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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고문산 목사(노량진 강남교회)

나를 따르라 -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by 복음과삶 2025. 4. 16.

2025.04.13.(주일예배). 나를 따르라. 마가복음 8:31~35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 8:31~35)

 

 

마가복음은 16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1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부터 7장까지를 영광의 장이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각종 질병을 치료하세요. 귀신 들린 사람이라든가 혹은 눈먼 사람, 귀먹은 사람, 나병 환자, 중풍병자, 손 마른 사람 할 거 없이 당시에 난치병으로 알려져 있는 온갖 질병을 예수님께서 치료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또 그 바다 위를 걷는 그런 초자연적인 행위까지도 드러내십니다.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랄 일이죠. 그러니까 어떤 귀신이나 질병이나 모든 자연 만물이 순종하는 그러한 신적인 영광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드러내신 겁니다. 또한 떡 5개로 5천 명을 먹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또 떡 7개로 4천 명을 먹이시는 그런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는 그런 일들을 하시고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공급하셔서 생명을 부여하시는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전형을 드러내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왕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겠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하나님의 나라거든요. 당장에는 로마로부터 해방이 되는 그리고 구약에서부터 예언하셨던 그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온 세상을 통치하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핫 이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메시아가 오셨구나! 이제 이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겠구나! 점점 더 그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거죠. 물론 그동안 영적 지도자였던 세례 요한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희망이 남겨져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죠. 정말 이러다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려나! 하는 그러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올랐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열기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찬물을 끼얹는 듯한 선언을 하시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렇게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이 돼버리는 거죠.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예수님께서 세 번의 수난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 8장 그다음 910장에 가서 세 번 계속 말씀하면서 강조하시고 그 예고대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마가복음 15장까지 이어지고 16장이 이제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좀 이해가 어려운 그러한 전환이 아닐 수가 없어요. 이왕이면 좀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지! 왜 굳이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인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어떠한 신이 고난을 당합니까? 그럼 신이 아니죠! 고난은 인간의 몫 아닙니까? 자연 만물의 몫이지! 어떻게 신적 존재가 고난을 당합니까? 세상에 어떠한 종교가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겠어요? 누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인정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동안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달랐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였다! 하는 것을 이 성경이 구조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꿈꿨었습니까? 강력한 하나님의 나라! 적어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메시아의 나라, 더 나아가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통치하는 그런 강력한 하나님의 나라를 꿈꿔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고생도 감내했던 거죠. 언젠가 메시아가 온다! 반드시 말씀대로 온다! 그 메시아가 우리의 고난을 완전히 벗겨줄 것이고 영광을 줄 것이다라고 하는 기대감으로 왔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약하고 고난받고 허무하게 죽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죠. 어때요? 여러분 같으면 이런 나라가 마음에 드세요? 우리도 강력한 나라를 원하지 않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강력한 나라가 되기를 다 원하지 않아요?

 

