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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N.글럽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3)

by 복음과삶 2010. 4. 10.

N 글럽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율법이 우리를 계속 정죄하는 위험성에 대하여 명백히 하고 넘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로마서 8:1에서도 경고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행하게 하고 비효과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칭의 평안을 통하여 무서운 율법의 천둥으로부터 피하게 되자 이제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부족한데를 율법이 손가락질함으로써 항상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며, 그것도 매일 그러하니 말이다. 그럼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우리는 주님 안에 숨겨졌고 또 주님 안에 거하나, 사탄과 그의 악당들은 이 일그러진 세상이 주는 유혹과 방해공작을 통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고, 때때로 이에 순응하여 범죄하게 된다(약 1:14,15). 이것은 과거에 지었던 야단스런 죄나, 혹은 지속적으로 짓는 죄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 아닐 것이다(요일 3:9). 그러나 우리의 심령과 마음의 그릇된 자세나, 성급한 말이나, 자기 중심적인 것이나, 조급함이나, 안목의 죄나, 섬세한데까지 거룩하지 못함과 같은 죄가운데 빠지므로 우리는 애통해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무감각하게 살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던 죄들이다. 그리고 육신에 의하여 흠이 생기는 순간 그것을 곧 깨끗이 하지 않게 되면 율법이 즉시 작용하여 우리는 정죄함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시 한번 로마서 7장의 자아-율법-죄의 영역 가운데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데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으며, 신속하게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첫째로, 형제는 참소하는 자의 커다란 거짓말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우리의 우치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하며 우리 속에는 아직도 "옛 사람"이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말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용납하고, 이로써 그들 속에 아직도 분리된 자아와, 분리된 심령과, 분리된 성품을 갖고 있다는 그릇된 가정 아래서 이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갖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개념은 계속적인 투쟁이며, 옛 성품과 새로운 성품이 순번적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믿는 사람 속에서 똑같은 두 개의 성품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한 번에 한 성품만을 소유할 수 있고, 그 성품이 곧 우리 자신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이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중간점이 있을 수 없다. 옛 성품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새 성품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속에서 사시는 새 사람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5:17의 육신과(구속받은 인간)의 싸움은 로마서 7장의 교훈을 몇 마디로 함축해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으로 살며, 생활하며, 인도함을 받는다(갈 5:25, 16, 18).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4) 육신(독립적인 자아)를 좇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신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율법이 오직 독립적인 자아에게만 자기 요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5:18). 율법이 우리에게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육체 가운데서의 죄의 작용)은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에 의하여 자극이 될 가능성도 없으며(육체의 소욕이 영을 거스리는 것), 우리의 무기력한 자아도 주관할 수 없게 된다(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동안 우리는 그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도 죽은 것이며, 그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육체와 자기 노력 가운데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 가운데 있는 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 탄생할 때 해결지은 새 성품과 옛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이 "육체와 영"의 문제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우리가 다시 육체 가운데로 돌아가 결국 죄와 율법과 정죄 가운데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육체 가운데 빠진다고 해서 옛 상태로 완전히 되돌아 간다는 마귀의 가짓말에 넘아거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두 인격체가 되어 우리 손에 선한 성품과 악한 성품이 서로 싸워 누가 이길른지 모르다는 그릇된 굴레 속에서 살아도 안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대개 이런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확신있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사탄이 우리를 붙들었을 때 비록 잠시나마 그의 정죄 가운데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기란 가장 쉬운 일이며, 사실상 우리의 걱정은 자기 연민과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을 슬프게 해 드린 것 때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실패한 것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정죄를 용납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의(義)를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하면 속히 빛 가운데로 나와서 죄를 인식하고 자백하라고 하셨으며, 그렇게 할 때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정죄 가운데 계속 머문다는 것은 사실상 불순종하는 것이며 자학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걸려서 넘어지게 되면 겸손하게 그것을 시인한다. 그리고 깨끗케 하는 보혈을 의지한다. 그 다음 기뻐하며 자기 길을 간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이런 단순한 경험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는 간증으로 사용하곤 한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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