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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교훈/그런 예수는 없다-Parkshin

3.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by 복음과삶 2009. 8. 27.
제목 없음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

신이란 절대적으로 절대자여야 한다. 절대자가 아니면 이미 신이 아니다. 전통적인 신관은 항상 절대자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찾아낸 상대적인 신관을 가지고 이 절대적 신관이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아무리 외쳐본들 절대적인 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죽은 것은 니체이지 신이 아니다. 표현이 센세이셔널하든 아니든 무엇이 문제인가? 실제로 인간이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사실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인 신이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작 따져 보아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신이 없다면 전통적이던 현대적이던, 절대적이던 상대적이든, 잘못된 신관이든 무신론이든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신이 있다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신론이다. 그 다음이 잘못된 신관이다.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가진 신관이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는 꼴 밖에 안 된다. 신관에 있어서 우열은 없다. 절대적 신인가 아닌가, 절대적 신관이 아니라면 나머지 모든 신관은 아무리 그 내용이 심오하고 고상해도 그 전부가 동일하다. 인간의 관점에서라면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 절대적 신이 우리를 볼 때는 말이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에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 137:1¡­4).

기원전 586년 바빌론 포로로 끌려 간 유대인들이 바빌론 여러 강변에 앉아 고향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바빌론 사람들이 그들에게 흘러간 노래를 불러 보라고 청하지만 그 노래를 더 이상 부를 수 없었다. 왜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까? 지금까지 '승리의 신(triumphalist God)'으로 철석같이 믿고 모셨던 여호와 하나님이 바빌론의 신들과의 파워게임에 져 포로 신세로 전락하게 됨으로, 이전에 갖고 있던 그 신관이 바뀌었기에 부르지 못했을까? 아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지 못한 까닭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못하고 그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4절에서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라고 한 것이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에게 졌으므로 유대인들이 여호와가 바벨론 사람들 앞에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이 싫거나 여호와 신앙을 포기했기 때문에 부를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여호와의 노래를 감히 어찌 이방인들 앞에서 부를 수 있는가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5절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와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말은 비유로서 내가 예루살렘을 잊는 것은 내 오른 손이 자기 재주(특별한 기술보다는 오른 손이 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도 습관적인 일)를 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오른 손이 밥 숟가락을 드는 것은 평생가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일부러 잊으려 해도 잊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예루살렘 성전과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7절과 8절에서도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고 했다. 이것이 어찌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변화된 자가 할 수 있는 말인가? 그 반대로 믿음이 더 굳어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간구다.

유대인들은 알다시피 야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출 3: 14)을 인간의 입으로 감히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이름이 성경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의 별칭 여호와를 따로 정해 대신 불렀고, 성경을 필사 하다가 그 이름이 나오면 옷을 가다듬고 붓을 다시 씻어 썼다. 이런 이들이 어찌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그 하나님을 조롱거리로 삼으려고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에 응할 수 있었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족신관의 변화 때문에 그 노래를 못 불렀다고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생각과 사상을 강요하기 위해 성경을 반동적인 문자해석 한 것이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신과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이 변화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계시하셨고 처음부터 끝까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하나의 초점을 향해 나아간다. 그 초점이 인간에게 완전하게 계시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오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때로는 무자비한 신, 혹은 이방신에게조차 패배하는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절대 변함이 없으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으로부터 찬양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도 새 노래로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실패했다. 전지전능한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변함이 없으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하나님을 자기 부족만을 위한 신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 사건 이후 2,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자기 민족만을 위해 역사해야 한다는 이른바 '부족신관(tribal God)'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자기 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 중동에서 팔레스타인과 죽기 살기로 복수극을 벌리고 있는 이유도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지켜 보호해서 반드시 승리케 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출애굽기·예레미야¡¤AI≫c¾ß¼­ μi ¸ðμc ¼º°æA≫ 시온주의로 해석했었고, 그래서 아직도 새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새 노래를 부른다. 가나안을 진멸하는 하나님이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는 하나님이나, 수난받고 조롱당하는 하나님이나, 전부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새 노래는 시대에 따라 세계관·신관·가치관·성경관¡¤예수관이 바뀌어서 옛날의 생각을 버리고 새 생각으로 스스로 해석하여 부르는 것이 아니다. 새 노래와 옛 노래의 차이는 시대 년도 수나, 가치관의 심오함과 고급함이나, 본인의 깨달음과 무지나, 전통적 해석의 유지 혹은 포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경과 하나님을 해석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다. 아무리 전세계에 새롭게 유행하고 지금 교계의 주된 흐름이 된 신학으로 작사·작곡되었더라도 십자가를 배제하고 부르는 찬양은 새 노래가 아니다. 하나님은 목소리 크기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십자가에만 관심을 쏟을 뿐이다.

우리에게 새 노래를 지어줄 사람이 누구인가 찾을 필요가 전혀 없다. 새로운 신학자가 새 노래를 지어주는 것도 아니요, 어느 날 자신이 명상을 하며 성경을 보다 새 깨우침으로 새 노래를 자진해서 부르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이미 새 노래를 지어 주셨다. 예수님이 지어 준 노래를 부르면 아무리 그 노래가 오래되어도 바로 그것이 새 노래고 그렇지 않으면 헌 노래다. 성경에서 새 노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시 40:3¡­7).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성경이 가리켜 기록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누구인가? 비록 다윗이 이 찬양을 할 때는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겠지만, 성령의 간섭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한 것이다. 12, 13절에도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분명히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다윗은 이 새 노래를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당시에 성경을 새롭게 해석했던 어떤 선각자에게 들었는가, 아니면 본인이 스스로 그 역할을 감당한 것인가? 그래서 우리 또한 새 노래를 지어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가? 다윗은 새 노래를 자기가 짓지도 않았고 선각자에게 들은 것도 아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라고 했다. 성령이 그에게 들려주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성경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면 저절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사와 곡조가 떠오르며 기쁨으로 새 노래를 부르게 된다. 진정으로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새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라.

 

 하나님은 남자인가?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해 그야말로 솔직히 이야기해 보자. 예수 바로 믿기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출발할 뿐만 아니라 바로 아는 것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신관과 관련해 최근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신이 남성인가 여성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논쟁을 제기하는 측의 주장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남녀평등을 이야기했지 남녀 차별을 이야기한 적이 없음에도 지금까지 기독교가 하나님을 남성으로 가르쳐 왔고 신이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측을 이단시해 왔다는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의 부속물쯤으로 여겨졌던 때는 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니면 반드시 남성으로 가르쳐지던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여자의 신분이 남자와 동등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의 오류를 정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을 남성이라고 명시적인 교리로 주장한 적은 없지만 신이 여성이라고 할 때는 이단시해 온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이유가 남성 우월 사상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신의 성별 여부와 무관한 문제다. 신은 분명히 남성이 맞는데 여성으로 주장하니 이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의 성을 따질 만큼 신을 피조물인 인간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신은 성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신이 남성인가 여성인가를 논하는 것 자체가 헛된 것이다. 신의 품성을 이해할 때에 남성적인 측면도 있고 여성적인 측면도 있지만 신이 성(ao)의 한 쪽을 소유하지 않는다. 절대적인 하나님이라 어쩔 수 없이 남녀 양성을 구유(Iyeo)하고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신은 성을 초월한 존재다.

하나님은 절대적이다. 절대적이라는 본성상 신이 한 쪽에 치우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중 한 쪽을 택할 수 없고 양성을 구유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절대적'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절대적인 것이 무한히 큰 것도 되고 동시에 무한히 작을 수밖에 없다는 상호 모순되는 개념이 양극에서 조화롭게 만난다는 것은 절대가 될 수 없다. 절대란 어떤 질·양의 극한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양의 완전함, 그래서 어떠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그 완전함이 털끝만큼도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절대의 개념이다. 최대와 최소의 극한치가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수학이나, 상대성 원리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신의 개념에서는 배제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질적·양적으로 무한히 클 수도 적을 수도 있다면 전지전능이란 속성이 생길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표현할 때에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의 수치가 양(+)의 극한치와 음(-)의 극한치를 동시에 포함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완전히 동양의 이원론적 음양 사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동시에 무한한 천재이면서 무한한 바보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로서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완전하기 위해선 당연히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질적·양적 절대치라는 것은 어떤 일정 수치로 표현되는 극한치가 아니라 무한대적 수치 자체도 초월하는 완전치(eCiio·)이다. 수리적으로 따질 수 있는 범위 내의 극한치와는 다르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에 전지전능하신 것이지 전지전능해서 완전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구태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규정한다 해도, 정(ia) 쪽의 극한치이지 부(Y¶) 쪽의 극한치도 될 수 있다는 법은 없다. 모순되어 보이는 두 견해가 서로 용납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완전이 아니라 이미 타협이다. 그래서 '도도주의'가 되면 그 용어 자체가 의미하듯이 상대적인 것을 의미하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도도주의가 용납되면 벌써 그것만으로도 신이 아니다. 신은 남성도 되고 여성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과는 무관한 존재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절대자이다.

따라서 신에게는 양자택일의 개념이나 이항대립이 성립되지 않을 뿐더러 양극의 조화도 적용되지 않는다. 오직 완전한 절대자일 뿐이다. 남성도 되고 여성도 되고 식의 '도도주의'야말로 동양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상대주의이다. 남성도 되고 여성도 되고라는 말이 일견 맞는 말인 것같이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남성도 되었다가 다른 경우에는 여성도 될 수도 있다'는 개념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절대자가 되지 못한다. 절대적인 개념을 단지 한 가지로 제한된 극단적이고도 배타적 개념으로 해석하니까 마치 상대적인 것이 더 맞고 옳은 것처럼 주장하지만, 신에 한해서는 절대가 배타적인 한 극단의 의미가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나 완전한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절대적 개념이다. 양극을 다 포함하는 '도도주의'가 되면 완전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 최하(oIu≫)의 부(Y¶)의 개념과 최상(oIß¾)의 정(ia)의 개념이 동시에 성립되는 완전이란 없다. '도도주의'는 오직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인간에게만 적용될 뿐이다.

상대적인 '도도주의'를 신에도 인정하면, 그 신의 개념이 어디까지 가버리는가 하면 이 세상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 수도 있는 신이 되어 버린다. 최고로 흉포하고 더러운 죄악의 현장에도, 극심한 대립과 전쟁의 와중에도, 가장 추잡한 성적 문란의 관계에도 소극적으로는 그 배경에 신이 존재하고 있고 적극적으로는 그 현상을 산출해낸 자가 신이 되어버린다. 완전과 거리가 먼 것이다. 신이란 완전한 절대자이지 단순하게 무조건 어느 쪽도 다 수용할 수 있는 무한한 존재는 아니다.

