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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 잭R. 테일러

1-3장 우리의 길을 막는 원수

by 복음과삶 2007. 8. 13.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1부 인간 생활 안의 그리스도의 임재

 

3장 우리의 길을 막는 원수

 

잭 R. 테일러

 

제 3 장

우리의 길을 막는 원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한 원수가 있나니 그의 숨은 힘은

       그리스도인이 가히 두려워할만 하도다.

    타고난 죄보다 훨씬 더 음흉하며

       마음에 더욱 파고 드누나.

 

    그것은 이기(利己)의 세력이요,

       그것은 완고한 “나”요,

    내 주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기 전에

        나의 그 자아(自我)는 죽어버려야 하느니라.3)

  나아가서 그것을 인정하라! “당신”이 바로 당신의 가장 큰 문제다. 당신이 당신의 가장 값 싼 대적(對敵)이다. 속어 중에서도 자아(自我)가 가장 상스러운 말이다. 당신이 이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 사실을 인정하면, 벌써 승리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재(內在)하시는 생활의 영광스러움을 정당하게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생활에서 승리를 가로막고 우리 삶의 보좌를 가로채는 이 내재(內在)하는 적(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자아(自我)의 선택

 

  적(敵)이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를 매우 아름답고 온전한 낙원에 두셨다. 하나님은 사람과 더불어 행하시며 그와의 사귐을 즐기셨다. 하나님은 사귐을 가지시고자 사람을 만드셨지만, 그 사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택하여야 했다. 선택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거기에는 응당 택하는 대상이 있어야 했다. 그러기에 성경 말씀에 동산 한 가운데 생명나무라 부르는 나무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그 나무와 또 그 동산 안에 있는 어느 나무의 실과라도 따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었다. 그 나무들은 사람의 행복과 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생명나무는 사람이 계속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사람이 생명나무를 택할 수 있다면 그 반대도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동산 한 가운데”(생명나무가 있는 곳과 같은 곳에) 다른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선(善)과 악(惡)을 아는 나무였다. 그것은 사람이 원한다면 하나님을 반대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권리를 가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쪽의 선택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만일 사람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택하였다면 그는 선과 악의 구별을 몰랐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그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생명나무와 열매, 곧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므로 하나님이 선하심과 같이 언제나 선할 것이다. 그는 늘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를 택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알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스스로의 생활을 발전시키기를 원했으며, “자신의 일을 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스스로 만족하며 독립을 원했다.

    자아(自我)가 보좌를 차지했다.

        하나님은 옆으로 밀려났다.

             사람은 넘어졌다, 그리고 그의 타락으로,

     창조는 균형을 잃었으며 혼돈하였다.

  사람의 큰 대적(對敵)은 자아이다. 사람이 그것을 선택하였다. 이제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다스리게 되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히고 사람은 동산을 쫓겨났다. 그는 스스로의 길을 택했으며, 따라서 그 결과를 스스로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지금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그 결과를 짊어지고 있다. 아담이 선택한 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였다. 첫 번째 나무의 열매는 그리스도다. 두 번째 나무의 열매는 자아다. 우리는 언제나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고 있다.

 

자아의 성격

 

  사탄은 자아의 성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사탄 자신이 큰 “자아”가 되어 그것이 그로 하여금 마귀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이 계명성에 관하여 인용한 말씀을 들어보라.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국북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14). 사탄은 “나”(自我)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이 사탄의 원하는 대로 행하였을 때 그는 사탄과 같은 자아의 병에 전염(傳染)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찌할 도리 없는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다. 자아가 적(敵)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 자아를 다른 말로 하면 “육신”(肉身)이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자아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으며 또 따를 수가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자아는 길들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나로 하여금 승리하지 못하게 한 주요 원인이다. 내가 구원을 얻었을 때 나의 “자아” 성품에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내가 구원받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나는 구원받았을 때 내 자아에 아무런 일도, 절대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고 한 목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티끌만큼도 개선(改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아를 개선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아와 교체(交替)하시기 위하여 들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자아가 끼어들 곳은 없다.

