의 영 받아야 예수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돼요. 다 성령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따라 내 삶은 과연 전환되었는가? 전환되셨습니까? 여러분! 공동체적 관점에서도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강남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인가? 그렇다면 세상 기관과 다른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볼 수 있어야죠. 다른 이단들과 다를 게 없어요. 다른 어떤 정부 기관이나 어떤 기업 공동체하고 다를 것이 없어요. 성령의 부르심 받은 거 맞습니까? 그냥 모이는 거예요. 우리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하나님의 복, 성령의 역사는 그 마음의 전환과 생각의 전환을 통해 시작이 돼요. 전환이 되면서 같이 시작돼요. 이게 만약에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계속 그 소를 붙잡고 있었다면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여러분! 안 일어나요. 무엇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게 하는가?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가? 성령의 역사를 너무 작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뭔가 좀 구별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완전히 별도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삶에 조금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인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리고 그것은 마치도 교양이 좋아지는 것처럼 인격이 좋아지는 것처럼 삶이 조금 풍성해지는 것처럼 여기게끔 만듭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성령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계속해서 추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영의 사람은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절대로 성령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다. 그냥 육적인 삶이 해결되면 어느 정도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때 살 만하면 절대로 영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 사치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거죠.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잖아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해 가시는 그 하나님의 일 아닙니까? 그 일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이 성령의 역사는 인간이 백 명 모이고 아니 천 명 만 명 수십 수백만 명 여러 국가가 모여서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한번 역사하시면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영적인 소수라 할지라도 반드시 거기에 가정과 일터와 사회 전 영역과 나라와 민족과 세계의 열광을 변화시키는 총체적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이 여러분이 살 만한 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보다 못한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고,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서 하나님을 요청하고 하나님을 초대하고 하나님이 거할 만한 하나님의 거대한 영적 공간으로 만드는 역사가 바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탄은 언제나 이 땅에 (물론 우리는 크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거 없으면 죽겠다라고 하지만) 언제나 작은 일에만 몰두하게 만들잖아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남들 앞에 자랑할까 그것만 몰두하고 살아가도록 사탄은 우리를 종용하고 있잖아요.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려고 그래! 그 목사한테 맡겨! 네가 무슨 뭐 그런 일까지 해! 그 헌금하고 선교사들한테 맡겨! 무슨 그렇게 기도까지 다 한다고 그래! 기도하는 사람 있잖아! 기도하는 사람에게 맡겨! 그리고 너는 열심히 살아!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지! 네 자식들은 네가 먹여 살려야지! 라고 하는 아주 교묘한 수법을 가지고 이 땅의 일에만 몰두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자기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그 나라와 함께 죽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술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하늘 아니에요? 하늘이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 때문이잖아요. 우리는 하늘과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그 모든 지위와 위치까지도 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거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에요.
엘리사에게 지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됐습니다. 많은 소를 가지고 큰 밭을 소유했던 삶을 떠나 이제는 하나님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동안 땅을 일구었던 사람이 이스라엘의 영적 토양을 갈아엎는 시대의 사명자로 부름을 받게 됐어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시골 어떤 과수원에 농기구, 트랙터 모는 사람이 갑자기 부르심을 받아서 이 땅에 영적 토양을 바꾸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거듭나게 된 겁니다. 그동안 육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가족들 다음 세대를 살려내는 삶으로 엘리사는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엘리사 개인적으로 보면 엘리사 한 사람의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변화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 안에 보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지키는 위대한 사명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사 한 명, 엘리야 시대는 엘리야 한 명, 엘리사 시대는 엘리사 한 명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야 돼요. 많이 모이면 뭐 합니까? 한 사람이라도 아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맞아!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진짜 신앙인이야! 교회가 많으면 뭐 합니까? 저 교회는 진짜 교회야! 저 교회야말로 살아있는 교회야! 라는 것을 엘리사가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 없는 이스라엘, 이세벨의 나라만 존재하는 그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만큼 엘리사가 중요한 거죠.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제 힘을 빠뜨리는 말이 뭐냐면 설교를 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설교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변해도 돼요. 여러분! 한 사람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가 아니에요. 