절대적 존재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에서 유일무이(eæieUii£)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진리는 세상 어떤 것으로라도 영향받지 않는다. 지구가 돌 수도 있고 안 돌 수도 있다든지, 지구 쪽에서 보면 태양이 도니까 지구는 멈춰 있고 태양이 돈다고 우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사학적 표현, 혹은 보는 사람의 관점의 문제이지 엄연한 객관적 진실과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도 보는 사람에 따라 남성적 측면이 있다든지, 여성적 품성도 발견된다든지 해서 그분의 속성을 좀더 잘 이해해보자고 하는 연구 내지 접근책으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남성인가, 여성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연구 내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절대자가 유일무이하다는 점에서 그 이름은 하나님(모든 속성에서 완전하신 오직 한 분)이 되어야지, 하느님(하늘에 있는 무한히 능력이 크신 분)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이 남성이 되든지, 여성이 되면 이미 세상에 하나가 있는 분이 아니게 된다. 남녀 성을 초월하는 분만이 오직 하나일 수 있고, 절대이며 영원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을 성경에서 너무나도 정확하게 표현한 부분이 있다. 모세가 시내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 하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 본 적이 있는데, 이때 하나님은 당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름을 직접 말해주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간혹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해 준 적이 있지만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한 속성만을 강조해 표현한 것들이다. 그래서 그 이름들은 단어 표기에 남녀 성을 명시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닐지라도, 그 이름의 의미에 함유되어진 하나님의 속성을 해석하다 보면 성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해석되어질 소지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직접 들려 준 야훼 하나님의 이름은 다르다. 유대인들이 감히 인간의 입으로 부를 수 없었던 바로 그 이름이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라고 되어 있어 문장 구조상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마치 "스스로 있는 자"처럼 되어 버리는데, 원문으로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다. 히브리어로는 이 문장의 구조는 특이하다. 영어 문법적으로 따지면 주어와 Be 동사뿐이다. 영어 문장은 잘 아는 대로 5가지 형식적 구조를 갖고 있고 문장이 되려면 최소한 이 중에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영어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언어라도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간단한 형태가 [S주어+V동사+C보어]로 중학교 1학년 들어가 제일 먼저 배우는 'I am a boy.'가 그것이다. 주어를 보어가 수식하는 형태로 주어와 보어는 동격이 되며 주어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은 무엇이든 보어의 위치에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student, Korean, Chulsoo(이름), tall, young¡|, 무엇이든 좋다. 만약 'Chulsoo is an American girl.'라고 하면 주어 '철수' 와 이를 설명하는 보어의 내용이 불일치하므로 틀린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히브리 원문에 'I am'이라고 한 것은 영어로 치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What is your name?'이라고 물었고, 그 대답은 문법적으로 따진다면 'My name is Jehova' (혹은 Ellohim, Immanuel, God 등)로 대답해야 함에도 하나님은 'I am'으로 대답한 꼴이다.

이 대답에는 참으로 깊은 의미가 많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말로 치면 말 그대로 '내다', 혹은 '내라니까'와 같은 어감이다. 이름을 물었는데도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첫째로 이름이 없다는 말이다. 이름이 있게 되면, 벌써 그 이름이 가지는 이미지·의미·상징성·대표성·뉘앙스 등으로 하나님의 품성이 제한받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내다'라고 모세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같은 포괄적인 의미이든, 치료하시는 하나님처럼 제한적인 의미이든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특성을 어떠한 형태로도 제한받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미리 막으신 것이다.

구약성경에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별칭과 같은 성격이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은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가 가진 언어로는 단 한마디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까, 그 속성 중의 하나 혹은 여럿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자가 가르쳐주었거나 인간의 영적 체험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어떤 사람이 아주 다재다능하면서 개성이 강하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며 컴퓨터도 도사이고 여자에게도 인기 만점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본명은 '김철수'라도 별명은 '만물박사·괴짜·개그맨·천재·IT도사·카사노바' 등으로 불리우는 것과 같다. 그 별명만 들어도 김철수라는 사람의 특성을 일부 짐작할 수 있고, 또 그 본명 '김철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별명을 제대로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친한 친구라면, 그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자동으로 떠오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명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그 이름이지만, 그 이름만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을 제대로 알 수 없으므로 여러 별칭을 성경의 여러 상황 속에 계시하셨다. 신자가 성경을 숙지하고 실제 삶에서 각 별칭의 품성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체험하면, 나중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품성들이 전부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뜻에서라도 문서설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각각 달라 성경의 사실성을 못 믿겠다는 주장은 억지일 뿐이다.

둘째, 인간의 어떠한 극상치의 아름답고 고귀한 표현일지라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I am a boy.'에서 'I'와 'boy'는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 'I am' 다음에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사물·사건·형상·상징 등 그 어떤 것도 보어로 올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동일시되거나 비록 상징적인 의미로도 폄하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이 세상과는 초월된 존재이지 이 세상 안의 존재가 아니다. 피조물이 아니며, 물질이 아니며, 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한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단지 'I am(내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것 외는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참으로 독특하면서 그 자체로도 은혜가 된다. 아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현존하는 언어 중에선 가장 좋은 이름인 것 같다. 하나님- 세상에 유일무이한 분이라는 뜻이다. 그 어느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I am'의 본질적인 의미에 가장 근접한 이름이다. '하느님'만 되어도 벌써 하늘에만 있는 영적 존재 중 좀 고귀한 분으로 의미가 제한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영어로는 'God, Lord'이지만 이는 '신들·성주·주군·주인'들과 그 의미가 겹친다. 그래서 신을 표기할 때는 대문자로 적지만 이 또한 자칫 신들 중에 가장 힘이 센 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본말도 그렇다. 발음상 가미사마(aeaÆ)로 '신님' 정도의 의미인데 벌써 가미는 종이·머리카락 등 여러 뜻과 중복이 된다. 우리말에는 하나님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 하나도 없다. 어떤 것으로도 그 뉘앙스가 오버랩되지 않는다. '하나님'이란 이름만으로도 그 의미를 깊이 새겨볼 줄 알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는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성에 대한 시비를 종결지을 수 있는 이름이다. 하나님 스스로 본인의 이름을 밝히신 출애굽기 본문에서 '나(I)'라는 주어를 사용했기에 성의 구분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성적으로 구분되어 한쪽 성으로 제한받으시는 것조차 막으셨다. 남성 신이냐 여성 신이냐를 따지는 인간의 부질없는 논쟁 자체를 그 근원부터 차단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남과 여, 암컷과 수컷으로 나뉘는 성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 당신이 만드셨다. 하나님은 성이 구분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셨고 하나님이 계신 후에 성이 나누어졌다. 양성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 당신이 양성을 구유한 것이 아니라 성과 관계없이 성을 초월한 존재다. 성 자체를 만드신 분이라 성과는 관계없다.

자동차의 왕 포드가 승용차와 화물차 두 종류를 다 만들었지만, 승용차 제조업자 혹은 화물차 제조업자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동차 제조업자일 뿐이다. 또 승용차와 화물차 중에 어느 것을 더 좋아했는가 식의 질문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둘 다 사랑했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하물며 만물을 만드시고 그 만물에 성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남성인가 여성인가, 혹은 어느 성에 편향적인가 따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의 어원과 성과 그 사용빈도수 등을 분석해서 하나님의 성을 따져 보자는 자체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겠다는 또 하나의 예일 따름이다.

물론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여성적인 측면이 많은 속성과 남성적인 측면이 많은 속성으로는 구분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이 인식하고 표현하는 한도 내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하지 그 자체가 성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라는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 공의는 부성애적인 징계와, 사랑은 모성애적 사랑에 비교해보면 알기 쉽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남성적인 속성이 공의이고, 여성적인 속성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100% 완전한 하나님다우심은 공의나 사랑이나 각 속성에 아무 차등 없이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남성적인 면을 기대한다든지, 여성적인 면에 의지한다든지, 또는 남성적 속성과 여성적 속성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든지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될 뿐 아니라 부질없는 짓이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일 뿐이다.

지금껏 서양의 기독교적 문화와 사회 통념상 또는 기독교 메커니즘이 교리를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 하나님을 남성 편중적으로 이해되게끔 한 잘못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일반 대중에게 좀더 쉽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 가부장 우선적인 사회 통념에 맞추어 설명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하나님 당신의 성이 남성이라고 전한 것은 아니다. 근래 와서 하나님을 여성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까닭도 따지고 보면, 이제는 여성이 갖는 장점·특징·역할·특유의 감성 등을 동원해, 하나님을 좀더 폭 넓게 이해하고 더 쉽게 접근하자는 노력의 일환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지금까지 남성 일방적 신관은 잘못되었으니 이제 여성적 신관이 더 낫다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노력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지금껏 남성적으로 오도했다고 지적했던 동일한 잘못을 역으로 저지르자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을 남성으로 볼 것이냐 여성으로 볼 것이냐라는 질문의 답은 그 어느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지금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남성적인 요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생긴 불균형을 시정하는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성을 찾게 해주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 주든지, 둘 중 하나를 자기에 맞게 해석하든지, 여성적인 신관을 강조하던지 하는 노력, 그 어느 것도 필요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인식하는 노력만 필요하다. 그 동안 무시되어 왔던 하나님의 여성적인 면을 연구해 강조해야 한다면, 자칫 또 다른 불균형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여성적인 면의 잘못도 함께 강요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하나님 어머니라고 해서 언제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며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한 하나님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행운의 여신, 승리의 여신을 들 수 있다. 왜 행운과 승리의 남신은 없고 여신만 있었는가? 행운과 승리를 잡거나 놓치는 것이 도저히 인간의 예측을 불허하고 일정한 원칙이 없더라는 뜻이다. 여자들처럼 변덕이 심한 것이 인생살이의 행운과 승리이므로 그 신의 성도 자연스레 여성으로 둔갑했다. 또 다른 예로 풍요의 신도 전부 여성이었다. 대지를 다스려 풍년과 흉년을 조절하는 것이 아기를 생산하는 여성에 비유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지만, 이 또한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흉년과 풍년이 오더라는 의미다. 행운과 승리와 풍요의 여신이라고 단순하게 그것들만 다스리는 신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당시나 지금이나 행운과 승리와 풍요를 다스리는 신이라면 우리 삶의 전부를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중의 신이고 절대적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다. 고대에 하나님과 방불한 신들이 여성으로 인식된 가장 큰 이유는 신경질적인 변덕스러움이었지 포근한 사랑이 아니었다.

