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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 잭R. 테일러

2-4장 둘째 축복이 있는가? (1)

by 복음과삶 2007. 9. 6.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2부 인간 생활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

 

4장 둘째 축복이 있는가? (1)

 

잭 R. 테일러

 

제 4 장

둘째 축복이 있는가?

 

  필자는 어린 아이 시절부터 “은혜의 두 번째 역사” 또는 “둘째 축복”이라는 말을 들어왔음을 기억한다. 구원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므로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게 되면 곧 “둘째 축복”을 구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마다 그의 일생 동안에 그러한 체험을 갖기 위하여 간구하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필자가 아는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 가운데 한 분이었던 필자의 조부(祖父)께서 그의 생전에 이 체험을 얻고자 구하고 있었음을 필자는 알고 있다. 그는 그 둘째 축복을 얻지 못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무척 슬퍼했었다. 그는 필자가 알고 있는 어느 사람 못지않게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낸 분이었다. 그는 울지 않고 기도한 적이 없었으며, 식사 때 감사하는 간단한 기도 때에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부르는 “둘째 축복”이라는 감정적으로 체험하는 어떤 표적이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하면서 세상을 떠났었다.

  “둘째 축복”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상적이고 옳은 대답은, “틀림없이 있다…그리고 셋째, 넷째, 그리고 다섯째, 백만번째 이상 더 있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성령에 관한 필자의 설교가 끝난 뒤에 이따금 누군가가 필자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침례교인으로서 ‘둘째 축복’의 설교자를 발견하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필자의 즉답(卽答)은 보통 다음과 같다. “성령의 충만이 둘째 축복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첫 축복의 두 번째 반(半)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셨을 때 그것은 성령으로 인함이었다. 주께서 지금 내재하시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예쑤의 생명으로 계속 충만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인함이다. 은혜의 전체 역사가 그리스도의 오심(마음에 거하시기 위하여), 채워주심과 계속 넘쳐 흐름을 모두 포함한다. 이 은혜의 역사는 신자의 행위, 헌신 또는 가치 유무에 따라 시간적으로 할당(割當)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생명 중에 들어오신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거하시고 따라서 아버지께서 생명 중에 들어오신 것이다. 이것이 모두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롬 3:21) 것이다.

  이제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을 관리하는 문제가 된다. 바울은 말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그것은 마치 많은 금액의 예금통장을 받는 것과 같다. 은행도 알고 있고, 입금(예금)을 한 분도 알고, 또 필요에 따라 그 돈을 찾아 쓸 수 있는 통장도 갖고 있다. 은행에 돈이 있어 당신의 필요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하루하루의 믿음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필요에 따라 계속 그 돈을 찾아 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인정했따.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수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 생활 가운데 회심(回心) 후에 얻는 체험이 있는데, 그것을 그들은 생활의 전환점(轉換點)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지 그것은 그들의 생활이 결코 그전과 같지 않다는 성질의 것이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후에 그와 같은 체험을 갖고 있는데, 아나니아가 그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를 만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성(다메섹)에서 그는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마태복음 26장과 사도행전 2장의 말씀 사이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생활의 그것보다 더 극적인 변화가 없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우리는 조그마한 소녀 앞에서 떠는 한 겁쟁이 제자를 본다. 그의 말은 차차로 노기(怒氣)에 차 열을 띠었으며 옛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말로써 맹세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단계적으로 무거워가던 그의 죄는 절정에 달했다. 그리하여 닭이 울 때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되새겨 간절한 마음으로 흐느끼게 되었다. 그는 패배(敗北)를 당하고 낙심하고 힘이 빠졌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비겁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설교하여 3,000명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생애의 어느 시기에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 다시는 옛 사람과 같지 않게 되는 체험을 가지는 것으로 믿어왔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과 같은 강력한 힘으로부터 마음을 돌리고자 하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되는 체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만일 이것을 당신이 믿는 교리와 어긋난다고 생각한다면, 슬펄젼, 피니, 무디, 토리, 썬디, 스카보로 등등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큰 역사를 나타낸 사실을 생각해 보라.

