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최고"
1.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철수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를 때는 자기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인줄 믿는다. 돈도 제일 많고, 힘도 제일 세고, 못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친구들의 아빠 누구와 어떤 것으로 견줘도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 조금씩 정신적으로 성장하면 자기 아빠가 얼마나 힘이 없고 별 볼일 없으며 어쩌면 친구들 아빠 중에 제일 못하다는 것을 알고 실망할 때가 많다. 심지어 왜 하필이면 저런 못난 아빠가 내 아빠가 되어 내가 이 모양 이 꼴인가 불평하다 못해, 허황되지만 재벌 회장과 자기 아빠가 바뀌어 공부 안해도 기부금으로 대학가고 일 안 해도 호의호식할 꿈도 꿔본다. 철이 들어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서도 '우리 아빠 슈퍼맨'이라는 믿음을 금과옥조처럼 갖고 있으면, 철수는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아내·자식·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잘못된 예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도 유치한 것을 벗고 철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아직 철이 덜 든 사람으로 그런 주장을 들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심히 성가신 일이 된다. 어떤 사물을 서로 비교하기 위하여 예를 들 때는, 그 예가 원래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 위의 예에서는 기독교 신자는 철수로, 신자가 믿는 하나님 내지 기독교 신앙은 철수 아빠에 비유되었고, 철수의 정신 연령이 높아질수록 아빠의 실상을 발견하여 그 인식을 바꾸듯이 신자도 자기의 신앙을 그렇게 고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신자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은 신자가 성장함에 따라 마땅히 변해야 하나 그 변화되는 모습과 내용은 태양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과 같다. 어려서 태양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진다고 믿다가, 차츰 커가면서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니까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문학 지식이 더 늘어가면 태양을 포함한 태양계 전체도 어떤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고,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도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태양 표면이 쉬지 않고 폭발하는데 그 폭발에 따라 지구 기후와 생태계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철수 아빠의 예나 태양의 예나 신앙이 변해야 한다는 외형적 측면에선 동일하나 그 변화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철수의 경우에는 아주 평범한 아버지를 슈퍼맨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그 변화는 수정(aoiU)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태양의 예에선 그 변화의 주된 내용은 성숙(a÷aU)이다. 어려서나 성인이 된 후에도 지구에는 태양이 하나고 그 태양의 빛과 에너지가 만물의 생존의 필수조건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고 단지 태양에 대해 좀더 깊이 알게 된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창조주 하나님이 한 분 계시고 그분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하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처음부터 믿게 된 자다. 신앙이 자라면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는 모습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다.
철수 아빠의 예로 기독교 신앙의 변화를 설명하려면 이렇게 해야 맞다. 철수가 제대로 된 아이라면 자기 아빠가 아무리 세상적으로 별 볼일 없이 보일지라도 철수를 사랑하는 그 사랑만은 세상 어느 누구와 견줄 바가 없다는 것을 어려서나 커서나 변함없이 믿는다. 변하는 것은 아빠가 어렸을 때와는 달리 차츰 자기 요구대로 들어주지 않는 일들이 많아지고 그 일들이 오히려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어 부자간의 관계가 더욱 굳어지는 것이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다 신자가 아니며 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통적인 교회에서는 세례(내지 침례)의식을 거친 자를 정식 교인으로 친다. 그 의식 자체에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 불신자를 신자로 바꾸어 주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처음부터 갖게 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고백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신자가 되는 기준은 의식이 아니라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이 기초석이 되어 그 기초 위에 다른 모든 신앙 활동이 쌓인다. 이 고백을 인간의 지성과 인격이 발달되어 너 생각이 틀렸으니까 바꾸라는 것은 마치 태양계에 태양이 중심이 아니고 목성이나 화성도 중심이 될 수 있으니 사고의 전환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 신앙에서 계속 자라나야 하는 믿음은 따로 있다. 철수가 어렸을 때 엄마가 "너희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로 힘이 세지."라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는데, 커서는 그 말이 어린 자기를 기를 안 죽이고 아빠를 세워주기 위해서 한 말이며, 정말 자기에게 그렇게 느껴지게 한 것이 비록 객관적인 사실은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런 믿음의 자람이 있다. 예를 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믿어 기도가 응답이 안 되면 왜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인데 이 일을 응답하시지 않는지 능력위주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 철수가 자기 아빠가 팔씨름이나 돈 많은 것으로도 반드시 친구 아빠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 전지전능이란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이룰 때만 전지전능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북한 김정일 정권을 베를린 장벽 무너지듯이 하루아침에 전복시켜 북한 주민을 해방시켜 줄 능력은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고 지금 당장은 이해가 안되고 잘못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믿고 때가 찰 때까지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함께할 때만 발휘된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능력보다 선하심을 먼저 찾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는 신자의 성장과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절대적 믿음과 그에 따라 자라야 하는 믿음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예수가 나의 구세주이며 그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기초석으로서 믿음('고백적 신앙')이고, 후자는 그 고백 위에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믿음('실천적 신앙')이다. 고백적 신앙은 전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신자의 영혼이 거듭날 때에 하나님이 심어 준 은사(gift)로서의 절대적 믿음이다. 실천적 신앙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신자가 이 땅에서 자기가 책임을 지고 성숙시켜야 하는 믿음이다.
흔히들 하나님은 동일하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까 자기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외부에서 기독교인들도 정신차려 제대로 잘 믿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이 두 가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다른 종교는 기독교와 같은 이런 구분이 없거나 있어도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실천적 신앙만 있거나 설사 둘 다 있다 하더라도 항상 실천적 신앙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볼 때도 실천적 신앙의 관점에서만 본다.
특별히 기독교의 고백적 신앙은 신자 본인이 분명한 거듭남의 체험을 겪었음을 인식한 후에 고백하는 것인데 반해, 타종교의 고백적 신앙은 대개 종교의 교리체계를 이해하고 동의하는 수준에 그치니까 기독교도 당연히 그러려니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 신자의 믿음을 두고 교회에서 믿으라고 강요하는 낡고 고착된 교리에 얽매여 있다고 오해하고 자꾸 그 배타적인 생각을 버리고 종교간에 관용을 베풀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고백할 때는, 교리에 동의한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자신의 체험에 의한 고백이자 변할 수 없는 절대적 신앙이다. 교회가 권유·교육·강요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신 믿음이다.
기독교의 이 고백적 신앙은 외부인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반면 실천적 신앙의 모습만 보인다. 신자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이웃 사랑하고, 희생하고, 영원을 대비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만 보고는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고 착각한다. 기독교 신앙은 고백적 신앙이 전제되지 않으면 실천적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자라지 않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 예수님의 설명대로 나무가 바뀌면 열매는 자동으로 그 나무의 종류에 따라 맺히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한 말이 유치한 수준의 믿음이 지성이 늘어남에 따라 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그 위에 우리가 책임 질 신앙이 자란다는 것이다. 그 자라는 신앙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라지 자기의 깨우침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깨우침으로 자라게 하려면 아직도 가르침이 부족하고 계시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인간의 그 잘난 지성과 사상에 관한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에 관한 것으로는 새롭게 드러나야 할 계시가 더 이상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것을 풀어 설명한 성경으로 충분하다.
