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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은사(2) - 존 맥아더

10장.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을 위해 있는 것인가? (2)

by 복음과삶 2007. 5. 8.

은사 ()

제 10장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을  위해 있는 것인가? (2)

존 맥아더

 

성령의 마지막 강림

방언의 은사는 20세기에 다시 시작되었는가?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은 둘 중 한 가지 방법으로 이 물음에 대해 답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은사는 단지 퇴보했을 뿐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 방언을 주장하는 자들은 동시대의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의 선두 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 같은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들은 이단의 한 무리가 되었다.

또 다른 입장으로,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사도 시대 이후 방언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많은 은사들은 성령의 마지막 강림이며 마지막 때를 위한 은사들이라고 믿는다.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의 주된 근거는 요엘 2:28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 2:19-32에 따르면 주의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하늘과 땅에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 방식으로, 즉 피와 불과 구름 기둥들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31절). 그것은 명백히 다가올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그전의 어떤 것으로도 말해질 수 없다. 요엘서의 문맥은 이것만이 적합한 해석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요엘 2:20은 마지막 때의 묵시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북편 군대”의 패배를 말하고 있다. 요엘 2:27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대부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대환난 때의 또 다른 현상으로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요엘 3장(2, 12, 14절)은 그 민족의 심판, 즉 아마겟돈 이후에 오게 되는 사건과 지상에서 있게 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도래와 관련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3장 후반부에서 요엘은 천년왕국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18절). 요엘 2장은 명백히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그것은 오순절 때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으며(행 2장) 그 이후에도 성취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미래에 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날에 대해 요엘 2:28-32을 인용했을 때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따르게 된다(행 2:17-21). 어떤 성경 학자들은 베드로가 오순절을 요엘 2:28의 성취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순절날에는 하늘이나 땅에 어떤 기이한 일도, 표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피도, 불도, 어떤 연기도 없었다. 해가 어두워지지도 않았으며, 달이 핏빛이 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은 아직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예언은 전혀 실현된 것이 아니었다. 오순절은 단지 그 예언의 부분적인 성취이거나 혹은 미리 선을 보인 것에 불과했다. 그와 흡사한 사건이 변화산 사건이다. 거기서 우리 주님의 영광이 잠시 나타났는데 그것은 천년왕국 때 갖추시게 될 주님의 모습이었다.

베드로는 단지 오순절에 참석한 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임시적인 것으로서 천년왕국 때 성령께서 나타내 보이시게 될 능력이 이와 같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이 지금 예루살렘에서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언젠가 전세계에 행하실 표적이었던 것이다.

19세기의 뛰어난 성경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조지 피터(George N.H.Peters)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순절의 세례는 성령께서 오는 시대에 행하시게 될 것을 입증하는, 미래의 성취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오순절날에 시작된 기적은 도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왕국을 전하는, 선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요엘 2:23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영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른 비는 성령께서 강림하셨던 오순절날을 말하며 늦은 비는 20세기의 강림을 말한다고 한다.

구약 전체를 통해 볼 때 “이른 비”는 가을에 내리는 비를 의미하며 “늦은 비”는 봄에 내리는 비를 의미한다. 요엘은 실제로 천년왕국 때 두 비 모두 “전과 같이”(23절) 내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왕국에서 풍성하게 양식을 자라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요엘 2:24-26은 그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두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찻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처럼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오순절이나 20세기, 혹은 성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요f 2:28을 두 번째 방언을 부어 주시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요엘은 방언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로, 오순절에서의 성령의 강림은 요엘이 예언한 것의 궁극적인 성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에드가(Thomas Edgar)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표적 은사가 교회 내에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혹은 신자들이 교회 시대 말기에 기적을 행할 것이라는 어떤 성경적 증거도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말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있다(마 22-23, 24:11, 24, 살후 -12).

따라서 우리는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유(類)의 것인가?

우리는 은사주의자들의 경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들은 방언이 자기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고 수없이 증거하고 있다. 다음 내용은 그 한 예이다.

“방언의 용도는 무엇인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이것이다. “블루버드(Bluebird, 미국산 지빠귀과의 일종)의 용도는 무엇인가? 석양의 용도는 무엇인가?” 단지 순수하고 완전한 고양, 말할 수 없는 기쁨, 그리고 더불어 있게 되는 건강과 평화, 무거운 짐과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과 쉼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다음 내용을 보라.