물론 인간이 고된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며, 또 절실한 것은 사랑·자비·부드러움·포근히 감싸지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특성이 아버지보다 어머니 쪽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모습을 본 것뿐이다. 어려서 철모를 때에 나쁜 짓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항상 용서해주시는 모습이고 아버지는 항상 야단만 치는 모습을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있는 그대로 용서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도 이 어머니의 모습에 더 가깝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사랑과 용서의 실체를 모르는 것이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 그 다음 날 새벽에 들어오면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반기며 밤늦게 다니면서 저녁이라도 제대로 먹었는가 걱정해주시는 분은 분명히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다. 살짝 숨어 자기 방에 들어가 아무 일이 없는 척하고 자고 일어나도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혹시라도 아버지에게 들켜 벌을 받을까 함께 조마조마 걱정해주는 이도 어머니다. 그런데 간밤에 있었던 일을 아버지가 감쪽같이 모르고 무사하게 넘어갔을 때의 우리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처음 한두 번은 신나고 스릴마저 느끼며 밤늦게 다니는 재미를 만끽할 것이다. 그런 일이 서너 번 계속되는데도 마음이 편안하거나 스릴이 넘쳤는가? 아무 말 없이 그저 따뜻하게 맞아주는 엄마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는가? '내가 밤늦게 다니는 것을 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야단을 치지 않지, 지금쯤은 야단을 맞아야 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는가? 꼭 자신의 어떤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거나, 책임추궁이 없으면 자신도 통제 못하게 될까 불안해서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나를 전혀 아는 척도 하지 않으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회초리에 대한 갈급함이 생긴다.

사랑의 용서란 무조건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용서가 제대로 된다. 남성적인 하나님이라고 해서 공의가 우선이고 사랑이 뒤라는 인식을 주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 바탕이 된 정의가 올바른 정의이고 정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버지가 자식이 밤늦게 와도 기다리지 않고 누워 자고 있다가 나중에 벌만 주는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현실에서 자식 양육의 역할을 분담을 한 것이지 사랑과 정의까지 분담한 것이 아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벌만 주는 아버지로 느끼면 그것은 벌써 바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다. 만약에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이라면 끝까지 벌만 피하려 하지 왜 벌 안 주는가 궁금해 하고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다. 사랑에 바탕을 둔 아버지의 벌은 얼마든지 기쁨으로 받을 수 있고 나아가 벌이 없으면 오히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아버지에게 정의의 응징의 면이, 어머니에게 사랑의 용서의 면이 더 느껴질지라도 엄마에게도 응징은 있으며 어떤 면에서 더 심할 수도 있다. 요즈음 아이들이 엄마를 더 무서워하는가, 아빠를 더 무서워하는가를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오히려 자식의 먼 장래를 바라보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사랑일 수 있으며 어머니의 사랑은 다분히 감정적·단기적·부분적일 수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을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자식에게 실천하는 모양이 다른 것이지 그 사랑의 크기나 열성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나마 가장 유사하게 닮은 것이 부모님인데, 이를 비유하여 표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 혹은 '하나님 부모님' 할 수가 없다 보니, 둘 중 하나를 택한 것인데 이를 두고 정의의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하나님 어머니 중에서 기독교가 정의의 하나님을 택했다고 오해해선 안 된다. 부모를 한 사람으로 대표하자면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물론 가부장적인 문화와 관습의 영향도 받았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 본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어머니로 인식하게 되면 사랑의 하나님은 강조되겠지만 자칫 자식이 어떤 길로 가도 방임하는 오도된 사랑이 강조될 수 있다. 형벌이 없는 사랑, 진정한 용서가 아닌 사랑, 자식의 이빨이 썩는지도 모르고 사탕만 주는 어머니,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체험한 후 붙인 이름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이 절대 아니다. 죄의 형벌로 죽음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는 사랑은 이미 정의로운 사랑이 아니고, 부활 없이 십자가 형벌만으로는 사랑 없는 정의가 된다. 사랑과 공의가 단번에 함께 충족된 것이 십자가 사랑인데,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 어느 쪽이 어울리는가 따지는 자는 예수의 십자가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자다. 현실 삶에서 인간의 풍요로운 삶만을 바라는 종교라면 그 신이 어머니 하나님이 되어도 상관없겠지만 기독교에서만은 그럴 수 없다. 기독교는 사랑이 먼저냐 공의가 먼저냐를 따지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동시에 그 둘이 충족되었다는 것만 믿고 기억할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일방적인 이미지에 치우칠 수 있으므로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에 더 어울린다고 하는 것은, 일방적이라 좋지 않다고 한 사람이 또 다른 일방으로 몰고 가는 자가당착이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남녀 우월에 관한 문제로 따질 것도 아니다. 남녀란 서로 돕는 배필로 상호 연합해야 하는 관계이다. 여권 운동가들도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역할과 책임이 무시되어 왔으므로 그것을 되찾자는 것이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겠다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남자와 여자는 함께 있어야 완전해지지 각기 홀로는 언제까지나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때론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고 싶다는 심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다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입시공부에 지쳐 학교를 자퇴하고 싶은 그 심정은 분명히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막상 그렇게 하겠다고 덤비면 이해해주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지난 2천 년간 아버지로 불렀으니 앞으로 2천 년간은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가정해 보아라. 솔직히 아버지라고 불러온 지난 2천 년보다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고 더 잘 믿을 것 같은가? 하나님이 어머니이니까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제 멋대로 살아도 그만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엄마는 밤늦게 다니는 청소년 아들을 절대 통제할 수 없다.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그 심층 저변에는 십자가의 예수가 싫은 것이다. 이왕 용서해주면 그냥 용서해 주면 되지 왜 꼭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지 그것이 맘에 안 드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구원 원리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의 심리다. 아니면 고대의 행운의 여신, 풍요의 여신, 가나안 여신 같은 음란한 이방신에 대한 향수가 짙게 깔려 있든지 둘 중 하나다. 철없는 청소년 아들 같은 인간들이 사랑만 받으면 음란한 망나니말고는 될 것이 없다.

 

실제적 다신론

신이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는 문제는 종교마다, 시대마다, 사람마다 여러 의견들이 있어 왔다. 기독교는 신이 하나밖에 없음을 믿는 유일신론(eæieaeOa Monotheism)이다. 신의 호칭부터가 하나님이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신, 힌두교의 시바 신, 중국의 상제, 한국 전래의 하나님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불신자와 대화하는 중에 상대방의 신과 그 종교를 부인해 버리면 당장 시비 밖에 생길 것이 없으니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 보니, 불신자에게는 기독교인이 마치 여러 신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신에 대한 관념과 인식이 다양하게 변천되어 왔지만 신이 있다면 그 숫자는 하나이고, 하나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반발하지 못한다. 신이 둘 이상 있다면 그 신들 사이에 능력의 우월이나, 그리스 신화처럼 태양의 신·바람의 신·바다의 신으로 나눠져 관할권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벌써 그것은 절대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 신은 절대자이고 절대자는 복수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알라 신이나 시바 신이 한 하나님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생각·표현·관념이라고 보아서도 안 된다. 비기독교인들은 모든 종교가 우주의 궁극적인 한 실재에 대해 마치 먼 산을 놓고 자기들의 지리적 위치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리 보고 다른 이름이나 표현을 갖다 붙인 것과 같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동일한 사물을 두고 표현한 방법과 이름만 다르다고 하는 것은, 자동차를 두고 미국인은 automobile, 한국인은 자동차(i≫ONo³)라고 표현했을 때에 해당된다. 서로 언어와 문화가 다르니 이름은 다르지만 '자체적으로 동력장치가 달려 있어 외부에서 누가 힘을 주어 밀지 않아도 운전 장치만 정해진 대로 작동하면 굴러가는 탈 것'이라고 동일한 뜻으로 표현되었다. 이때는 미국인더러 왜 차를 automobile이라고 하느냐고 한국인이 절대 따질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봐도 분명히 동일한 사물을 동일한 뜻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같은 자동차를 두고 미국인은 기차(Train)라고 하고 일본인은 인력거(iNOoEc)라고 하며 한국인만이 자동차(i≫i®Ec)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한국인이 표현한 것만이 진실이다. 더 나아가 미국인은 기차를 보고 automobile이라고 하고, 한국인은 차를 보고 자동차라고 하고, 일본인은 자전거를 보고 '지도샤'(자동차의 일본발음)라고 해도 두말할 것 없이 한국인만이 맞다.

지금 종교인들이 모든 종교의 하나님은 한 분 동일한데 이름만 다르다고 하는 경우가 바로 이 위의 두 가지 잘못에 해당하는데, 그 중에서도 후자 쪽의 잘못이 더 많다. 각 종교들이 자동차를 두고 automobile¡¤AUμ¿A÷¡¤지도샤라고 하듯, 한 분 하나님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모든 종교가 종교적인 가르침이 다를 뿐이지 하나님이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반발할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하나님과 자기 종교를 믿지 않으면 칼로 쳐서 죽여도 좋다고 가르치는 하나님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또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의 영혼에게 영원한 구원 내지 심판을 주시는 하나님과,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을 다른 동물로 환생시켜 지구로 돌려보내는 하나님과 같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아니어야 한다.

20¡­30년 전에 외항선을 타고 들어오면서 밤에 부산항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고층 빌딩이라고 생각한 것이 산 위에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의 불빛이었다는 것은 다음날 날이 새면 금방 알 수 있다. 인간이 자기 환경과 문화에 따라 하나님을 먼산 바라보듯 볼 때에 바로 이런 잘못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 고층빌딩이 부산항의 실체가 아니듯 각 종교들이 표현하고 생각하는 하나님도 실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각 종교가 한 하나님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는 명제는 어느 종교든지, 언제든지 틀리게 표현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도 함의(ußeo)하고 있다. 인간이 할 일은 다 맞는 표현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부산항에서 보이는 산에 줄지어 있는 판잣집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그것을 고층빌딩이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자기 눈에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것도 맞다고 우길 수 없다. 자기들이 생각할 때는 이 하나님이 맞을 것 같아 그 하나님이 맞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기 생각 속의 하나님이지 하나님이라는 궁극적 실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신을 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부인하지 않는 까닭은, 부산항을 밤에만 들어 왔다 나가는 외항선원이 부산항은 고층빌딩으로 이루어졌더라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고층빌딩이 아니고 판잣집이라고 아무리 말로 설명한들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은 것뿐이지 그것을 인정해준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신이 여럿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밤에만 다닌 그 선원이 부산항의 실체를 자기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알 수 있는 낮이 그에게도 임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만약 부산항을 먼 바다에서 밤에도 보고 낮에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고층빌딩이 낮에는 판잣집으로 변했다가 또 밤에는 판잣집이 고층빌딩으로 변한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훤한 대낮에 부산항을 본 자는 부산항의 뒤에 판잣집이 늘어선 산이 있다고 하지 고층빌딩이 둘러서 있다고 하지 않는다. 진리의 실체는 하나다. 절대 여럿이 될 수 없다. 물론 이름이 다를 수는 있지만 표현하는 내용이 다르면 이미 다른 사물을 말한다. 현재 각 종교가 하나님을 설명하는 내용이 각각 다른데, 어떻게 한 하나님을 이름만 다르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야 말로 다신론이며 기독교와 달리 절대자 하나님이 한 분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동일한 절대자가 이름만 다르다고 할 때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한국인은 하나님, 영어로 God, the Lord, 일본인들은 가미사마(aeaÆ)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숙명론을 가르치는 알라 신과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가르치는 하나님과 홍익인간을 가르치는 단군 할아버지는 절대로 같은 신이 아니다. 차라리 기독교인들에게 어느 신이 진짜 신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치가 맞지만, 똑같은 신을 이름만 다를 뿐이라고 우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은 어느 종교가 정말 참하나님을 말하고 있는가 스스로 완전한 확신과 결론을 내릴 때까지 탐구하고 갈등해야 한다. 종교간에 관용하고 서로의 진리를 인정해주자고 주장하는 것은 선의의 구도자들의 이러한 탐구마저 막는 결과를 나을 수 있으며, 나아가 종교인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허울좋은 방패막일 수 있다. 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나 관용을 떠나 누구든지 참 하나님을 만나고 알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럼 어느 종교의 하나님이 맞는지 누가 알 것인가? 물론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명제에 모두 동의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완전한 무신론자나 철저한 불가지론자는 이미 이 논의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누구나 하나님의 절대성만은 인정한다는 뜻이다. 또 절대적 하나님이라면 얼마든지 인간으로 하여금 참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조치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해 놓으셨다는 것까지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종교의 하나님이 맞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 누구든지 이 땅에서 틀린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참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요행수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자기가 믿은 하나님이 죽고 난 뒤에 보니까 참하나님이 아니었더라고 판명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참하나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짜 하나님을 믿어 영원한 멸망에 빠지도록 방치한 결과가 된다. 절대자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믿고 경배할 가치가 없다. 이런 결과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앞에 말한 대로 참하나님이 인간에게 참된 길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보여주거나, 우상이나 사탄을 숭배하는 종교까지 포함해 모든 종교의 하나님이 참하나님이면 된다.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은 없는데도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선 하나님이 이름만 다를 뿐이지 모두 똑같은 하나님이라고 한다.