성경 66권을 한 1분 내에 다 읽는 방법이 있다. 무슨 책이든 시작과 끝을 알면 그 내용을 전부 알 수 있듯이 성경도 그렇게 읽으면 된다. 성경이 어떻게 시작하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어떻게 끝마치는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시작과 끝을 연결해서 읽으면 어떻게 되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이유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종교든지 자기 종교의 경전에서 말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그 종교인이라 할 수 없다.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이므로 기독교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믿는 자라고 할 때 이 시작과 끝-창조주 하나님이 주 예수를 통해 베푼 은혜를 믿는 자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경우, 그 신앙의 절대적인 반석은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 된 계시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있어서 정확 무오(Uie|)하다는 것, 둘째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로서 그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셋째 세상 모든 자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있도록 선교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한 구절로 성경이 압축해서 설명한 것이 마르틴 루터가 작은 성경이라고 불렀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는 주 예수의 은혜다.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핵심이 너무 신학적으로 표현되어 이해가 잘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매일 고통과 슬픔과 분노와 불평과 의심과 죄악 가운데서 염려와 불안이 끊이지 않아 하루도 평강의 날이 없이 방황하고 있는 자들, 꼭 가난에 찌들거나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육신적 요소의 질과 양에 상관없이 심령에 불안이 끊이지 않는 자들에게 솔직히 가슴을 털어놓고 한 번 대답해보라고 물어보자. "지금 당신에게 누군가 와서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그것을 배워 연습해서 불안을 없애는 것을 원하시겠소? 아니면 누군가 그 불안 자체, 원인과 증상과 결과를 몽땅 없애주는 것을 원하겠소? 둘 중 어느 쪽이오?" 모두 당장 해결해줄 사람을 찾지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을 찾지 않을 것이다. 당장 급하고 죽을 지경인데 언제 배워 연습하고 실천할 여유가 있겠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스스로 밝히기를 죄인을 구원하러 왔고 병자를 치료하러 왔다고 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고 했다. 인자가 온 것은 자신의 살과 피를 주어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주리고 목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우리더러 빵을 구하고 우물을 파라고 하지 않으셨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인 예수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상담하고 치료 받아 구원의 능력을 매일매일 체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이 유치하고 잘못되었으므로 제대로 새로운 신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마치 과학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을 때의 의술이 민간요법과 미신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실험과 검증을 거친 현대 의술로 대체하라는 말과 같은데 신자더러 새로운 의술을 배워 의사가 되라는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인가, 근본주의 신학인가 따지는 것은 의술을 배우는 의학도에겐 필요할지 모르나 영원한 의사를 매순간 찾아가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신자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믿음의 원리를 갖고 있는 자들을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
ists)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최근 근본주의자라고 하면 무조건 고집불통으로 매도해 버린다. 근본주의자에는 예수만이 길이라는 성경의 진리는 끝까지 고수하되, 그 적용에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과 진리만이 아니라 적용에서마저 도저히 포용성이 없는 자가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을 한 묶음으로 완고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2002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솔트레익 시는 모르몬교의 본산으로 유명한데 그 모르몬교의 교리 가운데 '교리와 성약'이라는 것이 있다. 살아 있는 예언자 12명이 수시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을 교리로 기록한 책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가 그곳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어떤 예언자가 카페인이 든 음료는 건강에 안 좋으니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것이 교리가 되어 모든 모르몬교인들이 그대로 실천했다. 그런데 어떤 모르몬교 고위 직분자가 그 지역 콜라 공장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전 교리대로 하면 콜라가 안 팔릴 것은 너무나 뻔해 다시 어떤 예언자가 카페인이 든 음료가 다 나쁜 것이 아니니, 콜라는 먹어도 되고 커피만 마시지 말라는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이 문제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타협을 봤다는 것이다.
이 일을 수준 낮은 코미디 같다고 비난하고자 하는 뜻은 없다. 너무 구체적으로 계시를 받으니까(?) 그 양이 방대해지고 이전에 받은 계시와 새로 받은 계시가 서로 모순되어 충돌이 생기는 경우도 많아져 누구도 확실하고 일관된 교리를 제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 목사가 모르몬교 비숍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면 진리인데 진리가 그렇게 자주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물었더니 "진리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진리가 바뀌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 예에서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진리'와 '진리의 적용'을 혼동한다. 이 예에서 진리란 "하나님은 인간더러 건강에 좋지 않은 음료는 먹지 말라"는 것인데 이 진리는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바뀌지 않고 바뀔 수도 없다. 대신에 콜라나 커피가 건강에 좋은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그 진리의 적용에 해당되는 문제이지 "커피를 먹지 말라", 혹은 "콜라는 먹어도 된다"는 교리가 진리는 아니다.
이 문제를 동성애에 적용해보자. 동성애는 분명히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금하는 범죄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성경적 진리다. 그러나 그 진리의 적용이라는 측면, 즉 동성애자를 다루는 입장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우리 모두 죄인이듯이 그들도 죄인이며 동성애를 했기에 우리보다 더 추한 죄인이고, 우리는 동성애를 안하니까 덜 죄인이라는 구분을 두지 않는 쪽이다. 또 동성애라는 죄도 하나님과 분리된 영혼의 부패로부터 파생된 것이기에 의사이신 예수를 만나 십자가 용서를 통해 영혼이 변화되는 길만이 최선의 치유책으로 믿고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동성애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범죄일 뿐 아니라 동성애자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그들이 교회에 출석하면 다른 신자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막아야 하고, 그들의 치료를 위해 국가 예산을 배정하거나 복지혜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둘은 엄격히 다르다. 동성애가 죄라는 진리에선 양자의 입장이 동일하지만 그 적용에선 완전히 다르다.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하는데 필자는 전자를 복음주의자, 혹은 복음적 근본주의자로, 후자는 완고한 근본주의자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근본주의적 입장이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기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분석이다. 잘 알다시피 서방유럽에는 이미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사라지고 없어졌다. 근본주의란 복음주의 입장을 너무 강조해 그 적용에서조차 일체의 타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따라서 복음주의가 사라지면 근본주의도 자연히 없어질 수밖에 없다. 서방 유럽에 없어진 것은 근본주의가 아니라 복음주의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이라곤 성경을 비평하는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뿐이다. 의사로서의 예수가 부인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절대 남아 있지 못한다.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가 의대학장이 되어 의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는데도 그 의과 대학에는 지원자가 하나도 없다. 한국에만 근본주의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너무나 바람직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복음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록 너무 고집 센 복음주의자가 근본주의처럼 오해되기도 하고, 간혹 그런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긴 해도, 한국에선 예수가 학장인 의과대학이 아니라 의사 예수가 근무하는 병원이 아직 부도나지 않고 성업 중이라는 말이다.
