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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은사(2) - 존 맥아더

9장. 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가? (2)

by 복음과삶 2007. 5. 8.

은사 ()

제 9장 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가?

존 맥아더

 

그렇지만 그 많은 증거들은 무엇인가?

분명히 신유 은사자들을 믿는 사람들은 놀런 박사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또 기적을 빋지 않으려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연구는 객관적일까? 놀런 박사는 쿨만에게 그녀가 “치료된 것”을 보았다는 암 환자들의 명단을 자기에게 보내게 했다. 여기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녀가 보내준 명단에 있는 사람 중 8명에게 편지를 썼다. 협조 요청에 응한 사람은 쿨만에게서 전립선 암을 고침받았다는 사람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우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줬다. 전립선 암은 호르몬 치료에 잘 듣는다. 만약 그것이 넓게 퍼졌다 하더라도 방사선 치료를 하면 좋은 효과가 있다. 이 사람은 수술도 받고 방사선 치료와 호르몬 치료를 다 받았다. 그리고 그는 캐서린 쿨만에게도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치료된 것이, 혹은 차도가 있는 것이 쿨만 덕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 본 사람은 누구라도 보통 사람이건 의사건 어떤 치료가 그의 생명을 실제로 연장시켰는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쿨만이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암을 “치료”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그녀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놀런 박사는 계속해서 그녀가 보내준 명단을 보고는 캐서린 쿨만에게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82명에 대해 조사를 했다. 82명 중 23명만이 그의 요청에 응하면서 면접했다. 모든 조사를 마친 후 놀런은 소위 치료라고 하는 것들 중에 단 한가지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캐서린 쿨만은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이다. 나는 그녀가 사기꾼이거나 협잡꾼이라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부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수천 명의 환자들이 자신의 집회에 와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기관상의 질병을 치료 받았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조사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나는 그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질게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문제는 무지함에 있다는 것이다. 쿨만은 신경성 질환과 기관성 질환의 차이를 전혀 모른다. 비록 그녀가 최면술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최면술과 암시 효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자율신경계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녀가 이것들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감추는 법을 배웠음이 분명하다.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쿨만은 자기가 한 일이 보기보다는 그다지 기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사역의 효과를 위협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감정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모두 부인하도록 스스로 자신을 타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신기한 란디”(The Amazing Randi)로 잘 알려진 전문 마술가 제임스 란디(James Randi)는 신유 은사자들의 주장을 조사한 책을 썼다. 란디는 1986년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에서 텔레비전 방송 설교가인 피터 팝업(Peter Popoff)의 속임수를 폭로했던 장본인이다(팝업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청중에 대한 “지식의 말씀”을 받는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감춰진 이어폰을 통해 그의 아내가 알려 준 정보를 말한 것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는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적은 쪽지와 안내소에서 받은 기록들을 그에게 읽어주었던 것이다).

란디는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부인했다. 그렇지만 그의 조사는 아주 철저하고 또 정당한 것 같다. 그는 몇 번 신유 은사자들에게 “직접적이고 실증할 수 있는 진짜 신유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만약 내가 기꺼히 인정할 수 있는 기적적인 치료가 한건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이 책에서 적어도 한 가지 기적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 어떤 신유 은사자도 자연적인 회복이나 심리적인 차도, 혹은 속임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의학적으로 분명히 규명할 수 있는 치료의 기적을 단 한건도 베풀지 못했다. 란디의 결론이 무엇이었겠는가?

“결국 오늘날 신유 은사라는 것은 항상 그랬듯이 단순히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설교자들이 신유 은사는 마술과 다르다고 열심히 외쳐도, 그 행사들은 마술의 요건과 딱 들어맞는다. 마술의 요소들을 다 갖추었으니 그것은 마술이다.”

물론 신유 은사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모호하게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나는 치유할 수 없어요. 성령께서 하시지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온갖 흥행술과 허세, 각종 속임수를 동원해 그것을 부인한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치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왜 그들의 집회에 희망에 부푼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모이는가? 또 왜 그들의 집회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가?

우리가 들은 그 병고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들 중에 진짜도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부서진 뼈들이 고쳐진 적이 있는가? 신유 은사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찢어진 얼굴을, 혹은 깨진 머리를 치유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갈비뼈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이 뼈가 다시 생겨나고, 한때 마비 증세를 일으켰던 사람이 이제는 정상적으로 활동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단지 우리가 본 것은 대부분 상상의 질병과 상상의 치료인 것 같다.

오늘날 자칭 신유 은사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기가 행하였다고 주장하는 기적들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부분 뻔한 속임수를 쓴다. 또 그들이 보여준 소위 치료라는 것들은 매우 의심쩍은 것들이다. 그런데 수천 명의 지성인들이 그들의 집회에 계속 가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병이 들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며 평소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극단적인 행동까지도 하게 한다. 명석하고 지적이며 분별력 있는 사람들을 비(非)이성적으로 변하게 한다. 사탄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욥 2:4).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불치의 병이나 기관상의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아픈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신경성 질환을 앓거나 약간의 기능상의 문제를 갖고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서 기적이라고 믿는 것들을 봄으로써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이 집회 저 집회를 돌아다녀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다는 데 있다. 실제로 누구의 믿음도 강해지지 않고, 또 누구의 질병도 치료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낙심한 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는 데 실패했거나 혹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모두가 병고침에 대해들은 말 때문에 혼란과 죄책감, 그리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냉담하게 대한다고 느낄 때 그들이 겪은 병의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신유 은사자들은 지금도 신유의 은사가 있는데 사람들이 병고침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들의 잘못이든지 아니면 하나님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유 은사자들의 뒤끝은 항상 개운치 못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가? 그렇다고 믿는다. 일부 거짓이 있다고 해서 초자연적인 치유의 기적들을 모두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나는 극적인 기적이나 하나님의 즉각적인 간섭은 매우 드물다고 믿는다.

