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0.(주일예배).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복음 20:11~18
노량진 강남교회 (고문산 목사)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한복음 20:11~18)
여러분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습니까? 성경에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정의한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고린도전서 15:1)은 이런 단어를 사용하면서 3절과 4절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명확하고 간결하게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3~4)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모든 것이에요.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2절에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일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 전해주고 그 전해준 바를 받아서 믿게 됩니다. 그것이 나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나를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죠? 다 믿는 분들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계신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직접 본 사람들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 전해지는 말을 통해서 믿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자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해요. 본 것을 그대로 말합니다. 보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거죠. 보지 않은 거 말하면 위증입니다. 보았는데 본대로 말하지 않고 왜곡시켜서 말하면 그것도 역시 위증이죠. 본 것을 그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오백여 명의 형제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에요. 바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고린도전서 15:5~7)
보이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본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섭리라고 볼 수 있는 이 언약의 성취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영광의 주인공들, 놀라운 은총의 주인공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 마태, 마가, 누가, 특별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은 사도 바울이 언급한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 외에 최초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한 여인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어요. 당시에 한 여인이 중대한 사건의 증인으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파격적이고 이례적입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아가서 열려 있는 무덤 안을 보면서 울었어요. 왜 울었어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고 따랐던 그 스승의 시신이라도 보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갔었는데 시신이 없어져버린 거죠. 그러니까 거기서 펑펑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고난을 받고 넘겨진 바 되어서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수도 없이 얘기했지만 예수님의 그 마지막 말씀을 이 마리아는 기억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고난받으셨구나! 예수님께서 재판에 넘겨지고 십자가에 넘겨지셨구나! 그리고 죽음을 당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죽음을 당하셨구나! 여기까지는 실제로 그가 목격하고 체험하였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아직은 기억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뒤에 서 있을 때는 보고도 이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언제 알아봅니까? 그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행동을 하시는데 뭐라고 그랬어요? 마리아야! 이렇게 부르십니다. 평소에 살아계실 때에 하셨던 그 음성과 톤으로 자기의 이름을 이떻게 알고 부르시는 거죠! 그때 가서야 어떻게 돼요? 마리아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의 그 발언을 통하여 그 생명의 호흡을 통하여 가려졌던 마리아의 눈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고, 마리아의 귀가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경험을 하게 돼요. 오늘도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여러분들의 눈이 열려지고 귀가 열려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시죠. 내가 내 아버지 곧 누구의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누구의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나의 하나님 맞아요. 우리의 하나님이 맞아요. 그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알려줘라. 그래서 이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사람이 되고, 그 예수님과 최초로 대화를 나눈 주인공이 됩니다.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길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활 사건의 첫 번째 증이 되었는가! 하는 거죠.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사람이었어요. 여인을 증인으로 삼는 것도 희한한 일인데, 귀신 들린 그것도 한 귀신이 아니라 일곱 귀신 들린 사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동네 사람들이 볼 때 과연 이 여인의 증언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참 성경은 희한한 증인을 채택하고 있어요. 나 같으면 이런 증인을 채택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예수님에 의해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다 이렇게 소개합니다. 마리아를 소개할 때 일곱 귀신이 들렸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 의하여서 그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그녀가 귀신이 나간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소유’로 섬기게 돼요. 어떤 과정으로 재산을 모았는지 모르겠으나 성경이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섬겼다 하면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할 때에 그 예수 공동체를 물질로 후원했던 여인이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귀신 들린 여자였으나 예수님에 의하여 치료함을 받았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확인해 볼까요?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한복음 19:25)