기독교는 근본주의자의 교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또 내가 신학을 배워 그것이 근본주의든, 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 신신학이든 구신학이든, 역사비평학적 혹은 본문비평학적 신학이든, 종교비교학적 신학이든 그 신학 안에서 예수를 내가 정의하겠다고 하는 자를 두고도 기독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 당신이 말한 대로 자신에게 예수가 의원으로 필요한가를 인정하느냐 이다. 자신이 지금 당장 입원해야 할 병자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많은 사람에게 영적 감화를 주며 온전한 삶의 의미를 찾아 흔들림 없이 살고 있는 무수한 사람에게 신학이 당신을 변화시켰는가 아니면 예수가 당신을 변화시켰는가 물어보라.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기독교에선 어느 특수한 시대적 배경과 요구에서 형성된 특수 교리를 가지고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진리가 우선이지 교리가 먼저일 수 없다. 예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교리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기독교의 진리와 적용, 기독교와 그 메커니즘, 예수님 당신과 예수님의 가르침,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함으로 생기는 오해와 비난을 제거하는 것이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이전의 유치한 신학을 버리고 이제는 이 시대에 맞는 신학으로 기독교도 탈바꿈을 해야 한다면, 이 또한 진리와 그 적용을 구분 못하는 완고한 근본주의자와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진리에는 자라는 것이 없다. 언제나 불변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적용에서는 물론 자라야 한다. 기독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연령과 종교연령이 아니라 영적 연령이다. 더 나아가 영적 출생을 가장 먼저 따진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영적 출생이 이뤄지고 또 영적 출생이 있어야 영적 연령이 늘어난다. 영적 연령은 육신적 자람이나 지적 성숙과는 별개다. 자신의 깨우침과도 상관없다. 영적 출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성령의 간섭으로 자란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매일 씨름하며 동행할 때 비로소 자랄 수 있다. 영적 출생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어떤 모습에 있든지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다. 성경의 첫 절과 끝 절에 있는 대로 이 진리를 인간들로 알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주셨다.
기독교 패러다임 천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있을 수 없다. 007 영화 시리즈 중에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 Forever)'가 있지만 다이아몬드라고 해서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는 그것도 썩어 없어지게 마련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산화작용을 피할 수 없고 그 썩는 속도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물질에 한해서지 변하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있다. 특별히 예술 작품의 경우에 그렇다. 예술에도 미술처럼 어떤 물질적인 소재를 동원한 것은 색깔이 변하고 썩지만 음악이나 문학의 경우에는 다르다. 베토벤의 제9번 '운명'교향곡이나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단지 잊혀지거나 사람에게 주는 감흥이 시대마다 달라질 뿐이다.
물론 '운명'도 현대악기에 맞춰 새롭게 편곡하거나 '부활'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기 위해 각색할 수는 있다. 또 부활을 연극으로 각색하면서 두 주인공 네플류도프와 카튜사 중에 특별히 한 사람의 입장만 강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소설의 일부분, 예를 들어 하녀 카튜사가 귀족 주인의 강압으로 아기를 갖고 매춘부가 되는 과정까지만 다룰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연극이 톨스토이의 작품이며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상연되는 데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운명'의 악보나 '부활'의 원고를 보존할 수 있는 수단만 있으면 원작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남는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기독교도 변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와 같은 원리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다. 성경에 적힌 내용도 영원하다. 어느 누구도 '톨스토이'라는 작가와 '부활'이라는 소설을 두고 비난하고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것을 각색한 연극을 보고 잘못된 해석이라고 비평 할 수 있지만 부활의 원본을 바꾸자고 하는 바보는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그 저자이신 하나님은 영원히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존중하기 힘들면 최소한 인정이라도 해야 한다.
글로즈 토드랜크라는 무명의 목사가 쓴 '기독교의 변혁'이라는 책도 이런 원리를 적용해서 보아야 한다. 본인도 성경을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는 한 사람의 각색가에 불과하며 또 지금까지 성경을 각색한 다른 이의 잘못만을 지적해야지 성경이나 기독교의 본질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기독교를 변혁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교주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가 이제 국지적인 생각을 버리고 지구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성경에는 지구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이 처음부터 그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해석자들이 충분히 분석해내지 못했으니 이제 제대로 보아야 한다고 해야 맞다. 기독교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 뜻에서 이 책에서 기독교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패러다임 열 가지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첫째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가 부인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다시 언급할 기회가 많겠지만 기독교를 무조건 배타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진리란 본질상 항상 배타적이다. 진리가 배타적이 아니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1+1=2라는 진리에 다른 다원적인 진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1+1= 1.5도 맞고 2.1도 맞다는 것은 없다. 어떤 종교에 귀의하여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여 거기에 자기의 전 인생을 건다는 것인데 어떻게 자기 종교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고 네 것도 맞는 것 같고 내 것도 맞는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으면 모든 것이 다 맞다는 것으로 끝나버릴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다 맞다면 누구라도 구태여 특정한 진리를 꼭 찾을 필요가 없게 되므로 모든 것이 진리로서 의미와 가치를 자동적으로 상실하게 된다. 역으로 아무 것도 안 맞을 수도 있다는 논리로도 귀결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아무 종교나 믿어도 된다면 어느 종교도 안 믿어도 된다는 말과 상통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정답이면 결국 정답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 험한 세상과 고달픈 인생에 정답이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한 분 하나님, 100% 확률로 존재하는 하나님, 절대적인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면 당연히 그 정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이 이보다 낮아지거나 하나님이 여럿 존재한다면 그 때는 당연히 정답이 여럿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아가 기독교는 진리를 견지하는 측면에선 절대적인 배타주의를 주장하는 대신에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격여부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포용적이다. 누구든지 무거운 짐진 자 예수에게로 오면 아무리 흉악한 십자가의 강도도 구원 받는다. 예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에서는 절대배타적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절대 다원적이다. 자유자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누구에게나 그 진리가 개방 되어 있다. 1+1=2라는 진리가 수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에게는 3이 될 수도 있고 아이큐가 낮은 자에게는 0도 될 수 있다는 진리는 없다. 진리란 수학자이든 초등학교 일학년이든 누구나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되 절대 변함이 없어야 한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어떠한가? 진리 차원에선 절대 포용적이면서 진리를 알아야 할 사람을 수용하는 면에 있어선 오히려 절대 배타적이다. 종교끼리의 포교활동을 서로 금하자고 한다. 내 진리, 네 진리를 따로 구별하면서 신자도 네 신자, 내 신자 구별 짓는다. 사단을 숭배해도, 무당에게 부적을 사거나 굿을 해도, 신을 위해 무차별 테러를 해도 각 개인의 종교의 자유니까 인정해주자고 한다. 사단에게 돈을 바쳐가며 자기 영혼을 팔고 있는데도 관용으로 두고 보라는 것인가? 진리는 절대 주장하되 진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해야 함에도 거꾸로 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옳다고 한다. 과연 어느 쪽이 다원적이고 누가 배타적인가?
둘째, '상하구조에서 평등구조로'
성경에서 노예제도를 당연시한 적은 없고 성경이 기록되어진 당시의 인간이 저질러 놓은 시대적 상황이 노예제도를 정당화 하고 있었다. 성경은 오히려 자유인들과 상전들에게 노예를 동일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공평하게 대해라고 권하고 있다. 종이나 상전들의 "상전은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다(엡 6:9).