내가 방언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20년은 젊어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일으킴을 받았으며 기쁨과 용기와 평화를 얻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마침 나는 그와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하는 약한 사람이었다.

이 같은 증거들은 방언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게 해준다. 만일 방언이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 주고 당신을 더 젊어 보이게 해준다면 그 잠재적 시장성은 무한하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들이 과연 사실일까? 정말 오늘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경건하며 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고 있을까? 오늘날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타락한 은사주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과연 은사를 주장하는 교회들이 은사를 내세우지 않는 교회들, 즉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보다 더 영적으로 견고하고 강하다는 증거가 되는가?

사실 순수하게 성경의 이해와 영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교회를 찾으려면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은사주의 운동이 신학적으로 잘 훈려된 영적인 신자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결실을 맺고 있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결실을 거두고 있는가? 더 나아가 방언 운동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순수한 평화나 만족, 능력,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고 증거하는 많은 방언 경험자들의 말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초기의 황홀경의 경험에서 더욱 고조된 감정을 갖게 된 이들이 그 같은 상태를 반복하지 못하게 될 때 왜 그처럼 자주 환멸 가운데 떨어지곤 하는가?

물을 것도 없이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그 행위를 통해 유익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개-위에서 인용한 증거들처럼- 그들은 그것이 어떤 느낌을 주었으며 또 외양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만 말한다. 즉 그들은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신약이 보여주는 은사는 결코 더 나은 감정이나 외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성경적인 방언임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동일함을 증며할 수 있다거나 통역할 수 있는 언어로 말했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언어학자 윌리엄 사마린(William Samar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사주의자들 가운데 의심스러운 일들은 모두 그것을 입증하려 할 때마다 그 이야기들이 앞뒤가 맞지 않거나 혹은 언어학자인 관점에서 볼 때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은사를 반대하는 자들은 신야그이 은사와 그것들이 같은 현상이라는 그들의 가정 말고는 어떤 증거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면 그 현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많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첫째로, 방언은 사탄이 주는 것이거나 귀신이 주는 것일 수 있다.

이 운동을 비판하는 어떤 비평가는 일체의 방언을 마귀의 역사로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종종 사탄이ㅏ 성령의 은사처럼 보이는 현상의 배후 세력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든 거짓된 종교의 배후로서(고전 10:20) 거짓 진리를 가장하는 일을 한다(고후 11:13-15). 오늘날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거짓말에 현혹되고 있다.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전에 방언을 말한 적이 있는 밴 비어드(Ben Byrd)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 중 일부는 “심령적인 것이었으며 사탄의 능력 같았다”고 믿고 있다.

나는 방언으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눈을 감은 채 수없이 성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내려갔다. 나는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분명히 눈이 감겨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이상한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생생한 꿈 같다고나 할까…… 내 몸은 거의 잠든 듯했으나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였다. 다른 영역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황홀경의 언어는 일반적으로 거짓된 종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ica)최근판은 이방 종교의 예배시에 사용하는 그들의 방언에 관해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보고서는 스와힐리어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귀신들린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아프리카 동가(Thonga) 사람들의 경우 귀신이 쫓겨나가게 될 때 대개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줄루(Zulu)어로 노래를 부른다. 아마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은 “방언의 기적”에 의해 줄루어를 할 수 있는 듯 싶다.

오늘날 황홀경의 언어는 모슬렘이나 에스키모, 티벳의 승려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버지니아 의과대학의 초심리학(정신 감응, 천리안 따위의 자연적 심리현상을 다루는 학문- 여자 주) 실험보고서는 신비로운 일들 가운데 방언을 하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위의 것들은 이방 종교, 이단, 그리고 신비스러운 일을 믿는 이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오랜 전통을 지닌 방언의 몇몇 실례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심각한 것들로, 은사주의자들은 그것들의 영향을 약간이라도 받았음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방언이 학습된 행위라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대부분의 방언은 이 범주에 포함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찰스 헌터와 프랜시스 헌터는 어떻게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세미나를 가졌다. 그것이 배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두 사람은 기도와 찬양을 할 때 큰소리를 내도록 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첫 시동을 건다. 이어서 그들의 방언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실례가 되는 음운을 일러주면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반복해서 내도록 권한다.

그것은 분명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은사가 아니다. 그와 같은 방식의 방언은 “초자연적인”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거의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형태의 소리를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 모두는 근본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 따라서 그것을 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소리를 낼 수 있다.

