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축제
그리스도인의 승리생활
알란 레드파스(Alan Redpath)
제8장. 승리의 축제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버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수6:20)
우리는 사탄의 왕국에서 풀려나올 수 있는 석방의 원리들을 공부해 왔다. 구속은 언제나 십자가의 피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들도 사탄의 왕국에서 풀려나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오면서 너무도 긴 광야의 여행을 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승리를 본 반면에 많은 실패와 패배를 겪었다. 어떤이들은 요단을 건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고 그와 하나가 되었다. 이곳은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생명과 승리가 되어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충당시켜 준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장소였다. 우리들은 구속의 땅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광야를 거쳐 충만한 구원의 땅으로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은 놀랍게도 여리고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경험 때문에 좌절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탄의 간악한 올무에서 완전히 벗어나 은혜 속에 늘 머물러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죄와 유혹의 전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상상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경험은 이런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만일 이런 종류의 망상에 희망을 걸고 살면 환상에 붙잡혀 크게 실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고 살아도 역시 여리고와 대면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당신을 묶었다가 광야에서 다시 공격해 온 사탄은 당신이 축복의 땅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온 힘을 모아 저돌적인 공세를 취하며 다가온다. 당신은 십자가에서 죽고 귀한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승리라고 외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당신의 바로 목전에 나타난 여리고를 보고 당황하고 있는가?
어떤이들에게는 여리고가 자신의 인격속에 있는 하나의 세력일 수 있다. 가령 좋지 못한 성격이나 성품의 모난 일면일 수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 중에는 어릴 적부터 몸에 밴 것으로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후에까지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각자는 자신의 여리고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여리고는 당신밖에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의 가정이나 가족 간에 이 거대한 성벽이 쌓여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벽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날마다 고심하고 있다. 여리고는 당신을 우롱하고 있다. 하나님이 밝히 보여주시는 일도 이 장벽 때문에 해내지 못하고 뒤로 처져서 무능하고 구차하게 살고 있다. 당신이 되어야 할 인물이 못되는 것은 바로 이 여리고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여리고를 함락할 수 있을까? 여리고의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침묵 속에서 성벽을 날마다 도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을 것이다. 여리고의 성벽에 미친 소리라고는 행렬의 선두에서 법궤를 중심에 두고 부는 제사장들의 나팔소리 뿐이었다. 조용한 행렬은 성 위에서 내려다 보며 지껄이는 야유와 욕설로 가끔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6장의 앞 절들을 보면 비록 여리고 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웃었을지라도 실은 공포에 싸여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의 주위를 도는 모습을 몽매한 짓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영적인 힘이 서려있는 것을 직감하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조롱과 놀림에도 불구하고 이 침략자들은 침묵 속에서 성벽들을 도는 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는 마지막 날 성벽을 일곱 번 회전할 때까지 하등의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나 13번의 회전이 끝날 때에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이 길게 나팔을 불자 백성들이 크게 소리쳤다. 이에 여리고 성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 안으로 몰려들어 갔다. 요즘 말로하면 총 한방 쏘지 않고 여리고를 함락시켰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맛보았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여리고의 강적으로부터 구원하는 방법에서 당신은 무엇을 배웠는가?
이 도시는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나? 인간의 수단이나 기계의 힘이 아니었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히11:30)라고 히브리서의 기자는 영적으로 주석하였다.
그럼 성벽을 붕괴시킨 이 믿음에 대해서 잠시 고찰해보자. 이스라엘인들의 믿음은 우선 테스트를 받았다. 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받지 않고 그들은 13번씩 성 주위를 돌아야 했다.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이 자세하게 어떻게 될 일을 설명해 주셔서 그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몰랐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당일에 비로소 지시를 내렸다. 백성들이 제일 하기 힘들었던 일은 입을 떼지 않고 성을 도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여호수아가 함성의 명령을 내렸을 때 승리의 외침으로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본장의 중심은 법궤이다. 여기서 13회나 언급되어 있다. 법궤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상징이었다. 백성들이 비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고서도 침묵으로 성을 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요단을 건넜을 때에도 법궤가 백성들을 인도했었다. 법궤는 과거에 드러났던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였다.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궤로 성을 돌게"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명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리고를 같이 도셨다. 나팔소리와 백성들의 함성에 따라 성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승리의 입성을 하였다.
왜 13번씩 침묵으로 성을 돌아야 했을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여리고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리고는 13번씩 실제로 돌아보고 쳐다보고서야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공격할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거대한 성을 여러 번 돌게 하심으로써 각자의 마음 속에 자체내의 힘으로는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철저하게 인식하여 하나님의 간섭을 간구하게 하였다.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경험이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당신에게 당부하시면서 축복을 내리실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안팎에 있는 여리고 때문에 시달리고 있을런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매우 힘든 일은 모든 것이 자기에게 너무 과중하다고 인정하고 여리고가 무너지려면 하나님이 해주셔야 한다고 믿고 의지하는 일이다. 나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풍성한 영적 능력이나 승리나 축복을 주시기 이전에 먼저 여리고로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그 성의 크기와 위용을 보게 하신 후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고백하게 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실패 이외에 아무 것도 바라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여러 해를 두고 실패를 벗어나려고 버둥거린다. 우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전능의 하나님은 우리들을 도와주실 수 없다.