셋째,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에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이 거할 성전을 근사하게 지으려 마음먹었을 때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삼하 7:6). 이스라엘 백성 진중 한 복판을 떠난 적이 없으신 하나님이다. 성령 강림 이후에는 모든 신자가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전이 되었다.
넷째, '교리 중심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앞에서 설명한 기독교의 고백적 신앙과 실천적 신앙을 이 문제에 다시 적용하면 고백적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게 되지 인간의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고백의 반석 위에 실천적 신앙의 집이 지워지는데 이때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인간이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 중심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 중심에서 성경의 진리 중심, 하나님의 사랑 중심, 예수님의 은혜 중심, 성령의 인도 중심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섯째, '죄 강조에서 사랑 강조로'
인간이 아담의 원죄로 인해 비참한 존재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 원죄는 절대 음산한 교향곡이 아니다. 죄가 없으면 사랑도 용서도 필요 없다. 형벌 없이 죄를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방기(U?N¥: 방임과 포기)다. 사생자에게만 아버지의 형벌이 면제된다. 남의 자식이 무슨 짓을 하든 무엇을 상관하겠는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자라야 자기 죄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 벌거벗겨진 죄 안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날이 갈수록 기독교가 사랑만 강조하는데 오히려 죄를 더 강조해야 한다.
여섯째, '육체 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성경에서 육신 내지 육체로 표현된 것의 거의 대부분은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겠다는 죄의 본성을 의미하지 영혼과 대비되는 육체만을 의미하는 경우는 드물다. 육체 부정은 성경에 없는 사상이며 기독교에서 한 번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육체를 죄악시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일곱째, '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사회나 정치 문제에서 강자의 입장을 변호하고 야합하는 종교인들은 그야말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은 자들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원칙에서 죄악으로 찌든 현실을 고발하는 예언자적 자세로 인간을 향해 안타깝게 소리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여덟째, '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함께 하늘로 올라갈 것만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잘못된 광신도들이다. 기독교는 현실을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심히 아름답게 창조한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다스려 생육하고 번성케 하라고 하셨다. 자연을 파괴한 것은 인간의 탐욕과 죄 때문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진정으로 소원하는 참된 종말론적 종교는 오히려 자연을 하나님이 원하는 자연 상태로 유지한다.
아홉째, '분열에서 연합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YA×i)되었다는 것이기에 그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다시 연합함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기독교 연합의 진리가 타종교인도 포함한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허울좋은 종교간 상호 불간섭주의에 의해 비판받아선 안 된다.
열째, '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러 십자가에서 죽으러 오셨다. 예수님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진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면 십자가 사건이 인간 구원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나아가 인간이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 순교하는 것만이 믿음의 궁극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자신을 희생하여 죽는 것이 가치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문제는 자기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생명까지 버리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버렸는데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해주실 일은 아무것도 없다. 기독교의 변혁이 아니라 새로운 이단 기독교의 탄생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기독교 자체가 변화되어야 할 것은 없다. 성경의 기독교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맞다. '부활' 연극이 원작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각색되어졌다면 원작에 충실하라고 요구 할 수 있지만 저자인 톨스토이와 원작 자체를 바꾸라고 할 수는 없다.
기독교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다. 탈바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새 시대에 부응하는 새 기독교를 만들려는 역사적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었다. 작금 캐나다·미국·유럽의 기독교계가 많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매 세대마다 있어 왔던 '예수가 유일한 길'임에 동의하지 않는 흐름은 단지 그 시대에만 유행했던 신학의 한 조류로 그쳤고 또 그로 인해 기독교는 오히려 더욱 복음의 참진리로 되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요일 4:2, 3).
보수파 교회들이 따로 성경대학을 세우거나 신학교를 설립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를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를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수호하는 차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신학을 배제한 것이다.
이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범하는 차원이 아니다. 공산주의만을 절대 진리로 믿는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도 같이 가르치는 대학을 허용하겠는가? 공산주의란 연구실 안에만 있는 학문이 아니라 실제 그 주의를 따르는 인간의 모든 삶과 사회체제를 주관하고 통제하는 원리인데 어떻게 다른 주의를 함께 가르칠 수 있는가? 예수에 관한 학문에는 자유가 있다. 각자 알아서 깨우친 대로 믿으라고 할 때는 대학마다 다양한 교수·학파가 공존하면 할수록 좋다. 보수주의 신학교는 예수에 관한 깨우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당신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 그분이 우리 인생을 주관하도록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라 다른 신학과 공존될 수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당나귀 귀 임금님
-정직한 믿음과 무오설(Uie|aa)의 무요(Uieⓒ)
벌거벗은 임금님과 당나귀 귀를 한 임금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세상 권세에 무조건 잘 보이려 들거나 그 위력에 눌려 진리를 애써 외면하고 거짓인 줄 알고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어리석고도 연약한 대중의 모습과, 또 그런 헛된 아부와 맹종을 스스로 즐기거나 강요하는 권력자들의 교만한 작태를 잘 지적한 우화다. 진실은 언제든지 있는 그대로 용기 있게 전해야만 하는 것임에도 항상 그렇지 못한 것이 인간 사회다. 아직도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우기는(?) 보수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아부하는 신하이고 그 신자들은 어리석은 백성인데 반해 이를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용기 있는 어린이와 이발소 주인인양 행세하려 드는 것은 정말 낯간지러운 일이다.
이 두 우화에서 누구든지 진실을 발설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상황에서 어린이와 이발소 주인은 진실을 말했기에 대단히 용기 있는 영웅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진실을 말하면 잡혀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본 그대로 솔직히 말했고, 이발소 주인은 임금님 귀에 대해 발설하면 당장 죽을 줄 아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 대나무 밭에 가서 고함친 것뿐이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허위와 위선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용기는 개입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금이 벌거벗었고 당나귀 귀를 가졌다는 것은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논쟁을 정확히 비유하자면 이렇다. 어느 날 한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 앞에 나타났는데 아주 신기한 옷을 입었고 특이한 모양의 귀를 하고 있었다. 각자의 전공과 경험에 따라 옷의 재료·짜임새·디자인이나, 귀의 길이·두께·전체 모양 등에 따라 각자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지만, 희한한 옷을 입었고 특이한 귀를 가졌다는 것은 유식한 신하들이 보나 우매한 백성들이 보나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기독교의 중심에 자리잡았던 해석이 임금이 벌거벗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이제 벗었다고 제대로 말해 주겠다고 덤비는 것은 벌거벗지 않은 임금을 벌거벗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쉽게 알 수 없는 신기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보수 측이나 진보 측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을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고 상대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문제에 한해서만은 사리가 안 맞다. 보수와 자유측에서 그 옷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 처음부터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할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측 입장은 임금님의 옷과 귀가 비록 아주 특이하긴 해도 이 세상의 재료로 만들어졌기에 아직 지식과 실험방법이 완전하지 않고 어느 것이 확실히 옳은지 몰라서 그렇지 세상 방법으로 분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각자가 분석하고 실험한 결과를 서로 존중하고 참고하자는 것이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것은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함께 노력하자는 것으로 아직 결론이 나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보수측 입장은 임금의 옷과 귀가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있어온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르기에, 세상의 방법으로는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버린 상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셨다는 것이 보수측 입장이고 특이한 가르침과 가장 큰 사랑을 남기셨지만 인간 예수였다는 것이 진보측 입장이다. 서로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참작해야 한다는 것은 후자의 영역 안에서만 성립될 뿐이다. 전자는 믿음이 동원되는 문제요, 후자는 분석과 실험 즉 깨달음이 요구되는 문제다.
