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톤 연합교회 교인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독서회를 열고 있는데, 지난 몇 달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 1권(롬3:20~4:25)을 읽고 있습니다.
예전에 (25년 전에) 한국에서 대학교 다닐 때 읽었던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이번에는 로마서 강해를 원문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우리 독서회원 대부분은 한글 번역, 그러니까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출판된 서문강 역 (2008년 4월 초판 4쇄)을 읽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좀 지나치다 싶은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고, 특히 흠정역 (KJV) 인용에 대한 번역 실수로 인해 원 저자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들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미숙한 영어와 서투른 한글로 잘못된 점을 지적하려니 부끄럽기 짝이없지만 꼭 해야겠다는 심경입니다. 많은 비판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우선 이번 첫 글에서는 번역 오류들의 예를 원문과 함께 나열해 보겠습니다. 사사로운 것을 빼고도 심각한게 하도 많아서 이번에는 제1권 제1장(서론적 기초)에 국한하고, 좀더 광범위한 오류는 네이버 등에 블로그를 만들어서 올릴까 준비 중입니다.
우선 한글 번역판 로마서 강해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유형의 오류가 있습니다.
1. 단원 구분이 원본과 맞지 않습니다. 이건 도대체 이해가 안갈 정도로 엉망진창입니다.
2. 생략된 문장이 많습니다. 제1장에만 최소 11구절은 됩니다.
3. 어휘가 일정하게 사용되지 않았는데, 제1장의 경우 p23부터 끝까지는 그 전부분과는 다른 사람이 번역한 듯 합니다. 특히 교리에 관한 용어는 한국교회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를 남용하는 잘못이 여럿 눈에 뜨입니다. 로이드존스가 사용하는 어휘는 성서를 인용하지 않는 경우도 성서에서 따온 어투가 많고, 신학 용어도 도처에 적절하게 사용했습니다. 이건 좀 더 모아서 따로 정리해보려 하는데 뜻대로 될지... 한글로 된 신학용어를 배우는 것 보다, 주로 한자로 된 용어들을 한글을 쓰는 신학자들이 올바로 정립하는게 급선무입니다.
4. 흠정역(KJV)의 인용문 번역이 잘못된 곳이 많습니다. 이건 아주 치명적이면서도 중요한데, KJV 인용문의 한글번역에서 번역자가 우리말 성경(개역 한글)을 옮기면 그냥 되는 줄로 안 것 같습니다.
5. 제1권 1장에서, 'the Jew'를 '유대인 바울'이라고 한 것은 전혀 잘못된 번역입니다. 번역자가 무언가 크게 착각해서 전체 내용에 오해를 주었습니다.
6. 로마서 강해는 논리적 전개가 중요한데, 단원 구분을 엉망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의 접속사를 적절하게 옮기지 못해서 로이드존스의 논리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것입니다'를 너무 많이 사용하여, 그러지 않아도 따라가기 복잡한 개념들을 얼키고설키게 했습니다.
7.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직접적인 번역의 오류들입니다.
P11 그의 위대한 인물됨은 기독교회 역사에 뛰어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우뚝 솟아 His majestic figure towers over the story of the Church.
(이게 사소한 번역의 차이인지 모르겠으나,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뭔가 많이 어색합니다. 이런게 하도 많아서 여기에 다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이런식이더라는 예로서 하나 지적합니다)
다음은 한국교회에서 쓰는 흔한 용어와 실재의 신학용어, 그리고 로이드존스가 사용한 용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번역자가 임의로 일관성 없이 사용한 예입니다. 그러고는 한 구절을 생략하였습니다. 아마 그 문장을 "친히"라는 말에 흡수시키려한 듯도 한데.. 글쎄요?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 "그의 아들의 행하심"이라 하였는데 이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심"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 만으로도 책을 하나 쓸 수 있겠지요? 특히 로이드존스가 도처에 "하나님의 복음"을 강조하는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흔히 남용하는 "예수"라는 말 하나로 모든 것을 때려잡으려는 무지의 소산 입니다. 그리고 이건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P12 (가운데)
이 교리는 사람들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화해의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고안, 설계; 예비라는 말은 따로 사용됨)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생략문: 이는 전적으로 그가 행하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의 행하심을(아들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은혜로(기꺼이, 값없이, 은혜는 조금 다른 말) 용서하시며 도말(면제, 도말은 다른 말)하신다는 것입니다.
