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명의 말씀/스펄전

2. 스펄전 - 소경에게 던진 우리 주님의 질문

by 복음과삶 2007. 9. 21.

 

소경에게 던진 우리 주님의 질문

 

마태복음9장 27절∼31절     

  

 

시작하는 말

 

우리 시대 서구 사회에는 한센병(문둥병)이나 안질이나 어떤 다른 형태의 질병이 놀랍게 줄어든데 대하여 우리는 아주 크게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은 소경이 되지않게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고 또 치료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질병의 재앙 때문에 국가가 경제적으로  궁핍하기에 이를 정도의 사태도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의 시대에는 소경이 너무나 많았고 그분 주위에 많은 소경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일에 대한 기사를 복음서에서 자주 발견합니다.

긍휼은 그 긍휼을 베푸는 자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비참함을 대면합니다. 인간의 슬픔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났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정말 가장 긍휼어리게 작용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멀어 있는 것이 아주 다반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전 당신이 쓰시던 방식대로 역사하사 넘치는 이 악함 속에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말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지금 이 시간에 영적 시각을 얻기를 갈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여기 이 본문에 등장하는 두 소경이 예수님을 보기를 갈망하였던 것 같이 말입니다.

정말이지 바로 예수님을 보는 것이 영생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온 것은, 자기들이 영적인 소경됨을 느끼고 하나님의 빛 - 용서의 빛, 사랑과 화평의 빛, 거룩과 정결함의 빛 -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은 흑암의 관보가 들쳐지고 거기 틈새로 하나님의 광선이 영혼 속, 음울함의 속까지 침투하여 본성의 밤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오, 여명(黎明)의 순간이 ‘속 사람이 소경’된 여러분들 많은 이들에게 즉시 임하기를 마랍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즉시 빛이 비춰지는 복락이 주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저는 진리가 수년 동안 여러분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가 결국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 우리는 그러한 결과가 즉시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그것만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 있는 빛의 성질과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여기 이 지상에 내려오사 머물러 계셨을 때, 소경의 눈을 만지셨고, 즉시 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도 영적으로 그렇게 신속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남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오거나, 예수님 음성을 듣고 계신 데를 알고 벽을 더듬으며 찾아온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만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갈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을 기뻐하면서 안내자 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기이한 일을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존하여 주의 말씀을 설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표적들을 주시할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일이 즉시 일어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어째서 본성이란 어둠을 가지고 이 터버내클(Tabernacle. 이 설교를 할 당시 스펄젼이 시무하던 교회)에  온 여러 수백의 영혼들이 돌아갈 때 하늘의 빛으로 복 받지 못한 채 돌아가야만 하는 것입니까? 어쨌든 이것이 우리 마음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시급한 소원입니다. 우리는 여러 모든 기능들을 다 여기 이 목적에 집중시킬 것입니다.

 

 

본문 강해

 

이제 우리와 함께 본문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이 본문이 여러분에게 펼쳐 보이는 진리를 감동 받고 싶은 간절하고 자원하는 기꺼운 심정으로 충일(充溢)하시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1. 주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소경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자들인가?

 

먼저 우리가 이 대목을 설명함에 있어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이들’ 그들 두 사람의 소경들에게 여러분의 시선을 모아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모든 이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경들의 간절함

 

우리는 대번에 두 사람의 소경들이 ‘철저한 간절함’에 빠져 있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호소하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는 “소리질러”입니다. 이 말은 그저 단순하게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소리질러 말하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리지름’은 간절하고 힘있고 애원어리고 애절하게 자기의 청을 아뢰는 탄원의 자세를 함축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어조와 몸짓은 그들이 그저 한가하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깊고 열심히 추구하고 있음을 시사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경우에 있다고 상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수년간 밀턴이 ‘언제나 지속되는 어둠’이라고 일컬은 상태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복된 빛을 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겠습니까! 그들은 보는 것을 위하여 목말라 주려 있었습니다. 그러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하여 그러한 열정으로 구하기 전에는 구원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간절한 자들이 얼마나 소수에 불과한지요! 어떤 이들은 돈벌기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자기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얼마나 간절히 열심내는지요! 그들은 정치적인 이해나 선거구의 일에 대하여는 아주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의 문제를 그들에게 조금만 내비쳐도 북극의 눈처럼 차가워집니다.

