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에게만 믿음이 주어지는 것인가?
언젠가 D. L. 무디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가?'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무디는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공기가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여기 빵이 있다고 합시다. 당신을 그 빵을 먹어야 합니다. 또 여기 물이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 물을 마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신비로운 어떤 느낌을 원합니다. 그러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내가 앉고자 할 때, 믿음이 와서 나를 억지로 앉힐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가르침 역시 성경에 기록된 진리입니다. 믿음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유일한 선물은 아닙니다. 성경은 또한 구원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 곧 선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후 9:15). 우리 매일의 양식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입니다. 이것들 뿐 아니라, 그밖에 많은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선물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믿음의 은사
많은 성경 구절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장 3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12장 9-10절은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주시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절들을 조심스럽게 공부해보면, 이 믿음의 은사는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과 봉사를 효과적으로 하는데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몸의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인 것입니다. 고아원을 창설하여 수천명의 고아를 돌보았던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와, 이전에는 복음이 한번도 전해진 적이 없는 중국 내륙에 깊숙이 복음을 가지고 들어간 허드슨 테일러는 이러한 믿음의 은사에 대한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소유했던 은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사도 바울이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쓸 때, 그 마음에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믿음의 은사를 가리킵니다.
중요한 질문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선물이 과연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특별한 방식으로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을 근거 구절로 사용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믿음을 가리키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구원하는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에 더 나아가서 구원은 온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며, 구원하는 믿음은 결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으며, 즉 그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결론적으로 자연인에게서 나오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은 또한 하나의 행위이고,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가?(엡 2:8)
이 구절의 헬라어 구조는 믿음이 선물이라기보다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리키는 듯이 보입니다. 신약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 권위자들은 에베소서 2장 8절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대명사 'that'(tauto)의 선행사를 바로 아는 것이라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의 일반적인 원칙은 선행사를 밝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대명사의 성(性)과 수(數)는 선행사의 성(性)과 수(數)에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대명사의 격은 주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시대명사 that은 중성인데, '믿음'(pistis)과 '은혜(charis)'라고 하는 단어들은 여성형이기 때문에,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법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만일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했었다면, 지시대명사를 여성형인 "that(haute)"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존경받고 있는 수많은 복음주의 헬라어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한 문법 구조에 대해 설명하면서, 믿음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시대명사 'that'는 앞의 4-7절 전부를 가리키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고 우리를 향해 베푸신 그분의 은혜 등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주석가인 F. F. 브루스(Bruce)는 "지시대명사인 'that'이 헬라어로 중성인 'tauto'이며, 반면 '믿음'은 여성 명사인 'pistis'이므로, 여기서 중성 지시대명사 'tauto'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전반적인 개념들과 함께 결합된다"고 썼습니다.
신약 헬라어 권위자로 존경받는 W. E. 바인(Vine)은 '선물'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선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론(Doron)은 '주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에베소서 2장 8절에 하나님의 선물로 기록된 대로,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라고 썼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선물인가 아닌가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경적인 믿음은 때때로 "구원얻는 믿음"이라고 불리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 2. 마음의(mental) 동의 -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가 진리라는데 대한 동의, 3.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여 오직 그분만을 신뢰함.
이러한 정의를 칼빈주의 교사들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의 속에 인간 의지의 사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나 비칼빈주의자 모두가 이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여기서 조금 더 지나쳐 나아가게 되는데, 곧 성령에 의한 중생의 역사가 믿음의 사용에 앞선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먼저이고, 그 후에 중생 또는 구원이 뒤따르게 된다는 성경적인 순서와 놀랍도록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비칼빈주의자들은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사람들을 타락으로 인해서 "죽은 자"이고,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멸망 가운데 있고", "정죄되었으며", "어둠 가운데" 있는 존재로 믿고 있습니다. 타락은 이 모든 것 뿐 아니라,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락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정도까지 떨어지게 한 것은 아닙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영혼을 관통하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 그리고 성령님의 각성케 하시는 역사로 인해서 인간은 능히 믿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요 5:25).
믿음은 참으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이 생기도록 협력하여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간의 측면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신적인 각성의 역사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중생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게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비록 하나님이 신적인 각성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믿도록 하실 수 있지만, 믿는 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책임은 믿음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중생으로 이끌어주는 믿음을 산출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에 관해서, J. 드와이트 펜테코스트(Dwight Pentecost) 박사는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각성케 하고, 책망하며, 빛을 비추고, 권면하며, 우리의 필요 뿐 아니라, 그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준다. 각성케 하는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중생을 산출하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능력있게 역사하며, 중생케 하는 역사를 일으킨다"고 썼습니다.
또 다른 존경받는 작가인 C. H. 매킨토시(Mackintosh)는 "중생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의 성품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성품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매우 중대한 요점인데,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이 죽은 영혼들을 살리시는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그리스도께 두는 모든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다. 곧 거듭난 것이다."
믿음도 행위인가?
어떤 사람들은 만일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저항할 수 없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구원은 "행위로 얻는 구원"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처럼 불완전한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그것이 일부는 하나님이, 또 다른 일부는 인간에 속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과연 성경과 부합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견해가 상당히 논리적으로 들리십니까?
첫 번째, 믿음의 핵심적인 본질은, 사람은 구원을 얻는데 전혀 무력하며 또한 받을만한 자격도 없으나,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촉발된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믿음은 무언가를 하는(doing) 행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받아들이는(receiving) 것입니다. 길거리에 엎드려 구걸하는 거지가 은혜를 입은 것이, 자신이 무슨 합당한 행위를 해서입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인 구원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그 받는 자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모든 영광은 그 주시는 분에게 돌려지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의미에서 볼 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믿음이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그 능력―하나님의 은혜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구원을 사모하는 영혼 속에 믿음을 형성하도록 자극함으로써―에 대해 반응할 수 있도록 불가사의한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야 할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이제 책임은 하나님에게서 잃어버린 바 된 영혼에게로 넘어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는 우리가 믿기 위해 참된 믿음을 선물로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이루신 주 예수님의 완성된 속죄 사역을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로서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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