This is the doctrine which tells us that God has contrived a way whereby men and women can be saved and reconciled unto Himself. It is all of His doing. It tells us that God, on the basis of what He has done in His Son, our blessed Lord and Saviour, freely forgives, and absolves from all their sin, all who believe the Gospel.
의로운 백성으로 ‘세움’을 받은 것 we are ‘constituted’ righteous people
의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 (롬5:19 새번역)
(로이드존스는 이 "법률적인"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이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말대로 전형적인 랍비투의 가르침입니다.(p13 하반부)
This they say therefore is typical rabbinical teaching.
이것은(로마서는) 전형적인 랍비(rabbi)류의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문의 의도와 정반대로 된 곳도 여럿 있습니다)
(윗 말에 따라나오는 아랫부분은 세부적으로 틀릴 뿐 아니라 통채로 잘못되었습니다. 원문 아래에 새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지금 이 반대 의견은 20세기 초엽 대중 사상이 ‘역사적 예수의 교훈’을 바울 사도의 교훈과 신학과 다르게 구분하여 보았던 때와 같이 그렇게 많이 주장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생략) 율법주의자인 바울 – 철저한 율법적인 마음을 가진 - 이 나와서..
There is not quite so much heard of this objection now as there was in the early part of this century when the popular idea was to contrast the teaching of ‘the Jesus of history’ with the teaching and theology of the Apostle Paul. But there are many who unconsciously still subscribe to this point of view. They believe, they say, in the simple ‘Gospel of Jesus’, the Gospel of Love, and they think that it was a great calamity that this legalistic Jew, Paul – this man with an obviously legalistic mind – should have come along and foisted his legalistic ideas and opinions upon that delightfully simple Gospel. They say that Paul modified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message and changed it into something different.
요즘은 이러한 반대가 그렇게 많이 들리지 않습니다만, 20세기 초반에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신학에 상반적으로 대조시키는 아이디어가 유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단순한 ‘예수의 복음’과 ‘사랑의 복음’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무적이고 법률적인 유태인 바울이 등장해서 – 그가 법률적인 마인드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 아주 매혹스럽게 단순한 이 복음에 그의 법률적인 사상과 견해를 슬그머니 써 넣은 것은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기독교 메세지의 정수를 변조하여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P14
구약을 통해 예시되었고 암시적으로 나타났으며 비롯된 것
this was something which had been adumbrated, something that was to be found in suggestion and embryo
암시와 배아(胚芽; 싹)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
그것은 참된 증거 앞에서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it does not stand up to the test of facts.
사실들의 테스트에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P15
그 표현법은 강조점을 부각시키는 데 아주 훌륭한 표현방법입니다 (삭제 It is particularly an English way of doing so.) “내가 복음을…”는 말은 “나는 그 안에 있는 것이 영광스럽다” “나는 그것을 기뻐하여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긍지로 오싹해진다”는 뜻입니다.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of Christ.’ What he means is, ‘I glory in it’, ‘I exult in it’, ‘I thrill with pride whenever I think of it’.
‘나는 그 안에서 자랑스럽다’ ‘나는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나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긍지로 오싹할 정도로 감동한다’는 뜻입니다.
(좀 더 직설적이면서도 능동적인 표현)
성경 전체의 주제는 theme of this whole Epistle
바울 서신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생략 ;it is certain, it cannot fail. It is not of man, it is of God. 그것은 확실하며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P16그러나 그것은 이것이 확실하고 확고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But, still more, it is because this, and this alone, is the way of salvation, and it is a certain and sure way of salvation.
더더군다나, 바로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고 안전한 구원의 길입니다.
‘왜 그럼 그런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문제였습니다.
That is the question to ask.
그것이 바로 물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도가 불경건을 먼저 놓았다는 것과, 불의의 문제 하나 뿐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큰 문제는 인간, 특히 사회 속의 인간문제라는 것입니다.
You notice that the Apostle puts ‘ungodliness’ first, and that in his thinking ‘unrighteousness’ only follows ungodliness. To him the big thing, the important thing, is ‘ungodliness’
사도가 ‘불경건’을 먼저 놓은 것을 주목하십시요. 그리고 그의 생각에 ‘불의’는 단지 불경건에 따라오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요. 그에게 있어 크고 중요한 것은 바로 ‘불경건’입니다.