오 선생님들이여,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여러분이 반은 잠들어 있는데 어떻게 구원 받기를 바랄 수 있나요? 여러분이 마음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죄 용서와 은혜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주 무섭게 실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망과 영원, 심판과 지옥은 농담거리로 삼을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의 영원한 운명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써 구원받은 것이 사소한 문제는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믿는다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짓으로 믿음을 표시하는 것이 지옥의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 주지 못합니다. 중얼거리는 투로 “우리 아버지”라고 하거나, 그저 서둘러 몇 마디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소경들이 만일 자기들의 눈이 떠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가지지 않았었다면 여전히 소경인 채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열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악들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온전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도 그러합니까?

 

철저한 인내

 

소경들은 간절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철저하게 견디어 내고’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 어떤 방안을 세웠었습니까?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기란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주께서 취하시는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끗 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분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를 그분이 계신 데까지 인도해 주세요. 우리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계셨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그가 어디에 계시든지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찌나 굽히지 않는 기세로 나갔던지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하였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집 밖으로 나오시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앉아계신 방으로 밀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보기 위하여 온통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하게 소리치는 바람에 예수님의 설교는 중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멈추시고 그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끈질긴 기도

 

그렇게 끈질김이 이깁니다. 끈질긴 기도의 예술(藝術)을 아는 이는 어느 누구라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문지기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기까지 긍휼의 문을 떠나지 않을 마음의 결심만 한다면, 문지기가 나와서 빗장을 풀고 여러분에게 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말로 언약의 천사를 붙잡고 놓지 않으면,

곧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놓지 않는 자세를 견지(堅持)하면, 여러분은 씨름 장소에서 넉넉히 이기는 자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아 열린 입은 믿음의 눈으로 활짝 열려 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도 기도하십시오. 아무리 빛의 소망이 전혀 없어 보이더라도 말입니다. 빛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가련한 죄인을 감동하사 축복이 임하기까지 계속 부르짖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그 가련한 죄인을 조롱할 생각을 전혀 갖지 않으십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진 기도

 

이 소경들은 기도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괜히 칭얼대고 우는 아이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나 다 가지고 싶어하는 수전노(守錢奴)와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바가 그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영적으로 눈멀어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눈멀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보면 꼭 구해야 하는 한 가지 필요한 것은 빼놓고 다른 것만 구합니다. 소위 기도하는 것들이 아름다운 미사여구와 경건한 척하는 문장들로 꾸며져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기도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원하는 것을 구하고 또 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기도에 어떤 필요하다는 의식도 없고, 구하는 것의 진정한 방향도 없고, 이치있게 하나님께 진술하지도 못하는 기도란 대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 또렷한 말로 구원하여 달라고 구하였습니까? 여러분에게 새로운 마음이 필요함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을 필요성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권속이 될 긴박한 필요를 표현하셨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몰두하되, 마치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기도하는 그 일에만 관심있는 것같이 하기까지는 전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이미 간절하고 끈질기게 구하는 상태에 처하게 되고, 가르침을 받고 자기가 원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생각으로 충만하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는 것을 성공할 것입니다.

날카로운 갈망의 화살을 시위에 맞히기 위해 힘있는 팔로 당기되, 가르침 받은 교훈의 눈으로 의도하는 목표를 향하여 쏘면, 그는 과녁의 정통을 맞힐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빛과 생명과 용서함과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십시오. 목숨을 다해서 이것들을 위하여 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이 분명하니 이러한 좋은 선물들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그러한 자들 중에 누구를 거절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를 존귀케하는 기도

 

이 소경들은 기도하면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해 드렸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땅의 큰 자들은 우리 주님을 왕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힘있고 바르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리한 시력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이들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 그분이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야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단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시고, 메시야는 눈먼자의 눈을 보게 하시는 분이시니 예수님은 분명 자기들의 닫혀진 눈을 열어 보게 하실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메시야로서의 표징되는 일을 이행하여 수집하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실천적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 드렸습니다.

이것이 항상 바로 하늘로 신속하게 올라갈 기도의 양식입니다. 다윗의 자손을 크게 존귀하게 여기는 기도가 바로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를 광대하게 하고, 그의 사심과 죽으심의 공로를 크게 선양하고, 그리스도께 영광스러운 칭호들을 드리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그를 경외하고 크게 존귀하게 생각하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기도는 그 속에 천사들의 날개의 힘과 신속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들은 그 속에 천상적인 능력의 요소들이 풍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올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를 작게 여기는 기도는 하나님께 작은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구속주를 영화롭게 하는 기도는 지성소에서 올라가는 향연의 기둥같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달콤한 냄새를 풍깁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의 고백

 