남자는 한 명도 없어요. 다 도망갔죠. 그중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 여인들만 남아 있었는데 그 여인의 명단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어요.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화를 처음으로 나눈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오늘 본문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나고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한복음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마리아는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에 의해 고침받은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제자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끝까지 지켰고, 예수를 사랑하여 그의 무덤을 찾아가 열려 있는 빈 무덤을 최초로 보았던 사람이고, 최초로 부활하신 예수와 대화했고,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전파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하는 거죠. 이 막달라 마리아, 정말로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비천할 수밖에 없고 소외당할 수밖에 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이 한 여인의 인생의 여정이 사실은 우리가 가야 하고 경험해야 하는 영적 여정과 동일한 것이죠. 우리도 예수님께 죄 용서받고 병 고침 받아야 합니다. 이 신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결국에는 모두가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건강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아무리 의학의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에 다 죽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누군가에게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죄를 안고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주님께 죄 용서받고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포함한 모든 병을 치료받아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의 제자입니까? 교회에 등록하면 자동으로 제자가 됩니까? 또 늘 말하는 것처럼 제자 훈련 마치면 제자가 됩니까? 아니에요. 경험이 있어야 돼요. 이것은 단순한 공부가 아닙니다.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래 맞아! 이게 이해가 되네! 이게 설득이 되네! 그런다고 해서 제자로 따라갈 수는 없어요.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 제자인데, 이와 같은 은혜의 경험이 없으면,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거구나! 주님이 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거구나! 나의 죽음조차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나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구나! 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제자는 예수의 고난의 길, 십자가에 죽으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못 박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에요. 부활하신 예수를 반드시 만나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죠. 십자가 죽으심의 최종 목적이 바로 부활하심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이러한 영적 여정 중에 하나만 빠져 있다고 해도 참된 기독교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경험한 사람은 내가 주를 보았다! 이렇게 분명하게 선포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오늘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어요. 그런데 나에게도 보여주셨다! 이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한번 볼까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8)
나도 봤다! 그 말이에요. 수많은 사람들,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그 생생한 목격자들이 있다라고 하는 사실도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주님이 나에게도 보여주셨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어때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믿어주십니까? 이게 남의 일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굉장히 많네! 성경이 2천년 넘어가도록 베스트셀러네! 교회가 아직도 있네! 예배가 살아있네! 이 정도로는 안 돼요. 바울처럼 주님이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보았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내가 지금 사도를 하고 있는 것은 그저 내가 생각해낸 어떤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사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교회를 이렇게 목회하고 그렇게 힘들고 오해를 받고 분란이 넘쳐나는 그 공동체를 끝까지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인간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 운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이 교회에 머리 되시는 예수를 내가 직접 보았기 때문에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라고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한테 받은 걸 사랑하지 마시고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을 내가 보았습니다. 나하고 만나주셨습니다. 날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 지금도 날 위해서 보좌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그 주님을 내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다 만났습니다. 당신도 만나십시오. 이렇게 자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게 뭔가요? 이 땅을 주님의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요? 도대체 제자와 성도는 무엇을 증언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요? 내가 살아계신 주님을 봤습니다. 내가 살아계신 그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걸 증언하셔야 돼요. 다른 거 증언하실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철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부활을 설명할 수 있어요? 부활은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그 어려운 신학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아가지고 결론이 뭐냐 하면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웅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 내 마음속에 감동적으로 그냥 새겨져 있는 거 아니에요? 어떤 위인처럼 영웅처럼 나도 그런 사람처럼 살아야겠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겠다. 그 정도로 있습니까? 여러분! 그거 아니죠? 주님은 살아계신다! 내가 그 주님을 지금 만나고 있다! 이게 우리의 신앙이죠. 예수가 없다라고 믿고 사는 것도 신앙이에요. 그걸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믿고 사는지!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보면 달랐지더라고요. 예수님 부활하지 않았다! 부활이 어디 있느냐?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면 우리 모두의 부활을 인정해야 하는데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우리 모두의 부활도 인정하지 않는데 사람들을 보면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보면 그렇지 않더라고요. 다들 뭔가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도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우리도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결국 이 신앙은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서로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반드시 이기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건 경험한 거거든요. 우리가 실제로 성령 안에서 체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냥 머리로 생각하고 논리로 주장하는 사람하고는 게임이 안 돼요. 우리가 반드시 이기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체험했으니까! 우리는 설명하지 않고 다만 우리들의 경험을 증거할 뿐입니다. 내가 경험한 사실을 누가 논리로 빼앗아 갈 수가 있겠어요!
