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Ⅱ) 제 11장, 진정한 영성(spirituality)이란 무엇인가? (2) 존 맥아더 |
바울 그리고 거짓 사도들 은사주의자들의 가장 좋지 못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일상적인 체험이 되어야 하는 놀랍고 극적이며 감각적인 사건들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 결과 방언, 예언, 영적인 달아오름, 기적적인 일들로 가득찬 뜨거움,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그러한 가시적인 체험이 점점 줄어드는 사람들(혹은 그런 경험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메마른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류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기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롱받고 위협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네 장에 걸쳐서 바울은 그가 없는 동안 고린도에 나타나서 고린도 교회를 장악하려고 하는 새로운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새로운 선생들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경험과 절정의 체험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열광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바울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다며 공격했다. 그 새로운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바울이 자신들보다 영적으로 모자라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이 거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을 읽어보라. 바울은 그가 베풀었던 많은 치유와 기사들을 크게 떠들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자신의 영적인 “전과 기록”이라고 불리울 만한 지난 일에 대해서 언급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rods, 笞杖)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아 죽을 뻔 하였으나, 세 번 파선하여 일 주야를 망망대해의 깊음에서 지내야 했다. 바울은 그 모든 일을 견디어 냈다. 자지 못하고 주리고 춥고 헐벗었으며, 여러번의 여행중에 강도와 이방인들로 인한 위험, 심지어 자기 동족으로 인한 위험도 겪었다. 그는 아마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마을에서 쫓겨남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또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있었다. 세 번이나 없애주시기를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던가?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 12:10-11) 은사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TV쇼를 보고 바울이 좋아할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가 몇 번이나 죽을 위험을 당했던 것은 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육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고린도후서 12:1-4에서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일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셋째 하늘에 갔었던 기적적인 체험을 강조하기보다는,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어했다. 바울이 말하는 이러한 진정한 영성은 요즈음의 기독서적 베스트셀러 목록들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약하고 가련하고 절망적이고 보잘것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부터 로마 참수관에 의해 목이 잘릴 때 까지(고후 4:8-11) 역경과 당혹케 함과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고난과 진정한 영성(true spirituality)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다른 사도들-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의 어디에서도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어려움이 닥치면 도피하라는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방언을 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방언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영성으로부터 잘못된 길로 당신을 끌어내릴 수 있다. 진정한 영성에 도달하는 바른 길은 오직 “성령과 동행함”이라는 표지가 붙은 길이다.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온 것처럼 성경은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성령이 함께 거하게 된다(고전 12:13; 롬 8:9). 신약성서에는 성령 세례에 관해 일곱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 모두가 직설법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그 일곱 군데 중 어느 것에도 명령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명령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명령은 무엇보다 서신서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바울의 서신서들이 그러하다. 에베소서 4:1에서 바울 사도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5:18에서 어떻게 해야 합당하게 행할 수 있는지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다. 그는 간곡한 권고로 그의 말을 시작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방탕과 타락과 사치에 이르게 하는 것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피해야 한다. 바울은 술에 취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명령을 한 후에 일곱 개의 문단에 걸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는 과격하고 황홀한 종교적인 체험으로 고취되라는 언급은 없다. 그 대신에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피차 복종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여 제일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라고 표현했을 때 그는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충만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선택하거나 또는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사용한 말은 명령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른 말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전혀 타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초영성의 세계에 도달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우리가 완전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바울은 “성령 세례를 받으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성령의 그런 이차적인 역할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매일매일의 충만함이다. 당신이 오늘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일은 말 그대로 오늘이 아닌 또 하나의 날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 세례와 같은 “이차적인 축복”의 모든 개념들이 온당치 못한 이유이다. “이차적인 축복”이 사라지고 나면 은사주의의 신도들은 여전히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똑같은 종류의 기본적인 어려움들과 씨름하게 된다. 비록 구원을 받긴 했지만 그는 아직도 죄를 짓고 싶어하는 성향을 강하게 지닌, 육신을 입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날마다 주웠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날마다 성령에 의해 가득 채워져야 한다.