또한 이 두 소경이 기도를 통해서 ‘자기들의 쓸모 없음’을 고백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호소하는 오직 한 가지 요점은 긍휼을 베풀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공로에 대하여 한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지난 과거에 당한 고난에 대하여나, 또 열심을 낸 일에 대하여나, 앞으로 어떤 결심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만 할 뿐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복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들에게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정죄받은 범인이 왕에게 호소하며 왕이 가진 사변의 특권을 행사하여 주십사 하고 요청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거지가 거리에서 구제하여 주기를 구하듯이 우리도 지존하신 이에게 가서 자비하심에 입각한 긍휼의 은전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로 구해야 합니다. “오 하나님, 만일 주께서 나를 멸하시면 저는 마땅히 그러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주께서 제게 한 전의 위안어린 얼굴을 돌리지 않으실지라도 사실 저는 불만을 가질 수 없나이다. 그러나 주님, 당신의 자비하심을 인하여 한 죄인을 구원하소서. 저는 그 어떠한 것도 주님께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시니 당신만 애절하게 바라는 이 불쌍한 눈먼 영혼을 굽어살피소서!”

내 형제들이여, 저는 좋은 말을 한꺼번에 다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웅변술을 배우는 학교에 들어가서 웅변술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 말로 발라 맞추려고 하는 것은 제 마음이 혐오하는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과 양심을 향해서 곧이곧대로 말씀드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 수많은 이들 중에 바른 방식으로 듣고 있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으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 드리면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묻는 이가 있겠지요? “대체 어떠한 식으로 들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따라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같이 긍휼을 구하는 죄인을 묘사하는 대로 나도 할 것이다.

 

나도 오늘밤 기도하고 하나님께 아뢸 것이다. 나는 내 간구를 통해서 계속 예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아울러 내 자신은 그 자체로 아무런 쓸모도 없음을 고백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윗의 자손의 손에 있는 긍휼만을 간구할 것이다.”

 

 

2. 주님께서 던지신 질문

 

두 번째로, 우리는 이제 시선을 돌려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던지신 질문’에 대하여 주목해 보기로 합시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 열려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둘 다 스스로 볼 수 없는 자로써 주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묻기 시작하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알아볼 양으로 질문을 던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던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딱 한 질문만 던지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 질문은 그들과 그들이 볼 수 있는 일 사이에 서 있는 단 하나의 문제를 건드렸습니다. 그들이 그 소경의 방에서 벗어났으냐, 아니면 여전히 소경인 채로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대답 여하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죄인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오직 한 가지 그 질문만이 걸려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리고 만일 어느 누구든지 소경들이 한 것같이 “예,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참으로 대답할 수만 있다면, 그는 분명히 응답받게 될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는 응답을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진지하고 세심어린 자세로 매우 무게 있는 그 질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과거에 어떠한 유(類)의 사랑을 베풀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올 때 과거가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더러 너희가 너희 눈을 뜨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법들을 써 본 적이 있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은 여전히 눈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희에게 장차 치료의 효력을 발할 신통한 의사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호기심어린 질문들이나 격에 어울리지 않은 사변들을 생각해 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의 질문들은 모두 다 오직 한 가지 요점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요점이란 바로 ‘믿음’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까? 어째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의 사역에서나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 어디에서 언제나 믿음에 그러한 강조점을 두시는 것입니까?

 

믿음의 두레박

 

어째서 믿음이 그리도 진수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수용 능력 때문입니다. 돈지갑이 사람을 부자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돈을 넣어 둘 장소가 없다면 사람은 부를 획득할 수 있습니까? 믿음 그 자체는 구원을 위하여 한 점도 보탬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배로우신 그리스도를 모셔 두는 지갑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니 믿음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든 보화를 다 담아 둡니다. 어떤 사람이 목말라 있다고 해도 끈이나 두레박 자체가 그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들을 방도로 해서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구원의 우물물에서 물을 퍼 올려 사람의 마음으로 들이키게 두레박입니다.

여러분은 때로 큰 거리 귀퉁이에 있는 샘에서 물을 먹기 위해 멈춰 선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물을 퍼 마실 잔이 어디론지 가버렸습니다. 물은 솟아올라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을 뜰 그릇이 없습니다. 목이 말라 샘 곁에 갔으나 그 물을 뜰 작은 그릇이 없어 여전히 거기에서 목말라 있다면 정말 감질나는 일입니다. 그러합니다.

