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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은사(2) - 존 맥아더

9장. 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가? (3)

by 복음과삶 2007. 5. 8.

은사 ()

제 9장 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가?(3)

존 맥아더

 

사도들은 어떻게 치유하였는가?

앞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병고침의 은사에 대한 기준을 세우셨다. 오늘날 신유 은사자들이 예수님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병고침의 은사를 받고 그것을 사용한 사도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은사를 사용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제자 모두에게 병고침의 은사를 주셨다(눅 9:1-2).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 은사를 70명의 제자들에게도 주어둘씩 보내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게 하였다(눅 10:1-9). 그 외에 신약성경의 어디에 누가 신유 능력을 가졌는가? 그렇다. 바나바(행 15:12), 빌립(8:7), 그리고 스데반(6:8)과 같은 사도들의 동역자 몇 명이 그 은사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 은사가 교회에서 무작위로 시행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열두제자에게(바울을 포함하여), 70명의 제자에게,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한 동역자들에게만 주어진 은사였다.

사도행전 3장은 신유 은사가 사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를 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는데 어떤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였다. 베드로는 그에게 응답하여 말하기를 자기에게는 돈이 없지만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했다(행 3:6).

그러자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여러 해 동안 성전 문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본 것에 대해 놀라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행한 기적은 결코 베드로나 요한 자신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가 그 청중들에게 얼마만큼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또 그 치유의 기적이 얼마만큼 효과적이었던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베드로는 지금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만약 그저 걸어 다니면서 단순히 그들에게 설교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볓달 전에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라고 말이다.

그 메시지가 1세기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기들의 메시아가 일개 잡범들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대개 그들의 메시아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그 미운 로마인들의 속박을 제거하기 위해 권능과 영광 중에 오시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과 같은 그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무서워하였다. 사도행전 4:4에 의하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라고 했다.

오순절 때 교회가 시작되었다. 새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그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도록 기적적인 능력을 주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 기적에 나타난 여섯 가지 특징이 사도들의 치유 기적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첫째, 사도들은 말씀이나 안수함으로 치유했다

사도행전 9:32-35에 보면 베드로는 중풍병으로 8년간 누워 있던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쳤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오직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애니아가 즉시 나았다(34절).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멜리데라는 섬에서 안수하여 병자를 낫게 하였다. 멜리데의 지도자 중 하나인 보블리오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영접하였다. 보블리오의 부친은 심한 열병과 이질로 누워있었다.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였다(8절).

둘째, 사도들은 즉시 치유했다

성전 문에 있던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나서 뛰고 걷고 하나님을 찬양했다(행 3:2-8). 다른 치료나 안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불구였던 그 남자는 즉시 치료되었다.

셋째, 사도들은 완전히 고쳤다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의 경우에서 뿐만 아니라 9장 애니아의 치유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9:34은 의미 심장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완전하게 하신다.”(개역성경에는 “낫게 하시니”로 되어 있다) 예수님의 치유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치유는 완전하다. 점점 좋아진다거나, 증세가 재발한다거나, 혹은 조금씩 나아진다는 그런 경우는 없다.

넷째, 사도들은 각 사람을 모두 고칠 수 있었다

사도행전 5:12-16을 보면 사도들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고 사람들은 그들을 칭송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기까지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였다. 그리고 근방의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데려왔는데 “다 나음을 얻느니라”(행 5:16)고 했다.

사도행전 28:9에 보면 바울이 보블리오의 부친을 낫게 한 후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았다”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고침받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다섯째, 사도들은 기관상의 질병을 낫게 했다

그들은 기능상의 장애를, 혹은 가벼운 증세나 심리적인 문제로 인한 질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는 40세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면서부터 불구였다. 보블리오의 부친은 이질, 즉 전염에 의한 기관상의 질병에 거린 사람이었다.

