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2부 인간 생활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
2장 충만의 원리
잭 R. 테일러 |
제 2 장 충만의 원리
원 리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성도의 무조건 굴복으로 산 실재(實在)가 되어진다. 그 순간에 예수는 주님으로 성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역사에서도 그랬듯이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가 예수께 생명의 보좌를 드릴 때 성령이 오시어 그의 생명을 충만케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성령의 충만은 같은 체험의 양면(兩面)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면 그것은 예수께서 주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통치하시기 시작하심으로 제일 먼저 행하시는 역사는 우리에게 그의 영을 충만케 하시는 일이다. 이 시절에 있어서 성령의 인격과 그 역사하시는 곳을 예수와 구별하자고 할 때 혼동하기 쉽다. 사실상 그것을 구별하기는 불가능하다. 예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사시는 것은 성령을 통한 역사다. 그리스도의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 내재(內在)를 당했음이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삼위(三位) 중 한 분만이 아니라 삼위께서 모두 우리 안에 내재하신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첫째 원리다.
내재의 원리
성령께서 믿는 자가 회심했을 순간에 그에게 들어오셔서 거하신다는 사실 이외의 다른 일을 가지고 성령을 알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우리는 영적 실재(實在)의 내부보다 외부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또 하나의 잘못을 범하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심을 인정할 때, 충만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내재를 약속하셨다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예수는 요한복음 14:23 말씀을 하심으로 아버지를 포함시키셨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몸에 대하여 더 주의하도록 성령께서 내재하신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고린도 전서 3:16에서 물었다 :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령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을 생각할 때 성도에게 얼마나 큰 계시인가!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 8:9). 그리하여 또다시 바울은 말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그리하여 세 구절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심을 알게 된다. 우리가 내재의 원리를 공부하므로 불가피적으로 한 용어(用語)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그것은 성령의 침례다. 바울은 이 침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오순절 때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성령께서 강한 침례로 임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있었다 :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에 유하라”(눅 24:49). 그리스도께서는 더 말씀하셨다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행1:8). 사도행전 2장에는 성령의 강한 침례를 기록하였는데 그것은 마가복음 1:8의 약속의 성취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그리하여 제 4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성령이 내려서 누구(그리스도)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요 1:33).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오순절 날에 침례를 받았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각각 그 몸의 지체가 되므로 우리는 그 몸에 내재하시는 동일한 영에 의하여 침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성령의 충만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침례 또는 성령의 은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시게 되는 것도 성령의 침례를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원리
그리스도께서 내게 내재하신다면 성령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만일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도대체 누가 내게 내재하시는가? 우리는 이것을 한 번 뿐 만이 아니라 규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장 중요한 충만의 생명의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적어도 세 번 혼잣말로 해보라. “하나님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내재하신다. 그러므로 내게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내재하신다!” 하나를 말씀하는 것은 모든 것을 말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곧 지상(地上)의 예수와 하늘의 예수로 말이다. 지상의 예수는 육신의 모친과 스스로 육신을 가진 성육신(成肉身)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늘의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서 높임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각 성도에게 내재(內在)하신다. 지상의 예수는 우리들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죽이시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시고 오셨다. 하늘의 예수는 (성령) 영광을 받으시고 능력 가운데 방출되셨다. 지상의 예수는 제한(制限)을 받으셨으며 동일한 시간에 한 장소에 밖에 계실 수 없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이해하고 믿는 것이 더디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2,13). 하늘의 예수(성령)는 내부에서 가르치시는 저 새 교사이다. 누군가가 성령을 간단하게 “예수의 다른 자아”라고 말하는가 하면 캐럴(B. H. Carroll)은 성령을 “다른 예수”라고 짧게 부른다. 그는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땅의 예수는 하늘의 예수께서 오셔서 머무시기 위하여 가셔야 한다! 이와 같은 유리(有利)한 입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중(二重)의 능력을 갖는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구주로서 이 땅에 오시는 분이며, 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우리 안에 내재(內在)하시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민족을 구출해 낸 모세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끈 대장 여호수아의 사역과 흥미롭게 병행(竝行)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밖으로 인도되어 나왔었다. 모세는 백성을 “인도해 내는”데 사용된 그릇이었다. 여호수아는 백성을 “인도해 들어가는”데 사용된 그릇이었다. 땅 위에서 우리는 구주시요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재하시는 분이신 예수는 우리를 이끌어 내시고 또 우리를 이끌어 들이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말하게 될 때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고백과 정결의 원리