믿음은 작은 그릇입니다. 우리가 그 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흘러 넘치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잔을 채우고 마시면 시원함을 얻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영국에서 미국까지 해저 케이블을 연결하는 것이 정말 허탄한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만일 과학으로 말미암아 신호를 보내어 서로 교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면 우리도 그 일이 정말 쓸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케이블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전신술의 발명들도 두 대륙을 잇는 전선이 없다면 정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시 이 설교를 할 때가 1860년대 였으니 그때에는 무선 통신이나 전자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다만 전신술이 초보단계를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여기서 설교자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역주) 믿음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영혼과 하나님을 잇는 고리입니다. 그 믿음을 따라서 생명의 메시지가 우리 영혼 속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은 때로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우 잘 끊어질 듯한 연약한 실에 비교될 수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모든 것에 있어서 매우 보배로운 것입니다. 믿음은 큰 일들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현수교

 

몇 년 전에 그들은 저 깊은 아래로 항해할 수 있는 강물을 흘려 보내는 큰 구렁을 가로지르는 현수교를 놓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공중에 철로 된 다리를 높이 매달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어야 합니까? 그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화살 하나를 쏘아붙였습니다. 그 화상 끝에 작은 실을 매달아 쏘았으니 화살을 저쪽으로 날아갔을 때에 실도 따라서 날아가 저쪽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는 실만으로 시작은 충분합니다.

그래서 두 쪽이 연결된 것입니다. 점차 그 실에가 더 질긴 꼰실 꾸러미를 달아서 잡아 당겼습니다. 그리하여 그 꼰실이 저쪽으로 가게 되어 연결이 되면 거기다가 작은 밧줄은 금방 케이블을 또 옮깁니다. 그래서 그 밧줄은 금방 케이블을 또 옮깁니다. 그리고는 때가되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쇠줄까지 설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아제 나중에는 견고하고 영구한 다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이 그리해서 설치되는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믿음이 때로는 아주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일지라도 여전히 정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녀리게 보이는 믿음이 영혼과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교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믿는다면 여러분 사이와 그분 사이를 잇는 고리가 있는 셈입니다. 연약함이 그의 능력을 의지하고 매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아님이 그의 충분하심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를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복락도 여러분에게 흘러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주님의 이름으로 제가 모든 구원을 원하는 모든 죄인에게 던질 질문은 바로 다름 아닌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체중이 얼마나 나가는지 그것은 제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귀족인지 천민인지 저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왕족인지 아니면 시골뜨기인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배운 이든지 못 배운 이든지 그러한 것이 제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에게 전할, 같은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같은 요점에만 강조점을 두어야 합니다. “네가 믿느냐?” 만일 여러분이 믿는다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은혜의 복락에 참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 던진 질문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들 소경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하여 던져진 질문입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만일 우리가 각성받은 죄인에게 ‘당신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아닙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더 잘 알아요.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던 나는 이제는 죽었습니다.’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  ‘은혜와 성례의 제도와 방편들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묻고, 그가 지성적이고 각성 받고 회개하는 죄인이라면, 그는 ‘나는 더 잘 알아요. 나는 그러한 것들을 시험하여 보았어요. 그러나 그것들 자체로는 전혀 쓸모가 없었어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정말 우리 안에나 우리 주위에는 한 시간도 소망을 건설할 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 “내가 능히 이일 할 줄을 믿느냐?”를 듣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예수, 지존자의 아들

 

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할 때 단순하게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이들 위에 계신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존자의 아들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에 오시어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는 여인의 태에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같이 자리셨습니다, 그는 키가 자라고 지혜가 충족해진 어른이 되셨습니다. 삼십 년 이상 사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결국 인간의 육체를 입고 계셨던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죄책을 가진 사람 대신 서서 그 사람이 받을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예수님 믿는 자들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말입니다.

그가 죽으셨으나 짧은 시간만 무덤이 그를 담아 둘 수 있었을 뿐입니다. 셋째 날 이른 아침에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죽을 자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죽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많이 사람들이 당신 자신이 몸을 입고 실제로 살아 계셨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정말 오래도 참으셨습니다.

역사 속에 있었던 그 어느 사건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만큼 그 진실상이 잘 입증되지 못하였습니다. 부활하신 그 분을 직접 눈으로 본 몇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2명이 한꺼번에 주를 뵈었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계시다가 당신의 제자들이 보는 자리에서 하늘로 올리워 가셨습니다.