오늘날 우리 기독교 신앙도 한번 냉정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좀 흉내라도 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돌아봐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는 높아지려고 하고 강력해지려고 하는 이 세속적 욕망, 세속적 야망에 사로잡혀 있어요. 기독교가 너무 시끄러워진 것 같아요. 물론 불의 앞에서 침묵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너무 폭력적이 됐어요. 누군가 나를 공격하면 방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걸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너무 시끄러워지고 폭력적이고 강압적이 되는 것은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의 명분으로 전도의 명분을 가지고 그런 방식과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 공동체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 자신을 부인해라! 그리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정면으로 막아섰던 사람이 누구냐? 바로 베드로죠. 베드로는 교회의 출발점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막아서자 예수님께서 33절에 보니까 베드로를 향해서 뭐라고 말하죠? 지체없이 사탄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언뜻 보면 아! 이거 좀 너무하신 거 아니야? 아니 스승이 고난을 받고 죽게 되었다는데 그거를 만류하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주 정확하게 보신 거죠. 겉으로 볼 때는 마치도 스승의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만류하려는 그 제자의 대견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의 길을 통하여 아니 예수의 길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아주 교묘하게 방해하는 사탄의 수작임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셨던 거죠. 사탄이라고 하는 말은 대적자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탄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죠?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자기 부인의 길을 막는 그런 기독교인들,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의 길을 부정하는 그저 번영과 축복만을 주장하는 영적 지도자들, 그리고 자기의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싫어하는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바로 예수님에 의하면 사탄이다! 예수님의 대적자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에 의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두 가지를 해야 하는데 첫째는 자기 부인!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게 뭐예요? 자기 자신과 절연하는 겁니다. 끊어내는 겁니다. 자기 생각,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대신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자기 부인입니다. 오늘 33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정확히 대조되고 있어요. 자기 부인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오직 자기 자신만 보고 자기 자신만 자랑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죠. 거기에 하나님이 드러날 여지가 없어요. 자기 부인이 일어난 자가 그다음에 감당해야 할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문에 보면 자기 부인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재귀 대명사가 쓰였어요. 자기 자신을 부정해버린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는 인칭 대명사가 쓰였어요. 그러니까 앞에 말을 그대로 받아주는 거죠.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바로 그 사람이 십자가를 질 수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면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며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고생하고 남들보다 조금 헌신하고 남들보다 조금 열심히 살면 그게 마치 자기 십자가를 졌다고 말하는데 결국에 나중에 가보면 십자가가 아닌 것이 판명이 납니다. ?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십자가조차도 헌신조차도 자기 자랑임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베드로를 보십시오.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결정적일 때 어떻게 하죠? 나는 그를 모르오! 이렇게 하잖아요.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죽기까지 예수님 따라갈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 순간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았던 겁니다. 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주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 끝이 아니에요. 그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반드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죠. 보세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도 자기 부인이 있어요. 불교에서 보십시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아예 잊어버려야 된다고 그러잖아요.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 비움,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는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목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만 있고 자기 십자가가 만약에 없다고 하면 그것은 목표를 상실한 자기 의밖에 되지 않아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 누굽니까? 바리새인들이잖아요. 서기관들이잖아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 아닙니까? 십자가가 없어요. 그냥 남들보다 더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윤리와 도덕, 종교적 행위만 남아 있는 거예요. 이게 심해지면 자기 결벽 내지는 자기 강박에 빠지고 맙니다. 마음대로 죄짓는 것도 문제지만 또 하나의 심각한 것은 이 결벽적인 성향이에요. 이거는 기독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일들이에요. 자기 결벽, 자기 강박, 신앙의 성숙을 이루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봐야 합니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인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니 왜 기독교는 하필이면 많고 많은 여러 가지 상징과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십자가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딱 보면 뭐가 마음에 느껴지세요? 여러분!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극심한 고난과 참혹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십자가 처형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교리적인 사항이 아니었어요. 아주 실제적인 일이었습니다. 6년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갈릴리 지역에서 한 폭동이 일어납니다. 열심당원 젤롯당이라고 하는 그 당에 의해 국가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반란이 일어나게 돼요. 로마로부터 해방을 하기 위해,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당시 구레뇨 총독으로 하여금 그 지역을 관할하여 반란을 진압시키도록 합니다. 이 총독이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진압해 버리고 돌아오는 승리의 길에 십자가를 2천 개를 세우고 거기에 반란군 2천 명을 매달아 죽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디서 활동하신 분이냐면 바로 그 갈릴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십자가가 세워졌고, 동족들이 2천 명이나 신음하며 피 냄새를 흘리며 죽어갔던 그 현장에서 사역이 시작된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참혹한 요구입니까?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라! 그러면 별생각 없어요. 사역 훈련하다 보니까 어떤 집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런 고난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하니까 목사님 이걸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알기는 알겠는데 이걸 어떻게 합니까? 그건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하는 거지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나도 못한다고 그랬어요. 어떻게 우리가 그거를 합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집니까? 그 요구에 어떻게 당장 아멘 내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하겠어요! 베드로처럼 만류해야죠.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정도의 그런 능력과 명성을 충분히 입증하셨어요. 아니 그런데 왜 십자가를 집니까? 원래부터 보여주셨던 그 영광스러운 모습, 능력에 가득 찬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이지, 왜 이렇게 힘없이 무능하게 비참하게 무섭게 그 나라를 이루셔야 하느냐 하는 거죠. 예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독립이라고 하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죽음의 저주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제자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와 전혀 달랐듯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십자가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가는 전혀 달랐던 거죠. 제자들이 생각하는 십자가가 뭐예요? 그것은 단순히 가장 잔인한 처형의 수단일 뿐이고 분노의 표현이며 고통의 상징이었던 거죠.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십자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신 증표구나!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완전한 자기 부인을 이루신 예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제 온 인류의 죄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는 인류가 죄의 저주 아래 있지 않게 하겠다 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곳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지 않아요! 여러분은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않아요! 십자가만 보면 그거를 느끼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미 나의 죄를 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구나!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가 없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그것을 아들 예수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신 거예요. 그럼 우리의 고백은 무엇인가? 바울의 고백이겠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1차적 의미가 뭐냐면 이 고백으로 사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내 마음대로 살았어요. 지금까지는 그냥 뭐 앞날이 어떻게 되든 죽든 살든 두려워하든 말든 내 마음대로 살았다니까요. 그런데 이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건 뭐냐면 나는 주님과 함께 못 박혔습니다. 이제 앞으로 내가 사는 것은 날 위하여 죽으신 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삽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살아요. 자기 고집대로 살아요. 자기 두려움 안에 빠져 살아갑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이 말하는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예수님이 과거에 그냥 못 박혀 죽으신 거예요. 그런데 그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가져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았던 나의 모든 삶의 방식과 죄까지 다 거기에 못 박아 버리고 그다음에 이제는 앞으로 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단번에 이루셨어요. 그 십자가가 총체적 승리입니다. 언약의 최종 완성이죠. 이제 이미 이루어진 그 언약의 완성 가운데 제자들인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해요. 각자의 십자가를 졌을 때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된 언약이 우리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는 거죠.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이미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완성됐어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요? 각자의 십자가를 짐으로 이 땅에서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이게 같이 가는 거죠. 기독교의 문제는 어디 있는가? 기독교가 있는 이 땅은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인들한테 문제가 있어요. 지금까지 세상은 어차피 똑같았어요. 세상은 절대로 저절로 좋아지지 않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그런 유토피아는 절대로 저절로 오지 않을 겁니다. 그 세상이 그 세상입니다. 어차피 하나님 없이 망해가는 세상일 수밖에 없으나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꿔가는 사람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는 바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지금은 자기를 주장하는 시대예요. 자기를 알리는 시대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입증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누구라도요! 그런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니요! 누구나 살고자 발버둥치는 세상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잘살려고 남을 짓밟고 죽이는 세상에서 내가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우리 힘으로 하기 어려워요. 그러나 여러분! 그 끝에 고통만 있는 것이 절대 아니잖아요. 그렇죠? 만약 이게 고통으로 끝난다면 뭐하러 합니까? 고통 뒤에 영광이 있고 고통 뒤에 생명이 있고 고통 뒤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게 되는 역사가 있는 거잖아요. 자기를 부인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나지 않겠어요? 자꾸 나를 주장하는데 내 경험과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수가 있겠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내 뜻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죠. 결국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능력이고 영광이죠. 요한복음 끝에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아주 유명한 대화가 나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나 사랑하니? 정말 나 사랑하느냐?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님이 아십니다. 그랬잖아요. 그 말끝에 베드로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어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한복음 21:18~19)