 

실제적 무신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많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킴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다. 그러나 신자가 죄를 짓는다는 단순한 논리로 위선자로 몰아세우거나 기독교 자체를 매도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신자가 죄를 지어도 된다고 강변하거나, 기독교의 복음이 모든 죄를 용서해 주므로 예수 믿고 난 후 짓는 죄의 책임까지 면제 시킬 뜻은 아니다.

미국 회사를 다니는 필자의 후배 한 사람은 회사에 청바지차림으로 자기가 가고 싶은 시간에 아무 때나 출근한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 회사라 그런 것이 아니라 컴퓨터 회사 프로그래머이기에 자기가 개발하는 프로젝트만 집에서 하든 회사에서 하든 정해진 시간 내에 완수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면 도대체 직장인으로 기본도 못 갖춘 친구라고 매도하게 된다. 이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모르는 자로선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평가 기준에 따라 죄를 짓는 신자를 위선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위선이란 겉으로는 선한 체 하면서 속으로는 악한 것, 말로는 착한 척하며 행동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자란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인정한 자이다. 구체적으로는 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내 의지와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도움만을 간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기에 이미 성인(a¡iN)이 되었다고 자부하거나, 이제부터 두 번 다시는 죄를 안 지어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다. 만약에 예수를 믿을 때에 이런 고백과 마음으로 믿었는데 죄를 지었다면, 그는 위선자라고 비난받아 마땅할지 모르지만 대신에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아직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복음의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는 한 번도 선을 가장한 적이 없다. 강도가 드러내놓고 총을 들이대며 돈을 달라고 한들 아무도 위선이라고 하지 않는다. 강도가 강도짓을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한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위선이 아니다. 대신에 불신자는 어떠한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기독교 진리에 절대 동감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선행과 공적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이다. 불신자들더러, "당신은 죄인이므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권하면 "내가 왜 죄인인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는데!"라고 큰소리치는데, 과연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겉으로 스스로 부끄럼 없이 선하다고 선언해 놓고 호박씨를 까고 있으면 엄밀하게 따져 누가 위선인가?

바로 이런 면에서 기독교 신자만큼 실제적인 유신론을 생활 가운데 실천하는 자가 없다. 신자는 성전 한구석에 서서 가슴을 찢으며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한다. 나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이므로 단 한 시도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없사오니, 나를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이길 힘을 달라고 순간순간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어찌 그것이 무신론인가? 대신에 "하나님은 저 멀리 가만히 두고 보시기만 하십시오. 내가 내 힘으로 죄를 다 이기고 절대 죄를 안 짓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죽기 살기로 자기 힘으로 의를 이루겠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죄를 짓는 것이야말로 실제적인 무신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의 직원이 불규칙적으로 출퇴근하는 것을 일반 회사의 직원이 보고, 무슨 저런 회사원이 다 있느냐고 나무라는 까닭은 그 회사도 자기들처럼 출퇴근 시간이 정시에 정해져 있는 줄 착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인간 스스로 도덕적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을 그 본질로 삼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만은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해 주는 은총을 받고 누리는 것을 본질로 한다. 기독교의 내용을 모르는 타 종교인들이나 일반인으로선 신자가 죄 짓는 것을 볼 때는 자기들처럼 선해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해 위선이라고 탓하게 된다.

지금 누가 잘나고 못났나를 따지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모두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누가 위선적인가 아닌가, 혹은 실제적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든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다. 본인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면 위선이 아니고 구하지 않으면 위선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 앞에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분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지 않는 것은 절대 위선이 아니며 대신에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찾으면 위선이다. 인간이라면 이 둘 중에 하나는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위선이다. 예수를 믿는 신자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둘 중 전자를 택했다는 의미이다.

 

부족신관

성경의 하나님 가운데 가장 오해될 소지가 많은 것은 히브리 성경 초반에 나타난 하나님이다. 동방의 조그만 부족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과 반대하는 모든 족속을 잔인하게 쳐부수는 모습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원시적인 부족신(Y≫ðeae)의 모습에 불과한 것 같다. 이런 하나님으로 오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경 기사로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상식적으로 어떤 책을 잘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주관적 해석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일지나 회의록 같은 것 말고는 독자는 반드시 저자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 파악하지 않고 읽으면, 스토리만 알기 위해 눈으로 훑어 본 것에 불과하지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숙지하고 난 후에야 그 의도가 나빴다든지, 그 의도가 제대로 표현 되지 않았다든지, 의도와 달리 엉뚱한 내용이 되었다든지 비로소 그 책에 대한 올바른 비평을 할 수 있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독자는 가장 먼저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정짓고 그 저자의 의도를 물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든지 인간의 저작으로 이해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결지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고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저자로 40여 명의 인간이 동원되었지만, 성령에 감동된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이라는 동일한 하나님의 뜻을 모든 책마다 드러냈기에 실질적인 저자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저자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려 들면, 한 마디로 말이 안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 못하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고 예수를 보내 십자가에 죽였는지 살렸는지 의심이 가득 찬 채로 보면 성경은 성경으로 구실을 못한다.

저자의 뜻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독서의 원칙이 성경에 한해서만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음을 본다. 이상하게도 독서를 많이 하는 지식인들의 경우에 특히 더 그렇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이 있으면 우선 저자의 의도를 먼저 물어야 하지, 단지 이해되지 않다는 것으로만 무조건 비평부터 하고 보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가만히 앉아 묵상으로 헤아리거나 기도해서 직통계시를 받아 알기는 힘들다. 대신 성경을 자세히 앞뒤를 대조해가며 읽으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성경 초반부에는 잔인한 부족신 같은 하나님이 후반부에 가서 온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바뀌면 분명히 하나님도 인간처럼 시간적 간격이 흐른 후에 미숙한 상태에서 성숙한 상태로 자란다는 말이 된다. 그 어느 쪽이든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또 그런 하나님이 쓴 글이라면 이미 하나님의 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인간의 말이라는 뜻이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비평의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비평한 결과로 하나님의 글이 인간의 글로 변하고, 혹은 그 반대가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저자라면 그 비평과 연구의 대상은 하나님이 되고 인간이 저자라면 각 책의 인간 저자가 비평과 연구의 대상이 된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이나 가나안 정복의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할 때도 이를 구분해야 한다. 저자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잘잘못을 따져야겠다고 할 수도 없다. 완전한 절대자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을 수 없다. 대신에 하나님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기에 이런 모습으로 역사하셨으며 그런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 가운데도 분명히 선하신 뜻이 있을 줄 믿고 그 뜻을 탐구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반면에 단지 모세나 여호수아의 저작으로 그치면 그들이 갖고 있는 신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잘잘못을 골라내기만 하면 그만이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두 이야기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나가 일반적으로 오해 되는 부분을 제거해 보기로 하자.

 

자기 백성밖에 모르는 하나님- 출애굽 이야기

하나님이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일으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는 이야기는 성경의 문외한이라도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홍해가 가로막자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 위를 향해 내밀어 바닷물이 갈라지고 갈라진 땅을 걸어 나와 구원받지만, 따라오던 바로(애굽 왕)의 군대는 물에 수장되는 것으로 장식한다. 그래서 단지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구하고 애굽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죽음을 당하는 극도의 인종차별 정책을 썼으며, 또 바로의 마음을 계속해서 열 번씩이나 강퍅하게 만들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해놓고 엄청난 재앙을 애굽에만 내리신 기독교의 하나님은 부족신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기사를 살피면, 하나님의 전인류를 향한 사랑이 이만큼 풍성하게 드러난 기사도 드물다. 거기에 대해 논쟁을 하자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 문제를 삼은 두 가지, 인종차별의 하나님과 민족신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문제만 간단하게 지적해 보자.

먼저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고 애굽에는 벌을 내린 것을 공평하지 못하며 극도의 인종 차별하는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는데, 이는 구별(I¡U¬)과 차별(o¬U¬)의 차이를 몰라서 그렇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Distinction)한 것이지 차별(Discrimination)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이유야 어디 있던 학교는 다니지 않고 건들건들 놀고 먹으며 양아치 짓을 하는 청년이 고등학교 교무실을 찾아가, 왜 당신들은 당신 학교 학생들만 공부 가르치며 사랑으로 훈계하면서 같은 또래인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따질 수 없다. 고등학교 선생이 아무리 청년을 가르치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하더라도 자기 학생만 가르치고 학교 밖의 젊은이를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자기 학교 학생과 그렇지 않은 청년을 구별한 것이지 차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에 차별은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가? 다 같은 학생인데 단지 자기 부모가 부자이며 가끔 선생에게 돈 봉투를 건넨다는 이유만으로, 문제아를 감싸돌고 심지어 반장까지 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deal differently)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출 7: 22),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distinction)을 두리니"(출 7: 23),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distinction)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 11: 7), 성경 어디에도 차별했다는 말은 없다.