우리의 개인 생명에 성령의 충만함이 이루어질 때 곧 고백과 정결의 원리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성령에 관한 많은 가르침이 불충분한 상태에 있다. 그 이유는 정결하게 함과 그 전제 조건인 고백(告白)에 대하여 거의 언급함이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고백을 하게 될 때 모든 장애(障碍)는 제거(除去)되고 성령께서는 충만으로 응답하신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위대한 부흥들이 일어났던 기점(起點)이다. 유명한 성령 충만한 선교사였던 벌사 스미드(Bertha Smith) 여사는 저 「샨뚱」대부흥 때에 성도들 가운데 고백과 정결함을 입는 일이 중심을 이루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 “모든 죄를 다 고백해야 하며 그것을 버려야 하고 모든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정결함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비우는 과정(過程)이 없이는 채울 수 없다. 이러한 자기를 비우는 일은 우리가 정직하게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고(요일 1:7) 정결함을 얻기 위하여 죄를 고백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룻 팩슨(Ruth Paxson)은 성령의 충만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 세 가지를 들고 있다 : (1) 무지(無知), (2) 불신(不信), (3) 자백하지 않은 죄, 역대하 29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전(殿)을 축복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다. “이제 너희는 성결케 하고 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하라”(5절). 16일 동안 그들은 더러운 것들을 없이하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그의 전을 축복하셨다. 많은 신자들이, 인간적으로 말할 때 하찮은 것이라고 그저 넘겨버리는 극히 작은 죄를 고백하지 않으므로 성령 충만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죄를 용납하시지 않으신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원리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성령 충만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한 가지로 여긴다면 우리는 자신을 죽은 것으로 여긴다. 심프슨 박사(Dr. A. B. Simpson)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성령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장소로 결국 우리를 데려다 주시는 위대하신 장의사(葬儀社)시다. 곧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무덤을 사용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 자신의 동의(同意)없이는 그와 같은 십자가 생명에 동참하게는 못하신다. 우리 자신이 죽겠다는 동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겠다고 동의하면 성령의 임재와 통치에 의하여 우리 가운데 예수의 생명이 오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죽고 오직 예수에게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생명 교환(生命交換)의 원리다. 옛 사람의 생명이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대신해 새 사람(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승리를 안겨주기 위하여 자리를 잡는다. 우리가 살고자 한다면 죽어야 한다. 아주 단순한 원리다. 충만의 체험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가장 깊숙이 들어오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비록 성공을 거두고 있는 가운데서라도 육신의 생활 중에 너무나 비참하여 죽기만을 바라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다. 오직 사람이 죽기를 원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신다. 최근에 아캔소주 침례교회 목회자 수양회가 끝난 뒤에 가졌던 한 기도회에서 필자는 바로 뒷 자리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음성을 들었다 : “오, 주님, 나를 채워주시고 아니면 죽여 주십시오!” 필자는 조용한 가운데 주를 찬양하면서 주께서 지금 그에게 채워주시기 위하여 그를 죽이고 있는 과정에 있음을 생각했다! 필자 자신이 매우 비참하여 죽기를 바라기까지는 충만을 말하기를 반대했었다. 죽기를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살기를 원하는 사람만큼 많은 장애물을 갖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충만을 이룩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바로 뜻한다.
예수께서 자기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자격에 대하여 결코 에누리를 하시지 않으셨다 :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원하거든 죽을 준비를 하라!
“목마른 자여…와서…마시라”의 원리
명절 끝 날의 그 위대한 선언 가운데서 예수는 크게 외쳐 말씀하셨다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충만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더 뚜렷해질 수가 없다. 목마름은 욕구(欲求)의 강렬(强烈)함을 뜻한다. 누구라도 성령의 충만을 원한다면 그의 온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욕구하여야 한다. 그러한 강렬한 욕구가 드디어 그의 전인(全人)을 휩쓸기까지는 그는 성령의 영광스런 충만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 예수께로 오는 것은 방향을 잡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예수께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며 만물 안에 계신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충만을 주시는 복된 원천이심을 알고 그에게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마시는 것은 참가하고 받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예수를 “마신다.” 우리가 충만을 얻는 것은 마심으로써 이루어진다. 바울은 이 사실을 에베소서 5:18에서 말씀하였다 : “술 취하지 말라…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은 마심으로 취한다. 계속 마심으로 계속 취한 상태에 있게 된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성령의 놀랍고 이상한 능력 아래서 움직이게 될 때 남들이 그들을 술 취했다고 비난했었다. 사실 그들은 마셨던 것이었다! 그들의 생명을 통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방출되는 생명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내재하시고 다스리시는 주의 실재(實在)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강한 술을 마시면 때로 그가 술 마시기 전과 아주 달라지는 수가 있다. 소심(小心)한 사람이 담대해진다. 조용한 사람이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욕심 많은 사람이 남에게 인심을 쓰게 된다.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이 쾌활하게 된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되면 그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취하여 된다. 그리하여 그 놀라운 변화가 그 자신 안에서 생기는데 “한 다른 분”(주)이 그를 점령하신다. 그의 역사의 결과, 그의 모습, 그리고 그의 끊임없는 힘의 질(質)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 주게 된다.