한 사람이 변하면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면 여러분이 가정을 지키는 영적인 기둥이 되는 것이고, 이 땅이 아무리 혼탁하고 황무한 이세벨의 나라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그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여러분을 통해서 가정이 복을 받고 직장이 복을 받고 이 나라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지금 우리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한 여러분 한 사람을 통로로 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간혹 이제 좀 하나님의 일을 해보려고 했더니 하필이면 망했어. 젊은 날에는 열심히 일해서 가족도 먹여 살리고 그래서 이제는 좀 내가 뭔가 은퇴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보려고 해. 그런데 뭐가 없어요? 또 건강이 없네. 그럼 언제 순종할 거예요? 근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나는 할 수가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뭐 내 앞가림도 어렵고 하나님의 부르심 거기에는 더구나 순종할 방법이 없다라고 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성령이 역사하시는 자리입니다. 아멘이시죠? 여러분 절대로 하나님의 일에 여러분의 것을 보태려고 하지 마세요. 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뭔가 도움이 돼야겠다. 굉장히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 반대로도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부르시면 즉각적으로 순종하시면 돼요.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데살로니가후서 1:11)
여러분 우리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누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부르심을 받을 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식들이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육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아신대요? 우리를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신다’ 여러분! 이게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좋아요? 여겨주시는데 내가 너 목사로 여겨줄게! 내가 너 장로로 여겨줄게! 내가 너 선교사로 여겨줄게!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그걸 이루시는 분은 누구예요? 또 하나님이에요.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또한 이제는 믿음으로 결단하고 믿음의 방식대로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이렇게 나오죠. 바울이 체험한 거예요. 자기가 무슨 예수를 전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를 핍박한 사람 아닙니까? 누가 바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전하는 자로 여겨주셨어요.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셨어요. 그 여겨주심에 그 부르심에 순종하게 되니까 하나님은 그 순종에 합당한 능력도 부어주셨어요. 엘리야! 성경 보세요. 그 사람이 누구인가? 소개도 없어요. 디셉 사람 엘리야! 어디 신학교를 나왔다! 어디 백 일 훈련 과정! 성경 통독, 천독 했다! 이런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부르신 거예요. 엘리사! 소 몰다가 부르심 받았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자격도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 능력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가 하는 말과 그가 행하는 모든 능력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게 진짜인 거죠. 바울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다 마찬가지고, 오늘 이 시대에 부름받는 모든 교회 성도들 역시도 같은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불러주셨다는 거죠. 이 땅을 살아가는 날 동안 내 자아가 부추기는 대로 그냥 살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그런 복된 존재가 되게 하셨죠.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이 머리로 계시는 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로 불러주셨어요. 담임 목사로 선교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순장으로 부엌에서 저쪽 주차장까지 다 하나님이 부르신 거 맞죠? 성도로 예배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어요. 그 부르심에 순종하니까 여겨주시고 감당할 만한 능력도 주시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가정이요? 내가 이룬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거 아닙니까? 일터 내가 애써서 시험 봐서 남들과 경쟁해서 합격한 것 같지만 여러분 열심히 공부한다고 다 합격하던가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곳에 일상의 선교사로 부르시고 그곳에 파송한 줄로 믿습니다. 그 부르심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감당할 능력도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만 그 부르심에 엘리사처럼 급작스럽고 투박해 보이지만 세밀하고 분명하기를 간절히 바래요. 저는 불안하지만 떨리지만 너무나 두렵지만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부르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부르심, 그리고 처음 부르실 때뿐만 아니라 그 부르심에 처음에는 억지로 순종해 갔지만 순종하며 가면 갈수록 그 부르심이 더욱더 명확해지는 부르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의 가치 아닙니까? 이 땅에 뭐 하다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십시오. 겁내지 말고 어떠한 부르심이든지 간에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기를 바래요. 이세벨의 나라와 같은 이 암울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여러분이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또 다른 엘리야, 또 다른 엘리사, 또 다른 오바댜, 아직도 바알 앞에 그 물질의 만물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거룩한 사람들을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순종하시기 바래요. 그리고 그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깝게는 이 공동체 안에서 영적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귀하게 여기시고, 장로님, 권사님들, 집사님들, 목사님들, 순장님들,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여러분 귀하게 여기시길 바래요. 이제 점점 더 사역자들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에 돌입하였습니다. 어린이 부서, 저 영아, 유아를 맡을 만한 다음 세대 사역자들이 없어요. 앞으로 여전도사님들 찾기 어렵습니다. 남녀 차별하지 마시고 심방 여전도사님들 귀하게 여기시길 부탁해요. 그리고 찬양하는 분들이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그러한 분들을 더 귀하게 여기시고 기도해 주시고, 그분들을 특화시켜서 전문적 영역으로 내몰지 마시고, 여러분들도 말씀 받고 기도하여서 이 시대에 부름받은 소명자들로 여러분의 삶의 영역을 살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힘 있게 이끌어가시는 믿음의 주인공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