보수 신학자들도 임금의 옷과 귀가 이 세상의 것임을 알면서도 순전히 자기 이익을 위해 신자들에게 그렇게 믿도록 강요한다면, 이는 비난 받아 마땅하며 누군가 나와서 임금은 벌거벗었다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 기독교의 믿음은 믿어지지 않는데도 교회에서 권하거나 강요하는 대로 믿는 믿음이 아니다. 보수 신학자들이나 그 신자들도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춰지지 못하게"(고후 4:4)되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기"(고후 4:6) 때문에 믿게 된 것이다. 보수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기 전까지는 임금의 옷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몰랐다. 신자들도 신학자들의 말만 듣고 순진하게 따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믿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들이 본 빛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믿음은 순진하고도 무조건적인 신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서 절대자에 귀의(Iyei)하는 것과는 다르다. 임금이 벌거벗어도 그 벗은 것조차 옷으로 믿고 그 벗은 자연 상태의 옷에 귀의하면 된다는 식의 믿음은 기독교에선 없다. 종교도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고 믿음도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버리면 그런 믿음은 믿음으로서 존재가치가 없다. 어떤 때는 이렇게 믿었다가 또 다른 경우는 저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벌써 믿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 힘이 있을 때는 믿고 그 지위를 잃으면 안 믿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벌거벗은 임금에 아부하는 신하가 된다. 믿음이란 시대가 가도, 세상이 바뀌어도, 그 대상이 어떻게 나타나든, 믿는 내 처지와 형편이 어떻게 되든 믿어야만 온전한 믿음이 된다. 세상에서의 믿음은 그럴 수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은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상·철학·주의·이념·신념에 불과하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경의 무오설이 처음부터 벌거벗은 상태인데도 옷을 입고 있었다는 식의 억지 주장이 아니다. 임금이 신기하고도 완벽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부인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는 것이 무오설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성경으로 완전하게 보관·전수되어 왔으며 그 속에 있는 기독교 진리는 불변이다. 이 신기하고 완벽한 옷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연구하면 할수록 새로운 결함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오묘한 은혜를 찾아낼 수 있는 보고(UAI·)가 된다. 대신에 아무리 깊이 분석하고 실험해도 지상의 옷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복음의 광채가 가려져 그 은혜를 찾아낼 길이 없다.
최근 한국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단체의 이름을 '붉은 악마'로 짓는 바람에 기독교계에서 축구를 사랑하는 전 국민을 악마로 부를 수 있는가, 이는 사탄이 하는 일이라고 단체로 반대운동을 벌인 경우가 있었는데 좀 생각해 볼 문제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이 기독교적 견지에서 옳다는 뜻은 아니지만 저들이 예수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뜻에서 지은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 대경기장에서 우승한 유대인 마차경주 챔피언을 응원하는 유대인들이 자기 응원단의 이름을 '다윗의 별' 혹은 '유대의 희망'으로 부치지 않고, 마침 경주마의 색깔이 흑색이어서 '암흑의 질주'라고 부쳤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것을 문제삼으셨겠는가?
성경 기록에도 실제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38¡41). 예수님이 제자가 아닌 자들을 옳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제자들 더러 그 들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 된 기준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는가 아닌가, 그래서 그 이름으로 능한 일이 나타나는가,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다.
외부에서 기독교를 두고 벌거벗은 임금으로 치부하는 문제는 용기 있고 정직한 지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다. 보수 신학자이든, 자유 신학자이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서로 금하거나 비방할 것은 없다. 누가 예수님에 속해 있는가의 문제이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능한 일이 나타나는지 여부다. 또 그 능한 일이 누가 귀신을 쫓아내며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이 우리에게 구원과 능력이 되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이 그렇게 되는가의 차이이다.
문제는 양측 다 자기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현상은 예수 당신이 구세주라고 믿고 있는 쪽은 절대로 그것이 맞다고 하고, 그렇지 않은 쪽은 둘 다 맞을 수 있기에 상호비방해선 안 된다고 한다. 언뜻 보기에 후자가 합리적인 것 같지만 논리적으로 따질 때에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아무도 증명할 수 없으니 둘 다 맞는 것으로 치자든지 서로 간섭하지 말자고 하는 것은 상호 관용과 포용이 아니라 상호 외면과 배척이다. 서로 용납하자는 태도가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호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라고 하면 평생가도 상호 간의 접점은 생기지 않고 결과적으로 영원히 상호 배척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독교 보수측에서 기독교 진보를 포함하여 타종교인들 모두를 대상으로 전도하려 드니까 무조건 배타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예수님 당신이 구세주라고 믿는 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광신자 탕을 삶아 먹고 뿅 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노력했지만 그것으로는 구원의 능력을 절대 맛볼 수 없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자 비로소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보수주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 접근하고 이해하고 분석한 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똑같이 이미 다 겪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을 알게 된 반면에 자유주의 측에선 아직 하나님의 빛의 광채를 받지 못해 여전히 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아래 모든 자들이 다 들어와 구원의 능력을 얻고 참된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보수다. 이것은 배타가 아니라 모든 자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성숙한 믿음이라는 것이 학술적으로,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고매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서는 몰라도 최소한 기독교에서는 그렇다. 얼마나 예수 안에 있느냐의 싸움이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느냐의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일대일의 대면과 인도하심을 받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것이 성숙한 믿음이다. 기도 잘 하고, 성경 깊이 알고, 신령한 은사를 받아서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구세주 예수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도달하면 우리는 자유해진다. 예수를 스승으로 분석하는 믿음은 지적 충족과 문화적인 관용과 종교적인 툭 트임은 있을지 몰라도 그분이 내 삶 전체의 주인이 되지 않고는 절대 평강과 자유함은 맛보지 못한다. 성숙한 믿음은 성숙한 지식과 다르다.
허스키와 진돗개 - 내 종교만 종교인가?