끝으로, 사도들은 죽은 사람을 살렸다

사도행전 9:36-42에 베드로가 도르가를 어떻게 살렸는지에 대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42절을 잘 보면,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역시 우리는 여기에서 기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메시지를 믿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0:9-12에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서 죽었는데 바울이 그를 다시 살렸다.

오늘날 많은 주장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이와 같은 여섯 가지 특징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끝으로 한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성경에 의하면 기적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은사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신유 은사자들은 결코 수시로 그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럴 수도 없다. 그들은 성경적인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다”라고 말함으로써 교묘하게 어려움을 면한다. 그래서 반복되는 실수에 대한 비난은 그 은사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받게 된다.

 

신유 은사는 끝났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치유하신다.

신유 은사는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의 메시지와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 사도들의 공동체에 부여하신 기적적인 역사 중 하나였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된 이후에 그 표적들은 사라졌다. 기적적인 표적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사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정당성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한 강한 표적으로 병고침의 기적을 행하였을 뿐이다.

빌립보서 2:25-27에 보면 바울은 그의 좋은 친구 에바브로디도가 여러 해 동안 심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바울은 전에 병고침의 은사를 발휘한 적이 있다. 왜 그는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낫게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그 은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바울은 단지 그 은사를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은사를 남용하려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에바브로디도를 낫게 하는 것은 신유 은사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은사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건강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일 뿐이다 .

디모데후서 4:20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경우를 보게 된다. 거기에서 바울은 드로비모를 병들었으므로 밀레도에 남겨두었다고 했다. 왜 바울은 아픈 그의 친구를 그냥 두었는가? 왜 그를 고치지 않았는가? 그것은 신유 은사의 원래 의도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5:23; 고후 12:7).

병고침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기적적인 표적 은사였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기위해 영원히 주어진 은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은 애초부터 기독교인들이 병들게 하시는가?

이 세상에서는 신자들도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데 왜 고통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강하게 잘산다면, 만약 화목의 유익이 완전한 건강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의 동기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시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을 육체적인 혹은 일시적인 병 치료를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의 병고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은사주의자들은 종종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물음에 대하여 체험에 호소하여 응답한다. 그들은 “하지만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라고 변명한다. 나 역시 은사주의자 친구들에게서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듣는다. “이 부인의 아들이 암에 걸렸었는데……”, “내 친구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허리가 굽어서 움직이지도 못했었는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신유 은사자도 분명히 입증될 수 있도록 기관상의 질병을 즉각 치유한 경우는 없었다. 어떤 신유 은사자도 병고침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을 모두 낫게 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올 때나 다름없이 병든 채, 불구인 채 돌아갔다. 어떤 신유 은사자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밖에 다른 확증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신유 은사자들의 화목과 구원에 관한 신학은 의심스럽다. 은사주의자들과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질병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신유 은사자들은 특별한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병고침에 대한 증거라고 제시하는 것은 보잘것없고 미심쩍은 것들이며 과장된 것들이다. 병원에 많은 환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들이 병원에 가서 기적을 행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은사주의자들이 병고침이라고 말하는 사례들은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신유 은사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병들고 죽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는 많은 혼란과 모순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되물어보고 싶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병고침의 은사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병고침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병고침의 은사는 사라졌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하나님이 원하실 때 치료하신다. 어떤 때는 나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치유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치유하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느 목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설명할 수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손 쓸 도리도 없이 신실한 기독교인이 고통을 받는 아주 비극적인 경우들을 많이 보아 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전혀 응답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은사주의 목사들도-만약 그들이 정직하기만 하다면- 자기들도 역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은사주의를 가르치는 자들과 치유자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이 병고침을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항상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치유 받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그런 변명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

 

왜 기독교인들이 병드는가?