여러분! 집에 사춘기 겪고 있는 자녀들 둔 부모님들 있죠? 사춘기 겪고 있는 애들 보면 마음이 어때요? 힘들죠? 근데 사실 정작 제일 어려운 거는 그 당사자예요. 그 아이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런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을까! 내가 낳아달라고 그랬나! 나는 왜 학교를 다니나! 학교를 다니는데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나! 나는 생긴 게 왜 이 모양인가! 왜 하필이면 이런 유전자를 이어받았을까! 온통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돼버리는 거죠. 그걸 벗어나면 더 좋은 인생, 더 다양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근데 부모가 보면 알아요. 왜냐하면 그 과정을 겪었거든요. 나도 통과해 왔거든요. 그러니까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정작 그 기간에 머물러 있는 그 아이는 이것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갱년기 한번 비유해 드립니다. 저 요즘에 갱년기 같아요. 어쩔 때는 별로 사는 게 재미가 없어요. 목사가 이런 말하면 안 되는데 지금까지 내가 뭘 했나!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아까 젊은 사람들이 자꾸 밀려온다고 그랬잖아요. 부목사님들 젊은 목사님들이 계속 올라온단 말이죠. 너무 멋있게 생겼고 너무 설교도 잘하고 심방도 잘하고 그러면 나는 감사하기도 하지만 한쪽이 왠지 쓸쓸하고 외롭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갱년기를 다 거쳐간 여기 어르신들이 앉아 계십니다. 그러면 그 어르신들이 볼 때 갱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때가 행복한 거야. 그래도 그때 눈물도 나고 또 그것 때문에 몸부림도 쳐보고 쓸쓸한 마음도 생기고 그것도 낭만이야. 나처럼 이렇게 나이를 먹어봐. 그때도 추억의 한 장면이야. 어르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이 기간을 다 거쳐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기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거죠. 여러분! 이 세상 안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땅이 악하고 실제로 자기도 구조적인 악을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아요. 왜요?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서 성령의 사람이 되면 세상을 실제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돼요.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까지만 진리인 줄 알고 그 세계가 당연하다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진리가 최고고 옳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여러분! 부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고 단정지어버려요.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성령의 거듭남으로 보면 육으로만 살았던 관점이 완전히 파괴가 되고 영의 눈으로 이제 바라보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죠.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예수의 영을 받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그 마음을 받은 사람들은 실제로 영의 눈이 열려서 점점 영적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도 살다 보면 나는 왜 이럴까! 왜 과거의 자아를 못 벗고 여전히 반복하고 있을까! 하는 한탄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은 점점 더 성령 안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성숙하고 익어간다라고 하는 사실이죠. 부활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 성숙의 절정이라고 봐야 돼요.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겨내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반드시 그분을 따라 부활할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포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몰라요. 부활은 우리가 설득하고 설명해야 할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영적 무지와 미성숙해 있는 세상을 향해서 내가 경험한 것을 그냥 증거하시면 돼요. 그대로 증언하시면 돼요. 딴 얘기하지 마시고 난 예수님 만났습니다. 난 예수님 경험했습니다. 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이 나에게 기도를 응답하고 계십니다. 당신도 그 예수님을 만나세요. 사모하세요. 제가 대신 기도해 드릴게요. 이렇게 전하시면 돼요. 나는 주를 보았다. 나는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했다. 나는 복음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나는 복음대로 경험했다.
여러분!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자꾸 공부하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물론 공부해야 됩니다. 어느 일정 기간까지는 공부가 필요해요. 그런데 이게 무서운 건 뭐냐 하면 공부를 어느 정도 많이 하시면 내가 복음을 많이 알고 있다. 복음을 경험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세요. 성경을 많이 읽으면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면 자기가 저절로 영적으로 성숙해 간다는 착각을 갖습니다. 성경 읽지 말라는 얘기 아니에요! 속지 말라는 거예요. 경험하셔야죠.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가 나의 사건으로 경험되셔야 되지 않겠어요? 아닙니까? 복음은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제자는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배우는 사람이 아니에요. 훈련하는 사람이에요. 이미 끌려가면서 저 더 잘 끌려가도록 훈련하는 사람이지! 갈까? 말까? 고민하며 공부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도 마찬가지고요. 경험한 부활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전파하는 사람이 돼야 돼요. 경험했으니까! 전해 받았으니까! 그것이 너무 확신이 되니까! 난 그것 때문에 살아가니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전파를 하셔야죠.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전해 받았잖아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신앙인들을 보면 전해 받기만 하고 전하질 않아요. 주님의 떡을 받고 주님의 피를 받습니다. 받기만 하고 그 주님의 몸을 전하는 사람이 안 돼요. 