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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J.C.Ryle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눅24:1-12) - 존 라일

by 복음과삶 2009. 9. 15.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커다란 토대 중의 하나이다. 실지로 그것은 십자가 사건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지금 시작하는 24장은 우리를 부활의 증거들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사실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실체성을 보게 된다. 우리는 "

안식 후 첫 날"

어떤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누워있는 무덤에 그 시체에 기름을 바르러 왔던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돌이 무덤에서 굴러져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한 것"

을 알 수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금요일 아침에도 주님의 시체는 무덤 속에 있었다. 그러나 안식일날 아침에 그의 시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가 그 시체를 가져갔을까? 누가 그것을 옮겼을까? 절대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나 그밖에 주님의 원수들이 그랬을 리는 없다. 만약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기 위한 증거로서 그리스도의 시체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것을 기꺼이 내다가 보였을 것이다. 사도들이나 주님의 다른 제자들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겁에 질려 의기소침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경우의 모든 상황에 부합하는 단 한 가지 유일한 설명이 있다.그것은 본문에서 천사가 전해준 설명이다. 그리스도는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셨던"

것이다. 무덤에서 주님을 찾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일이다.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으며, 친히 육체로 나타나사 많은 증인들에게 자신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셨다.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은 불신자들이 결코 반박할 수 없는 증거 위에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묘사와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확증되었다. 복음서의 기자들이 전해주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설명을 검토하면 할수록 더욱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설명의 진실성을 부정하기로 한다면 세상의 모든 일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줄리어스 시저가 한때 살았었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가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더욱 확실한 것이다.  복음의 초석들의 하나로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기독교 진리에 대한 요동치 않은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우리의 믿음은 한 질의 교과서나 단순한 교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의주의자들이 결코 뒤집을 수 없는 위대한 사실 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사후에 우리들의 부활에 관한 확실성을 심어주는 것이어야 한다.우리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면 주님의 제자들도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복음구원의 충만한 기쁨으로 채우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를 정죄할 자가 누구인가? 우리의 위대한 보증이신 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롬8:34)그는 우리를 위하여 갇히셨다가 우리의 죄를 구속하신 후에 승리하시고 나오셨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지불하신 속전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역사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사도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도 당연하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하신 것들을 기억하는 데 얼마나 둔했었는지를 보게 된다. 여자들에게 나타났던 천사들이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언하시는 갈릴리에서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켰던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라는 말씀을 읽어볼 수 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들었으나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 후 여러 날이 지났을 때 그 말씀들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는데 둔한 것은 믿는 자들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영적인 질병이다. 그것은 주님의 제자들 당시처럼 지금도 널리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그것은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대한 많은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된 후라도 복음의 교훈들과 약속을 잘 잊어버리는 것 때문에 끊임없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에 간직하여 새겨두어야 할 많은 것들을 듣지만 듣자마자 곧 잊어버린다. 그리고 나서 아마도 여러 날 후에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게 될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래 전에 들었던 말씀들이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그들은 들었던 사실을 알지만 헛되이 들은 것이다.  말씀을 더디 기억하는 질병을 참으로 치료하려면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위에 있는 일들을 온전히 사모하고 거기에 애착을 가져야 한다.우리가 사랑하는 일이나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목표로 삼는 일은 쉽사리 잊어버리지 않는다.부모님이나 자녀들의 이름은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의 얼굴은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더욱 큰사랑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욱 쉽게 기억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는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2:1)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얼마나 더디게 믿었는지를 보게 된다. 여인들이 무덤에서 돌아와 천사들에게서 들은 말을 열 한 사도에게 전했으나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아주 명백한 선언과, 다섯이나 여섯 사람의 믿을 만한 증인들의 무덤이 비어 있고 천사들의 주님이 살아나신 사실에 대한 뚜렷한 증언, 기적적인 부활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빈 무덤, 이 모든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믿음 없는 열 한 사도들은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우리는 그들의 불신을 보고 놀랄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지각없고 불합리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을 반성하고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주변에 있는 교회 안에서 사도들 보다 훨씬 더 불합리하고 책망 받아 마땅한 더 큰 불신을 보고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증거들이 19세기 동안 쌓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참으로 애석한 형상을 보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듯이 보이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이것들은 참으로 마음 아픈 문제들이다. 굳센 믿음은 참으로 귀하며 찾아보기 힘들다. 주님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라고 말씀하신 것이 당연하다.  악하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놀라운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송하자. 사도들의 불신마저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에 대한 가장 유력한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그토록 주님의 부활을 믿기를 주저했다가 마침내 그 진리에 완전히 사로잡혀 어느 곳에든지 그것을 전파하게 되었다면, 그리스도가 살아나신 사실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복음의 첫 전파자들은 한사코 믿으려고 하지 않고 완고하게 버티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도들이 마침내 믿게 되었다면 부활은 진리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Puritan05/3344/page/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