존 킬델(John Kildahl)은 그의 저서 「방언의 심리학」(The Psycholosyof Speaking in Tongus)에서 여러 가지 증거들을 연구한 후에 방언은 학습된 기교고 결론을 내렸다. 임상심리학자인 킬델과 그의 파트너인 심리학자 폴 퀄벤(Pau Qualben)은 방언에 대해 폭 넓은 연구를 하도록 미국 루터 교회와 전국 정신과 협회(The National Instiute of Mental Health)로부터 요jd을 받고 그것에 대해 연구한 후에 방언이 “학습된 현상”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보다 최근에 오타와주의 칼스톤 대한(Carleteon University)에서 행해진 연구에서 사실상 약간의 지도와 시범을 통해 누구든지 방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결코 방언을 해 본 적이 없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방언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6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았는데, 방언이 담겨 있는 오디오와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훈련을 시킨 뒤 그들 모두에게 30초 동안 방언을 해 보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그들 모두가 30초간 방언을 하였는데 그중 70퍼센트는 아주 유창하게 방언을 하였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방언을 할 줄 아는 어떤 사람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그것을 배웠어요. 자 한번 보여드리지요.” 그리고는 방언을 하기 시작하여T다. 그때 내가 들은 소리는 정확하게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은 유의 소리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사주의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사적인 기도의 언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번은 새 신자에게 방언을 가르치려고 한 어떤 열심있는 은사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아직 미숙한 신자에게 그처럼 열심히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애쓸 필요를 느꼈다는 사실이 내게는 의아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들은 당신에게 방언하는 방법을 기꺼이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를 하는 동안 TV를 통해 은사에 관한 토크쇼를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영적인 어려움에 대해 고백을 하자 다른 은사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매일 방언을 사용하나요? 당신은 당신이 받은 언어로 매일 말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은데요.”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것이 당신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매일 그것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시작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시작만 하세요. 일단 시작만 하면 성령께서 계속 그것을 지속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대회는 여러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만일 성령께서 그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시작하는데 있어 왜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은사주의 안에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은사나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 같은 것이 상당히 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은 방언이다. 방언이 은사주의자들에게 있어 영성과 정통성 그리고 성숙도를 재는 가장 공통된 기준이자 보편적인 기준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잘못된 기준이다.

킬델(Kildahl)과 퀄벤(Qualben)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적으로 계속해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방언은 방언을 하는 실제적인 경험 때문에 주어지기보다는 그 그룹의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방언을 하는 자들이 그 그룹의 지도자와 좋지 않은 관계에 이르거나 그가 속한 그룹으로부터 쫓겨났을 때 그들의 방언의 경험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들의 연구 가운데 상당량은 방언에 대한 환멸을 기록하고 있다. 방언 은사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학습된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 어떤 초자연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이내 그들이 항상 지녀 왔던 정신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킬델과 퀄벤에 따르면 방언 은사자들이 신실하면 신실할수록, 그가 방언을 그치게 되었을 때 더욱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또 다른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방언은 심리적으로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언에 관한 가장 이상스런 경우들 중 어떤 것은 심리적인 착란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방언 은사자들은 무의식적인 신경작용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임상학적으로 볼 때 주변의 의식으로부터 내부적으로 전격 분리되는 현상으로 묘사될 수 있다. 무의식적인 신경 작용이란 모든 수의근(Voluntary Muscles)이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뉴스 시간에 록 콘서트에서의 십대 소녀들을 본 적이 있는가? 흥분의 도가니, 열광의 함성들, 그들은 그야말로 의식의 통제를 상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중에는 극에 달해 아예 바닥에 누워버리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번쯤 의식이 희미한, 뭔가 동떨어진 듯한 의식 상태에 처한 경험들이 있다. 누구든 감정이 극도로 격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경우 쉽게 자신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방언은 그 같은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언으로 인해 황홀경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상태는 거의 최면 상태와 같다. 킬델과 퀄벤은 연구를 통해 “최면 상태는 방언 경험에 있어 필수 불가결의 것으로, 만약 누군가가 최면 상태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방언을 할 수 있는 적합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이 깊이 연구한 후에 킬델과퀄벤은 결론적으로, 지도자에 의존하며 복종하는 사람들이 대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었다고 말했다. 윌리엄 사마린(William Samarin)은 모든 유형의 방언 은사자들이 이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TV에 나오는 대부분의 은사적인 프로그램을 보라. 청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단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심지어 소설이든 기괴한 무슨 이야기든 모든 것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을 연발한다. 그들은 쉽사리 그 가르침을 따르며 순순히 하라는 대로 행한다. 그런 가운데 감정이 격해지고 분위기가 고조될 때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각각의 사람을 분석한다든지 그들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까지 본 것처럼 현대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에 대한 많은 가능한 설명들이 있을 수 있다. 기독교 심리학회(the Christian Association for Psychological Studies)의 한 회원인 맨셀 패터슨(E.Mansell Pattison)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분석한 바로는 방언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기계적 현상입니다. 방언은 심리적인 현상으로서, 일어나기가 쉬우며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경정신과 환자들과 가진 임상적인 실험들로부터 얻어 낸 관찰을 덧붙이자면 충격이나 뇌종양 같은 데서 비롯된 뇌 손상의 경우에 환자는 언어 체계의 와해에 빠지게 됩니다. 이 같은 실어증 환자를 연구하게 되면 우리는 방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정신 분열증에서도 비슷한 언어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구조에 있어서 방언과 같습니다.

