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자적 번역을 통해 형식의 동등성을 유지하며 직역하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의미를 살려 번역할 때는 말투나 어감을 가감하기 위하여 의역했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강해” 즉 설교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한 문장 한 문장, 단어 하나 하나를 음미해 볼 만한 “책”이기도 합니다.
· 한글 성서 인용은 <개역 개정>을 사용했습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과 <개역 한글>이 현저히 다를 경우, <개정>과 <새번역>을 동시에 참고했습니다.
· 저자가 인용표 ‘ ’를 사용한 단어나 구의 경우, 성서(KJV)에서 인용된 것은 한글 <개정>의 어휘로 옯겼습니다. 어떤 인용구는 저자가 출처를 밝혔지만 그렇지 아니한 경우도 많은데, 명백한 인용문의 경우는 번역자의 주를 달았습니다.
· ‘justification by faith’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으로서 동사적으로 번역하였고, 특히 by를 ‘말미암는’으로 옮겼습니다. 로마서 강해 한글판 제7권 제20-23장에서 로이드 존스가 로마서 1장 16,17절을 강해한 뜻을 존중하였고, 특히 제1권 9장의 ‘말미암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따랐습니다. 1권 4장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고어체를 사용해서 원문이 갖는 심오한 뜻을 독자가 스스로 탐구할 여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 로이드 존스가 사용한 말이 넓은 의미에서 관용구를 따온 것이거나 신학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경우라고 판단될 때, 번역자의 주를 달았습니다.
· ‘바울’, ‘사도’ 또는 ‘사도 바울’의 경우, 영문 원서를 따라 그대로 옮겼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를 흔히 사용했는데, 사도 바울의 권위를 강조하는 적절한 호칭입니다. 그는 제7권 4장에 ‘사도’란 말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 Bible은 ‘성서’, Scripture는 ‘성경’으로 옮겼습니다.
· 로이드 존스가 man, men을 혼합해서 사용한 경우, ‘사람’ ‘사람들’ ‘인간’을 문맥에 따라 혼합하여 옮겼습니다.
· 인물의 이름 표기는 통용되는 발음을 따랐습니다.
· 하나님께 대한 존칭을 한글로 표시할 때, 원래 로마서 강해가 설교였다는 것을 고려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사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로마서는 성서의 어떤 책이나 단락보다도 기독교 교회의 역사와 그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위대한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이 회심하게된 것도 로마서 13장의 마지막 몇 구절들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어거스틴은 5세기 이래 교회의 역사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인물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자신을 얽어매던 속박과 굴레에서 해방되어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된 것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친 로마서 1장 17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진리의 조명을 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루터가 해석한 바로 그 교리는 ‘베드포드의 불후의 땜장이’ 존 번연(John Bunyan)을 회심케 했고, 그 결과 번연은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과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마찬 가지로 1738년 5월 24일 밤에,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게’된 것도 한 남자가 읽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들으면서였습니다. 그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서신서의 내용을 면밀히 연구해야 하는 이유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1장 16,17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도에 대한 기쁜 소식(복음, the good news; ευαγγελιον (eu[v]angelion))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서(Bible; 성경 Scripture-역자 註) 전체의 대 주제이기도 하지만, 로마서에서 만큼 분명하게 진술되고, 완벽한 방식으로 논의된 곳은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 (justification by faith)’이라는 결정적이고도 필수불가결한 교리가, 성경 전체를 통털어서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3장 19절부터 5장 11절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이 우리가 알아보게 될 주제입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상세한 주해(註解)를 해나감에 따라 그것에 대한 해답이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만, 우선 간단한 정의(定義 definition)로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이 교리는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과 화목(롬5:10)하는 방도(方道way)를 하나님께서 고안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가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 안에서 당신께서 행하신 일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며 면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신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서(롬13:14; 욥29:14-역자 註)’ 하나님의 목전(갈3:11; 신12:28-역자 註)에서 올바르고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轉嫁 impute)’되어 ‘우리 앞으로 달아놓여진 (put to our account 빌레몬1:18 새번역-역자 註)’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졌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허용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19절에서 표현한 바대로, 우리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로운 백성으로 ‘여기심 [판정constituted]’을 받았습니다.
자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핵심 교리입니다. 이제는 이것이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나온 것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교리는 사람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철학과도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성경 안에서 ‘발견하는’ 그 무엇입니다. 기독교 내의 어떤 분파들이 –적당한 때 그 이름들을 밝히겠지만- 가르치는 교리들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분명히 강조해야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교리들은 전통(tradition)으로부터 유도되었거나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석-역자 註), 그들에게만 주어진 추가적인 계시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 (몰몬교 등-역자 註).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인 우리의 입장은 가르침과 교리들을 하나하나 모두 말씀으로 테스트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以信稱義’의 교리가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나온 것임을 보여야 하는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당장 야기되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단지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 그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교리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의 위치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의해 인도함을 받거나 성경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 인간의 사고나 사상, 즉 철학의 가르침에 지배를 받습니다. 요즘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입장을 취하며,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의 교회라 불리는 곳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궁극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사상인 철학이지, 계시된 (말씀인) 성경이 아닙니다.