이런 일에조차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창조하고 사랑하므로 모든 인류에게 똑 같이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이다. 앞에 든 학생과 양아치의 예를 다시 들면 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도저히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갔으니까 나에게도 공부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무시한다면 이는 선생의 잘못임이 분명하다. 야간학교라도 차려서 가르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싫고 양아치 생활이 좋아 학교 앞에서 선량한 학생들을 매일 괴롭히며 돈을 뜯어먹으며 사는 자를 학생과 다른 취급을 한다고 차별한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애굽의 기사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편견이 개입된 일방적 판단으로 이스라엘과 애굽을 차별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소원했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기를), 애굽은 단 한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 적이 꿈에도 없으며(학교는 무슨 얼어죽을 학교야 내 주먹이 밥 먹여주지),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임금 한푼 주지 않고 학대했지만(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등쳐먹고 살았는데) 하나님은 400년간이나 참아 주었다. 어느 날 누워 자느라 자기 백성의 신음을 듣지도 못하고 외면하다가 갑자기 난폭한 살인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번에 멸망시키지 아니하고 열 가지 재앙을 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재앙을 열 가지나 줄 수 있는가 그것도 애굽 백성에게만?'이 아니다. 학교 앞 양아치를 불러 이제 마음 바로잡고 공부해서 착한 청년이 되라고 열 번이나 타일렀다. 그것도 양아치가 가장 잘 알아들을 만한 방법으로 하셨다. 그 양아치가 칼 쓰기를 자랑하면 칼 쓰기 대결을 해서 세상에는 네가 칼 쓰기를 최고 잘하는 자가 절대 아니며, 칼을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 양아치가 몽둥이로 도전해 오면 몽둥이로, 총이면 총으로, 떼거리로 패싸움을 걸어오면 단독으로라도 상대해 정신 들게 했지만 아무리 해도 말을 못 알아 들으니까, 그 양아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장자를 죽여서라도 그 양아치를 돌이켜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성경에 대한 조금의 상식만 있어도 그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 사람이 믿었던 우상 신들과 대결한 것인 줄 금방 알 수 있다. 양아치가 공부하지 않고 얼마든지 세상에서 출세하고 있다고 믿고 의지하는 힘들을 하나씩 부숴나가는 작업을 했다. 단번에 경찰서에 넘겨 감옥에 보내버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문제는 성경에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라는 표현 때문이다. 하나님이 마음을 더 굳게 만들어서 일부러 골탕먹인 것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극단적으로 문자적 해석을 한 가장 좋은 표본이다. 어디까지나 범사가 하나님의 완전한 주관하에 있었다는 말이지, 일부러 더 벌을 중하게 주려고 하나님이 그를 더 완악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완악한 자는 벌을 받을수록 더 완악해지는 것이지 수그러든다면 이미 그는 완악한 자가 아니다. 또 더 완악해지는 것이 완악한 자의 잘못이지 더 벌을 주는 자의 잘못이 아니다. 학교와 학생에 대해 분노와 독을 품고 있으며 그 학생들이 있어야 계속해서 돈을 뺏어 배불리 먹고 살려는 양아치는 아무리 선생이 두들겨 패도 말을 듣지 않는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 나타내는 반응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이 사실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뱀이 된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술객의 지팡이가 변한 뱀을 잡아먹으니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7:1)고, 성경은 분명히 바로가 강퍅해졌다고 했지 여호와가 강퍅케 했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호와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1) 피 재앙: "애굽 술객도 자기 수법으로 그렇게 하니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도 관념하지 아니하였고 애굽 사람들은 하숫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출 7:22¡­24). 학생을 등쳐먹던 양아치가 학교 선생에게 그날 빼앗은 돈만 압수당한 정도니까 선생한테 야단맞은 것을 신경이나 쓰겠는가?

2) 개구리 재앙: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8:15). 훈육 선생이 일주일에 한두 번만 단속하고 나머지 날은 단속을 하지 않으니 이전보다 수입은 좀 적어졌지만 숨은 쉴 수 있으니 제 버릇을 남 주겠나?

3) 이 재앙: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출 8:19). 양아치 밑에 있는 똘마니들이 두목에게 학교에서 단속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데, 계속 이래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까 두목 체면이 있지 이 정도에서 후퇴하면 되겠는가?

4 ) 파리 재앙: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³≫°¡ ³EEn¸| º¸³≫¸®´I¡| ³E¹≪ ¸O¸®´A °¡Ao ¸≫¶o ³EEn´A ³ª¸| A§CI¿ⓒ ±aμμCI¶o¡| ¿ⓒE£¿I²²¼­¡| ÆA¸®¸|¡| ¶°³ª°O CI½A´I¶o ±×·?³ª ¹U·I°¡ AI¶§¿¡μμ ¸¶A½A≫ ¿I°­AE CI¿ⓒ ¹e¼ºA≫ º¸³≫Ao ¾Æ´ICI¿´´o¶o"(출 8:25, 28, 31, 32에서 발췌). 양아치 두목이 단속이 심상치 않아지자 학교 교장과 훈육주임을 찾아와서 '이제 이 짓을 그만두겠으니 단속만 거두어 주시되 이 근처에서 구두 닦는 것은 허락해주시고 내가 잘 되도록 빌어주십시오.'라고 해놓고는, 단속을 거두자 마음이 달라져 다시 제 버릇을 발동했더라.

5) 악질 재앙: "바로가 보내어 본 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출 9:7). 약속을 어긴 양아치를 학교에서 더 강력하게 단속하자 밤늦은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 단속을 피해 더 악랄하게 학생들을 괴롭혔는데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제 강화된 단속을 믿고 겁내지 않고 마음 놓고 학교를 다니는 꼴을 보니 약만 올랐더라.

6) 독종 재앙: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출 9:11, 12). 단속의 그물이 양아치들에게도 미쳐 졸개 중 몇이 경찰에도 잡혀 혼이 났지만 '좋다 이 학교 교장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사생결단 해보자'고 마음을 더 독하게 먹었더라.

성경은 여섯 번째 재앙부터 드디어 여호와가 바로를 강퍅케 했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도저히 보통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에서 항복하고 양아치 짓에서 손을 씻든지(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항복하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 학교에서 떠나든지(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주든지) 해야 함이 정상인데 그렇지 아니하니까 바로가 무엇인가 영적인 힘에 붙들려 있고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그 배경에 있는가 보다는 표현이지 하나님이 벌을 더 주려고 일부러 약을 올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졸개를 잡아가는 것은 두목도 언제든지 잡아 갈 수 있으니 두목더러 항복하라고 회개의 기회를 준 것이다. 두목이 회개해야 졸개들도 전부 다 손을 씻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7) 우박 재앙: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는 그 종들과 생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러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³ª ¹Ð°u 나맥은 자라지 아니한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하게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출 9:20, 27, 32, 34 발췌). 학교에서 정식으로 경찰과 합동으로 단속을 펴오자 일부 졸개들이 동요해 뿔뿔이 숨기도 한데다, 그 학교 앞에서 떠나지 않으면 떠날 때까지 학교를 무기한 휴교하고 단속만 하겠다고 하니까 찾아가 처음으로 자기 잘못을 시인했으나, 다시 학교가 개학되고 흩어졌던 부하들도 돌아오자 또다시 그 짓을 슬슬 재개했더라. 애굽은 이전부터 나일 강변의 삼각주 평야의 풍요로운 곡창지대가 부의 원천이었다. 하나님은 일곱 번째 가서야 비로소 그 곡물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큰일났다 싶은 바로가 잠시 회개하는 척했으나 아직 자라지 않은 밀과 나맥의 싹이 온전함을 보고 당장 마음을 바꾼 것이다.

8) 메뚜기 재앙: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고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니이까.¡| ¹U·I°¡ ±×μe¿¡°O °¡¼­ CI³ª´O ¿ⓒE£¿I¸| ¼¶±a·A 갈 자는 누구누구뇨¡| ³EEn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A≫AA´e ³ªAC AE¸| AI¹ø¸¸ ¿e¼­CI°i ³EEn CI³ª´O ¿ⓒE£¿I²² ±¸CI¿ⓒ AI A×A½¸¸A≫ ³≫°O¼­ ¶°³ª°O CI¶o¡| ±×·?³ª ¿ⓒE£¿I²²¼­ ¹U·IAC ¸¶A½A≫ °­ÆUAE CI¼IA¸¹C·I AI½º¶o¿¤ AU¼OA≫ º¸³≫Ao ¾Æ´ICI¿´´o¶o"(출 10:7, 8, 11, 17, 20에서 발췌).

경찰과 학생이 24시간 감시체계로 들어가 수입이 완전히 떨어지자, 드디어 자기 졸개들 중에도 서서히 반기를 드는 자들이 나타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해 학교를 찾아가서 학교 앞 반경 5km 이내에서는 철수하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학교 측으로부터 양아치 짓에서 완전히 손을 씻지 않는 한 어디서라도 단속은 계속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도리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더라. 곡식을 우박으로 상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메뚜기 떼가 절단을 내자(자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구역을 구석구석 샅샅이 뒤지고 단속해 수입이 완전 바닥에 이를 정도로 떨어지자), 할 수 없이 찾아가 빌며 회개하는 척하여 학교측에선 단속을 거두게 되었지만 그것도 잠깐 또다시 이전과 같이 설쳤더라.

9) 흑암 재앙: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출 10:24, 26, 27, 28에서 발췌). 이제는 학교 앞에만 단속하는 것이 아니라 근처 식당·술집에도 경관이 24시간 순찰 근무를 해, 수입의 원천이 완전 봉쇄되니까 또다시 교장을 찾아와 잘못을 빌어 단속을 풀었다. 그러나 완전히 땅에 떨어진 두목의 체면이 말이 아니고 그 동안 여러 번 교장을 찾아가 빈 것과 번번이 당한 일들을 생각하니 밤에 잠이 안 와 드디어 교장을 찾아가 '양아치 짓은 그만두겠지만, 이제 학생들이 문제가 아니라 교장 당신이 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그때는 없는 목숨인 줄 아시오.' 하고 이판사판 막가판이 되었더라.

자기 학교 앞에서 자기 학교 학생을 괴롭히는 양아치 두목을 경찰에 바로 넘기지 않고 단속만 하다가, 그에게 화해나 회개의 빛이 조금만 보여도 속는 줄 뻔히 알면서도 다시 단속을 풀고 또 풀어 준 것이 하나님이다. 인간 세상에 용서는 몇 번 정도 허용되는가? 삼세번 아니겠는가?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남쪽 오랑캐 두목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칠종칠금(oOðyoOÐO)이라는 숙어가 생겼다. 비록 전쟁 중에 적국의 장수를 자기 부하로 삼고 그 땅을 영지로 편입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목적이 작용했지만, 일곱 번이나 용서해주니까 아무리 강퍅한 자라도 넘어갔다. 일방적으로 열 번이나 용서해 준 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을 다같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일흔 번 씩 일곱 번을 용서해주라는 말씀이 실제로 구약의 역사 속에 하나님 스스로 본을 보인 것이 이 출애굽 사건이다.