성령 충만은 성령이 우리 삶을 충만히 지배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성령으로 “채워진다”라는 단어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채운다는 것을 생각할 때 보통은 가득찰 때까지 무엇인가를 따라 붓거나 퍼 넣을 수 있는 어떤 그릇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바울이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바울은 끝까지 꽉 채우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양적인 꽉 채움이 아닌 질적인 채움이며 성령의 감화가 우리 속에 충만하게 스며들어 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분노에 “차 있다”거나 기쁨에 “차 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전적으로 분노나 기쁨의 통제아래 놓여있다는 말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종종 “충만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서 떠나실 것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었다”(요 16:6)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다. 그 순간에 근심이 그들을 지배했고 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한 중풍환자를 치유하셨고 그로 인해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 “두려움에 가득 차게 되었다”(26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는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두려움은 다른 느낌들과는 다른(즉, 공통분모가 없는) 감정이다. 당신이 무섭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는 다른 감정들은 조금도 섞이지 않고 오로지 두려움만이 존재한다!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그들의 율법주의에 대해 언쟁하시고 나서 손 마른 한 병자를 고치신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은 “분기가 가득하게”되었고 예수님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모의하기 시작했다(6:11). 바리새인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당신이 성냄과 분노로 가득하게 되면 그런 것들이 당신을 온통 지배하게 되고, 당신을 완전히 소모시킨다. 그것이 바로 성냄이 굉장히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한 격정들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이 완전히 흐려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성경에서 “가득찬다”라는 단어는 어떤 감정이나 영향력에 의해 완전히 지배받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다. 성령은 성령으로 가득차는 것,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함(being filled with Spirit)을 말할 때에도 정확하게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도행전 4:31에서 바로 그러한 점을 발견한다.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에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분명히 많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더구나 체험을 가졌었다고 주장하는 많은 은사주의자들도 성령이 충만하다거나 성령에 의해 지배 받는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이 그들의 삶에 충만히 넘치도록 하는 길을 따르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혹은 다른 것들에 도취되어 있다. 그들은 자만심과 자기 중심성, 분노, 우울 그리고 영적 공허감을 몰고 오는 다른 많은 유혹들에 지고 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할 수 있는가? 성령 충만하게 되는 첫 단계는 우리 일상의 삶에서 성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30에서 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할 수도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은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성령을 “소멸할”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성령을 근심케 하고 소멸케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성령의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품고 성령을 귀하게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에 순종하며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몸과 시간과 달란트와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귀한 것들을 내어드림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성령을 따르기로 헌신하는 것, 이것은 굉장한 결단성이 요구되는 행동이다. 시험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런 시험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죄악이 손짓할 때에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다. 무엇인가가 우리를 성령의 영향권으로부터 이끌어 내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옆으로 제쳐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아가는 오락이나 기분 전환거리, 혹은 친구들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그리고 실패할 때 우리는 회개하고 죄를 떠난다. 이렇게 해서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충만과 기쁨과 능력을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0:10에서 말하는 풍성한 삶인 것이다. 당신이 그러한 풍성한 삶을 산다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Spirit-filled) 사람은 그의 삶에서 의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경의 어느 부분도 성령 충만이 흥분상태의 체험이나 외적인 표시들을 동반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확실히 성도에게 형언할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서신들은 성령 충만함이 성령의 열매로 생기는 것이지 성령 은사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에베소서 5:19, 6:9에서 우리는 그 구체적인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차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그의 마음으로 주께 찬송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권위있는 자들에게 순종할 줄 안다. 성령 충만한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하며 성령 충만한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주 안에서 순종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부모들은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않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다. 성령 충만한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고 열심히 일하며 성령 충만한 상전들도 종들을 공평히 대하고 이해한다. 이 모든 것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 분명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슷한 말씀인 골로새서 4:16-22에서는 성령 충만함의 표시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타난다고 말한다(3:16). 성령 충만한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은 둘 다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안에 거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예수에 대해 알수 있는한 모든 것을 배우려고 전심 전력하는 사람이며 예수가 말씀하신 모든 것에 복종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즉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가는 일에 전적으로 그리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매달리는 것이다.
베드로 - 성령 충만의 모범적인 예 성령 충만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한 완벽한 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 베드로의 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곁에 있기를 좋아했다. 그는 잠시도 주님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곁에 있었을 때 그는 참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했고 놀라운 말도 많이 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과연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보셨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 예수께서는 그것이 베드로 스스로가 생각해낸 것이 나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7절).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거친 물결 속에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그때 베드로는 그 분이 예수님이신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28절). 그리고 곧장 물 위로 걸어나아갔다. 배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불안한 생각들로 인해 두려워져서 점점 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물 위로 끌어 올리셨다. 이렇듯 예수님이 가까이 계실 때마다 베드로는 놀라운 일들을 해 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장면이다. 