구름이 그분을 가리워 그들 제자들이 더 이상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그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나무에 죽으셨던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높은 하늘에서 지금은 만유의 주로 높여지사 면류관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천사들이 그를 기뻐하며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이 가련한 입술을 통해 오늘밤에 여러분에게 던질 한 가지 질문은 그것입니다.“내가 능히 너를 구원할 줄 믿느냐, 지금 하늘에 거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너를 능히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느냐?” 모든 것이 그 질문에 대해 여러분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께는 어려운 일이나 불가능한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분이 속죄를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것을 하나님께 허락 받았다면, 그의 피에는 나같은 자라도 깨끗케 하는 효력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대답은 이러해야 합니다. “주 예수여, 그러하외다. 내가 당신이 이 일 할 줄을 믿나이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의 다른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같이 그 말에 강조점을 두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이제 이 소경들이 “우리는 주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나이다.”라고 말하였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으면 주님께서는 “아니다. 지금 문제되어 있는 것은 너희 눈을 떠서 보게 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바로 ‘그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한 선생님이시여, 우리는 한 여자가 당신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여자의 몸에서 흐르던 것을 멈추게 하셨음을 믿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아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너희 눈이 지금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너희는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 믿음에 관한 문제는, 너희가 내가 바로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오라

 

아,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 충분하게 여러분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제를 가지고 와서 “그리스도께서 바로 ‘당신’을, 아니 ‘당신까지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바로 그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죄에 빠져 아주 멀리 가버린 어떤 자들에게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친구들이여, 여러분이 아주 삶의 작은 시간의 간격 속에서 아주 큰 죄악들을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짧은 인생을 살았고 즐거운 삶을 영위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전망으로 볼 때에는 짧은 인생을 살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겨움이 여러분에게 이미 너무 지나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자기의 삶을 뒤돌아 볼 때에 어떤 남자나 어떤 여자도 여러분이 행한 것보다 더 어리석게 자신의 인생을 내팽개쳐 버린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하니 여러분은 구원받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나도 구원받고 싶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제게 대답하십시오. 제가 던지는 다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능히 ‘이 일’, 곧 여러분의 모든 죄를 씻고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여러분을 오늘밤에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하여 “오, 선생이시여, 나는 그가 능히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가 능히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바로 문제의 현안입니다. 그 점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을 어떻게 견지합니까? 다른 이들의 경우는 놔두시고 여러분 자신의 문제를 숙고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가 능히 ‘바로 그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이 일’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바르지 못하게 살아온 여러분의 인생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문제의 범주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 여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주의 능력을 믿는 것을 꿈꾸면서도 자기 자신의 경우에는 확신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분이 바로 ‘이 일’ 할 줄을 믿어야 합니다. ‘이 일’은 바로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여러분의 문제’에 대하여 믿지 않으면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대하여는 불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덕주의자의 함정

 

지금 제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세상의 여러 가지 악으로 치달아 간 적이 없는 이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도덕성과 신실함과 정직함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 중에 어떠한 이들은 자기들이 뻔뻔한 큰 죄인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뻔뻔스러운 죄인들이 설교를 듣는 것같이 듣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들, 뻔뻔한 죄인들이 회심하여 돌아서는 것 같은 일이 여러분 자신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이들의 회심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러한 지혜롭지 못한 소원을 가지려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이 질문을 잠잠히 듣고 대답할 준비를 하십시오. 여러분의 경우는 외적인 의무를 온전하게 다 이행하였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나태했던 한 도덕주의자의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마치 회개라는 것이 자기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의에 너무나 오래 취하여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부패의 근원을 어떻게 해야 제거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자기 의에 취한 잘못에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하시되, 죄의 습관에 빠져 있던 다른 이를 구원하는 경우와 같이 쉽게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능히 ‘그 일’ 하실 줄 믿습니까? 오십시오. 여러분은 그가 능히 그 일을 해결하실 수 있음과 그 일을 능히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예’,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확정된 믿음의 소망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아뿔사, 내 마음은 너무나 굳어 있어’라고 탄식할지 모릅니다. 그가 능히 그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기 하실 줄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화강암같이 굳어 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한 경우에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리스도께서 그 것을 한 순간에 눅눅하게 녹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마치 바다 바람과 물결과 같이 정함이 없이 흔들린다고 상정해 봅시다.

그러한 경우에도 여러분은 그가 능히 여러분을 확정된 마음의 소유자로 만드시고 여러분을 영원한 반석위에 세우실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를 믿는다면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따라 그 일이 여러분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곤란한 요점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을 위하여 능력 행하심을 믿는 대로 생각을 돌리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는 여전히 떨고 있습니다.

저는 각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요점을 강조하여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 각자를 붙들고 상세하게 말하며 실질적인 시금석에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내가 ‘이 일’ 할 줄을 네가 믿느냐?”