  그것은 훈련할 수도 없다. 우리는 자아를 길들이겠다고 얼마나 많이 애쓰고 있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쩔 도리 없이 불가능하다. 자아는 사납고 속임수에 차있다. 자아를 교육시킬 수 있고 그의 생활 조건을 바꿀 수 있고 또 그것을 가장 높은 도덕 수준에 내맡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여전히 “모든 것보다도 속이는 것이 많으며 말할 수 없이 악하다.” 하나님과 관련되는 한 “선한” 자아나 “악한” 자아가 있을 수 없다. 자아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는 전혀 상용(相容)되지 않는다. 자아의 성품이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갈 5:19-21) 있다.

  자아는 헌신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얼마나 자아를 헌신하고자 애쓰는 경향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자아를 헌신하고자 하는 노력의 축적된 결과는 이기적(利己的) 동기와 이기적 보수를 위하여 움직이는 일이 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자아를 헌신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그것은 전혀 헌신이 아니다“). 자아는 그것이 죽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지 할 것이다. 기도하고 일하고 십일조를 바칠 것이다. 주일학교도 가르치고 집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설교까지도 할 것이다! 스스로 종교적 전승(傳承) 위에 올라 앉아 하나님에 대한 완충(緩衝)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여전히 하나남의 대적(對敵)이다. 자아와 그리스도가 동일(同一)한 심령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거기에는 전쟁이 있을 것이다.

 

자아의 행로(行路)

 

자아는 변함없는 비경건(非敬虔)의 행로를 취하게 마련이다. 자아는 우리를 패배시킬 것이다. 바울의 부르짖음을 들어보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18-19, 22-23). 그것은 우리를 절망시킬 것이다. 로마서 7:24의 바울의 부르짖음보다 더 큰 절마의 소리는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것은 우리의 운명을 정한다. 로마서 8:6에 그 결과가 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자아의 행로는 이미 미리 작저된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받을 것인가를 이미 아는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확대(擴大)시킨다. 그것은 스스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는 굉장히 예민해 지고 감상적이 된다. 그리고 언제나 최고의 명예롭고 칭찬받는 지위에 오르고자 발버둥친다. 꾸지람을 듣거나 교정(矯正)받는 일을 참지 못한다. 자기 방위(自己 防衛)에 급급하고 있다. 자기의 주장을 남에게 강요한다. 자아는 파괴적이고 흉악한 것이다.

 

   오 주여, 내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품으로!

   오, 이제는 이미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시기를!

 

  자, 그 자아를 길들일 수도 없고 훈련할 수도 없고 헌신할 수도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행로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신은 자아를 다루는 당신의 방법을 모두 포기할 용의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자아의 치유(治癒)

 

  나무(樹木)의 내부에 목질부(木質部)라 불리는 도관조직(導管組織)이 있다. 나무의 이 세포조직은 광물질(鑛物質)과 수분(水分)을 운반하는 기능을 가지는데, 말하자면 땅에서부터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는 물질을 빨아 올려 나무 각 부분에 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 세포들이 지닌 독특성(獨特性)은 그것들이 죽지 않으면 나무에게 있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세포 안에는 세포질(細胞質)과 세포의 성질을 결정하는 핵질(核質)이 있다. 그런데 이 질(質)이 살아 있는 한 나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명 물질의 유통(流通)을 막아버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그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께 필요가 없다. 그가 스스로의 성질대로 삶을 계속하는 한 하나님의 성질대로 살 수는 없다.