우리는 필연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기독교인들이 병드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어떤 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출애굽기 4:11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매우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된 이 말은 매우 충격적인 것처럼 들린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누군가 고통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인가? 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벙어리나 귀머거리, 혹은 소경이 되게 하시는가?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계획은 우리의 제한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불구자와 허약한자들을 만드셨다. 결함을 가진 아이들이 매일 출생한다. 많은 아이들이 선천적인 불구자로 자란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병을 앓기도 한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둘째, 어떤 병은 사탄에게서 온다.

누가복음 13:11-13에 보면 예수께서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뜻이 있어서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을 병들게 허락하신다. 그 전형적인 성경 사례가 욥이다(욥기 1자을 참조하라).

셋째, 어떤 병은 죄를 벌하기 위한 것이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문둥병에 걸렸는데 회개하고 나았다. 신명기 28:20-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전염병으로 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열왕기하 5장에서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탐욕 때문에 문둥병에 걸렸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썼다(시 119:67).

사람이 아프면 혹시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모든 생활을 점검해야 한다. 만약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거든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하심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병든 사람을 상담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조심성 없이 신실한 자기 반성없이 다른 사람의 죄를 꼬치꼬치 캐묻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이런 성경의 원리를 남용하면 다른 사람을 잘못 정죄하기 십상이다.

어떤 경우에는 죄 때문에 아픈 삶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꼭 그 사람의 죄와 관련시키는 것은 마치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병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잔인하고 무자비한 처사이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욥 42:7-8).

 

하나님께서는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는가?

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재도 치유하신다고 약속하셨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치료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신자들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음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는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품 때문에 치유하신다.

출애굽기 15:26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여호와에 해당하는 단여 야훼 로페카(Yahweh Ropeca)를 직역하면 “너희의 치료자 여호와”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할 권리가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 때문에 치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 안에서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지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1:22; 요 14:13-14; 16:24; 요일 5:14). 이것은 우리의 요구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병고침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신다.

셋째, 치유는 하나님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의 표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과 질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보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기 위하여 어디든지 가셨다. 다른 방법으로도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입증하실 수도 있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시기 위해”(마 8:17) 고통과 괴로움을 면하게 하는 자비의 길을 택하셨다. 그렇지만 베드로전서 2:24에 관한 논의에서 지적했듯이(은사Ⅰ. 4장 참조), 이것이 이 시대의 모든 병을 치료하는 것이 속죄 사역의 일부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증하는 데 있어서 치유를 본보기로 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우리가 장차 이 세상의 질병과 불구로부터 영원히, 완전하게 해방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집에는 질병이나 죽음이 없다.

 

기독교인들도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치료하신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증거한다. 이사야 38장은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왕은 슬피 울면서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어주기로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가 낫게 되었는가? “이사야는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사 38:21)고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치료하기로 하셨다면 왜 찜질이 필요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한 가지 원리를 제공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프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즉 낫기를 위해 기도하고 의사의 치료를 받는 것이다.

마태복음 9:21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견해를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지금 죄의 문제를 말씀하시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의사의 치료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됨을 확실하게 하셨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보블리오의 부친을 기적같이 고쳤더니 많은 사람이 병 낫기를 바라고 그에게 왔다. 9절에서 다른 병든 사람들이 ‘고침’에 해당하는 단어는 의학 전문 용어이지만, 8절에서 바울이 보블리오의 부친을 낫게 하는 데 사용된 헬라어는 치료에 대해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이다. therapeutic이란 단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어쩌면 바울이 기적적으로 잣게 한 후 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였으므로(골 4:14) 의학적으로 치료했을 것이다. 얼마나 멋진 협력 선교인가? 원리는 분명하다. 아플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또 훌륭한 의사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EMt을 신뢰해야 한다. 결국 고난은 우리에게 현재에는 유익을 이루고(약 1:2-4; 밷전 5:10), 장래에는 영광이 되게 한다(롬 8:18. 벧전 1:6-7).

우리는 모두 타락으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죽게 될 존재(살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게 될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병들었을 때에도 성도들은 성경적인 인식을 벗어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정하신 방법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그의 주권적인 의지와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치료하신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