이 자료는 방언과 같은 언어의 상동증(무의미한 언어를 반복 지속하는 증상- 역자주) 현상이 언어의식 혹은 언어의 통제의지가 뇌의 손상이나 정신병 혹은 의지의 통제가 포기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방언을 하는 자들은 “의지 통제의 수동적인 자기 포기” 상태로 들어가도록 분명히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포기하도록 자신들의 소리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몇 개의 똑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내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매스터스 신학교(The Master's Seminary)의 학장이었던 찰스 스미스(Chrles Smith)는 현대에 일어나는 온갖 방언 현상에 대해 가능한 모든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방언에 대해 여러 가지의 표현을 썼는데 “자동 무의식 작용”(motor automatism), “황홀경”, “최면상태”, “심령 점화”, “집단 정신”, 혹은 “암기의 반복”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방언은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성령과 관계없이 1세기 당시의 고린도 사람들처럼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속임수의 형태로 방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방언은

왜 그처럼 널리 퍼져 있는가?

모든 교파의 기독교인들이 방언을 계속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람들이 오늘도 매일같이 그것을 갈구하고 있다. 은사주의 작가들과 교사들은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마지막 때에 교회에 주어진 전혀 새로운 능력의 역사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오늘날 방언은 성경적이 아니다. 방언하는 자들은 성경에서 기록된 은사를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열렬히 방언을 사모하는가? 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방언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가? 기본적인 이유는 영적인 고갈이다. 사람들은 방언이 놀라운 영적 경험을 가지는 방편인 양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방언을 하지 못할 경우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영적으로 나타내는 일에 갈급해 하고 있다. 그들은 오랫 동안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교회 안에 속하지 못했다. 즉 특별히 영적이거나 거룩한 자로 인정 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방언하는 자들이 특별히 거룩하며 영적인 자로 인정받는다고 여기고 그와 같이 되고자 그처럼 애쓰는 것이다.

방언이 그처럼 널리 유포된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소속감과 안정감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룹 안에” 소속되는 것이 필요하며 “방언을 하는”자들 가운데 포함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자들 가운데 속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은사주의에 속하는 것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는 은사를 받은 자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처럼, 자신이 특별한 곳에 속한 사람처럼, 즉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처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 은사주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기계적인, 학구적인 냉함, 그리고 무관심한 사회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자신이 초자연적인 것에 직접 접한 것처럼 느낀다. 그들이 경험한 것에는 확실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메마른 것도, 학구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 사실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방언이 그처럼 강력하게 유포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냉랭하고 무기력한 기독교에 대해, 대체할 만한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은사주의와 결부된 사람들을 보게 되면 종종 행위나 뜨거움, 따스함이나 사랑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그들의 삶 가운데서, 즉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는 자들이 많다. 죽은 정통 교리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은사주의에서 만족을 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그들의 계시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들이 성령을 믿으며 그것을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어한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며 그의 희생적인 죽음과 육체의 부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인한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가운데 살 필요가 있음을 믿는 것으로 인해, 아울러 열심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뜨겁게 믿음 생활을 가지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ㅐ 영광을 돌리고 싶어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왜 그들을 비판하나요?”

이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진리 가운데 바로 걷는가 그렇지 않은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도록”(엡 4:5) 가르치고 있다. 참된 사랑은 진리 위에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