  성령께서 스스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그 자체보다도 어떤 은사나 표면에 나타나는 어떤 표적을 더 강조하는 운동이 오늘날 세상에 진행되고 있음은 우리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 중의 하나이기는 하다. 우리는 그와 같은 운동에 대하여 잘못된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을 반대하여 싸우거나 아니면 그것을 피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그 어느 쪽도 마귀가 우리를 위하여 택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행동하기로 결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방법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무엇인가가 일어난다! 그 무엇인가가(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예수께서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을 갖다준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승리를 원한다면 더 많은 것이 있음을 속히 알아야 하며, 이 더 많은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생활을 주관하시도록 우리가 그에게 온전히 맡기게 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이러한 성령의 충만을 그 생활 가운데서 체험한 몇몇 사람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드와이트 엘 무디(Dwight L. Moody)

 

  무디씨의 아들이 자기 부친의 전기(傳記)를 쓰는 가운데, 이 유명한 전도자의 생애에 극히 중요한 해(年)가 있었음을 밝혔다. 1871년에 무디씨는 그가 전도사업에 얼마나 합당하지 못하는가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의 전도집회에 참석하여 앞줄에 앉아있던 두 여인으로 인하여 그는 영적능력을 원하는 강렬한 기갈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그 두 여인의 표정으로 그들이 기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집회가 끝나자 그 두 여인은 무디씨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습니까?”하고 무디씨가 되물었다. “당신에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들은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가 능력이 필요하다고요? 왜요?” 무디씨는 후일에 이 사건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했지요. 나는 시카고에서 가장 큰 집회들을 인도했고 또 많은 결신자(決信者)들이 나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건한 두 부인이 나를 위해 기도한 것과 아울러 특별한 봉사를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열심히 말하는 것 때문에 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나는 그들을 청해서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털어 내놓았고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 영혼에 큰 기근이 생겨 욕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전에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던 내가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봉사를 위한 이 능력을 얻을 수 없다면 더 살고 싶지 않다고 진정으로 느꼈습니다.”

  그러자 시카고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무디는 북부 성막의 건축 자금 모집사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동부지망을 여행하는 동안에 그는 영적능력을 더 얻고자 하는 굶주림을 또다시 느꼈다.

  “내 마음은 구걸하는 일에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호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늘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시에서 였습니다… 오, 얼마나 놀라운 날이었던지!…나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좀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성스러운 체험이었기에 감히 그것을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한 체험을 가졌으나 그것을 14년 동안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내가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내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생생하게 내게 체험케 해 주셨으므로 나는 그의 손을 그대로 두실 것을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말씀 전하러 나갔습니다. 설교는 전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나는 어떤 새로운 진리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수백명이 결신(決信)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게 온 세계를 다 준다 해도 나는 이 축복 받은 체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세계는 그저 조그마한 먼지와 같은 비중(比重) 밖에 없습니다.”

  토리 박사(R. A. Torrey)가 “하나님께서 D. L. 무디를 들어 쓰신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무디를 쓰실 만한 뚜렷한 몇 가지의 자격을 열거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마지막에 말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디는 틀림없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았다.”였다. 토리는 무디가 겪은 체험을 더욱 설명했다.

  “무디 선생은 뉴욕의 월스트리트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 복잡하고 번잡한 가운데서 성령충만을 위한 그의 기도가 갑자기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내렸습니다. 그는서둘러 친구 집으로 달려가 혼자 있을 수 있는 방 하나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방에서 그는 여러 시간을 혼자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심령을 채워주셨고 드디어 너무나 큰 기쁨이 그의 마음을 휩쓸었기 때문에 그 강렬한 기쁨으로 그가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달라고 간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그 장소로부터 그의 생애에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제이 월버 �먼(J. Wilbur Chapman)

 

  �먼박사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성별(聖別)을 받았는가를 말하고 이어서 믿음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아버지, 이제 나는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주님은 내게 살아계시는 실재(實在)입니다. 전에 나는 내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전에는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전에는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내 체험 속에서 ‘옛 것은 다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오스월드 챔버스(Oswald Chambers)

 

  챔버스씨는 인류 역사를 통해 가장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랑 중의 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목마르고 기근에 시달리며 속으로부터 힘을 구하여 몸부림 친 시대가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성령께서 나를 일하도록 기름 부어주셔야 하며 내게 불을 붙여 목표를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안 나갈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안 나갈 것입니다. 나는 내 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좀 독특하고 위대한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깊고 특이한 체험을 해야 하는 것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나를 사로잡아왔습니다. 여기에 어린양과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의 불 만이 제물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비참한 기간에 그는 다음 글귀를 지었다 :

 

    “올라가리라 올라가리라 내게는 시간이 있어

    바다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기 전에

    늦지 않도록 높은 곳에 올라가리라

    내가 간절히 있고 싶어 하는 그곳에 도달하리라!

 

  그는 에프 비 메이어(F. B. Meyer) 박사가 성령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바로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했다. 그러나 4년 동안 챔버스씨는 하나님과 아무런 의식할 수 있는 교통이 없었고 동기마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그에게 있어 성경은 지루하고 흥미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에게 때가 와서 누가복음 11장 13 말씀을 자기의 거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후에 얼마 안 되어 그는 스스로 이 구절을 증명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한 여성이 말했다. “좋습니다. 목사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말씀하셨어요.” 그는 다시 일어서서 말했다. “나는 당신들 누구를 위해서도 말하지 않았소. 나는 나 때문에 일어선 것이요. 기독교가 사기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잘못된 쪽을 잡고 있는 것이요.” 그리하여 그는 거기서 아까 그 성경말씀이 진실된 것임을 입증하게 된 것이었다.

