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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 알프레드 깁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13)

by 복음과삶 2007. 9. 15.

제10장


3. 거듭남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신분을 얻은 것이다.


(1) "새로운 신분"에 대한 정의
여기서 "신분, 혹은 지위"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보좌가 요구하고 있는 거룩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흔히 "사업상의 지위" 또는 "사회적 신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개인들이 특정한 사업이나, 혹은 어떤 사회 계층 내에서 그러한 계층이 요구하고 있는 사항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살며 활약하는데 필요한 적합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적합성을 가리켜 우리는 신분, 또는 지위라고 부릅니다. 거듭나기 이전에 죄인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고, 또한 "원수 되었"던 자들입니다(엡 4:17, 롬 5:10).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신분과 지위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신자는 이제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받아들인 바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엡 1:6). 즉 하나님은 이제 신자를 그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동일한 존재로 보시며, 신자는 이제 이러한 새로운 지위를 통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친자녀로 받아들인 바 된 것입니다.

이에 찬송가 작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토록 가까이, 그토록 친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네.
그 아드님 예수 안에서
이제 나는 주님만큼 가까이 나아가는 자 되었네.
그토록 친밀하게, 그토록 사랑스럽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네.
하나님이 아드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바로 그 사랑으로 또한 나를 사랑하신다네!

또 다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떠나 있지 않다네.
이제 그 귀한 보배 피로 가까워졌기 때문이라네.
그 사랑하는 주님 안에 받아들여 졌다네.
하나님의 심장 가까이 나 누워 쉼을 누린다네.”

(2) 새로운 접붙이기 예화를 통한 "신분"에 대한 설명
아마도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고, 신자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신분을 얻는 일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지고, 명쾌한 예화는 다른 나무의 줄기에 전혀 다른 열매를 맺는 가지를 접붙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매우 신 레몬 나무가 있는데, 그 과수원 주인은 단 맛이 나는 레몬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그 해에, 주인은 레몬 나무의 가지들을 잘라내고, 그 잘라낸 자리의 나무껍질을 벗겨내고, 오렌지 나무 가지를 붙이거나, 끼워 넣어, 그 부분을 접합시킵니다.

이제 봄에 수액이 나오고, 이 접붙인 가지가 발육이 됨에 따라 점점 원가지 속으로 자라게 됩니다. 점차로 원래 레몬 나무가 땅에서 끌어올린 자양분이 접붙인 가지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가지는 점차적으로 나무로 성장하게 되며, 계절마다 풍성한 오렌지 수확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신 레몬 나무 줄기였지만, 이제 그곳에서, 접붙인 바 된 줄기를 통해 오렌지를 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접붙인 가지를 통해서 수액이 흐르면서, 레몬의 신맛은 신비스럽고도, 기적적으로 오렌지의 단 맛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예화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 레몬 나무는 바로 본질상 죄악된 성품인 육신을 가지고 나서, 죄악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태도라고 하는 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대한 그림입니다. 죄인이 그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감미로운 맛을 내는 과실을 맺기 이전에, 레몬 나무처럼, 그는 정죄받아야 마땅하며, 잘라지고, 꺾여짐으로 하나님 앞에서 끝장이 나야 합니다. 이처럼 나무가 베어지는 역사가 갈보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죄)하사."

레몬 나무가 그 주인의 눈에 보기에 레몬 나무로서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정죄된 순간, 주인은 그 나무를 잘라내어 버리고, 새로운 가지로 접붙였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고,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신뢰하는 그 순간, 육신 안에 있는 그 사람도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끝이 난 것입니다.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은 신자를 더 이상 죄인으로 보시거나, 죄인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보십니다. 접붙이기를 한 주인이 그 레몬 나무가 죽었다고 여기며, 따라서 그 후로부터는 그 나무를 "오렌지" 나무로 생각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이제 신자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은 자로 여기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레몬 나무의 경우, 그 나무가 잘라지고, 접붙여졌을 때, 이제는 "레몬" 나무로서의 정체성은 상실하고, "오렌지" 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자도 하나님 앞에서 "육신 가운데" 있던 그 정체성은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되었고, 이제는 "성령 안에"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보시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은 마치 레몬 수액이 여전히 이전의 나무줄기 속에 남아 있듯이, 신자 속에도 계속해서 육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를 "육신 안에" 있는 존재로 보지 않으십니다. 비록 죄가 신자 속에 여전히 있지만,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신분상으로 더 이상 "죄 가운데(in sin)"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나무는 접붙임을 통하여 그 주인이 보기에 전혀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접붙인 바 된 나무가 접붙임을 받았지만 레몬을 열매로 맺는 일은 가능합니다. 이 일은 이전의 나무가 접붙인 바 된 가지 아래로 싹을 틔울 때, 일어납니다. 이렇게 싹을 틔우는 일이 자양분을 받고, 발육의 조건이 되면 곧 레몬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나무는 두 가지 종류의 열매를 맺게 될 터인데, 곧 신맛을 내는 것과 단맛을 내는 레몬이 같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과수원지기라면 가위를 들고, 신맛을 내게 하는 레몬의 새싹이 나오자마자 바로 잘라내 버릴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로 옛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해 자기 판단이라고 하는 가위를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이 아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육에 속한 것을 바르게 분별하며, 그것으로부터 돌이킬 때, 신자는 성령님을 통하여 능히 "몸의 행실을 죽이"게 될 것이며(롬 8:13), 또한 육신을 계속해서 죽음에 위치에 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자는 과실을 많이 맺게 되고, 주와 구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요 15:1-8 참조).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신분은 완전할 뿐 아니라, 이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엡 1:3).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 값, 또는 십자가의 무한 값으로 사신 백성들을 위해 확보하신 모든 신령한 복들은 거듭난 모든 신자들의 즉각적인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령한 복들 가운데 몇 가지가 에베소서의 초반부에 나열되어 있으며, 신자의 영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가 받은 복을 헤아리고,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흥분되고, 감격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1-14절을 읽어보시고, 나열되어 있는 복마다 밑줄을 그어 보십시오. 이것들은 신자가 받은 엄청난 유업들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 거듭남은 신자들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이끈다.

