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함의 중요성
우리 주님은 매우 적은 사람들, 가장 적은 모임인 두 사람의 모임일지라도 그곳에 오십니다. 물론 이 약속은 열두명, 스무명, 혹은 수백명에게도 적용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하고 받을 것을 완전히 납득하며 철저하게 동의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 11:5-10)
우리가 누가복음 11장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가 분명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벗이여 떡 세덩이를 내게 빌리라". 여기에서 분명한 필요가 느껴지고 표현되었으며, 마음과 생각에는 한가지 일이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일에 대한 길고, 두서없고, 일관성이 없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정확한 것입니다-나는 세덩이의 떡이 필요한데, 그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떡이 꼭 있어야만 하며, 상황이 급한데, 지금은 밤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한가지 사항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벗이여 떡 세덩이를 내게 빌리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참으로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고 전혀 기다릴 생각이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언급하고 있습니까? 때로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집회가 끝날 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해주기 원하는 것이나 네가 받기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참으로 놀라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긴 공중기도를 금합니다
우리의 기도집회에 큰 진실함, 신선함, 뜨거움, 깊음, 실재성, 그리고 힘을 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교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분명한 어떤 것을 가지고 기도집회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에 대해 길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긴 기도의 많은 부분들이 매우 옳고 선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혼란스럽게 됩니다.
한 두가지 문제를 들고 보좌 앞에 나아가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간청함으로 성령님께서 동일하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때로 우리의 긴 기도가 얼마나 지루했던지요! 많은 경우에 긴 기도들은 분명한 고통입니다. 긴 기도들은 성경의 규범이 아닌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길게 기도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마가복음 12장 40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간략하고 분명한 기도는 그 기도 집회에 커다란 신선함을 줍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에 나타난 주님의 가르침에는 또 다른 매우 중요한 도덕적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청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떡 세덩이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집착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거절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일어나 네게 줄 수 없으니 나를 괴롭히지 말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강청하라고 권하시므로 우리는 그 가르침을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우리의 기도집회에는 강청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명확함의 결핍에 비례해서 강청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이 두가지는 늘 함께 합니다. 떡 세덩이를 구하는 것처럼 우리의 구하는 것이 분명하면 일반적으로 그것을 강청하는 것과 그것을 얻으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질 것입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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