서부 캐나다 북쪽 외진 마을에 개라고는 썰매를 끄는 허스키밖에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중국산 시츠, 한국산 진돗개, 테리어, 푸들 같은 개들을 데리고 들어오니까 그것들이 개인가 아닌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끝까지 허스키만 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가운데도 어떤 허스키가 순종인가 잡종인가로 분쟁이 일어났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허스키 순종을 가져와 퍼뜨린 사람들이 한국에 있는 개는 개가 아니라고 하니까 한국 사람들이 허스키만 개인 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한국의 허스키 충성파가 캐나다 본 고을보다 더 많아졌는데 이 충성파가 본고장의 허스키를 연구하려고 가봤더니 본고장에서는 이제 허스키보다 다른 개들이 더 대접을 받고 있으니 허스키만 좇던 한국 애견가들은 시대에 뒤처진 꽉꽉 막힌 사람이 되어 버렸다. 도저히 말도 안되고 어리석은 자들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편벽한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새로운 조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빗대기 위해 가정한 예에 불과하다. 흥미롭게도 상상으로 가정한 이 예가 절대 허황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얼마든지 발생 가능할 것 같다.
캐나다 시골 마을 사람들이 다른 개들을 보고도 개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때까지 개라고는 허스키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개는 반드시 썰매를 끌 줄 알아야 된다는 선입관 때문이다. 개밖에 없던 동네에 고양이를 데려왔다면 모를까 아무리 허스키 개에만 익숙해 있다 할지라도 다른 개들의 짖는 소리, 뛰는 모습, 코를 컹컹대고 냄새 맡거나 꼬리를 흔드는 것들을 보면 당연히 같은 종류의 동물이라고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개는 반드시 썰매를 끌어야 하는데 다른 개들이 썰매를 끌지 못하니까, 다른 개를 두고 개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개인가 쓸모 없는 개인가를 따진 것이다.
나중에 썰매 대신 마차·자동차·스키·스노 모빌¡¤¼³≫oA÷ μi ¿ⓒ·? °¡Ao ¿i¹Y ¹× ±³Ae ¼o´UAI °³¹ßμC¸e ≫oE²AI ´Þ¶oAø´U. 또 개라는 동물이 사람에게 주는 유익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다른 개들도 개로서 인정하게 되고 또 개에 대한 체험도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게 된다. 집을 지키기에는 진돗개가 좋고, 혼자 외롭게 사는 사람이 동무라도 하려면 푸들이, 맹인 길잡이로는 셰퍼드, 복날 얼큰한 보신탕으로 잡수려면 황구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아직도 눈 올 때 교통과 운반수단으로 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골 마을에 가면, 여전히 허스키가 아니고는 아무리 셰퍼드·진돗개라도 개는 개지만 제대로 개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적인 체험도 이와 동일하다.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지어낸 예가 오히려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적합한 예화가 되었다. 허스키 개의 예화에서 허스키만 개라고 고집하는 자와 다른 개도 인정하는 사람들 두 종류로 나뉘는 이유는 개의 우월성 차이 때문이 아니라 개가 인간에 주는 용도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라서다. 개는 썰매를 반드시 끌어야 되니까 허스키만이 개라고 고집하는 측과 개는 보신탕이나 맹인 안내로도 쓰이니까 똥개나 셰퍼드 모두 개라고 하는 측으로 나뉜다. 마찬 가지로 기독교에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 때는 종교의 용도를 하나로 한정했기 때문이고 다른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도 종교로 인정하라고 하는 까닭은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유익한 용도가 여럿 있으니까 그에 맞춰 종교를 골라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에게 제공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유익은 죽음 이후 구원의 문제다. 기독교가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부분을 말한다. 대신에 종교가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유익, 믿음에 귀의하여 불안을 없애고, 나쁜 죄를 짓지 않고, 인격이 승화되고, 남들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삶을 사는 모습 등에 있어선 다른 종교도 내용적으론 기독교와 동일하지 않지만 결과적이고도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같아 보이기에 여러 종교 중에 자기 인식에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는 말이 성립된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가 구원 이외에 제공할 수 있는 유익성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명상을 하며 이 세상에 헛된 것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뜻이라면 불교의 체험을, 이웃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고 자신의 잘못을 수시로 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카톨릭을, 엄격한 도덕률과 사회공동체의 규칙대로 살아서 평화를 얻겠다면 유대교를,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신의 섭리에서 도저히 꼼짝달싹할 수 없고 오직 신에 대한 절대 복종을 숙명으로 알고 살겠다면 이슬람교를, 나아가 앞길에 귀신의 방해를 막아 액땜만을 하겠다면 무속신앙을 선택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개도 용도에 따라 사람이 고르듯이 종교도 여러 용도가 있어 자기 발에 맞는 신발 고르듯이 고른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종교의 종교 된 본질은 인간의 죽음 이후의 문제를 다룬다는데 있다. 단지 이 땅에서의 평안한 생활과 도덕적인 삶만을 다룬다면 그것은 윤리와 철학과 사상이다. 구태여 그것도 종교라고 우긴다면 내세를 다루는 종교에 대해 서로 누가 맞느냐고 시비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문제에선 어떤 종교이든 자기들의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누가 포용성이 많은가 적은가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가 진리이고 절대적임을 확신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자기가 믿는 종교와 그 신이 절대적이라고 담대히 주장하지 못하면 상대적인 것을 믿고 있다는 뜻인데 상대적이라는 것은 항상 가변적(E|U¨iU)일 수 있다는 것과 통한다. 자기가 믿는 종교의 내용이 자꾸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대적이라는 말은 진리가 변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아진다.
죽음 이후의 구원이란 항상 궁극적으로 절대자인 하나님과의 대면을 전제로 한다. 어느 종교도 다 맞다고 하면 하나님이 셀 수도 없는 가변적인 길을 제시해 인간 스스로 알아서 택해서 오면 내가 심사해서 내 맘에 드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인간을 미혹의 길로 빠뜨린 것에 불과하지 인간의 구원을 진정으로 바라는 하나님이 아니다. 바로 이 부분, 즉 기독교의 하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자가 하나님이 십자가에 독생자 예수를 죽여 모든 인간의 죄를 담당케 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구원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는 뜻에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가 부활하여 그 진리를 보증하였기에 더욱 절대적 진리가 된다.
종교나 사상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 융합을 거듭하며 상호 영향을 받아 온 것은 사실이다. 고립된 진공관 속에 보관 유지된 사상이나 종교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경륜만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공간 안에서 수천 년간 세상의 어느 것과도 융합되지 않고 보관 계승되어 왔다. 기독교 구원의 원리는 본질상 주변 사상이나 종교와 융합을 할 수 없다. 절대자 하나님이 절대적 진리로 계시하시고 그것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롬 5:8)하셨다.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이라 고집으로 우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보관된 그 진리를 대변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포요 계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경에 적혀 있는 대로 예수님이 말한 것을 믿지 않으면 이미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슬람 교인들에게 물어보라. 코란을 인정하지 않고 마호메트가 말한 것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회교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코란을 믿는 자를 영적 오만이나 신학적 무지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개가 인간에게 끼치는 여러 유익성을 감안해 자기 용도에 맞게 골라 자기 개로 삼는 데 시비 걸 이유는 전혀 없다. 미국에서 어떤 개가 잘 생겼는지 겨루는 웨스트민스터 개 선발 대회라는 것이 매년 열린다. 한 기자가 상을 탄 개 주인에게 '개는 주인의 생김새와 닮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물었다. 분명히 그렇다. 날씬한 귀부인은 개도 화려하고 날렵하게 생긴 것을 키우고, 텍사스 카우보이는 개도 우락부락한 것을 골라 키운다. 주인의 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종교도 자기 닮은 것을 고르려 하지 절대자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종교마다 서로 다른 것을 가르치는 이유는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잡아 나가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궁극관심'을 인식하고 이해하여 적용하는 방법에서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 관심'이 계시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 관심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는 어떤 모습이든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온당한 반응은 이 사랑 앞에 무릎 꿇는 것뿐이다.