 

어쩌면 지금까지는 베드로가 자신이 원하는 길을 따라온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앞으로는 말이야!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않아. 그리고 어떠한 고난과 죽음으로 나의 영광까지 도달하게 될 것인가를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충성하는 마음으로 순교하기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곳곳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를 준비하셨어요. 지금 내 삶에 있는 고통이 정말 십자가인가! 아니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고통인가! 자신의 죄로 인한 어떤 그것으로 받은 형벌인가! 자신의 욕망의 결과로 나타난 삶의 파괴인가를 생각해야 돼요. 그거는 자신의 십자가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자기 십자가는 반드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발적 선택

 

그런 말 많이 하죠. 집에 있는 그 인간이 나의 십자가라고! 진짜 십자가예요? 그럼 십자가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뭐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사람을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섬길 때 그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십자가라고! 가난함이 어떻게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부요함보다는 나는 가난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신앙을 지킬 때 그것은 가난이 십자가가 될 수 있는 거죠. 억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절대 십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합리화를 참 잘하죠. 왜냐! 너무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떤 고통이 주어지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어떤 삶의 운명이라고 섣부르게 자기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빠져 있는데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없어요. 이건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거예요. 그 자기에 대한 부인이 없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가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 전제돼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 그 자아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열쇠인 그런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만 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세요. 너의 십자가를 이제는 질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겠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 물음에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앞에 사랑과 충성을 바쳤습니다. 오늘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이 성찬의 시간에 주님께서 물어보실 거예요. 그럴 때 그것을 대하면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나도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그 무거운 십자가 무겁다고 버리지 않고 주님 따라 끝까지 감당하며 하나님의 나라 이루겠습니다! 라고 하는 결단이 여러분 안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