  자아를 치료하는 오직 한 가지의 방법이 있으니……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이야 말로 자아의 생활에서 탈출하는 유일의 수단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죽일 수 없으며 하나님도 그것을 원치 아니 하신다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온전한 뜻을 받아들일 것을 원하신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면 우리가 죽은 것이다. 우리가 죽었다면 우리는 이미 살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을 밟도록 요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도록 권고를 받고 있다. 바울은 말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그렇다면 우리는 외칠 수 있다 :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나를 자유케 하였으니,

   나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며 나를 다스리신다!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자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며 나를 다스리시며,

        그와 함께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4)

 

  자아의 치유(治癒)는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치유를 이루어 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이와 같은 명제(命題)는 더욱 자세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씀에서 어떤 사실들을 이끌어내 보기로 하자:

  예수를 따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뚜렷한 자격이 필요하다. 자기 스스로를 반대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하며, 또 계속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만일 오늘날 말씀을 하신다면, 곳에 따라 이루어지는 죽음의 방법을(그것이 무엇이든) 말씀하실 것이다. 한 곳에서는 그것이 교수대(絞首臺)일 것이고, 다른 곳에서는 가스 사형실이며, 또 다른 곳에서는 전기의자(電氣倚子)일 것이다. 이것들은 결국 합쳐서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니…… 곧, 죽음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면 상징적으로 내가 그 사형 집행대 위에 앉아야 한다. 내가 스스로 내 몸을 의자에 벨트로 고착시키며, 전기 스위치를 넣고 혹은 손잡이를 당겨야 한다. 그 사형 집행의 스위치와 더불어 나는 갈라디아서 2:20을 보게 된다. 내가 다시 말한다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2:20). 나는 그렇게 여기고 또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내일은 어떨까? 내가 지치고 어렵고 참을성이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다시 한 번 상기(想起)하여야 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과정이 되풀이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새삼스럽게 찬양하는 일이 바로 여기에 또 있다. 십자가는 자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회답이다. 그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그러나 무엇인가 다른 일이 거기서 생겼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게 될 때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우리가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 우리의 자아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의 모든 삶이 우리 안에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중(二重)의 십자가가 있었다. 외관적(外觀的) 십자가, 곧 죄 값에 대한 지불, 대속(代贖)의 죽음,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를 화목 시키고자 하는 십자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십자가가 자아에 적용되는 내부적(內部的) 십자가가 될 때, 거기에 새롭고 완전한 자유가 있게 된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롬 6:7).

  맥스웰씨(L E. Mazwell)의 요약을 들어보자 : “하나님 안에 있는 본향에서(거기에는 하나님이 빛이요 생명이며 하나님의 숨이 바로 자기의 숨이며 우주의 중심되는 태양인)…가장 높은 이의 이 감추인 곳으로부터 사람은 뚫고 나와 먼 자아의 나라로, 낯선 곳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밤의 장소로 뛰쳐나왔다. 하나님을 팽개쳐 버렸다. 자아가 보좌를 강탈(强奪)하였다. 그 강탈자는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자아는 사람이 정착하는 새로운 거짓 센터이다. 그는 스스로를 해 아래 무엇보다도 사랑한다. ‘자아는 우리 타락한 상태의 모든 악의 뿌리요 가지요 나무’라고 윌리엄 로오(William Law)씨는 말한다. 이러한 거의 전능(全能)한 자아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좌에서 밀어내게 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 여기에 하나님의 기막힌 솜씨가 있다. 십자가는 실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갈보리는 첫 번 가족(家族) 나무의 뿌리에 놓인 하나님의 도끼다. 아담이 찍혀 잘렸고, 새 아담이 보좌에 올랐다. 주 예수께서 새 종족의 새 머리로 오셨다. 그는 기꺼이 오셨고,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줄로 그는 우리를 죽음의 바로 그 깊은 데까지 그 자신에게 묶으셨으며, 그것은 우리를 죄의 값에서 깨끗이 풀어주시며, 자아 대신 하나님을 택하도록 강권하시기 위함이다. 그는 죽음을 택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그 죽음, 곧 우리 대신 우리의 죽음을 죽어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죄스러운 자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5)

  주를 찬양하라! 여기에 자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법이 있다. 우리의 길을 막았던 원수는 이제 제거(除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