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화/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 잭R. 테일러

1-4장 기독교는 그리스도가-당신-안에-교(2)

by 복음과삶 2007. 8. 13.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1부 인간 생활 안의 그리스도의 임재

 

4장 기독교는

 

그리스도가-당신-안에-교 (2)

 

잭 R. 테일러

 

증   명

 

  우리의 온 주위에는 그리스도 내재의 중요성에 대한 명백하고 살아 있는 증거들이 있다. 성경에서나 우리 주위에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많은 보기가 있다.

 

(1) 몸과 그 지체

  우리의 몸과 하나님의 성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두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이 곧 교회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 5:30). 사람의 몸 내부에 생생한 내재(內在)의 보기가 있다. 나와 내 몸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내 생명은 두 사람의 내재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이다. 내 생명은 내 몸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이다. 나의 몸 전체는 정상적 경우에 내게 순종한다. 나의 생각, 나의 정력, 나의 생명은 그 끝까지 내 몸에 내재한다. 내 작은 손가락 하나가 다쳤어도 나는 그것을 안다. 그 손가락은 나의 한 부분이다. 내가 발가락 하나를 상하게 하여도 나는 그것을 안다. 그것도 나의 일부분이다. 내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나는 그것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은 다 나의 부분들이다. 내가 내 몸 안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된 교회에 거하신다. 그는 또한 우리들 개개인의 몸 안에 계신다. 주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우리들의 개개인의 몸 안에 있는 것은 그의 생명이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의 영적 유기체(有機體)다. 나의 몸을 통일된 몸이 되게 하는 요소는 그 안에 거하면서 모든 지혜를 통괄하는 나 자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 된 교회에 내재하시고 관리하심으로 교회가 영광스러운 통일체가 된다. 내가 내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개인적으로 내 안에 계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를 지배하시므로 나는 더 큰 몸인 교회의 효과적인 회원이 된다.

  당신의 몸을 보라. 당신은 그 안에 살고 있다. 몸은 당신을 표현(表現)하고 운반해주는 수단이다. 당신의 손은 다른 하나의 손이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허락된 당신의 손이다. 그것이 일을한다 해도 당신 없이는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불가능하다. 당신의 손이 당신의 마음대로 될 때 그것은 곧 당신 전체가 그것에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상 그 손이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 자신이다. 발도 다리도 눈도 귀도 그리고 몸 전체가 꼭 이와 같다—몸은 당신에게 순종한다.

  당신이 당신 몸 안에 사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영접하면 몸 안에 오셔서 사신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시는 것으로 인정하는 그대로 그리스도는 상주(常住)의 주가 되신다. 당신이 전에 결정하던 것을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전에 당신이 익혀 선택하던 방향을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잡으시고 선택하신다. 당신이 지금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이미 당신의 몸을 그리스도께서 표현과 운반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도록 드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가신다. 지금은 당신의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대로 하신다. 놀라운 진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간의 작용을 통한 기적은 풍성한 삶을 갖다 준다.

  나는 날마다 영적 실천으로 큰 기쁨을 맛본다. 그중 하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내가 아침에 처음으로 나 자신을 볼 때(그것은 언제나 매우 겸허한 체험이다) 나는 자신에게 상기시킨다. “이것은 내 몸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것이다. 이 몸은 오늘의 순간순간마다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죽었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나는 사형집행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벨트를 단단히 매고 전기 스위치를 넣고 “220단추”를 누른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갈 2:20). 그 다음에 나는 예수께 말씀한다. “주님, 나는 이미 살아있지 않으므로 주님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살아주십시오. 나는 나의 죽음과 주님의 사심을 선언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자리 잡아 살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께 아닌 내게 오늘 아무런 요구도 없으시고 어려운 문제도 내가 다룰 필요가 없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날이 진정으로 시작되기 전에 나는 내가 지금 ‘승리’를 소리치고자 하는 이유가 주께서 내 안에 계심인 것을 선언합니다!

 

(2) 한 알의 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여기에 예수께서는 또 하나의 내재의 중요성에 대한 보기를 주신다.

