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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C.H.Mackintosh

율법과 사랑 - C.H. 매킨토시

by 복음과삶 2009. 8. 4.

율법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져 있는 완벽한 시스템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을 시험testing하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롬 4:15).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렇다면 죄인들의 세상에서는 이런 율법이 어떤 일을 합니까? 율법이 생명을 줍니까? 불가능합니다. 왜 그런가요? 왜냐하면 사람은 그 거룩한 요구사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사망과 정죄의 직분입니다(고후 3:9 참조). 율법의 유일한 효과는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의 영혼에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양심을 정죄하고 죄책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정직한 영혼이라면 다른 식으로는 율법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이 주는 고귀한 선물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기초를 이루는 일입니다. 사랑과 사랑의 선물에 관해 탐구하십시오. 그 선물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는다는 점을 언제나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 많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안에 머물러 있게 될까요? 죄와 거룩이 어떻게 함께 자리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의는 인간의 죄를 정죄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런데 독생자를 주시는 일 외에는 죄인을 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 이하의 대가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랑입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를 사자 굴에서 구해내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메대와 바사의 바꾸지 못하는 법으로 인해 그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왕은 밤이 새도록 금식하면서 슬퍼했습니다. 그는 동굴 입구에서 슬피 울었지만 다니엘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을 향한 왕의 사랑은 대단했지만 그를 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왕이 만일 다니엘을 대신하여 자신을 사자들에게 던졌다면 영광스러웠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랑은 별 효력이 없는 눈물과 비통함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바사 왕국의 법이 바사 왕의 사랑보다 훨씬 더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법은 그 엄숙한 위엄으로, 무능한 사랑을 밟고 승리합니다. 그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아무 열매없는 눈물만을 흘릴 따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다함께 영원토록 찬송합시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할 능한 힘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의를 통해 통치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율법은 대단히 엄숙한 말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여러분은 이것이 메대와 바사의 법보다 덜 엄격하고, 덜 강제적이며 위엄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율법은 드높여지고, 명예로운 대접을 받아 마땅하며, 굳건히 세워져야 합니다.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율법의 고상함은 인정되고 죄는 정죄해야 하며, 죄인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달성됩니까? 이에 대한 답이 담대하고 분명히 표현하고 있는 시구가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위에 이 기록은 묻혔네,
죄는 정죄당하고, 죄인은 구원받았다네.

얼마나 귀한 기록인지요! 근심하는 많은 죄인들이 이 시를 읽고 그대로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내어주신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분은 사랑에 대한 대가로 당신의 품속에 계시던 아들을 내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단지 입술에 있는 말씀 몇 마디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죄인들이 가득한 이 세상을 사랑하는 문제는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며, 의로운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당신의 본성에 속한 모든 속성과 함께, 그 보좌의 요구와 조화를 이룹니다.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reigns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롬 5:21, 흠정역). 우리 영혼이 이 진리를 확고히 붙잡지 않는다면 결코 자유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면서 막연한 소망을 갖게 될 수도 있고, 예수님의 대속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목격하지 않았다면 우리 마음으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죄가 완전히 정죄받고 해결되지 않았다면, 양심의 평안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고 사탄의 정죄를 잠재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so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처럼’이란 단순한 단어에 이 얼마나 놀라운 깊이와 권능이 있는지요!
 출처 : http://www.christ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