(1) 모든 신자는 현재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불순종의 아들들", 혹은 "진노의 자녀"가 아니며(엡 2:2-3),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거듭나는 경험을 통해서 신자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외인"이었습니다. 다음의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의 마음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또는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와 같은 말씀을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7). 확실히 거듭난 신자라면 다음과 같은 요한일서의 말씀을 읽을 때, 크게 기뻐 뛸 것이 분명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요, 자매입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형제들(brethren)"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족 관계는 국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늙은 사람이건 어린 사람이건, 부자건 가난한 자건, 백인이건 유색인종이건, 배운 사람이건 못배운 사람이건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인 다 동일한 천국의 가족입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기록되었으되 "내신(태어나게 하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또는 태어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2) 이러한 관계는 변경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결단코 끊어질 수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 두 가지 사항을 구분해서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두면 좋을듯 합니다. 곧 관계와 사귐입니다. 관계는 출생과 관련이 있지만, 사귐, 또는 이러한 관계를 누리는 것은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와 같이, 자녀들의 어떤 불순종이나 자기 고집 등의 행위는 아버지로 하여금 징계의 매를 들게 하며, 이로 인해 서로 마음이 불편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불순종이나 어떤 죄를 짓게 되면, 이로 인해서 하늘 아버지의 징계를 초래하게 되고,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불순종하는 자녀라도 그 아버지의 자녀가 더 이상 아닐 수는 없지만,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일은 있는 것입니다. 영향이 미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귐입니다. 일단 자녀가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을 아뢰며 사죄를 하게 되면, 사귐은 다시금 회복이 됩니다. 이제 독자들은 이것을 영적으로 히브리서 12:5-12과 요한일서 1:7-10의 빛을 통해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엄청나게 큰 가족들이 모두가 다 영광스러운 만남, 또는 재회를 하게 되고, 죽음에 의한 이별이 없어지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주 예수님이 그분의 약속대로 다시 오시는 날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요 14:1-3). 이것이야말로 신자들의 최고한 소망입니다.

5. 거듭남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운 시민권을 얻는 것이다.

(1)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의 출생지에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 3:20). 거듭남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할뿐만 아니라,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부여받게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태어난 세상, 곧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미국 시민이 되기로 결정하면 자신의 국적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이후에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생겨서 방문할 때, 그곳 공항에 내리게 되면,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정부가 자신을 "외국인"으로 대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하자면, 자신의 원래 국적을 버리고, "더 나은 본향"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곧 자신이 원래 태어난 나라에서 계속 사는 동안은 "나그네와 행인"이 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벧전 2:11).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기 본향에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행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본향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외국인처럼 여행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옛날 순례자가 말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곳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네.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민 10:29)".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이제 순례의 행렬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내가 발견한 보화가 이것일세.
그것이 나를 이 땅에서 순례자 되게 했네.
내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 뵐 때,
내가 알았던 그 주님을 충만 가운데 뵈오리!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했던 믿음의 숭고한 용사들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자들로 당당히 밝힘으로써,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히 11:9-16 참조).

(2) 이러한 "외국인과 나그네"의 특징
거듭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천국의 시민으로 살면서, 경건하며 또한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삶을 살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동일하게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도록 가르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딛 2:11-12). 거듭난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의 계명에 주의하면서,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을 추구합니다(벧전 2:12). 거듭난 사람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며, 세상이 주는 쾌락이나 유행이나 정치나 또는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합당치 못한 동역(또는 협력) 관계를 맺음으로써 스스로 올무가 되는 일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으며, 또한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고후 6:14-18). 따라서 거듭난 사람들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구별된 삶을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거듭난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일 2:15-16, 요 17:14-17).

 

http://www.christian.or.kr/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