  씨는 바로 씨다. 그것의 영광은 그 씨가 그 안에 생명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죽음으로 이끄는 조건 가운데 놓이기까지는 그것이 결코 본래 의도(意圖)된 목적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씨를 취하여 깨끗이 씻어 문질러 광을 내고 선반 위 눈에 띄는 곳에 올려놓을 수 있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씨일 따름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지만 그것을 통하여 생명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 씨는 죽지 않았다. 그것을 오래 간직하려들면 그 영광은 상실되고 만다. 그것을 차고 축축한 땅에 던져 보라. 그리하면 그 영광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그와 마찬가지다. 여기에 꼭 다른 하나의 생명이 있다. 그리스도인 생명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성령으로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그저 안전만 꾀한다면 거기에는 영광이 없다. 그는 깨끗하게, 정상적이고 효과적으로 생활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돋보이며 “헌신”한 생활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광이 없다. 그는 인상적이겠으나 기적적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비결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계심, 이것이 바로 영광의 소망이다!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죽음을 택하고 죽음—생명의 원리가 그의 생활에서 작용하도록 한다. 그가 스스로를 죽이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하여 살기 시작하신다. 그가 두려워하는 고민과 그가 직면하는 비극은 길을 비켜 승리를 그에게 안겨준다. 그가 고통이고 비극일 것이라고 생각한 죽음이 승리로 바뀐다.

  그리스도는 그 한 알의 밀이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전시품(展示品)처럼 만들어 그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시지 않았다. 죄 많은 세상을 구원하는 데는 인간의 생명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했으며,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짐으로써 오직 “쏟아져 나왔던”것이다. 그 씨가 “땅에 떨어져 죽었으며” 진실로 그것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씨다. 그의 생명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다. 겉보기에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놀라운 일도 기적적인 일도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심겨졌을 때 우리는 최선(最善)의 단계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우리가 땅에 심어질 때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생명이 그의 생명으로서 우리를 통하여 싹이 트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기 때문이다.

 

(3) 포도나무와 그 가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니”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5:5에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는 내재(內在)하는 생명에 관한 가장 명백한 교훈의 하나를 주셨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하나이다. 하나가(가지) 다른 것(포도나무)에 내재한다. 포도나무 전체는 바로 그 가지 안에 있는 셈이다. 가지를 취급하게 되면 바로 포도나무를 취급한 것이 된다. 포도나무가 존재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 가지이다.

  가지는 열매 맺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지는 포도나무로 하여금 그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게 한다. 만일,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포도나무의 종류에 따라 맺는 것이 아니다. 가지의 위치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바와 같다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열매 맺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가지 없이는 열매 맺을 소망이 없다. 아름다운 진리는 바로……가지 안에 있는 포도나무는 영광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가지의 과업(課業)은 간단하다. 포도나무 안에 거하는(조용히 쓰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다. 우리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고 다만 우리 안에 있어 일하시는 그리스도와 부단(不斷)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居)하면 족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상적인 것 이상이 된다. 우리는 기적적인 존재가 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몸과 그 지체, 씨,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세 가지의 비유가 또 이 진리를 말해 준다.

 

(1) 자동차

  그녀가 앉아 있다. 그녀는 산뜻하고 맵시 있으며, 안락하고 강력하다—곧 그녀란 바로 최신형 자동차다. 이 차는 나타낼 수 있는 마력(馬力)을 가지고 있다 햇빛에 번쩍이는 그 몸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세계의 기계공학의 하나의 결정으로 여기에 자동차가 놓여 있다. 그러나 자동차의 영광은 광택(光澤)나는 그 외관이나 그 소유자가 자랑하는 차의 성능적 통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자동차는 스스로 내장한 기동성(機動性)을 가지고 제작되었다. 그것은 모든 구성부분(構成部分) 곧 변속기, 캐브레터, 기어, 피스톤, 래디에이터, 바퀴 등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부속들은 그것만으로는 “자동차”가 될 수 없다. 하루 종일 그것을 바라보고 “자동차”라고 부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는 자동차가 안 된다.

  다시 한 번 아까 말한 촉매적(觸媒的) 진리를 살펴보자. 자동차에 있어서의 지능적인 짜임새 그 자체는 영광의 소망이 아니다. 차는 그 안에 내재(內在)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차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 그의 미관(美觀) 그의 연료(燃料)등은 다같이…본래 차가 차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운전사가 온다. 그가 들어가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가 자리를 잡고 모든 것을 관리한다. 운전사가 그 자동차 안에 거하고, 차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자동차의 영광의 소망이다. 아름다움, 날씬한 모습, 힘 등은 차가 도로에 나가 달리게 될 때 제이의적(第二義的)인 것들이다. 그것이(달리는 것) 바로 차를 만든 목적, 곧 어떤 상태로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충족시킨다. 그녀는 이제 내재(內在)를 당했다!