 

어떤 이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니 주께서 오늘밤에 나를 구원하시려 한다면 아마 주 예수께서 행하신 일 가운데 가장 기이한 일이 될 거야”라고 말입니다. 주께서 그 일을 능히 하실 줄을 믿습니까? 지금 주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그 일을 하실 줄 믿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이적 일거야.” 주님 예수께서는 이상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그는 전에 이적을 행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그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 일은 바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믿음이 가진 능력은 놀랍습니다. 주 예수님을 향하여 가진 믿음의 능력이 말입니다. 저는 제 작은 방식 속에서 담대한 확신이 여러분을 어떻게 정복할 지에 대하여 자주 체험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어린아이의 신뢰심에 압도당한 적이 흔하지 않았습니까? 어린아이가 던지는 단순한 요청은 너무나 신뢰심이 가득해서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길을 건너는 소경에게 붙잡힌 적은 없습니까? 그 소경이 여러분에게, “선생님, 저를 인도하여 길을 건너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그 때 그는 아마도 무언가 아주 교묘하게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는지 모릅니다. “저는 선생님의 음성으로 선생님이 친절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저는 선생님을 신뢰할 분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여러분은 그 일에 붙잡혔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께 ‘저는 주께서 저를 구원하여 주실 줄 알아요. 나의 주시여, 저는 주께서 구원하여 주실 줄 알아요. 나의 주시여, 저는 주께서 구원하실 줄 알아요. 그래서 저는 주님을 믿지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어찌 여러분을 뿌리치시겠습니까? 그 분이 그러한 영혼에 대하여 그렇게 냉철한 자세를 가지실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은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로 그 점을 예증하기 위하여 한 예를  들곤 합니다.

 

믿음의 승리

 

이야기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 믿음이 어떻게 이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제 집의 정원은 푸르게 보이기는 하였지만 길은 보호 시설이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 정원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습니다. 이웃집 개가 우리 집 정원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우리 정원에서 피는 꽃에 하나도 유익이 없으니 한 번도 그 개를 정중하게 맞은 적이 없지요. 하루는 저녁에 가만히 걸어가서 개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가는 막대기를 던져 제 집으로 가도록 쫓았습니다. 그러자 그 놈이 제게 어떻게 대꾸하였는지 아세요? 그 녀석이 돌아보더니 꼬리를 치며,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제가 던진 막대기를 물고 제게 가져와서는 제 발 앞에다 놓았습니다. 내가 그 놈을 때렸겠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그 놈의 들을 쓰다듬어 주면서 언제라도 원하면 오라고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질 것 같았습니다. 그 놈과 저는 금방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놈이 나를 믿고, 나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지만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철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개가 사람을 신뢰함으로 사람을 이긴 것과 같이 가련한 죄인도 사실은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가련한 개와 같은 죄인입니다. 주님은 나를 쫓아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기에는 너무나 선하신 분이심을 믿나이다. 나는 주께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나이다. 나는 구원을 받든지 구원을 받지 못하든지 오직 당신에게 나를 맡기나이다.”

아, 친애하는 마음을 가지신 여러분이여, 여러분이 그러한 식으로 믿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께 맡기는 이는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러하오이다.”라는 답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길을 흔연히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그를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이치에 맞는 질문

 

이제 셋째로, ‘그 질문은 매우 이치에 맞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봅시다.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잠시, 저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질문을 던지신 것은 매우 합리적이었음과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이들에게 종용하는 것도 동등하게 이치에 함한 것임을 보여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만일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지 않는다면 어째서 나를 따라왔느냐?’고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너희는 다른 이 말고 ‘나’를 따라왔느냐? 너희는 거리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여기 나를 따라 이 집까지 왔다. 만일 너희가 내가 너희 눈을 열어 보게 할 줄로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하였느냐?”

여기 오늘밤에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중 아주 많은 분들이 예배당에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오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여기 오기를 좋아합니까? 무엇하러 오기에 오는가요?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없는 구주를 찾으러 오십니까? 저는 자기가 믿지 않는 의사를 찾아서 병을 고쳐 달라고 하는 병자 같은 미치광이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대한 어떤 믿음도 없이 오늘밤에 여기에 왔습니까? 다른 때에도 믿음이 없어도 자주 여기에 옵니까? 만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여기에 무엇하러 오는 것입니까? 정말 여러분은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없지요?

 

기도한 이유

 

다시, 이 소경들은 자기들의 눈을 뜨기 위하여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한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치료하실 수 있음을 믿지 않았다면 그들의 기도는 정말 우스갯소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것 좀 하라고 요구하겠습니까?

기도는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에 얼마나 많은 양의 믿음을 투영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도의 진위 여부가 측정되지 않겠어요?