믿음의 원리
필자는 오랫 동안 이 말을 젖혀두었다. “믿으라.” 목마른 자는…와서…마시라고 하는 원리 다음에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적 의미에서 성령의 충만을 놓치고 있다. 목말라서 와서 마신다. 그리고는 큰 흥분, 감정, 복받침, 신체적 현상 등을 기대한다.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필자는 오랜 동안 충만을 얻고자 기도하면서 감정적으로 충동적인 울음, 정서적인 고조(高潮), 황홀감을 기다렸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자 필자는 다시 평상시의 생활로 되돌아가 다음번에는 무엇인가 일어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필자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무한정하게 성령을 필자에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때가 왔다. 필자는 요한복음 7:37-38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처방(處方)에 “믿으라”는 말을 포함시키고, 조용히 말했다 : “예수님, 충만을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아무 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깨닫게 해주신 모든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제게 깨닫게 해주신 모든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제게 사시기 위하여 저는 죽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필자는 주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필자에게 충만케 해주심을 믿는 오직 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그가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하셨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있었다…흘러내린다. 이것은 바로 다음 원리로 우리를 이끈다.
하나님의 흐름의 원리
우리가 어떻게 기능을 발휘하는가를 공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흐름(神的流出)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간 생명을 통한 하나님의 생명의 자연적 흐름이다. 우리는 하나님 생명의 단순한 용기(容器)가 아니라 그 생명이 흐르는 통로(通路)다. 예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심에 따라 그는 세상적 영향(影響)의 흐름을 역행(逆行)시키신다. 세상의 영향을 받았고 또 환경과 사정에 좌우되던 우리는 이제 주께서 그의 생명으로 우리를 통하여 움직이고 계심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흐름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와서 다시 우리를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나간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므로 그의 계명을 지킨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요일 3:24). 우리가 계속하여 주 안에 거하면 거하는 우리의 믿음의 응답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흐름이 계속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계속 흘러나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흐름을 체험하고 있다. 지극히 조그마한 사랑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던 우리들의 마음에서 이제는 사랑의 강이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 순간의 평강이라도 찾아내려고 애쓰던 우리들의 생명 가운데 이제는 평강의 강이 쏟아진다. 굶주린 거지처럼 기쁨의 맛을 보려고 헤매던 우리가 지금은 기쁨이 강물과 같이 흘러내림을 알게 된다. 압력을 당할 때 참고 이기고자 애쓰던 우리가 이제는 인내(忍耐)와 양선(良善)과 부드러움이 우리를 통하여 흘러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믿음이 부족했던 우리에게 이제는 믿음의 홍수가 임했다. 하나님의 흐름을 인하여 주를 찬양하라! 얼마나 놀라운 강인가! 강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
강이란 자연적이며 흐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강은 비이기적(非利己的)이며 흐르는 곳이면 누구에게라도 간다.
강은 자신(自信)과 능력의 상징이며 작은 개울처럼 졸졸거리지 않는다! 강은 시종일관(始終一貫)하며 계속계속한다. 재촉할 필요가 없다. 강은 끊임 없이 정결케 함을 상징한다.
오물(汚物)을 그 속에 버려 보아라. 깨끗이 없애 줄 것이다. 강은 용기의 상징이다. 장애물을 그 앞에 두어보라. 그것을 극복(克服) 할 것이다.
강은 능력을 말한다. 강은 온 나라의 공장을 움직이고 불을 켜준다.
강더러 흘러달라고 애걸할 필요가 없다. 강을 흐르도록 “프로그램”을 짜거나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 그 흐르는 방향을 정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가는 길을 택할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계속의 원리
성령의 침례는 그리스도 안에 잠기게 되는 바 단 한번 밖에 없는 체험이다. 성령의 충만은 그 뒤에 계속되는 믿음이 뒤따르는 하나의 사건이다. 에베소서 5:18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은 문자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 “너희는 언제나 계속하여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있으라.” 이것은 바로 목마른 자…와서…마시라는 원리와 같다. 이것은 각각 현재 시제(現在時制)로 되어 있어 다음과 같은 뜻이다 : “누구라도 계속 목마르면 계속 와서 계속 마실 것이며, 성경 말씀대로 계속 믿는 자는 그 배에서 계속 생수가 흘러내릴 것이다.” 목마름이 그치면 예수께 나아오는 것도 그칠 것이다.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멈추면 마시는 것을 그칠 것이다. 마시는 것이 끊어지면 충만을 위한 믿음이 끝날 것이다. 충만을 위한 믿음이 끊어지면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이 멎게 될 것이다. 여기에 언급(言及)한 원리는 하나하나가 우리가 계속 실천해 나가야 할 원리다.