기독교인은 절대 자기 잣대로 자신이나 타종교인을 판단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를 믿는 자인가 아닌가를 따질 뿐이다. 성경이 잣대이며 예수가 기준이다. '장미가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그 향기는 마찬가지'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간다운 향기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문제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평가다. 나와 같이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했다. 인간의 궁극적 구원에 관한 문제 즉 종교의 본질은 절대 인간끼리 배타적인가, 포용적인가, 종교끼리 관용을 베풀어야 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 누가 자신 있게 설 수 있는가, 어떻게 설 수 있는가, 이 땅에서 내가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새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이며 그 길은 십자가뿐이다. 착하게 사는 것에는 예수가 구태여 필요 없다.
세 부류의 사람들
석가는 진리에 대해 반응하는 사람의 모습을 연꽃에 비유하여, 물위에 나와 있는 꽃·물 속에 잠긴 꽃·물에 잠겼다 나왔다 하는 꽃, 세 종류의 꽃이 있다고 구분했다. 노자도 사람이 도에 대해 들으면, 힘써 행하는 뛰어난 사람·이런가 저런가 망설이는 어중간한 사람·크게 웃는 못난 사람, 세 종류가 있다고 했다.
이 분들의 분석대로 모든 사람이 이 3가지 중 하나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평가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의 겉만 보고 내린 객관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문제는 외부에서 보는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어떤 주관적 인식과 평가를 갖고 있는가이다. 알면서도 일부러 크게 웃을 수 있고, 모르면서 짐짓 힘써 행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근본주의 교회에 다니다 보니 자기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는 줄줄 외우면서 실제로 믿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다. 그 말은 또 얼마든지 그대로 확신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주관적인 내면의 상태에 관해 정말 솔직한 고백을 받아 낼 수 있다면 그때에도 과연 상중하(ß¾neu≫) 세 가지 수준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예상 외로 스스로 하(u≫)라고 생각하는 이가 훨씬 많을 것이다. 어쩌면 거의 전부 자기를 하(u≫)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진리에 대해 갈급하지 않는 심령이 없으며 도를 찾으면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전부다.
또 인간의 외형적 반응만을 본 객관적 평가의 경우 그 평가가 과연 정확할 것인지는 항상 의문이다. 스스로 모든 사람이 자기는 하(u≫)라고 생각하는데 남이 자기를 상(ß¾)으로 평가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아가 일반적으로 하의 수준에 불과한 사람들이 남을 어떻게 상·중·하로 정확히 구분 지을 능력이 있겠는가?
이런 상황인데도 어떤 사람이 자기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설사 정말 상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무조건 교만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의 내면의 수준을 정확히 모르고는 제3자가 본인이 무엇이라고 판단하든 군말이 없어야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본인은 하라고 생각하는데도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상이라고 하면 상이 되고, 또 본인은 상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사람이 하라고 하면 그만 하가 되고 만다. 차라리 본인의 주관적 판단대로 가만 내버려 두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되어 버린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본인의 절대자에 대한 체험과 그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인식과 평가다. 정말 성령 체험을 해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의 감격을 누려 영원의 세계를 알게 되면, 그것이 꼭 어떤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 그대로 일치하여 자기 영혼의 거듭남의 체험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면 제3자가 그를 아무리 근본주의자라고 평가 내지 폄하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성경에 니고데모 사건에서 보다시피 기독교의 구원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면 십자가에 드러난 하늘나라의 계시 자체를 못 보게 되는 것이지 성령이 신자가 이미 받은 십자가의 계시를 바꾸라고 지시하는 법은 없다.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에 관해 뭔가 개운하지 못하고 찜찜한 법이 절대 없으며 그분의 주인 되심에도 흔들림이 없다. 이 부분에서 자라거나 성숙할 여지가 없다.
거듭난 이후에 예수 안에서 계시를 본 자답게 영원을 소망하는 일에 전 인생을 거느냐의 싸움에는 성숙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갈수록 얼마나 예수를 더 의지하느냐의 싸움이지 자신의 실력이 더 나아지고 신령해지고 거룩해지는 싸움이 아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당연히 성숙해진다.
신앙의 여섯 단계
믿음은 어느 면에서 자전거 타기와 같다. 세 발 자전거는 어지간해 넘어지지 않으니까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페달에 발만 닿으면 기술을 배우지 않고도 탈 수 있다. 그러나 두 발 자전거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두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배우는가? 발을 저어서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지만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가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중심을 잡고 편안하게 자전거에 의지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그 중심을 잡는 것이 특별한 훈련으로 발 근육을 발달시키거나 운동신경을 개발시켜야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했듯이 어느 순간 갑자기 터득 된다. 아무 두려움 없이 완전히 자신을 자전거에 자연스럽게 의지하는 순간 중심이 잡히고 그 다음에 발을 저어 나가는 것은 운동실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차츰 페달을 밟지 않아도 한 자리에 가만히 서있거나, 두 손 놓고 타거나, 외 발 자전거 타는 것은 훈련을 거쳐야 하지만 그 훈련도 자전거에 의지해 무게 중심을 잘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기독교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자신의 전 인생을 던져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생긴 후에 예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자가 그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정당한 반응을 하여 경건의 훈련을 쌓아 자신의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화(a¡uu)로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신앙 성숙의 단계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는 면에서 기독교의 신앙 성숙은 다른 종교의 그것과 내용을 달리한다. 일반 종교에서 신앙 성숙이란 파울러 교수가 쓴 '신앙의 단계'란 책에서 설명한대로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대해 본인이 수긍하고 동의하여 학습과 받아들임의 관계를 거듭하여 믿게 되며 그 믿은 대로 실제 생활에서 따르게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 지성의 능력이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 신앙 성숙도 비례하는 것인데 인간 이성만으로 탐구하다 보면 종국에는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상대적인 신앙이라는 것이 말이 좋아 종교와 종교의 벽을 넘는 초월과 포용을 이룬 것같이 보이지만, 기실 하나도 확실한 신앙을 붙들지 못했거나 자기 신앙을 포기한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학위만 없다 뿐이지 모든 종교를 학문적으로 두루 섭렵하며 비교 연구하는 아마추어 종교학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또 이들 이성적 탐구자가 최종 목적지로 삼고 있는 성자가 되어 진리를 터득하겠다는 단계는 구경도 못하고 끝난다. 상대적 신앙의 단계에 도달했는데 어떻게 다음 단계로 절대적 진리를 깨우칠 수 있겠는가? 소위 말하는 생불(ßæYO)이 되는 단계는 남들이 볼 때 그렇게 보일 뿐이거나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성장할 영역은 인간 이성으로 교리를 깨우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느냐의 싸움이다. 지성의 발달에 비례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릎 꿇는 정도에 따라 비례한다. 이런 싸움을 고든 맥도널드가 '인생의 괘도를 수정할 때'라는 책에서 네 단계로 나누었다. 이 구분은 사실은 한 사람이 순서대로 성장해 나가는 네 단계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에 대해 반응하는 형태를 기준으로 네 종류의 사람으로 나눴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것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방관자: 가장 수가 많고 흔한 부류의 사람으로, 이기적인 이유로 예수님 근처에 서성거리며 그저 받기만 바라며 그 기대가 무너질 때는 바로 험악한 모습으로 주님의 약점을 잡으려 든다. 비록 자신들이 영적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부담이 되는 것은 수용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오묘한 말씀이라도 그들의 가슴에 새겨져 번창하게 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병을 낫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지만 결국 물러간 대중들이다.