자, 저는 여러분들 중에 어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내내 기도하는 습관속에 살아온 자들임을 알고 있습니다. 밤에 자려고 할 때 어머니가 가르쳐 준 기도의 형식을 되풀이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여러분은 그 분이 하시리라 믿지도 않는 일을 하여 주십사 하고 요구하는 것입니까? 정말 믿음 없이 기도하는 것같이 이상한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이 소경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그렇게 고백하였을까요? 여러분 중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회중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하는 이는 아주 드물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영감되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죽으셨고 다시 당신의 영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신데도 하실 수 없다고요? 죽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속죄하시고 희생제물로 돌아가셨는데도 구원하실 수 없다니요? 아니, 여러분이 규범적으로 외우는 신조가 진정으로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조를 작성하려고 한다면, 이렇게 써야 할 판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아니면 그가 죄를 위하여 충분한 속죄를 하였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가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르지 않습니까?

자,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저 큰 낡은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으면 제 말에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선생들이여, 그분은 여러분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그분을 믿은 지 27년 가량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에 대하여 발견한 대로 그분에 대하여 말씀드려야 합니다. 어둠의 시간마다, 절망의 때마다, 제가 만난 모든 시련의 때마다 그분이 신실하고 진실하심을 저는 알았습니다. 제 목숨을 다하여 그를 신뢰할 정도로 그분은 미쁘시고 진실하십니다.

만일 제가 천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천 개의 목숨을 다 드려 그 분을 신뢰할 것입니다. 만일 제가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은 목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는 ‘다른 구주’를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 모든 목숨을 다 묶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그 사랑하는 손에다 바치겠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영원히 붙잡아 주시도록 말입니다. 그는 정말 여러분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여러분이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능히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으심을 아시고 말입니다.

그분이 죽으셨음을 안다면 그분이 억지로가 아니고 자원하는 심정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여러분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따라서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4. 소경들의 대답

 

이제 저는 더 이상 여러분을 붙잡아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소경들이 예수님의 물으심에 ‘대답한 것’을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자, 저는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 계속해 왔습니다. 다시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되풀이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가 이 일 하실 줄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특수한 경우에 이 질문을 적용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의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말할는지요. 저는 그 말을 큰소리로 하고 싶은 충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애원하며 그 말을 여러분의 은밀한 영혼 속에 조르는 바입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이 아주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도록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뒤로 미루거나 마음으로 나중에 하겠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분명한 어조로 말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감긴 눈, 둔한 혀, 냉냉한 마음. 저는 주께서 그 모든 것을 다 변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기 위하여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말 믿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온 마음을 드려 결심어리고 분명하게 그리 말하십시오. “주여, 그러하오이다.”

 

즉시 대답하는 믿음

 

그 두 사람이 ‘즉시’ 대답하였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질문이 나가자마자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여러분의 대답 속에는 그러한 민첩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질문하기를 ‘내가 이 일 할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라고 하였는데, 그가 가만히 서서 이마를 긁적거리고 손등을 어루만지면 결국 한다는 말이 ‘아-예에…’ 하였는데, 그 소리가 ‘예’라고 들리기보다 희한하게 ‘아니오’로 들리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도 가장 훌륭한 “예”는 즉각 튀어나오는 ‘예’입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내가 아무리 악해도 저는 주께서 나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의 보배로운 피가 모든 더러운 것을 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예요. 비록 제가 아주 오래된 죄인이고 정말 악한 죄인이며, 신앙 고백을 등지고 멀리 달아났던 죄인이고,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 같고, 지금 이 순간에도 느꼈으면 하는 대로 느끼지 못하고 마땅한 사람됨의 정반대의 상태이지만, 저는 믿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 죄인들을 위하여 간구하셨다면, 그분이 능히 당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오는 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오늘 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저는 그가 나 같은 자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나이다.’ 바로 이것이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서 듣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대답을 하게 하십니다.

 

 

5. 소경의 대답에 대한 주님의 반응

 

이제 우리는 그들의 대답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는지 살펴봅시다. 주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일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너희 눈이 열려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이 그리 진실하다면 진짜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너희가 정말 온전히 믿는다면 너희가 한쪽 눈만 보게 되거나 아니면, 두 눈 다 보게 되지, 반쯤만 열리게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 모든 시력이 다 주어질 것이다. 단호한 믿음은 모든 티를 다 제거할 것이다. 단호한 믿음은 너희의 시력을 강하고 깨끗하게 만들 것이다. 너희의 대답이 신속하니 내 응답도 그러할 것이다. 너희는 즉시 보게 될 것이다. 너희가 즉시 믿었으니 말이다.

주님의 능력이 그들의 믿음과 접촉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면 주님의 치료도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믿음이 온전하였다면 주님의 치료도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의 믿음이 즉시 “예”라고 말하였다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즉시 시력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라고 말하는데 오래 걸리면, 여러분은 평화를 얻는데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오늘밤에 ‘나는 오늘 그 일을 감행할 것이다. 나는 그러함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나는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포기하련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즉시 여러분은 즉각적인 평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바로 저 자리에 있는 젊은 사람이여, 만일 그대가 여기 짐지고 나왔지만 돌아갈 때는 평안히 돌아갈 것입니다.