급기야 바로는 하나님의 종 모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는 모세(교장)를 죽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전체(학교)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직접 죽이지 않으시고 장자를 대신 죽였다. 왜 그런가? 바로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도 다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둘 째 아담 곧 인류의 장자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대속 죽음으로만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과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한 그 뜻을, 자기 백성뿐 아니라 애굽 백성에게도 알리기 위해서였다. 현실적으로는 왕이 회개해야 애굽 백성 전부가 회개할 수 있고, 또 가장이 돌아 와야 집 안 식구 모두를 되 돌이킬 수 있기에 비록 어린 아들을 죽일지라도 왕과 아버지들은 살려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안에서(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믿음 안에 들어와), 인방과 설주(가로 세로로)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면), 죽음의 사자가 유월(׺eÆ-Passover, 뛰어넘겠다)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뛰어넘겠다는 것은 원래는 죽음의 사자가 그 집에도 들어가야 하지만(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오직 어린 양의 피로 구별되었기에 그 죽음을 면한 것이다. 학교에 들어와 공부하겠다는 소원만 있으면 우등생이든 열등생이든 양아치로부터 학교가 책임지고 보호하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소원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해 주신다. 눈을 씻고 성경을 샅샅이 훑어보아도 차별하는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단지 구별하시는 하나님만 있을 뿐이다.

만약에 스팔타카스의 노예 반란이 성공해 부패와 사치와 향락과 부도덕과 우상숭배의 극치를 이룬 로마제국을 무너뜨렸다면, 세속의 역사가들은 틀림없이 인류 역사 최초의 진정한 개혁이라고 찬사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400년간 한 민족 전체가 다른 나라에 식민지 지배를 당한 정도가 아니라 노예살이한 것이 과연 인류 역사에 그 유례가 있었는가? 그 노예들에게 칼과 창을 쥐어주어서 항거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양을 칠 때 쓰던 다 낡아빠진 지팡이 하나 든 80이 넘은 노인을 홀홀 단신으로 세계 최강의 제국 앞에 서게 하고, 양보하고 또 속아 주면서 바른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한 것이 차별이란 말인가? 차별의 '차'자도 모르는 셈이다.

 

잔인하신 하나님 - 가나안 정복 이야기

모세의 지도 아래 풀려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지체가 있었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산물이 풍성하고 땅이 비옥하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산업이라고는 양봉과 목축밖에 할 것이 없는 척박한 땅이라는 의미이다. 애굽의 풍요와 비유가 되며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고 의지해야만 하는 땅이며, 바로 그런 뜻에서 신자에게는 도리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

을 향해 진군하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한다. 애굽에서는 이스라엘의 어린이 심지어 육축의 한 마리도 상하지 않게 하던 하나님이 돌변하여, 가나안 땅에는 여자·노인·어린아이·육축까지 씨도 남기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미처 못하니까 하나님이 직접 나서기도 한다. 정말 잔인한 하나님일까?

이런 기사에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완전히 용납하지 못하여 미진한 구석을 남겨둔 채, 대신 이스라엘 백성의 당시의 잘못된 부족신관에 불과하니까 그 잘못된 신관을 바로잡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해석해버리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저자의 의도는 물어보지 않고 평자가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각색한 꼴이다. 차라리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이 정당한 평자가 할 일이다.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에게 이런 비참한 일을 인간 저자로 기록하게 할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래서 잔인한 하나님인가 사랑의 하나님인가 둘 중 하나를 확정지어야 한다.

이 기록을 잘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이유와 과연 그렇게 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부족만 사랑하는 부족신에 불과한가, 두 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의 신관이 정말 부족신관에 불과했는지 아닌지도 성경의 기록을 통해 조금 있다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이 왜 가나안 족속을 진멸(씨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키는 것)하라고 하셨는지 성경에 적힌 이유 즉 성경의 저자 하나님의 의도를 먼저 알아보자. 창세기 15:16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I≫cA)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여러 부족 중 가장 수효가 많고 강력한 부족이름으로, 가나안 족속 전체를 대표한 것으로 간단하게 가나안 전체 부족이라고 보면 된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열두 아들과 함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후 400년이 경과한 후에야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애굽에서 400년이나 지체해야 하는 이유를 가나안 땅에 죄악이 관영치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은 죄악이 관영하면 그때에 돌아오게 해주겠지만, 그 동안에는 애굽에서 노예살이의 고통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관영이라는 의미는 넘칠 만큼 찼다는 의미이다. 쉽게 예를 들면, 컵에 물을 부어 넘치는 것이 관영인데 컵 속에 오직 물만으로 가득 찾지 공기나 다른 물체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가나안 땅에 죄악이 관영한다는 것은 오직 죄악뿐이고 눈을 닦고 보아도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선이라곤 하나도 없기에 가만 두면 오직 악만 확대 재생산이 된다는 말이다. 중세 시대에 페스트균이 어떤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마을 전체를 불에 태워 없애야지 물로 씻거나 살아 남은 육축이 아까워 다시 잘 키워보려 하면, 그 마을에 들어가 새로 잘 살아 보려는 사람들이 흑사병에 걸려 몰살할 것은 뻔하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보시기를 페스트균이 퍼질 대로 펴져서 그 땅에 들어가 호흡하는 순간, 그 땅의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고 심지어 가축에게서조차 병균만 옮을 뿐이라고 보신 것이다. 이럴 때 그 마을을 불태우는 것이 잔인한 것인가? 그대로 두어서 새로 들어간 사람도 같이 흑사병에 걸리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5).

최근 그 지역을 발굴해 가나안 정복 당시의 사람들의 유골을 연구해 본 결과, 성병이 만연하였고 심지어 어린아이들마저 성병에 감염되어(유전적이었는지, 어린아이도 타락했는지 알 수 없지만)있었고 그로 인한 불구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가나안의 풍요의 여신들을 섬기면서 신전에서의 난교가 성행했고, 그런 문란한 성 풍속이 실제 생활에도 일반화되어 온갖 질병이 창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문란한 성은 아마 관영된 죄악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만으로도 항생제가 발명 안 된 당시로서는 페스트균처럼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진멸해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이 세상 가운데 건설할 때에 세상의 죄악을 그대로 둔 채 건설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전염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창조한 인간과 그들이 살고 있는 터전을 스스로 불태우실 만큼 하나님은 절대 잔인하지 않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 주겠다고 했고, 니느웨의 12만 악한 백성도 사랑하신 하나님이다. 오죽하면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최대 한계까지 가서 더 이상 사정을 봐줄 여지가 전혀 없었다. 죄악이 흘러넘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수 없다. 옛사람이 죽어야 새 사람이 창조된다. 옛사람을 그냥 두고, 새 사람이 태어나면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만 나타난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더러 자기를 의지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가나안 족속은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했다고 해서, 고대 중동 지역의 부족신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당시의 모든 나라들이 믿는 신은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부족신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다.

민수기 22¡­24장까지 발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를 지나야 하는데, 이미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모압 왕 발락이 이웃 지역 브돌의 신령한 제사장 발람을 초청해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이스라엘)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6)고 부탁한다. 처음에 발람은 이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을 했다. 발락이나 발람이나 당시 보편적인 부족신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은 자기들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믿는 신에게 내가 복을 빌면 내게 복이 오고, 내가 저주하면 대적에게 저주가 필연적으로 따라 가는 것이 부족신관이다. 복을 빌거나 저주하는 것은 나의 몫이고 신은 내가 바친 열성과 치성의 정도에 따라 판단해서, 그 복과 저주의 질·양만 결정해 자동적으로 내리게 되는 것이 부족신이다. 혹시라도 복이나 저주가 기대 이하이면 치성과 열심을 더 동원하면 된다. 발락의 요청이 부족신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에 반해 여호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낼 때에 주신 약속의 말씀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라고 했다. 부족신관과 무엇이 다른가? 아브라함이 남의 복을 빌거나 저주하는 주체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남을 축복해주고 또 남을 저주하면 하나님이 남을 저주해준다고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는 처음부터 여호와에게 우리 민족만 보호해주고 다른 민족은 벌주라고 요구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가나안 땅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일신·창조주·사랑의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너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데, 그 일을 너희가 수행할 때 너희에게 일어나는 모든 위험에서 내가 지켜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이 그 나라를 좋아하든, 설사 싫어하든 간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복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만을 사랑하고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여 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부족신이라는 말인가?

출애굽하여 가나안 진군의 지도자로 모세를 세울 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다짐을 또다시 확인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 6). 아직도 부족신관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부족들이 너희를 통해 참 하나님을 알게 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고 싶어하는 나라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참하나님을 아는 복을 받았으므로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은 그 복을 나눠주는 창구로 불림을 받았고 또 그 복을 체험을 해야 제대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에 먼저 복을 받은 것뿐인데도, 이스라엘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 못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무수한 징계를 당했다는 것이 구약의 기록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부족신관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자신들이 패배한 기록을 성경에 기록하여 자기 부족신의 능력에 먹칠을 하게 하겠는가?

요나의 경우를 보자. 요나는 악의 도성 니느웨를 저주하고 싶은데도 하나님은 자꾸 가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다. 부족신 여호와라면 경건한 백성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니느웨를 저주하면 당연히 니느웨에게 유황불을 내려야 하지 않는가? 벌을 받은 것은 오히려 요나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맺은 언약을 요나가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다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어떻게 호소했는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덩굴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 11).

구약의 부족신관을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바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구세주 예수를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려면 필연적으로 어떤 민족과 지역과 시대를 택하셔야 했는데,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 가운데 이스라엘이 뽑혔을 뿐이다. 이스라엘이 잘났거나 특별히 사랑해서 뽑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계시를 완벽하게 드러낼 수 있는 민족으로 뽑혔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만약에 예수가 한국 땅에 태어났더라도 성경 구약의 기록에는 중국에서 종살이 몇백 년 하다 탈출했고, 오다가 서해 바다 어딘가가 갈라지고, 평양성을 7일간 침묵으로 돌았더니 무너지고, 한반도에 살고 있던 죄악에 관영한 오랑캐족을 진멸하라는 명령이 내렸을 것이다. 또 그렇게 기적적인 은혜를 많이 입은 한국민족임에도 하나님을 배반하다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는 기록도 나타났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한 동일한 언약을 주셨을 것이며 요나 같은 자도 나타났을 것이다. 분명히 한국민족이 다른 어느 민족보다 더 큰 축복을 받는 역사가 있겠지만, 다른 민족 앞에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 서 있지 않으면 가차없이 더 큰 화를 내렸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나안 족을 진멸하라고 했고 이스라엘 민족을 기적으로 보호했다고 부족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전 인류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 누구를 편애하지 않는다.