또 다른 반대 의견을 다루어 봅시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단지 전형적 바리새인인 바울의 교리라고 하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로마서는 전형적인 랍비(rabbi)류의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러한 반대가 그렇게 많이 들리지 않습니다만, 20세기 초반에는 ‘역사적 예수’(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Albert Schweitzer著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1906독일어 원저 출간-역자 註)의 가르침을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신학에 상반적으로 대조시키는 아이디어가 유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단순한 ‘예수의 복음’과 ‘사랑의 복음’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무적이고 법률적인 유태인 바울이 등장해서 – 그가 법률적인 사고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만 –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이 복음에 그의 법률적인 사상과 견해를 슬그머니 써 넣은 것은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기독교 메세지의 본질를 변조하여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논란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이 칭의에 관한 메시지가 성경의 처음서부터 끝까지 발견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도 자신이 아주 명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칭의의 교리가 구약 전체에 걸쳐 예시되었고 암시와 싹(embryo)으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교리는 실로 성서 전체의 줄기찬 메세지로서,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속에서 만개되어 분명히 드러났다.” 또는 “신약은 구약 속에 잠재해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명백하게 나타났다.” 이는 물론 위의 사실에 대한 간단명료한 진술입니다.
동일한 관점이 우리 주님 자신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됩니다. 왜 주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바로 그가 오신 이유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비유(눅18:9-14)가 주는 주님의 가르침은, 다른 많은 비유들과 가르침 속에서 그랬듯이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이점은 특히 더 분명해집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그러므로 이 교리가 랍비적이고 법률적인 유태인인 바울에게서만 나오는 특이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한가한 공상에 불과합니다. 그 공상은 사실들의 테스트를 견뎌 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대하게 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1서, 그리고 계시록 등 성경의 많은 곳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공통된 메세지입니다. 서문에서 이유를 밝혔듯이 (롬3:20절부터 첫 강해를 시작하는 이유가 서문에 쓰여있음-역자 註) 로마서 1장16절에서 시작하여 3장 20절에서 끝나는 위대한 진술들을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 논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거기서 사도는 21절의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고백과 뒤따라 나오는 영광스러운 일들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의 논증을 요약해 봅시다. 그는 대담하고 강한 어조로 단언하며 시작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물론 그 말은 그가 복음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인 표현법을 빌리는 곡언법(曲言法 litotes)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표현법은 강조점을 부각시키는 데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특별히 아주 영국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합니다.” 라는 말은 “나는 그 안에서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나는 생각만 해도 오싹해질 정도로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든 노예에게든 그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롬1:14). 그는 왜 그렇게 느꼈습니까?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6,17)
이것이 바울서신 전체의 주제이자, 특히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교리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한 본 단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자랑스럽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확실하며 실패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바울의 표현기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접근방식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바울서신의 구조에는 변하지 않는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그의 서신을 읽을 때마다 항상 음악 작품, 예를 들어 교향악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보통 교향악의 서두에는 서곡이 있는데, 여기에 시도동기(示導動機leitmotifs: 악곡의 중심 테마-역자 註)들이 암시적으로 던져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다음에 작곡자는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끝낸 다음에는 전체를 하나의 장엄한 대단원과 클라이맥스 안으로 응집시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이 두 구절에서 그가 왜 그렇게 복음이 자랑스러우며 로마에 가서 전도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말함으로써 중심 테마에 대한 실마리를 던집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른 철학 이론을 제시하고자 로마에 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또한 유토피아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메세지는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포괄적인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더구나, 바로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고 안전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즉시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럼 그런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바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18절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18절에서부터 3장 20절까지 다루려고 하는 주제를 대하게 됩니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두겹으로 된 (twofold; ‘이중적인’ 대신 다소 생소한 ‘두겹으로 된’을 사용한 이유는 여럿 있지만, 우선 이 문열의 소설 두겹의 노래 (Twofold Song) 같은 데서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고, 수학에서 manifold라는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이원론적 상황에 처한 인간을 기술하는 여러 저서들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문제가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이 복음만이 인간의 그 두겹으로 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 자랑스럽고 전율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 두겹의 한 쪽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쪽은, 인간이 실재적으로 불경건하고 불의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가 이 두겹의 문제를 제시한 순서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고 위반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고의적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불경건’을 먼저 놓은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불의’는 단지 불경건에 따라오는 것일 뿐이라는 그의 생각에 주목하십시오. 그에게 있어 크고 중요한 것은 바로 ‘불경건’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관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교회 내에서의 현대적 접근방식이, 물론 세상에서도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불의함이며 오직 그것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불경건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중차대한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특히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필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문제이며, 이것이 교회가 담당해야할 과업이라고 합니다. 세계는 인종 문제, 이념 문제, 정치 문제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나누어져 있습니다. 