P17 (맨 윗부분)
어떤 이는 인간의 위대한 요구는 ‘은혜스런 이웃’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 앞에 놓인 일이라고 요약하며 말하였습니다.
Someone has summed it up by saying that man’s great need is to find ‘a gracious neighbour’, that this is the task before us.
인간에게 중대하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과제
(여기서 한글판은 위와 단락이 나누어져 있으나 원저서에는 붙어 있는 무수한 예 중의 하나.)
끝으로 이에 덧붙여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약점..죄를 치료받을 필요있는(조사의 문법) 질병과…똑똑히 보시는 것처럼 어떤 시대든지 그런 것은 인간의 문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And in addition to this, and to that end, we are told that what we need is to be cured of our ills and weaknesses. Sin is regarded as sickness, a disease, of which we need to be cured. But all the time, you notice, it is in terms of man, and man’s relationship to man. It does not mention what the Apostle puts first – ungodliness, man in his relationship to God.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연약함... 죄는 치료받아야할 필요가 있는 아픔과 질병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주시하다시피, 항상 그것은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들과 인간들의 관계로 치료된다고 합니다. 사도가 첫째로 놓았던 불경건,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적이라는 것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한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예상한 대로 그들은 어떤 특별한 이유를 내세워 개회식에 시장을 참석할 것을 요구키 위해 시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시 고위층들이 예수를 믿든 안믿든 간에 참석하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A religious conference was being held in the City of Glasgow in Scotland; and as they will do, for some extraordinary reason, when they have a religious conference they invited the Lord Provost of the City to attend the inaugural meeting. You must always have these civic dignitaries present whether they are Christians or not!
열리고 있었습니다. 종교회의를 가질 때마다 늘 그들이 하려는 바대로, 어떤 놀랄만한 이유로 인해 개회식에 시장이 참석하도록 초청되었습니다. 그들이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뭐가 열릴 때마다 고관대작들을 모셔야한다는 것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정말 저는 여러분의 신학에 흥미가 없습니다. (생략 and I believe you people are wasting a lot of your time over theology.)
그리고 당신들은 신학하느라 당신의 시간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모든 교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의 첫번째 필요는 하나님을 알며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루터가 ‘은혜로운 하나님’ (생략 not a gracious neighbour) 이라고 표현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He thereby revealed his total ignorance of the whole doctrine of salvation as taught by our Lord Himself and by the Apostle as he puts it here.
구원의 전체 교리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는 것을… 루터가 ‘은혜로운 하나님’이라 했지 ‘은혜로운 이웃’이라고 하지 않은 바와 같이, 인간의 첫번째 필요는…
이 점은 인간의 제 1차적인 요구입니다.
This is man’s primary need.
이 점은 인간에게 제1차적으로 주요한 필요입니다.
불경건은 불의 보다(는) 우선합니다. ('는' 생략해야 함)
P18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생략 which the Lord Provost of Glasgow put first)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한 참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략 You canno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f you do not know the truth about yourself.)
그 다음 둘째로는 (글라스고의 시장이 첫번째로 놓았던) …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전에는…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모른다면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의 원문에 해당하는 ‘love thy neighbor as thyself’는 몸이라기 보다 자신self라고함이 옳음)
복음 전도자는 결코.. Evangelism 복음주의
바울 사도가 믿으며 이제 전파할 특권을 가진 이 복음을 기뻐하는 것은 그것의 확실한 사실에 비추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생략) 이것은 현대의 정신 구조입니다. 현대인은… 현대인은 규율과 율법을 싫어하는데, 이유는 세상이 그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의 사실을 거역합니다.
It is in the light of that revealed fact that he rejoices in this Gospel which he has come to believe, and now has the privilege of declaring. (문단 뛰고..)
But this is a doctrine that is utterly abhorrent to the modern man. He heartily dislikes the whole notion of the wrath of God. Indeed he dislikes the whole notion of justice and righteousness. He does not like discipline, he does not like law, and that is why our world is as it is. This is, I say again, the tragedy of modern man. He has departed from these basic principles and so is confused; and he objects to the one thing that can put him right.
그것이 바로 그 빛 가운데 사도에게 드러난 사실, 즉 이제 믿게된 그가 그 복음 안에서 기뻐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복음을 선포할 특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완전 질색인 교리입니다. 현대인은… 그는 규율을 싫어하고, 법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이 이모양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거부합니다.