 

(2) 골프의 파(par)

  나는 골퍼(골프하는 사람)이다. 나는 농장이자 목장에 살았으며 소를 따라서 몇 마일이고 걸어야 했다. 나는 조그마한 공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쳐놓고 그것을 따라가며, 이것을 되풀이하는 장래를 가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적어도 내게 관한 한(限) 다음과 같은 골프에 대한 말이 옳은 것 같다 :

    쓸데없는 노력이다…

       대수롭지 않은 공을…

          지극히 불충분한 기구들을 가지고…

             희미한 구멍에 쳐넣는 일!

  그러나 이것은 좋은 비유가 된다. 내가 천국에 가기 위하여 골프를 해야 한다고 상상해보자…그보다도 나는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나의 지금 상태보다 훨씬 익숙하게 될 수 있었음이 틀림이 없겠으나, 그 타격이 나를 그 수준에 몰아넣고 말았다.—“모두가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나는 약속한다. 나는 열심히 열심히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공을 훅킹(골프에서 공을 다루는 한 가지 방법, 이하 같음), 슬라이싱, 탑핑하는 낡은 옛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가 걸어와서 말을 했다고 가정하자, 곧 정맥(靜脈)에 주사(注射)할 수 있는 어떤 혈청(血淸)이 있는데 그 혈청 주사를 맞으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그리고 그 혈청은 다년간(多年間)의 연구의 결과이며, 그 안에는 골프를 사랑하는 마음, 최선의 컨디션 조절, 적극성 등 골프인(人)을 최고의 상태로 만드는 요소가 들어 있으며, 그것은 금세기(今世紀)의 모든 유명한 골프인(호간, 플레여, 스니드, 파아머, 닉클라우스 등)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내게 일러주었다고 생각하자. 그리하여 내가 이와 같은 시시한 골퍼를 집어치우고 이 주사를 맞으면, 어떤 특수한 신진대사(新陳代謝)의 기적으로 나의 골프 능력이 마치 그 모든 유명한 골프인들이 다 내 안에 사는 것처럼 위대해질 것이라고 내게 일러 주었다고 가상하자. 내 안에 거하는(內在하는) 그 골퍼들은 나의 파(par)의 소망이 될 것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나의 영광의 소망이다. 나는 하나님의 채점에 따라 파(par) 밑으로 쓰러졌다. 나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절대로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었다. 나는 백년이고 노력해볼 수 있었으나 결국 마지막은 바로 시작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누군가가 내게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살아계신 주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사시면서 내 안에서 자기 자신의 행동을 하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만 그렇게 되는 데 동의(同意)하고 내재하시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 계획인가! 내 안에는 아직도 그 낡은 “표준 이하”의 성품이 있다. 그러나 내 안에는 다른 하나의 존재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살고 계시며 그가 관리하신다. 그렇게 됨으로써 나의 생명은 최초의 목적대로 되어진다…예수께서 내 세상 안에 살아 계시며 사랑하고 봉사하시며 그럼으로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 앞으로 인도 해오는 일이다.

 

(3) 홍차와 홍차 봉지

  여기에 한 잔의 물이 있고 그 옆에 한 봉지의 홍차가 있다. 물은 차가 아니며 차는 또한 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두 개의 분리된 물건이다. 물을 데워 홍차 봉지를 그 물 속에 넣는다. 이상한 일이 생긴다…물의 빛깔과 성질이 달라진다. 물은 한 새로운 지배적(支配的) 성격의 내재(內在)를 받는다. 풍성한 홍차 빛깔이 컵 안을 감돌다가 드디어 액체는 물 아닌 홍차가 된다. 이제 물이 존재하는 것은 홍차가 존재한다. 물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사는 홍차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더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 물이 끓여져서 위생적이고 자극적인 음료가 된다면,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꼭 한 잔의 물이다. 그것이 믿음으로 더워지고 그 안에 구주께서 들어오시면 물은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 안에 들어오고 그의 동의(同意)로 그를 지배(支配)하게 된다. 그는 더욱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점점 더 자기와 덜 같아진다. 그것은 마치 “물 안에 있는 홍차가 맛의 소망인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당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을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