세계는 여러 장막, 즉 철의 장막, 죽의 장막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인간 사이의 화해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담당해야 할 위대한 과업이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시작하며 거기서 끝납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가장 큰 필요(need; 요청 postulat 칸트가 사용한 말로서 신의 존재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 사용. 로이드 존스는 ‘필요’라는 뜻으로 격하시키면서 사용한 듯-역자 註)는 ‘자비로운 이웃’을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바로 이것이라고 요약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죄를 치료받아야할 필요가 있는 아픔, 즉 질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인간에 관한,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가 첫째로 놓았던 불경건,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태도의 본질입니다. 저는 한 두해 전 이에 관한 주목할 만한 실례를 접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Glasgow)시에서 종교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종교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늘 그렇듯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개회식에 시장이 참석하도록 초청되었습니다. 고위 인사들을 그들이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항상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례대로 글라스고우의 시장은 회의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전형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참으로 학식있는 신학자들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나는 공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며, 당신들의 신학이나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나는 신학에는 흥미도 없고, 당신들이 신학을 하느라고 시간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알고 싶어하는 바는 어떻게 하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로부터 바로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위대한 신학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싶고, 또 보통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구원에 관한 교리 전체에 대한 완전한 무지함을 드러냈습니다. 루터가 ‘은혜로운 하나님’이라 했지 ‘은혜로운 이웃’이라고 하지 않은 바와 같이, 인간의 첫번째 필요는 하나님을 알며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필요이자 요청입니다. 불경건은 불의보다 우선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경건의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비극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병의 증상들만을 약으로 처방하고 있으며, 질병 자체는 잊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타난 증상들만을 취급할 뿐이지,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 자체는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활동들을 하면서 진짜 본질적인 문제는 회피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물음에,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다음 ‘둘째는’ (글라스고우의 시장이 첫 번째로 놓았던) “네 이웃을 네 자신(<개역 한글>에서 ‘몸’이라고 번역된 yourself가 <개정>에서 올바로 고쳐졌음-역자 註)과 같이 사랑하라.” (막12:28-31)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결코 ‘그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한, 당신은 당신 자신처럼 당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이유로 미루어 ‘불경건’이라는 사실에 대한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기만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일로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입니다. 그곳이 출발점입니다. 이점을 자주 진술한다고 해서 지나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 전도는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다른 의미나 뜻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께 나오라고’ 초대할 때, 예수를 친구로서나 몸을 치료하는 자로서나 약간의 평안을 주는 자 등으로 소개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 합니까? 정답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내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이 이미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나타난 바 된 사실로 인해서 바울은 그가 믿게 된 그 복음을 기뻐하며, 또한 그 복음을 선포할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이 교리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든 개념을 마음으로부터 싫어합니다. 그는 규율을 싫어하고 법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이 이모양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로부터 떠났으며, 그래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을 그는 거부합니다.
현대인은 공의와 의로움, 그리고 심판과 같은 사상을 거부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정과 학교와 대학과 거리, 그리고 자기가 속한 여러 사회 영역이 무법천지임을 보고 놀랍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전반적 법률 개념을 유기하고 미워하며 혐오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이 점을 설파하는 것이며, 바로 우리의 메세지에서 핵심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진노’라고 해서 변덕스럽거나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뜻한다든지, 제멋대로 성을 내거나 자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혐오를 뜻합니다.
이 점은 성경의 어느 곳에나 나타나 있습니다. 십계명의 의미가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십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는 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역자 註)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죄가 우리를 해하기 때문이거나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죄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박국이 말한 대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 (합1:13-역자 註).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요일1:5-역자 註).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도 거룩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교회가 –때로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교회 까지도-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 상황의 비극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기도하며, ‘예수’로 시작하여 ‘예수’로 끝납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아버지, 즉, 우리와 관련된 거룩한 하나님이요, 온전한 의와 절대적 거룩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내셨던 하나님, 그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위대한 메세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도 동일한 강조점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11:1-역자 註)하고 물었을 때, 그래 좋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 주리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누군가 하나님을 ‘아빠(Dad)’ 또는 ‘사랑하는 아빠(Dear Dad)’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모든 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요즘 슬며시 침투해 유행하는 듯한 가볍고 친숙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우리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와 다른 타자(他者 Other; 전적타자 das numinose - Rudolf Otto가 그의 <거룩함의 의미 The Idea of the Holly>에서 말한 것-역자 註)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 주신 기도 방법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인 그 자신이-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을 부르신 방식은 “거룩하신 아버지” (요17:11에서 ‘Holy Father’로서 한 번 사용됨,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역자 註)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육신(成肉身)한 사랑의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참 표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입니다. 주님은 이런 방도와 태도로써 하나님을 대하셨습니다.
