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M. 코완
롯과 아브라함
하나님은 종종 기쁘게 받으실 만한 사람의 아름다운 특징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 그와 대조적인 사람을 붙여두신다. 이같은 배경으로 하여 이 아름다운 인물들은 한층 더 두드러지게 된다. 물론 그와 반대로 바람직하지 못한 인물은 한층 더 그의 문제점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타적)은 전혀 반대되는 기질이다. 전자는 흔히 육신적인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후자는 영적인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늘상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곤 한다.
이같은 두 가지 대조적인 특징을 전형적으로 나타내주는 두 인물에 대해 이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초기에 되도록이면 빨리 우리 자신의 자원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성취하는 데에 전적으로 부적합함을 깨닫고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지하고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잠 3:5). 롯은 어떤 것은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같은 생각이야말로 롯의 삶을 치명적으로 실패케 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능한 것을 명하신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 6:14)하는 말씀은 기드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그 길에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일꾼이 필요할 때 그를 부르시고 보내신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나아갔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사람이 그 부르심에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불리움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움직이며 그 일의 성취에 대해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모르고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보내셨기에, 그를 보내신 그 모든 여정을 행하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해 주실 것과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알았다.
롯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그 길을 행하는 동안 아브라함이 그를 공급해 주는 것에 의지해야만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무모하게 뛰어 드는 자는 그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의지할만한 다른 형제의 안정성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며 보이는 것에 따라 산다. 아브라함의 길은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길이었지만, 롯에 대해서는 단지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갔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 길은 믿음의 길인가? 아니면 보이는 대로 행하는 길인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보이는 아브라함 같은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길은 아닌가?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 보이고 뛰어난다 해도 기껏해야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롯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단지 보이는 것에 대한 감탄사 "오 놀랍다"라고 하는 것으로 여겼다. 보이는 대로 행하는 것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고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적인 인도하심보다는 물질적으로 더 나은 것에 이끌린 것이다.
우리의 눈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가인처럼 악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물질적인 부를 얻고자 하는 것은 수고스러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믿음의 사람과 그 길로부터 멀어지도록 한다(창 13:11,12). 믿음의 사람과 헤어지고 난 뒤, 롯의 눈은 물이 가득찬 요단 들로 가득차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 도시 소돔 쪽으로 향하다가 마침내 소돔으로 들어가게 된다. 눈이 어떤 것에 영향을 받을 때 마음도 동하게 되고 마침내 그 발걸음도 옮겨지게 된다.
결국 그같은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그저 충동에 따라 떠내려가는 표류하는 삶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갔던 롯은 마침내 그 발걸음도 옮겨지게 된다. 결국 그같은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그저 충동에 따라 떠내려가는 표류하는 삶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갔던 롯은 마침내 소돔에 안주하게 된다(창 14:14). 이처럼 점점 타락으로 향하는 길은 얼마나 쉽게 내려가게 되는가! 물론 우리들이 그같은 타락의 길에 들어서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순례자로서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그 소돔 사람들처럼 비슷해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아마도 롯은 소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곳에 내려갔다는,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미명으로 그의 양심의 가책을 무마시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호와 앞에서 심히 악하고 죄인된 소돔 사람들은 롯의 경고의 말을 듣고 오히려 농담으로 여기며 비웃을 따름이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같은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경고하시고 깨우치기 위한 경계, 또는 교훈으로 기록하신 것이다(고전 10:11; 롬 15:4).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행하는 어떤 악으로부터 선한 것이 나을 수 있겠는가?"
롯은 자기 자신을 위해 부귀영화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그의 선한 간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솔로몬의 말년처럼 롯 또한 자신이 그토록 얻고자 한 것들이 다만 헛될 뿐이며 영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임을 뒤늦게 발견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의 내용만을 읽어본다면 롯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베드로후서 2장 7,8절 말씀을 통하여 그를 "의로운 롯"이라고 칭하셨다. 흔히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롯의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하는 대목은 정확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롯이 그들의 무법한 행실과 음란한 말을 보고 들음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했다. 롯은 소돔에 있어야 할 권리나 의무가 없었다. 그가 그곳에 머무른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인격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우리 자신이 물질적인 영화를 얻고자, 영적인 침해를 받게끔 하는 환경 속에 자신을 두게 된다면 그 결과는 순전히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롯의 그같은 행동의 궁극적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그사실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돔에서 가까스로 끌어내어진 롯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으며 그의 두 딸에 의해 대단한 불명예를 입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으로부터 점점 사라졌으며,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는 아무것도 남겨놓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자아의 뜻과 죄로 인한 열매들만 남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영원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요 대적자로 남은 그의 변칙적인 후손 모압과 암몬 자손이 있다.
그러기에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펑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6,27)고 한 지혜자의 말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계속적으로 자기의 자아를 기쁘게 하는 길로 행하게 되면 그 결국은 비참히 마쳐지게 된다. 롯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소돔에서 이름 없는 아내를 얻어 이름 없는 두 딸을 소돔에서 낳게 되었다. 그는 결국 떠나야 했던 그 소돔의 한 지방장관이 되었다.
또한 마치 불가운데서 구원을 얻게는 되었지만 그의 전 생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우리가 이 나그네 인생 길을 지나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 결국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진정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만족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