가장 중요한 계속의 원리 가운데 하나는 구약성경의 모세의 이야기(출 4장)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땅에 던진 것은 완전하게 깊이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일어난 사건은 하늘에서 능력이 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막대기가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 그것은 사람의 힘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지팡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지팡이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원하셨다. 모세의 전체를 원하신 것이었다. 지팡이는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길에 있었다. 모세가 그것을 땅에 던졌을 때 뱀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헌신하지 못한 자아(自我)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꼬리를 잡으라고 분부하셨다. 모세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막대기는 첫째 하나님의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것을 성화(聖化)시키시고 문자 그대로 그것을 “탈자아”(脫自我)하셨다. 그리하여 모세에게 그 꼬리를 잡게 하셨다. 그 뒤에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다 :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하나님의 지팡이)가 된지라.”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맺어진 관계는 지속(持續)되어야 한다. 위기(危機)와 승리가 번갈아 닥쳐올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지팡이의 원리는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
모세와 백만이 넘는 백성들은 애굽을 빠져나와 땅을 가로질러 홍해의 물가에 이르렀다. 바로가 변심(變心)하여 군대를 동원,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追擊)케 했다. 이제 여기에 이 원리들을 온전히 시험하게 되는 문제가 생겼다. 모세는 용기를 내어 백성들 앞에 서서 말했다 :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가 필시 바위 뒤에 들어가 여호와를 향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전에 “네 손에 무엇을 쥐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지금 그 말씀으로 다시 물으셨음이 틀림없다. 모세는 대답했을 것이다. “하나님, 전과 같은 지팡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전에 네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것이다. 그것으로 전에는 네가 할 수 있는 일 밖에 못했고, 너보다 더 강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것은 내 것이고 너도 내 것이다. 모세야, 그 지팡이를 들고 그 원리대로 행하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과 바다 위에 내밀었다 바다가 갈라졌다. 그들은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모세가 스스로의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사람을 통하여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건너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의 군대가 갈라진 물 사이의 길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온 것처럼 건너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하고 모세는 물었을 것이다. “모세야,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이 다시 물으셨다. “오, 네, 그 지팡이입니다!” 모세는 스스로 먼저 번 일을 상기하였다. “그것을 높이 들어라…원리를 선포하라. ‘그것은 힘이 아니요 능도 아니요 의나 영으로 된 일이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다!” 한번 지팡이를 내저으니 바닷물이 다시 하ㅂ치고 애굽 군대의 모습은 물속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원리는 계속한다.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식수(食水)가 떨어졌다. 무리들은 얼마나 불평을 했는가! 억지스러운 불평 가운데 처하게 된 모세는 다시 한 번 여호와께 물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모세야,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가라.” 하나님은 그들을 호렙산으로 이끄시고 모세에게 거기 반석을 지팡이로 치라고 하셨다. 지금 기억할 것은 그 지팡이는 옛날에는 모세의 손에 쥐어진 한낱 막대기였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고 사람의 힘으로 치는 것 이상으로 강한 힘이 나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지팡이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였다. 지금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구로서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연장이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바위를 쳤다. 강같이 물이 쏟아져 흘러나왔다.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적당히 설명해 치우고자 하지만, 그 기적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기적의 능력은 계속되는 믿음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능력의 원리에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르비딤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아말렉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었다. (그 일은 조만간 당한 일이다.) 이제 모세는 계속의 원리를 배우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골짜기에서 아말렉 사람들과 싸우게 하고, 자기는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싸움에 이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싸움은 심해졌다. 그리하여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고 있는 동안에는 여호수아가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피곤해져서 모세가 막대기를 버리면 싸움은 아말렉이 이기게 되는 것이었다. 싸움은 언제나 지팡이의 위치에 따라서 밀고 밀리고 했다. 지팡이가 높이 들릴 때는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고, 지팡이가 내려질 때는 패배를 당했다. 드디어 아론과 훌이 그것을 보고 도우러 왔다. 그들이 하나는 모세 이편에 하나는 저편에 서서 모세의 손을 높이 들어 지팡이가 내려오지 않게 했다. 성경에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인정하고 주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주의 능력을 받으며, 우리를 주께 의지함을 계속하게 될 때, 비로소 성령의 충만함이 이루어져 강이 계속 흘러내리고 전쟁을 계속 승리하게 된다.
할렐루야, 계속의 원리로다!
|
'성화 >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 잭R. 테일러'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장 둘째 축복이 있는가? (1) (0) | 2007.09.06 |
---|---|
2-3장 성령의 능력 (0) | 2007.09.06 |
2-1장 예수는 주님(2) (0) | 2007.08.29 |
2-1장 예수는 주님(1) (0) | 2007.08.29 |
1-6장 이중적 생명 (0) | 2007.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