또 하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큰 시험은 침묵하는 일이다. 우리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털어놓기를 좋아한다. 또 다른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친구와 짐을 나누어 지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승리는 내가 이루는 일에서 오지 않는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서 승리가 온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다시 주시려고 하신다!
당신의 여리고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믿는 순간이 오기 이전에는 항상 당신 앞을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여리고의 함락이 당신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신자의 생활에서 실제로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이 성을 부술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인할 때에만 여리고는 당신의 것이 된다.
그럼 이 여리고의 형편을 좀더 좁혀서 우리들의 개인생활에 적용시켜 보자. 여리고는 우리 신자들의 생활에 갖가지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죄의 여리고, 무관심의 여리고, 물질의 여리고, 이교의 여리고 등등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것은 불충한 교회 속에 있는 헌신이 없는 교인들과,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냉담한 안일의 여리고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안팎에는 무수한 여리고들이 줄지어 있다.
아마 우리들은 이 여리고의 성벽을 자주 돌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리고를 향해 싸우며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을 줄 안다. 설교로, 프로그램으로, 통성기도로, 금식으로, 그 외 갖은 노력으로 대항해 보지만 여리고는 여전히 서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은 교회 앞에 버티고 있는 이 여리고들은 하나님의 능력인 성령의 부흥에 의해서만 무너질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들은 얼마나 효용없는 방법으로 이 여리고의 성들을 측량해 왔는지 모른다. 위원회와 대회와 갖가지 부흥회와 행사로 정력과 재정을 써오지만 여리고 성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새 방법이 아니고 새 사람이다.
여리고 성은 세상의 곳곳에 서서 우리들의 노력을 비웃고 있다. 우리들이 구차한 방법으로 전도를 하여 우리들의 왕을 다시 모시려는 허술한 시도를 여리고성은 조롱한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절박한 상황에 있다. 급속도로 교회의 힘이 약화되어 간다. 당신 자신의 생활을 들여다 보라. 또 주위의 신자들을 살펴 보라. 그러면 하늘을 쳐다보고 "주님,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세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때는 없었다. 수 억의 사람들이 한 번도 전도를 받은 일이 없이 매년 수천 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 매 시간 소망없이 죽어가는 인간들을 생각해 보라. 또 철의 장막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믿음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계속 받으며 살거나 아니면 학대속에서 죽어간다. 성령의 부흥을 하나님이 일으키시지 않으면 교회는 질 수밖에 없다.
그럼 이 여리고를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를 13회나 돌면서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여리고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질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고 여리고의 시민들이 공포에 싸여 있음을 알았으므로 침묵 속에서 성을 돌 수 있었다.
20세기 교회는 이 점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의식하면서 침묵할줄을 모른다. 마치 상업광고처럼 요란하고 크게 떠들어대면 교회가 잘 될 줄로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폭풍이나 지진이나 혹은 불 속에 계시지 않고, 정적이 흐르는 고요하고 작은 음성으로 나타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은 영적투쟁을 위해 육적투쟁의 무기를 사용한다. 이것은 그릇된 방법이다. 따라서 실패는 정한 이치이다.
당신은 위원회의 한 위원으로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프로그램이라면 이를 재고해서 고치거나 취소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고 당신을 인도하시도록 하나님께 자리를 양보할 용의가 있는가? 당신은 진정 하나님이 당신을 변화시킬 권리가 있다고 믿고 그에게 우선권을 드리겠는가, 아니면 당신의 방법과 고집을 따르겠는가? 여리고에 대한 해답은 당신의 무릎 위에 있다. 이것은 무기력도, 수동적인 것도 아니다. 당신의 약점과 속절없음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다 연결짓는 일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고대하면서 그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고 또 기도에 힘쓰면 적들은 무서워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중에 우리들은 죄에 대해 이곳 저곳 찔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한 확신이 근래의 기독교에서 결핍되어 있다. 우리들의 종교는 또 하나의 여흥이나 위안물이 아니다.
우리들은 죄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나님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보라.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서 있어 보라.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죽은 자들이다. 죄의 용서를 받고 성령의 구속과 채움을 받지 못하면 우리들의 봉사는 끝장이 난 것과 다름이 없다.
교인들끼리 분쟁을 일으키고 교파 간에 갈등을 빚으며 세속의 모습을 닮고 있는 사람들을 당신은 보았을 것이다. 또 기도회나 성경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허세나 위선 속에서 사는 자들도 교회에 있음을 당신은 알 것이다. 직책을 받고 있는 교인이지만 날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펴 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려는 사람들도 교회에는 적지 않다. 그 외 우리들이 알고 있는 죄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책망하신다. 동시에 자기 교회도 꾸짖고 계신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견책을 받고 있는가?
이제 본인은 승리의 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모든 여리고는 반드시 무너진다. 나는 조금도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 여리고는 어떻게 무너졌던가? 먼저 외침이 있었다. 나팔소리가 길게 퍼졌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세상의 온갖 죄와 부패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계21:2~4).
이 영광스런 날이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앞당겨서 올 수는 없을까?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마음을 열고 회개하며 겸손해지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통회의 마음이 있을 때 왕으로 오시는 주를 보고 환성을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