그런 것들은 결코 신유의 대리자인 양 행동하는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진정한 병고침은 기도의 결과이며, 그것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차도를 보인다. 이따금 하나님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급작스럽게 병자를 회복시키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하나님은 의학적인 예측을 뒤집고,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병자를 회복시키신다. 그런 병고침은 기도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며,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 병고치는 사역을 위해 특별히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전형적인 신유 기술들은 사도 시대 이후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그리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치유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 시대에 있었던 병고침과 오늘날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서, 이상한 것들을 우편으로 배달해서, 그리고 대륙을 횡단하는 부흥사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병고침과는 큰 차이가 있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치유하셨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시유 은사와 성경의 가르침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적 은사에 대한 기본 틀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엄청난 치유의 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질병도 많았었다. 의술이라는 것은 아주 조잡했고 한계가 있었다. 지금 이 시대 보다는 당시에 치유할 수 없는 병들이 더 많았다. 전염병들이 전체 도시를 휩쓸기도 했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증명하시기 위해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치유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나타난 6가지 중요한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말씀이나 안수함으로 치유하셨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한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서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ㅝ 하는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다(6-7절).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에게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지만 백부장은 사양하고 예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하인이 낫겠다고 했다(8절).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의 빋음에 놀라셨는데, 특히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로마 군인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예수께서 그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자 그 하인이 즉시 나았다(13절).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하루 종일 무리 중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셨다. 성경에는 몇 사람이 치유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수천 명은 될 것이다. 숫자야 어떻든 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말씀 한마디로 고치셨다. 과장된 몸짓이나 특별한 분위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접촉을 통해 치료하기도 하셨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5:25-34을 보면 단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혈루증이 고침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 경우이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즉시 치유하셨다.

백부장의 하인은 “그 시에”(마 8:13) 나았다고 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즉시”(막 5:29) (개역성경에는 “이에”나았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 열 명을 길을 가는 도중에 즉시 낫게 하셨다(눅 17:14). 또, 다른 문둥병자를 만지셨는데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눅 5:13)고 했다. 베데스다 연못의 불구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요 5:9).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도 가서 씻으니 즉시 나았다. 물론 이 경우에는 예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그 기적을 두 단계로 행하셨다. 하지만 그 치유는 분명히 즉각적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나는 치유받았고 앞으로 점점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점진적”인 치유를 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께서 즉시 치유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기에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지 자연적인 경과일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고치셨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 나가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 거기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으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가가서 “열병을 꾸짖으시니” 즉시 그녀는 완쾌되었다(39절). 그녀는 일어나서 그들을 수종들기까지 했다. 회복기가 따로 없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뜨거운 물에 꿀을 조금 타서 마시고 몇 주간 안정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증세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미듬으로 병고침 받았다고 외치라”라고 그녀를 독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완쾌되었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치유는 순식간에 이루어졌으며 또한 완전한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역사이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을 모두 고치셨다.

요즘의 신유 은사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망한 채로 휠체어에 실려서 돌아가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비행기 시간이나 텔레비전 시간표에 쫓겨서 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신유 집회나 프로그램에서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4:40에 보면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했다. 누가복음 9:1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기관상의 질병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타인을 돌아다니시면서 기껏 허리의 통증이나 두근거림, 그 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 따위를 고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관상의 질병임이 분명한 환자들을 고치셨다. 예를 들면 앉은뱅이, 손 마른 사람, 소경, 중풍병자 등인데, 이런 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기적이다.

여섯째,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누가복음 7:11-16을 보면 예수께서 나인성에 계실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나셨다. 어떤 과부가 자기의 독자를 묻으러 가는 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행렬을 멈추게 하신 후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다. 마가복음 5:22-24, 35-43을 보면 예수께서는 또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신유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이나 장례 행렬, 혹은 묘지에서 그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지금도 때때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난 경우들과는 전혀 다르다. 수술대에서 살아 있다는 신호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사람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나흘 동안 무덤에 묻혀 있다가 무덤에서 나온 사람이나(요 11장) 혹은 장례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눅 7장). 이것들은 의심할 수 없는 부활의 사건이다. 오늘날 그런 일들을 한다고 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이야기가 근거도 없이 소문으로 떠돌고 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기적을 시시껄렁한 것으로 만드는 죄를 짓고 있다. 왜 텔레비전 방송에서 행한 기적들은 그렇게도 죄다 눈에 띄지 않는 증거가 없는 것들뿐인가?

하지만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신유 은사는 진정한 은사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주장,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리고 신성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 은사를 사용하셨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당신께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한 방편이었다.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사와 이적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고 하였다(요 20: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