사도의 전체적인 입장은 이러합니다. 그는 그가 전파한 이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복음만이 유일하게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를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복음이 이것을 할 수 없으면 복음이 아니며, 그 속에는 기쁜 소식을 담은 메세지도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일차적인 목적이며 의도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체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자리에 놓아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구약에서 입니다. 구약은 그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여기 완전하게 창조된 사람이 있고, 똑같이 완전한 배필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의 최고 절정이었으며, 하나님은 그 남자와 그 여자를 낙원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그에게 반역하였으며, 유혹하는 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죄에 대한 진노를 품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동산에서 그들을 내쫓으셨으며, 그들이 죄의 대가로 받을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놀랍게 표명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기에서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계속하여 나타납니다. 구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총애하시는 자’로 보이는 듯하거나 또는 실제로 좋아하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징계하셨는가를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모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도 모세의 불순종함으로 인해 그는 끝내 약속된 땅에 들어갈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명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4-역자 註)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점을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변명도 할 여지가 없습니다. 몰랐다고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인간이 죄를 범하면 그는 반드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현 시점에서 다드(C.H. Dodd) 교수와 같은 학자가 자신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점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다드 교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참된 의미가, 죄는 항상 스스로 자기 징계를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손가락을 불 속에 집어 넣으면 당신은 고통을 느낄 것이고 또한 당신 자신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다드 교수는 죄의 즉각적인 결과에 덧붙여, 하나님께서 ‘닥쳐올 징벌’ (마3:7 <새번역>; <개역 한글>의 ‘임박한 진노’는 미래 시제로 쓰여진 원문과 어감상 차이가 있음-역자 註)로써 징계할 것을 할당해 놓으셨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미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이며, 그것은 표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로마서의 다음 부분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그 방도(the way)에 대하여 한가지 특별한 진술을 합니다. 그것은 1장 24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타락한, reprobate mind <새번역, KJV>]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4-28 개정) 그러고나서 사도는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그 가공할 죄목들을 열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가를 조심스럽게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는 그 가공할 죄목들(롬1:29-31에 열거된 죄악들-역자 註)이 바로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이자 계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고대의 역사에 불과할까요? 아닙니다.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 현대사회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실감합니까? 사람들이 흔히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20세기 두 차례의 가공할 세계 대전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오늘날 부도덕과 악덕이 얼마나 만연하고 있습니까? 또한 성적 타락과 끔찍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습니까? 20세기와 오늘날의 생활상에 대한 설명은, 상실한 심령대로 인간을 내버려 두신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는 역사 속에서 이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의 세대 이전에도 그랬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에 대한 참된 관점을 취했을 때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법을 반대하고, 하나님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호소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예언자들(messengers)을 보내어 그들을 억제하려고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여전히 그들의 악한 길을 고수하고 반역을 계속하면,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 자기들 스스로 맘대로 하도록 간섭치 않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 좋다. 만일 너희가 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장담한다면 그렇게 해 보아라. 네가 어떻게 사는가 보자.”하고 사실상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세상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설명은 단순합니다. 지난 백년 이상 영리하고 고도의 지적 교양을 갖춘 인류는 하나님을 등져 왔는데, 이는 ‘불경건’의 죄목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좁은 소견을 따라 그들 나름의 한 신(神)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불경건의 죄를 지었고, 불의는 자동적으로 뒤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런 상태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상 형편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간섭을 접으시고 인간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성서적인 가르침은, 인간이 죄에 빠졌을 떄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어떤 한계(boundary; ‘에덴 동산’의 ‘동산 garde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גּן gan은 ‘that is fenced; boundaries; hedge’라는 뜻이 있음-역자 註)를 설정하고 그것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창2:16,17-역자 註). 만일 하나님께서 통치체제나 다른 제도로써 죄를 억제시키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곪아 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에 금지 명령을 내려 놓으시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주기적으로, 죄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표명하시려고, 당신께서 그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당신의 제지를 철회하시고 인간을 그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당신은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는 교리를 소개하는 사도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는데, 그가 벽에다 자신의 머리를 부딪히게 하여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위대한 주장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제가 이미 강조하였지만,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불경건’과 ‘불의’의 순서, 즉 불경건이 불의보다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망각하지 맙시다. 소요리 문답(Shorter Catechism) 제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합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인 인간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을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조물주보다 더”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실한 마음대로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그 원래적 질병(that original disease; ‘원죄’를 암시하는 듯 함-역자 註)으로부터 나오는 증상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그 다음에 이 문제를 자세하게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 (下편에 계속)
출처 : http://lloydjon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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