내가 주를 보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거하고 선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부활이 인류의 궁극적 소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무덤이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이라면 마리아처럼 울고 주저앉아 있어야겠죠. 그러면 우리 인생이 가장 불쌍한 인생이 됩니다. 여기 오늘 예배드리러 온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예요. 왜요? 부활이 없는데 놀러가지 뭐 하러 여기에 앉아 있어요? 그렇잖아요? 죽기 전에 다 보고 가야 될 거 아니에요? 안 그래요? 고린도전서 15장 19절 말씀 읽어볼까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19)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리스도인들 중에 정말 불쌍한 사람도 있어요. 불쌍하게 살아요. 아니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믿으면서도 그냥 이 세상 문제에 빠져서 그 세상이 주는 그 작은 기쁨에 홀려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고 나누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불쌍한 사람이에요. 평생을 교회 다니다가 예수 믿다가 죽는 순간에 그 죽음의 자리로 용기 있게 기쁘게 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예수 부활 없고 부활하신 예수 없는데 지난 시간처럼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가십시오. 그런 설교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바로 기독교 신앙의 최고점이고 최고 승리의 팡파레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놨어요.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사건이에요. 언제나 죽음이 문제예요. 모든 문제가 죽음으로부터 파생이 되고 그 뿌리가 죽음에 있습니다. 다른 모든 고통과 질병과 아픔과 분리와 싸움은 바로 죽음이라고 하는 근본 원인에서 파생된 거예요. 영원히 산다면 죽음이 없다면 이런 건 문제도 안 돼요. 안 죽는데 가난하면 좀 어때요? 안 죽는데 좀 아프면 어때요? 영원히 사는데! 죽기 때문에 문제인 거예요. 여러분이 고민하고 걱정하는 거, 염려하는 거, 다 죽음의 문제입니다. 자녀 걱정하는 문제, 노후 걱정하는 문제, 이 민족을 걱정하는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부활하셨다. 그 말은 죽음과 함께 거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까지도 주님이 다 해결하셨다. 할렐루야! 죽음 같은 내 육신의 질병, 정신적인 병, 영적인 병, 관계의 틀어짐으로 인한 고통, 돈 문제, 이 모든 것 셀 수 없는 다양한 죽음의 현상들이 있는데 그래서 삶을 포기하고 싶고 내가 지금까지 뭘 했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되나! 한숨밖에 나올 수 없는 그때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소리 내서 선포하셔야 돼요. 그때 모든 죽음 같은 상황이 새롭게 변화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종류의 고통에서 벗어나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줘요. 부활 신앙은 지금까지 살았던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들어요. 아! 이게 진짜가 아니구나. 이게 껍데기밖에 안 되는구나! 진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구나! 예수께서 시작하셨고 예수께서 완성하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진짜 나라구나! 하는 것을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확인하게 돼요. 마리아 보세요. 예수님 만나지 않았더라면 세상 안에서 갇혀서 끝날 인생입니다. 낙인 찍힌 인생입니다. 부활의 예수 안 만났다면 더 불쌍한 여자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에 생생하게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았어요. 이 여인뿐만 아닙니다. 허다한 사람들이 그랬는데 히브리서가 증언하고 있어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서 11:35)
이게 우리 조상들이 했던 신앙 방식이에요. 풀려나기를 오히려 원하지 않았다. 참 이해되기 어렵죠. 구차하게 연명하지 않았다. 변명하거나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차라리 그냥 억울하게 그냥 감옥 가고 이렇게 억울하게라도 그냥 순교 당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왜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게 이 부활의 신앙이에요. 십자가 신앙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활의 신앙이에요.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십자가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더 좋은 부활을 구하였다. 이 땅의 삶! 그 어떤 인생의 성공보다도 변화보다도 나는 완전히 변화되는 그 부활의 생명을 꿈꾸기 때문에 이 구차한 인생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습니까?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의 세계는 경험되지 않으면 배우는 것으론 불가능합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사모하셔야 됩니다. 아직 못 만난 분들은 만나도록 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태신자 작정을 왜 합니까? 교회가 어려워져서 헌금이 줄어서 인원수 확보하고 포섭해서 교인수 늘리려고 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내가 주님을 봤으니까 본 사람으로서 아직 못 본 사람을 작정하고 그 사람한테 말하기 위해서 작정하는 거예요. 오늘 작정 안 한 분들은 아직 예수님 못 본 걸로 알고 제가 중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쉬운 일도 아닐 겁니다. 왜요? 내가 본 것을 말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내가 본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에 여러분 안에 메말랐던 심령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명을 내 안에 잉태하고 기도하면 먼저 내 영이 건강해지고 살아나고 결국에는 그 사람도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 몇몇 분들 보니까 배우자께서 오랫동안 30년 40년 기도해서 결국에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도 지금 있네요. 여러분! 부활의 기쁨을 여러분들만 간직하지 마시고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셔서 그분의 얼굴에도 영적인 미소가 환하게 퍼지게 되는 그러한 축복의 현장이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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