무장한 군사들이 예스님을 체포하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베드로는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급히 달려들어 칼을 빼들고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폭력을 휘두른 것에 대해 책망하시고는 말고의 귀를 제자리에 붙여주셨다. 비록 베드로가 행한 일이 바르지 못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몇 시간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고난을 받을셨을 때 베드로는 그분 곁에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세 번이나 예수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세 번 다 예수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완강히 부인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베드로는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십자가의 고통을 겪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가 행한 예수님에 대한 부인으로 인해 더욱 괴로워 했을 것이다. 그 후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몇 주후 다시 승천하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불과 몇 발자국 안 떨어진 곳에 그토록 가까이 계시다가 하늘로 완전히 사라지시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그 후 베드로는 무엇을 했는가?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적대적인 군중들 앞에 섰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확신을 주는, 능력있는 설교를 행했다. 곧이어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자를 고쳤다. 그리고 노한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원들 앞에서 대담하게 외쳤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져 있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득차 있을 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와 똑같은 능력과 담대함과 힘을 소유했던 것이다. 성령 충만함은 매 순간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 서 있는 것 처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을 의식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의식할 때에는 그 사람과 대화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을 연습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매일 아침을 “주님, 안녕하세요?”하며 시작해야 한다. “주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제 옆에 계시다는 것을 제가 잊지 않도록 하루 종일 그것을 생각나게 해 주세요.” 유혹을 받을 때에도 주님께 말해야 한다. 결정할 사항이 있을 때에도 가야할 길을 보여주시도록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과 죄를 생각하는 것으로 동시에 채워질 수 없다. 예수님과 죄는 한꺼번에 같은 장소를 차지하지 못한다. 전자 아니면 후자가 반드시 밀려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지금 내 앞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의 죄 많은 육신이 그 자리를 점령해 버리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기억하고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 될 것이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해 보기 바란다. 나는 찬송하고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당신 안에 풍성히 거하게 될 때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성도간에 서로 나누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골 3:16).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성경 읽기와 주님과의 영적 교제가, 일시적이고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위해 일상적인 일로서, 자연스럽게 계속되어야 하는 영적인 양식 섭취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감사하고 있는가? 성경은 항상 감사하라고 가르친다(엡 5:20; 살전 5:18).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불평인가 감사인가, 어느 쪽인가? 이 부패한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불평할 일이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골칫거리와 짜증스러운 일들, 절망과 위기상황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감사할 일들도 너무나 많이 갖고 있다. 당신은 하나님이 계심을 감사하는가? 그리스도안에서 받은 구원을 감사하는가? 죽음의 권세를 이김에 대해 감사하는가?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함을 감사하는가? 건강을 주심에 대해 감사하는가?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을 주신 것에도 감사하는가? 계속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당신이 받은 축복을 헤아려 보라. 당신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많은지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나의 배우자와 자녀들, 친구, 동료, 이웃들과 잘 지내고 있는가? 우리는 바울의 에베소서 5:21-6:9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할 수 있는가? 당신은 나서는 것만 아니라 따르는 일도 잘 하는가? 만일 당신이 한 남자의 아내라면 남편의 이끔에 잘 순종하고 있는가? 또 당신이 한 여자의 남편이라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가? 당신은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당신은 윗사람의 말에 순종하는 직원인가? 당신은 성실히 일하고 있는가? 당신이 고용주라면 아랫 사람에게 공평하고 정당하게 대우하고 있는가? 당신이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윤의 많은 부분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차지할까만 고민하고 있는가? 내 삶 속에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성령 충만의 한가지 분명한 증거는 자신이 죄에 물들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느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당신은 죄를 더 많이 깨닫게 되고, 그 분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 있는 죄를 깨닫게 될 때마다 즉시 그 죄를 자백하고 그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성령 충만함을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더 바라는 세상적인 어떤 것이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자기 중심적이지는 않는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하고 있는가? 당신의 삶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이건 간에, 당신은 그것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성령이 바로 이 순간부터 그 부분을 지배하시도록 할 수가 있다. 주님께 그저 당신이 완전히 그 분의 영향 아래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만 하라. 그리고나서 당신 자신을 훈련시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 성령에 굴복하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반응들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짐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아주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감정의 급격한 변화는 느끼지 못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부터는 올 수 없는 평안과 만족을 느낄 수도 있다. 당신의 반응이 어떤 것이 될지는 몰라도, 성경은 “신성한 흥분체험(야ne zap)"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리스도께 진실하고, 날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끊이지 않고 변함없이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적으 양으로 조금씩 조금씩 힘들게 다가온다. 쉬운 길은 없다. 일회성의 “영적인 흥분 상태(spiritual zap)"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과정이다(롬 12:2). 그리고 거기에는 잠재 의식을 개조하는 테이프나, 아무런 노력없이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해주는 방법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힘써야 한다(딤후 2:15). 우리는 부지런하고 한결같아서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눅 8:15)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커다란 수고를 요구하는 계속적인 영적 성장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어슨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5-8) 우리는 단번에 멋진 새 사람으로 개조되는 것과 이러한 과정을 맞바꿔서는 안된다. 우리는 입에 뼈다귀를 물고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기 오습을 보고는, 거기 보이는 뼈다귀가 더 먹음직스럽게 보여 그걸 물기 위해 입을 벌리다가 자기가 가진 진짜 뼈다귀를 잃어버린 어리석은 개에 관한 이솝우화를 알고 있다. 그 개는 물 속에 비친 뼈가 자신이 가진 뼈보다 어찌나 좋아보였던지 그만 대번에 컹하고 짖었던 것이다. 결국 그 개는 환상 때문에 현실을 내버리고 말았다. 나는 참으로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갈망하고 있으나, 지식이 없음으로 인해서 그 개가 한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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