 

장애인을 차별하는 하나님-제사장 제도

레위기에 보면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장애인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자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전 가까이도 못 오게 하고 심지어 몹쓸 병에 걸린 자나 사생아까지 그러하다. 외국인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구하지 말라고까지 한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이 문제로 인해 철두철미 배타적이고 차별적이며 단지 중동의 한 민족의 미숙한 신관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문제는 레위기의 전체 주제와 연결시키지 않고,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해병대나 공수부대 같은 특수 부대에선 항상 그 부대만의 아주 혹독한 규율이 있고, 그것을 어겼을 때는 지독한 체벌이 따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침번 서면서 졸면 일반 부대에선 연병장 풀 뽑기 한 시간을 시키는데 반해 특전사에서는 사흘 배식 일절 금지에 연병장을 오리걸음으로 10바퀴 돈다는 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특전사의 기합을 두고 일반 군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좀 심하다고는 생각하겠지만 꼭 잘못되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특전사는 적진에 홀로 침투하여 자기 생명을 거는 특수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그에 맞는 훈련과 정신무장도 갖추어야 하므로 어떤 면에서 당연하고 더 심한 벌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레위기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적진에 홀로 생명을 걸고 들어가는 하나님의 특공대로 훈련시키는 교본이지, 남자라면 누구나 다 가는 논산훈련소 교본이 아니다. 그것도 지난 4백 년간 단 한번도 실제 전투나 훈련을 겪어 보지 못한 오합지졸을 훈련시키려면 더 엄격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럼 그 교본의 첫째 항목에 무엇이 나오겠는가? '비상시나 전시에 적진후방에 단신으로 투입되어 적을 교란하고 아군의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식의 특전사병의 임무와 목적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세부적으로 불침번이 졸 때는 어떻게 한다는 규정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 세부적 벌칙 규정만 보고 특전사 교본이 잘못되었고 너무 심하다고 따지지는 않는다.

레위기 곳곳에 바로 이 특전사병의 임무와 목적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이라 여호와라.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20:24, 26). 특전사병으로 불렀으니 그에 맞게 되라고 한다. 예의 장애자를 위한 규정에도 마지막 부분에 가서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레 21:23)고 하셨고 거의 모든 세부규정마다 그 끝은 항상 "나는 너희의 여호와라" 는 말로 결론짓는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더러 여호와의 군병답게 완전하게 구별되라는 뜻이지 내가 장애자들을 차별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특전사병 훈련에 앉은뱅이나 장님이 오는 것을 막으라고 해서 장애자를 차별하는 규정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도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창세기 32장에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장애인을 차별하는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이스라엘 12가문의 선조가 되는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속여 빼앗는 바람에, 이방 땅에 도망 가서 천신만고 고생 끝에 이룬 많은 재산과 처자식을 이끌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내일이면 얍복강을 건너 맞대면할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그런 불안 가운데 밤새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한다.

그런데 그 사자가 야곱의 기세에 눌려 밀리다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키지만 그래도 야곱은 끝까지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우겨 기어이 복을 받는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지만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 32:30)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선조가 불구자 병신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불구자를 하나님의 백성의 선조로 삼으셨다.

환도뼈란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 쌍의 좌골 뼈로서 사람의 힘과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더 이상 생식능력이 없어진 고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신체적으로는 장애자 겸 고자로 만들었고 영적으로는 그가 의지했던 모든 인간적인 힘을 꺾으시고 완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든 것이다. 장애자·병든 자·과부·사생아·고아·이방인들… 모두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병신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 민족 전체를 이런 사람들과 같은 처지로 만드셨다는 뜻이며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더 사랑하셨다. 또 그런 자들만이 전심(iiay)으로 하나님을 찾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율법의 세세한 규정들은 당시 사람들로선 알 수 없던 미개한 위생상태에 대한 예방과 또 예배 같은 공중 집회에서 전염병을 막는 실질적인 효과도 감안된 것이다. 당시의 외국인의 경우는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아무도 없었으며 모두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들을 성전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은 요즘 식으로 따지면 굿을 하는 무당을 교회의 공적 예배에 금한 것과 같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어느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대신에 하나님은 외국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3, 34). 무당이나 그를 추종하는 자를 공적 예배에서는 배제하더라도 실제의 삶에서는 절대 인종 차별하지 말고 같은 민족처럼 사랑해주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관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것도 구약의 하나님을 더욱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은 그 신관이 변천 되었고 설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변천된 신관에 영향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성경의 하나님은 변화가 없었다. 또 하나님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들을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선지자로, 그루터기의 어린 순으로, 이세벨에게 굴복하지 않는 7천 명의 모습으로 항상 남겨 두셨다. 그 남은 자들이 세상의 나머지 전체 숫자에 비해 너무 미약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자기 일을 이루시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으셨던 분이다.

 

율법주의적 신관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공적에 의해서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에만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기준으로 삶을 살고 있다고 비난한다면, 이는 기독교 신자의 잘못을 탓하기 이전에 십자가의 예수가 근원적으로 부인되는 결과가 된다.

 

왕으로서의 하나님

일반적으로 왕이라는 메타포(Metaphor-eßec)는 그 상징적인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떠오르게 하는 형상과, 또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거나 율법주의적인 신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만은 이것을 다른 종교에서처럼 일률적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신자 개개인의 아주 주관적인 문제로 보아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을 포함하여 기독교인들이 여호와를 왕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때, 율법주의적¡¤Æø±ºAu¡¤³²¼ºAu Ay´e±C·AAC ≫oA¡A¸·I ≫y°¢CIAo ¾E´A´U.

신자에게 왕이라는 호칭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모든 주권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그 주권의 뜻에는 생사여탈(ßæÞYæ¨÷¬)권과 생존을 유지시켜 주는 것과 외적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의미가 가장 크다. 성경이 씌어질 당시로는 우리의 삶의 주권을 쥐고 있는 하나님을 은유하기에는 왕 말고는 적합한 단어가 없었고, 그것은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왕이라는 직위가 주는 나쁜 이미지도 오버랩 된 것뿐이지 기독교 신학이 왕이라는 폭군적 이미지를 고의로 도입한 것은 아니다. 설사 오늘날 성경을 기록한다 해도 폭군적 제왕의 의미를 없애기 위해 대통령·대법원장·국회의장 같은 이름을 하나님의 호칭에 부칠 수는 없으며,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쓸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 맞다.

왕이신 하나님은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생존여건을 마련해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시험 및 위험에서 건져 보호하시며,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 그렇게 씌어 있거나, 교회에서 교리적으로 그렇게 가르쳐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완전히 그분만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체험하고 확신했기에 아주 자연스럽고도 스스럼없이 불리는 호칭이다. 고대 절대 군주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분의 인도하심에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무한하시고 한 번도 우리를 강요하거나 폭압으로 다루신 적이 없음을 누가 뭐래도 알고 있다. 은유의 의미를 생각하거나 그 관계를 분석해 본 적도 사실 없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왕이시다.

신자 가운데 자동차에 물고기 모양의 심벌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였고, 또 예수님이 수제자 베드로를 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바꾸어 준다고 해서 붙이는 것이 아니다. 고대 로마시대에 로마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반드시 '로마 황제가 나의 주입니다'라는 인사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절대로 세속적인 폭군 왕이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대신에 '예수님만이 나의 주입니다'라는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 문장의 헬라어 이니셜을 하나씩 모으면 생선이라는 뜻의 헬라어 익투스가 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수난받는 종에게 폭군적 제왕의 이미지는 전혀 없었으며 신자는 바로 그 종을 왕으로 모셨다. 율법주의가 판을 치던 고대, 로마 문화권에서조차 기독교인들만은 하나님을 율법주의적으로, 제왕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로마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으로 훨씬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공동체를 이루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라는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민족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가나안 땅에서 타락과 배교의 역사를 거듭하다가, 급기야는 참왕이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민족들과 같이 율법주의적 인간의 왕을 세우기로 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사울이라는 출중한 인물을 왕으로 세워주고, 대신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왕정 제도가 얼마나 잘못될 것인가를 깨우쳐 준다. 당시 백성들을 일깨울 뿐만 아니라 후세에라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하나님은 왕'이라는 은유를 혹시라도 잘못 해석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전에 마련해 둔 배려인 듯싶다. 그 경고를 여기에 옮겨보기로 하자.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을 취하여 그 병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삼 8: 10¡­19).

 

율법주의적 믿음과 삶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도덕률 내지 계명이 있고, 그것을 잘 지켜 죄를 짓지 않으면 나중에 심판을 면하고 내세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인이 율법에 관해 갖는 공통적인 견해다. 이런 권선징악적인 심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을 율법주의적 신관이라고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율법주의적인 삶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율법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언제 주셨는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해내신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 여정길의 시내 산에서 주셨다. 이미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은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라고 준 것이지 그 율법을 지켜야 천당을 가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는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그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10, 13, 14). 첫째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둘째 그 자녀에게도 그 경외함을 가르치게 하며, 셋째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성경 곳곳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화를 당한다고 경고하셨지만 어디까지나 가나안 땅에서 복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의 문제이지 사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것을 어기는 것 자체가 화다. 율법은 심판을 내리는 잣대가 아니라 복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다. 우상숭배와 죄악에 찌든 백성들이 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 된 삶인가를 천하에 보여, 열방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라고 주신 것이 율법이다. 심판이 겁이 나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일반 종교의 권선징악적 율법관이 문자적 율법주의라 한다면, 하나님 뜻대로 따르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 기쁨으로 그렇게 사는 기독교의 그것은 진정한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자기들의 삶이 다른 민족에게 본이 되어야 함에도 그 땅 거민들의 삶을 자기들의 모범으로 삼아버렸다. 그들에게는 이미 얻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대신 현실에서 어떻게 풍성하게 살 것인가 만이 당면과제였다. 자기들은 선택된 백성으로 율법까지 받았기에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율법을 자기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받았다면 그렇게 쉽게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문자 그대로 율법주의적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들은 율법주의적인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미 3:11). 설사 죄를 지어도 자기들에게만은 심판이 없다고 믿었기에 하나님의 사후 심판을 두려워하는 삶을 산 것이 아니다.