그대는 자기의 짐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여 의아해 할 것입니다. 둘러보지만 그것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이를 바라보고 그분께 그대의 모든 죄를 다 맡기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기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던 여러분의 악한 습관들이 여러분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서 떼어내려고 해도 다시 새롭게 여러분을 얽어매는 사슬같이 괴롭히던 거미줄 같은 그 악한 습관이 그렇게 말씀이 떨어져 나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그러한 악한 습관들을 부수실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그분께 맡기고 새롭게 되기를 원하면, 그 일은 오늘밤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영원한 궁창이 주권적인 은혜의 외침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 앞에 모든 문제를 다 보여 드렸습니다. 저의 오직 유일한 소망은 복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여 주님을 추구하게 하시되, 이들 소경들의 소리를 지르며 주님을 찾고, 이들이 믿은 것같이 주님을 신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 적용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 드립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지 않아야 하는 이유들을 찾는데 열심을 내는 것같이 합니다. 저는 그러한 이들과 한 도합 30분간은 싸웠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기껏 다 듣고 나서는 항상 이러한 말로 들은 것을 무산시키곤 합니다. “그러합니다. 맞는 소리예요. 그러나 목사님…” 그런 때에 그들은 “그러나”라는 말로 무산시키고 분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잠시 그들이 다른 이유를 또 찾아서는 “그러합니다. 나도 그 점을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은 ‘그러나’라는 말들로 자기들의 불신앙을 받치려 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기서 어떤 이가 여러분에게 일천 파운드를 주고 싶어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어째서 주지 않아야 하는지 그 어떤 이유를 제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와서 반론을 펼 수 없을 정도의 액수를 은행 수표에 적어가지고 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 한 번 상상하여 봅시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계속 ‘나는 돈을 좋아하지요. 그러나…’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돈을 가지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유를 찾아내게 할 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거스려 반론을 제기하기위해 그 이유를 발견하려고 머리를 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만큼 자신의 원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무한히 더욱 보배롭고 가치가 있는 영생의 문제에 관하여는 사람들이 정말 무모하게 말합니다. “나는 정말 영생을 얻고 싶다. 그리스도께서 능히 그 일 할 줄을 믿는다. 그러나…” 자신을 거스려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정말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리석은 숙고

 

뉴게이트의 교도소에 있는 어떤 사람이 사형 판결을 받아 내일 아침 교수대에 서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안관이 와서는 ‘당신을 위하여 사면령이 떨어졌소’하면 그 사람은 그 말을 거스리는 말을 할까요?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울부짖으면서 ‘내가 내 문제를 생각할 시간을 30분만 주시오. 내가 용서받지 못할 이유들을 찾아보아야겠소’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는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할 것입니다. 오늘 밤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을 인하여 여러분은 그렇게 뛰며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위급한 상황과 여러분이 가진 죄책을 인식하는 지각을 주시어 “저는 믿나이다. 저는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라고 황급히 부르짖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인들은 참새들의 반만큼도 지각이 없습니다. 다윗은 그의 한 시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여러분은 참새를 주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참새는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에 무슨 먹을 것이나 곡식 낟알이 떨어지게 되면 즉시로 내려가 쪼아먹습니다. 참새는 누가 자기를 초대하여 주기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제발 오셔서 먹을 것을 들라고 간청하는 이를 기다리기는 더욱 하지 않습니다. 모이가 될 만한 것을 보면, 자신에게 말합니다.

“여기에 배가 고픈 참새가 있다. 그리고 저기에 빵 조각이 떨어져 있다. 그 둘이 짝이 잘 맞아 들어간다. 그 둘은 오래 떨어져 있다. 그 둘이 짝이 잘 맞아 들어간다. 그 둘은 오래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날아가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모든 것을 주워 먹고, 발견하는 대로 먹이를 재빨리 먹어치웁니다.

오, 만일 여러분이 참새가 가진 지각의 반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 죄책에 물든 죄인이 있다. 저기에 보배로우신 구주께서 계시다. 이 둘은 짝이 잘 맞는다. 그 둘은 오래 동안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다.”

 

주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오늘 밤 이 예배당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이 회중과 복도에서 예수님을 보고 믿을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신뢰심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그가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그가 그 일을 하시되, 바로 지금 하실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 모두 하늘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http://www.lloydjones.org/technote3/read.cgi?board=C307&y_number=1&nnew=2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