2. 구도자: 하나님이 삶의 변화가 무엇을 감수케 하는지 깊이 깨닫도록 요구할 때에 진지한 호기심으로 가능한 모든 걸 배워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심사숙고하며 오랜 시간 주님 근처에 머물러 있을 수 있으나 무슨 계기로 언제 믿음의 선을 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나 영생에 대해 질문한 부자 청년이 이에 해당된다. 오늘날도 예수를 스승으로 보고 그 가르침을 좇으려는 이성적 신자를 말한다.
3. 추종자: 구도자에서 추종자가 되는 자는 소수다. 최초의 변혁을 이룬 자들로 캄캄한 숲 속에서 지내다 갑자기 섬광이 어두움을 뚫고 들어 온 것을 경험하여 새로운 인생 여정을 출발하라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한 자들이다. 인생 방향은 철저하게 전환되었고 삶을 다르게 생각하며 자신의 소명을 깨닫지만 그 길에는 여전히 장애물이 있고 추종한 것만으로 최종 지점이 아님을 안다.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은 신자들이다.
4. 왕국 건설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하나의 생활 방식이 된 사람들이다. 자신이 받은 소명에 철저하게 헌신하여 조용하고 일관성 있게 주님을 섬기면서 종 된 삶을 살며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고 내면에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자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 이성의 개발과 훈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정당하게 반응하여 자기 삶의 방향을 전환하여 주님을 추종하며 왕국을 건설할 때에만 성숙될 수 있다. 이성을 발달시켜 종교적 지식과 깨우침을 늘리는 책상 앞의 탐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늘려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며 살아가는 일상적인 현실의 구체적인 삶이다.
두 가지 사유 방식
이분법적 사고체계가 중심인 서양논리가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 바람에, 자기만이 옳다는 편협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기독교는 사물의 양면을 보고 사고의 폭을 넓힐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주장과 논리만으로 한 면만 본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조차 이분법적 사고(either/or)를 버리고 초이분법적 사고(both/and)로 돌아갔기에 빛이 파장도 되고 입자도 된다고 그 주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일에나 both/and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더 진보적이고 성숙한 지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일 뿐 아니라, 그 자체도 이분법적 사고와 초이분법적 사고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발상이 되어 버린다. 빛이 파장도 되고 입자도 된다는 것은 과학자들이 빛을 분석하고 실험을 해보니까 입자이더라는 것이지, 파장을 가지고 입자로도 볼 수 있고 입자를 파장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빛 안에 파장과 입자의 성격이 둘 다 있었는데 지금껏 과학이 발견했던 것은 파장뿐이었는데 이제 입자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 사고의 방식 자체를 바꾼 것이 아니다. 과학이 사고나 논리체계를 함부로 바꾸어 버리면 안 된다. 철학과 사상에선 몰라도 과학에서만은 상대적으로 모든 것도 맞을 수 있다는 접근법은 용납되지 않는다.
동그란 컵을 옆에서 보니까 사각형처럼 보이니까 '컵은 둥글 수도 있고 사각일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 말이다. '컵은 둥근 컵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사각이나 둥글게 보일 수도 있다'라고 해야 맞다. 둥근 컵이라는 실재(aui¤)가 각도에 따라 사각으로도 보이니 사각 컵일 수도 있다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무리 입면도로 보아도 튀어나오고 들어간 부분에 따라 명암이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 봐도 여전히 둥근 컵인데도 마음이 사각이 된 인간이 고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때는 '컵이 사각'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컵이 사각'이라고 해야 맞다. 둥근 컵은 어디까지나 둥근 컵일 뿐이다.
그것을 화면에 그림으로 옮기거나 사진으로 찍으면 아무리 둥근 컵도 사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삼차원에서 이차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지 컵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다. 둥근 컵에 물을 넣어 얼렸더니 얼음이 네모로 나오거나 둥근 컵으로 물을 마시니까 둥근 컵처럼 한쪽으로 몰려서 흐르지 않고 네모 컵처럼 한꺼번에 철철 흘러나오지 않는 한 그것은 둥근 컵이다. 잔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변하지 않는다. 헷갈리는 것은 헷갈리게 보는 사람일 뿐이다.
최근 과학에서조차 고전적인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논리의 부재가 아니다. 아무리 과학으로 규명을 하려 해도 분석이 안 되는 미지의 세계가 있더라는 솔직한 고백이지 사상의 미성숙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파면 파고들수록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니까 이제 과학도 과학 이외의 영역 보이지 않는 세계, 비물질의 세계가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한 것이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는 당시로선 최고의 지성·이성·인격을 갖춘 구도자였다. 그러나 그가 다음 단계인 예수님의 추종자로 넘어가지 못한 것은 이성이 깨이지 못해 사물의 양면을 다 볼 줄 몰라서가 아니라 오직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양면을 보지 못하면 단지 상대적인 사유방식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는 상관없다. 절대자 하나님을 만나려면 오히려 고전적 이분법이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절대자 하나님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기 때문이다. 이분법이냐 초이분법이냐를 따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철학과 사상과 논리의 세계, 사람의 마음 안에서의 문제다. 사람의 마음에 따라 컵이 둥글게도 되고 네모도 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무슨 인간 지성이 크게 발달된 증거라고 자랑 할 수 있는가? 아직도 헷갈리고 있는 구도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표시로 절대자 하나님 앞에 단 한 번도 겸비하게 무릎 꿇어 본 적이 없다는 말밖에 안 된다.
기독교는 이원론적 역사관으로 사회를 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함께 볼 뿐이다. 하나님의 시각과 관점에서 역사와 사물을 보는 것이지 논리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이분법적인가, A 혹은 E 형 논리로 세상을 재단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런 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 '하나님이 사탄도 되고 하나님도 된다. 인간이 하나님도 되고 하나님이 인간도 될 수 있다. 천사가 악마도 될 수 있고 악마도 천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이 무엇인가? 바로 동양적 사고에서 나오는 논리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절대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창조주일 뿐이다.
출처 : http://www.nosuchjes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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