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으셔야 됩니다."라고 전도를 하다 보면, 가장 자주 접하는 반응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시오. 그럼 믿겠소."이다. 유사 이래로 하나님이 존재하는가를 증명해 보려는 온갖 이론이 나왔지만 결론은 어느 누구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도박 논증(Wager Argument)) 신이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어차피 증명할 수 없으므로, 이 문제에 관한 한 일종의 도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거는 것이 나중에 손해가 없다는 이론이다. 없다고 걸었다가 있게 되면 낭패지만 있다고 걸었는데 없어도 아무런 피해가 없기 때문이다.
으로 그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경쾌하면서도 해학적인 맛을 풍긴다.
그런데 도박을 하려면 제일 먼저 따져 보아야 하는 것은 돈을 딸 확률이다. 도박은 확률과 상관없이 사람을 무작정 미치게 만드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모든 도박에는 사전에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검증 받은 확률이 있게 마련이다. 경마·카드게임·주사위·룰렛, 빠찡꼬 등 모두가 확률로 이기고 지는 게임이며 이 확률을 잘 다스리면 크게 잃지 않는다.
도박 논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따지려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률도 함께 따져 보아야 한다. 흔히 하나님의 존재 확률에 크게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 50%라고 쉽게 생각해버린다.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인데도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혹시 지옥과 천당이 있으면 어쩌나?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식의 천국 보험 드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솔직히 꽤 있다.
동전을 던져 앞면과 뒷면 중의 한 면이 나올 확률은 50%다. 동전에는 앞면과 뒷면이라는 두 가지 상수(ßEa|)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공중에 던져 어느 면이 나오는가 하는 변수(U¨a|)의 확률은 1/2=50%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존재하는 것도 맞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맞다는 두 가지 불변의 상수는 있을 수 없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존재하면 하고 존재하지 않으면 안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은 100% 아니면 0%이다.
350년 전에 살았던 파스칼이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도박논증에 이 확률논증도 포함시켰으리라 생각된다. 하나님이 존재하면 100%라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확률로 존재하는 것이고, 아니면 또 0라는 절대적이고도 두말할 여지를 주지 않는 확률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절대로 함부로 경솔하게 다루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100%의 확률로 확실하게 믿어야 하고, 믿지 않는 자는 0%의 확률로 확실하게 믿지 않아야 한다.
주위에 아무 종교에나 기웃대다가 파리 끈끈이 같은 종교에 빠져 몸도, 마음도, 돈도, 시간도, 가정도, 정성도 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유독 기독교에 많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예수 잘못 믿어 자주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고 교회에서 목사가 갖고 오라는 대로 그저 갖다 바친다. 그런데 성경의 예수가 그렇게 하라고 한 적이 있는가? 전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문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의 진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메커니즘이 빚어낸 폐해일 뿐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에 빠진 자는 그런 실수를 하거나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100% 절대 확률의 하나님에 빠진 자는 그렇지 않다. 100%의 존재 확률이란 이미 그 존재성만으로도 하나님의 절대적 본성을 말해준다. 그분은 절대 100%의 선이요, 100%의 사랑이요, 100%의 정의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모든 속성에서 100% 완전하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할 때도 절대적인 100%의 신뢰와 사랑으로 경배해야 한다. 전 재산을 팔아 바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관·가치관·역사관·세계관·도덕관·종교관·대(Oß) 신관 모두가, 100%의 온전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100% 완전히 바뀐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신자도 0%의 존재 확률이 의미하는 바대로 확실한 불신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없으면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니까 인생관·가치관 등 모든 사고와 삶이 그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 내세의 심판과 구원이 없으므로 인생이란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며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법에만 안 걸리면 된다.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가장 고귀한 만물의 영장인데 그럴 수 없다."라고 반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제로의 확률로 없는 것이 분명한데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해봐야 자기 자랑이요, 인간 세상에서의 공과 싸움에 불과하다. 그렇게 인간인 것이 자랑스럽고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면 최소한 비겁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불신자라면 온전한 불신자답게 소위 "천벌을 두려워해라.", "하늘이 무섭지 않는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 등의 말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지금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종교를 잘 선택해서 나중에 낭패를 보느냐 안 보느냐는 도박에 우리의 운명을 걸 것이 아니다. 절대적 하나님이냐, 제로의 하나님이냐에 정말 인간답게 정정당당하게 반응하여 그것에 우리 일생을 걸어야 한다. 종교는 선택할 수 있으며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의 기준을 고매한 사상과 심오한 철학과 고급한 계명으로 삼아선 안 된다. 그 종교가 100%의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가 아닌가를 정말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지금 기독교가 개선하고 구조 조정해야 할 문제도 단순히 학문적인 신학이냐, 토착 민족 교회냐,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을 두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복음적 생명력과 성경 말씀의 이해·해석·적용을 바로 이 절대적 가치의 하나님에게 온전히 두느냐의 문제이다. 100% 절대적 하나님이란 이미 전 인류애적 가치와 전 우주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며, 성경에도 이미 그 진리가 분명히 선포되어 있는데 기껏 지금 와서 아시아적 가치를 갖추자, 단선적이며 서구적 전투형 교회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논쟁은 실컷 누워 자고 일어나 갑자기 남의 집 봉창을 두드리는 격이다.
흔히 하나님은 한 분뿐이니까 자기에 맞는 종교를 택하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사람이 만든 종교는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한 분뿐이며 절대적인 존재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한 분뿐이라면 이미 선택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받을 존재가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만나져야 할 대상이다. 그분은 유일하실 뿐 아니라 100%의 절대성을 지녔으므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반응은 오직 하나뿐이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우리 삶을 그분에게 온전히 맡겨야 한다.
간혹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기독교의 진수를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이웃을 섬기고 그들을 대신해 희생한 사랑의 본을 닮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빌 2:5)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신앙생활의 목표를 선한 행위(doing)를 실천하는 데만 둔다. 기독교의 진수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 영혼이 완전히 거듭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 존재(being)가 변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본질이다. 희생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상을 심어주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왔다면, 그는 수많은 도덕적 선각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인간에게 또 다른 도덕 교과서나 최고난도 선행의 모범을 보이는 훈련된 조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도덕교과서라도 제대로 지키면 우리 모두 천사가 된다. 인간은 도덕을 몰라 죄 짓는 것도 아니요, 방법을 몰라 선행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도덕교사의 부족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누군가 남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어야만 했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가 온 것이다.
올바른 신자란 진리를 이미 신앙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자이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양 가장하는 자는 신자가 아니다. 진리가 아니면 신앙내용으로 갖고 있어서도 안 된다. 아직 진리를 붙들지 못했다면 신자(aaiº)가 아니라 구도자(I´O³iº)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그렇다. 왜냐하면 신자란 예수님이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에 신자 자신이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 구원 받았다는 것을 진리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메커니즘이 신자들에게 강요한 것이나 신자가 본인의 노력으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성령의 간섭으로 100% 체험한 신자의 영혼이 100% 그 사랑에 반응한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할 이야기는 바로 이 문제를 규명하는데 있다.
모든 종교가 하나님은 단 한 분뿐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절대적인 100%의 확률로 존재하고 있다. 그 하나님을 인간이 선택할 수 없다. 만나져야 한다. 그리고 그 만남을 체험한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 무릎 꿇게 되어 있다. 그리고 변화된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제 이 기독교의 진리에서 잘못 오해 되고 비판 받고 있는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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