P19
...거부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and then ..사회 영역이 율법에 어긋나 있다고 하는 것을..
;and then he is surprised that there is lawlessness in his own home,
그러고는 현대인은.. 사회가 무법천지라는 것을..
십계명에서 이 점을 떼어버린다면 그것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the Ten Commandments if it is not this?
십계명의 의미가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진실로 교회가 – 때로는 복음적인 교회까지도 – 이 점을 잊어버려 사는 길을 벗어나 방황하지 않습니까?
Is not this precisely the point at which the Church has gone astray – even at times the evangelical section of the Church?
이점이 바로 교회가 –때로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교회 까지도 -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간 것 아니겠습니까? (사53:6)
P2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략) 그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He is utterly different from every father we have ever known: ‘which art in heaven’.
그분은 우리가 아는 모든 아버지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 분입니다.
받으시는
그가 전파한 복음을 자랑하는 것은 단지 이 복음만이…
오로지
P21
그런데도 불순종함으로 인한 모세는.. 못했던 것입니다. (생략 That is a manifestation of the wrath of God.)
불순종으로 인해 모세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표명된 것입니다.
P22
“임박할 진노”에서 심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심판하시며, 어떤 경우에는 이미 진노를 심판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He does not believe that God, in addition to the immediate consequences, metes out punishment in a ‘wrath to come’. But God says that He is going to do so, and in some cases He has done so already.
그는 하나님께서 “임박한 진노 (마3:7)”로서 벌줄 것을 할당해 놓으셨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어떤 경우들은 이미 형벌을 내렸습니다.
(생략) 롬1:24-28 을 인용했는데 28절이 없음. 그 다음 단원에서 상실한 심령대로 인간을 버려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설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구절을 생략한 것임
“사람들의.. 하나님의 진노가 확실히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That’, he says, ‘is a manifestation, a revelation, of the wrath of God against all ungodliness and unrighteousness of men.’
바로 그것이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명시되고 계시된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현대세계가 말하는 영적인 진술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하고 있습니까?
Here is the sole explanation of your modern world. Had you realized that?
현대사회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있었나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으며 사도 이전에도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참된 역사관을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열거해 보십시오.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고 그의 율법을 거역하며 하나님 없이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장담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처음 나타나십니다.
This is how God acts, and the Apostle says that it had been happening in history, he says, and this is what you find. When people refuse to listen to God and reject His laws and say that they can manage life without Him, God first appeals to them.
...일어났었으며, 그것(세계대전..)을 당신이 지금 보고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호소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대로 열거해...라는 말은 어디에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P23그런 다음 하나님 없는 인간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Then you have man without God, and you see the result.
그러면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당신은 그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P24
확실히 그들은 그런 모든 죄악에 대한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Certainly, they were not all guilty of all those sins; there were good men among them.
확실히 그들 모두가 그 모든 죄들에 대해 유죄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선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분명히 임하지 않지요?”라고 묻기도 하는 것입니다.
So someone may say, ‘Surely the wrath of God is not against that?’
‘그럼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가요?’라고 묻기도...
P25
왜냐하면 그 유대인(바울)은 특수한 입장에...
the Jew 유태인 (유태인 전체)
(이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지칭해서 전체 단원의 내용에 혼란을 가져오거나, 로이드존스가 사도 바울을 부당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되어버립니다)
유대인 바울은 자기의 비극이 그 점을 의존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인식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대인 바울은 이 드러난 외형적인 율법을 천사들의 전갈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대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Jew knew this; his tragedy was that he relied upon it. The Jew felt that all was well with him because he had the Law in this explicit external form, as given by God to Moses, through the disposition of angels.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의 전갈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이 명시적고 외형적인 형태의 율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P26
그 모든 것이 할례에 대한 논증 부분에서 뒤엎어졌습니다.
All that is demolished in terms of the argument about circumcision.
그 모든 것이 할례에 대한 논쟁에 근거하여 뒤엎어졌습니다.
유태인은 그런 외피에 쌓여 말했습니다.
The Jew was hiding behind that façade.
유태인은 그러한 외양(外樣) 뒤에 숨어있었습니다.
다음 번에 흠정역의 인용문이 잘못 번역한 예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10/43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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