  그 체험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나는 하늘이나 천사들의 환상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아무 능력도 하나님의 임재도 성령의 증거도 없었습니다. 나는 한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도록 요청을 받았으며 40명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다고요? 아닙니다! 나는 비참하게 여겨 그 집회를 떠났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어요. “당신은 성령의 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때 불빛과 같이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는 말하자면 내 스스로의 손에 능력을 쥘 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보라 내 전부를 제단에 드리고 얻은 것을’. 하고 내가 말할지 모르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꼭 같이 우리는 믿음으로 충만을 얻습니다. 내가 변화된 성품에 관하여 그렇게도 많이 말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성품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실 때 나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알 에이 토리(R. A. Torrey)

 

  토리 박사는 저서(著書) “성령, 그는 누구시며 무엇을 하시는가”에서 자신에게 능력의 성령께서 임하신 것을 묘사하고 있다 :

  “내가 내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정확한 장소를 기억한다. 조용한 순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조용한 한 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단순히 내게 말씀하셨다. 내게 들리는 음성이 아니고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네게 주었다. 이제 나가서 말씀을 전하라.’ 주님은 그의 말씀 요한일서 5:14-15에서 이미 그 말씀을 내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 성경 말씀을 지금 내가 아는 것처럼 알지 못했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나의 무지(無知)를 불쌍히 여기셔서 직접 내 영혼에게 말씀해 주셨다. 나는 나가서 말씀을 전했다. 그리하여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교역자가 되었다. 이 체험이 있은지 얼마 뒤에(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을 못한다) 어느 날 내가 내 방에 앉아 있을 때 갑자가 나는 고함을 질렀다(나는 고함지르도록 양육을 받지 않았고 또 고함치는 성미도 아니지만 가장 크게 고함치는 감리교인을 좋아한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나는 고함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성령으로 침례를 받는 때는 아니었다. 내가 성령의 침례를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단순한 믿음을 갖고 그를 우러러 봤을 때였다.” 토리박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다른 위인(偉人)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침례”의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용어(用語)에 전적으로 찬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가 충만함을 입는 체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서 눈을 돌려야 할 정도로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충만이라고 부르면서도 아무런 체험을 갖지 않은 사람보다는 그것을 침례라고 부르면서 충만함을 입은 사람이 내 마음에 든다.

 

  찰스피니(Charles G. Finney)

 

  피니씨는 “성령의 침례”라는 말을 사용한 또 한사람이다. 성령충만의 체험을 우리는 그와 같은 말로 부르지는 않지만, 이분의 생애와 사역에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임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피니씨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 체험을 말하고 있다 :

  “나는 1821년 10월 10일 아침에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에 나는 굉장한 성령의 침례를 받았는데 그것은 내가 느낀바 내 몸과 영혼을 통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능력을 받았음을 알았다. 내가 말을 하면 그것이 개인에게 떨어져 그것이 바로 그들을 회심케 하는 힘이 되는 것이었다. 나의 말은 마치 가시 돋힌 화살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찔리는 것 같았다. 검(劍) 같이 쪼개었다. 내 말은 망치처럼 마음을 때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증명한다. 때로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 나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당장에 회개토록 했다. 때로는 내게서 이 능력이 빈 것을 알게 되는 수도 있었다. 내가 과히 힘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결과는 다름이 없었다. 나는 내게서 그 능력이 아주 떠나가지나 않았나 하고 하루를 정해놓고 금식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열심히 이와 같은 능력 떠남의 원인을 얻고자 간구하였다. 나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도움을 청하여 부르짖을 때 내게는 다시 능력이 새롭게 돌아오곤 했다. 이것은 내 생애의 체험이다. 이 능력은 큰 놀라움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이 능력이 때로는 능력 충만한 사람의 분위기마저 바꾸어놓는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전체 분위기가 차 있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 능력을 입을 것이다. 그 장소를 지나가거나 거기에 들어오는 나그네들도 즉석에서 죄를 깨닫고,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낮추고 자신의 전부를 그리스도께 드려 성별(聖別)하고 이 능력을 간구하면, 그들은 그와 같은 성령의 침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전에 그들이 온 생애를 통하여 얻은 것보다도 더 많은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어 내는 도구(道具)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자기를 낮추어 능력을 받는 한 회심(回心)의 역사는 계속되며 그 나라의 모든 고장과 지역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