이런 잘못된 선민의식(Zionism)은 예수님 당대에까지 이르렀고,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꾸중을 들은 바리새인들이다. 이제 율법은 단지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치부하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율법은 사람들로 죄 문제로 괴로워하고 심판을 받을까 두렵게 하는 짐조차 되지 못하고 종교적·영적 우월의식을 증거해주는 역할밖에 못했다. 바리새인들만큼 율법의 규정을 엄밀하게 따르며 산 자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주의적 삶은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율법의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적용한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여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들이야말로 율법의 규정을 가장 잘 준수하는 것처럼 살았던 것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이 땅에서 진정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완전한 길인 율법이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었다. 율법도 그러했고 율법을 받은 백성도 진정한 율법주의적 삶과는 완전히 담을 쌓아 버렸다. 이들의 삶은 형식적 율법주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고 하셨다. 예수님이 폐하신 것은 제사 절차법이지 제사법의 배경에 있는 정결의 정신과 도덕법은 오히려 더 강화했으면 했지 폐한 것은 아니다. 신자들의 삶이 바리새인들이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켜 사는 정도보다 선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구원을 얻은 자가 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율법대로 살아야 하며 나아가 그렇게 사는 도덕적 삶 자체가 신자에게 축복이 된다는 뜻의 진정한 율법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죄가 중심 문제가 되어 있지 않는 종교란 생명력이 없는 종교다. 죄가 중심이 된다고 해서 신자들에게 멍에를 메우자는 것이 아니다. 도덕률이 구원의 기준이 되면 그것은 멍에가 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아무리 낮은 수준의 도덕률이라도 평생을 두고 완전하게 지켜낼 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덕적인 삶을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지 못하고 율법만을 강요하면 어떤 종교라도 짐이 될 수밖에 없다. 죄의 용서가 없는 사랑은 헛것이며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용서 또한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의 대가로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가 임했다는 것을 믿을 때만, 문자적 율법주의의 짐과 멍에가 벗어지고 진정한 의미의 율법주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갖는 의미와 방법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죄의 형벌이 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부담을 가졌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율법대로 산다. 이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사랑을 입은 자로서 거룩과 영원을 사모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며 영광의 빛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 자로서 진정한 기쁨으로 선한 삶을 열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 가끔 시험과 유혹에 빠지게 만들기도 해, 내 의지적인 노력만으로 그 선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사모할수록 더욱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성에 대한 미움은 증대되게 마련이다. 예수에게 가까이 갈수록 죄의 본성이 얼마나 추하며 그 권세가 얼마나 센지 내 힘만으로 이길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선을 이겨낸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신자가 된 후에도 남은 죄성을 한탄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 25)고 복음의 은혜와 권능에 감사했다. 바울은 율법의 멍에를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성을 저주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붙든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신자라면 완전한 천국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누구나 바울이 했던 것과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조건부 신관-이기적 신앙

신자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신다. 그러나 그 선한 일에 비례해서 축복을 내리지는 않는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보다 특별히 복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훨씬 복을 많이 받고 있거나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관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그렇게 오해될 수 있는 구절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럴 때는 항상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문자적인 해석의 오류에 빠진다.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는 다윗의 고백을 들 수 있다. 과연 그러한지 구체적으로 하나씩 따져보자. 분명히 "원수의 목전(UIin-눈앞)"이라고 했다. 다윗의 앞에는 위험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대적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지, 대적을 무찔러 망하게 만들고 그가 흥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게 상을 베푸시고"에서 상은 축복과 보상을 뜻하는 '상(ßU)'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테이블을 뜻하는 '상(ßE)'을 뜻하는데, 상에 넘치도록 음식을 차려 주었으니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베풀어진 상이란 항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진정한 교제를 의미한다. 환난과 어려움에 처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는가 의심하고 불안했지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보호해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다는 뜻이지, 신자가 복을 불신자보다 더 받았다는 뜻은 어디에도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구절이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이란 항상 성령의 임재를 뜻하는데, 성령의 간섭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에 은혜가 넘쳤다는 영적인 의미다. 불신자는 현실적 형통을 잔의 밑바닥에 깔릴 정도밖에 못 받았는데 신자는 넘치도록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계속해서 제기하는 질문은 '왜 신자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형통하는 데 반해 신자는 오히려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가?'이다. 시편을 읽어보면 그런 표현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0: 1). "악인은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시 10: 4, 6).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 1).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 1, 2).

급기야는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과 직접 토론을 벌인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두 가지 질문을 들고나선다. 첫째 신자가 기도해도 구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악이 성행하도록 가만두고 보시는가 하는 문제와, 둘째 더 나아가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고 이익을 취해도 잠잠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인간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신자가 기대하는 대답은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 뜻이 있어 그러니 참고 기다리라'는 정도일 것이고, 둘째는 또 '때가 되면 내가 저들을 벌을 주고 너희들을 상을 줄 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고 위로를 주셔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을 성경대로 간략하게 옮겨 보자.

 

선지자의 질문 1: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하나님의 대답 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Aß·≪¡|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합 1:5, 6, 10).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고 신자는 환난 가운데 있는 것이 어찌 된 사정이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더 큰 악인이 설칠 것이며 그에게 아무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으로 삼는 자"(합 1:11)이기 때문이라는 한 가지 알 듯 모를 듯한 이유만을 드신다. 하나님이 악인을 통제할 힘이 없거나 죄악을 제거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단지 자기 힘만을 믿는 자들로 하나님은 없다고 하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이 신자가 세상에서 형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신자의 복이고 또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불신자의 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두 번째 논쟁에서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선지자의 질문 2: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중략…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1: 13, 2: 1).

하나님의 대답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 2¡­4).

 

무슨 하나님의 대답이 이러한가? 너희를 삼키는 까닭은 말할 수 없고 또 너희가 알 필요도 없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 굽어지지 아니하고 다만 실현될 때가 따로 있으니 믿음으로 살라고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현실에서 너희가 살고 죽는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실현된다. 그러나 무조건 참아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때에 신자를 형통케 해주는 모습으로 그 의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이 땅에서 참으로 승리하는 것은 현실의 형통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은 신자의 형편과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것만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너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일방적 선언이 아니며 독재자 하나님이 아니다. 신자를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실현되는 일에 초대한 것이며 신자는 그 하나님의 의를 함께 이뤄나가는 자로 부름받은 것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이 선행과 회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논쟁을 마친 하박국 선지자가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내용이 어떻게 바뀌는가 보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내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 16¡­19). 신자는 검소하게 살아야 하고 또 신자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비록 기근과 흉작으로 인하여 소출과 열매가 없더라도 무조건 기뻐해야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열매와 소출이 없는 까닭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약탈하고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가장 강력한 군대가 곧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기에 뼈가 썩고 처소가 떨릴 정도로 선지자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기뻐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에 이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대로 이뤄진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 신(ae)을 삼는 자"들인 갈대아 사람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자기 나라를 왕성케 하는 데 반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고백하는 신자는 완전히 다 뺏기고 망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것만으로 승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기독교의 어디에서 이기적인 신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자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잘못 알고 똑같은 기도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하박국 선지자에게나 우리에게나 항상 동일하다. 이 갈등을 가지고 씨름하여 분명한 응답을 받은 자만이 믿음으로 살 수 있지, 교회에 나온다고 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람들

필자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무리 전도해도 씨가 먹히지 않는데 그가 드는 이유는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데 질렸다'는 것이다. 실컷 기도해놓고 기도한 대로 응답이 안 되고 결과가 정 반대의 나쁜 모양으로 나타나도 하나님의 뜻, 또 전혀 기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마치 카지노에서 대박 터지는 모습으로 행운이 나타나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고 너무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더 분통터지는 일은 불신자도 하지 않는 분명히 잘못된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밀어붙이고 강요하는 꼴은 정말 못 봐주겠다는 것이다. 한 예로 자기 동네의 아주 큰 교회에 주일 예배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차들을 대로상에 버젓이 불법 주차해 바쁜 사람들의 교통을 방해하면서도, 도대체 미안한 눈치도 보이지 않고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주일마다 그러고 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뜻인가라고 반발하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생각과 계획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신자와 교회들이 의외로 많으며, 그런 잘못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순종하려면 최소한 회교도들이 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들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라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순종한다. 단적인 예로 운전을 하다 차가 고장이 나면, 그 차가 아무리 벤츠 600이라도 알라신의 뜻이라고 해서 그 자리에 버려 둔 채 걷거나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간다. 기독교 신자가 이 정도도 되지 않으면서 입에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면'을 달고 다니면서 자기 편리대로 매사를 적용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신자가 이런 잘못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하나님의 뜻대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전혀 다르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았다는 말이다.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는 거의 전부가 여러 대체 방안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국한시킨다. 선교사라면 몽고로 갈까요 북한으로 갈까요, 기독 실업가라면 무역회사를 차릴까요, 아직 내수에 치중할까요, 청년부 학생이라면 이번에 무리해서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할까요, 아니면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지방대학으로 갈까요, 중에 고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의 전부로 착각한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신자가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신자는 하나님에게 어느 길을 갈까요, 혹은 무엇을 할까요(Which way should I go? or What should I do?)에 관해 먼저 물어선 안 된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어떤 일(what kind of work or act)을 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사람(what kind of person or being)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목전에 항상 서 있는 자의 자각을 가지고 모든 일을 하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일차적으로 갖고 있는 뜻이지, 우리더러 무슨 거창하고 구체적인 일을 하게 하고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되었다면 비로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하나님이 결정하여 책임져 주실 뿐 아니라 신자가 그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깨닫게까지 해주신다.

선교사가 진정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생명까지 바치기로 헌신했다면, 몽고로 가든 북한으로 가든 선교의 열매는 맺힐 것이고 또 그곳에서의 모든 형편도 하나님이 주관해 주신다. 사업가도 정직과 신용과 성실로 청지기적 소명을 가지고 사업을 한다면 수출을 하든 내수에 초점을 주든 하나님은 그 사업을 융성케 해주며, 학생도 학생으로 먼 장래의 소명을 붙들고 열심히 공부하면, 어느 대학을 가도 우등생이 되어 졸업 후에도 자신의 소명을 이룰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신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그가 우리 갈 길을 지도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교사이든 사업가이든 학생이든,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뀌어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 편, 장로 편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이런 하나님의 뜻에 관해 심지어 목사나 장로마저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성전을 신축해야 하는가, 선교사업을 먼저 해야 하는가로 싸운다. 양쪽 다 기도해보니 서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싸운다. 대개의 경우, 이런 문제에 관해 하나님은 직접적인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 어떤 일을 추진하기 위해선 반드시 최선을 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하나님을 위해 더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집착하니까 이런 문제들이 생긴다. 성전을 지어 현재 교인들을 더 잘 양육시키고 새 성전으로 인해 교인이 늘어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과,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불쌍한 민족을 위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 둘 다 하나님 뜻이다. 그러나 아무런 가시적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심지어 더 큰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만약에 이런 문제로 싸운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겠는가? 그 답은 당연히 "일 가지고 서로 싸우지 말고 먼저 바른 신자가 되어라"일 것이다.

신자가 물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한 가지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지니게 될까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더 풍성한 교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이 하나만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주고 인도하시는 것은 그 다음에 하실 하나님만의 몫이다. 하나님의 뜻은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께 순종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것 외에 없다.

그럼에도 자꾸 '하나님, 어느 길로 갈까요, 무슨 일을 할까요?' 하고 묻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핑계로, 어느 길이 위험부담이 적고 성공의 가능성이 높은지, 그것을 가르쳐 달라는 뜻일 수 있다. 물론 이미 모든 위험부담을 각오하고 떠나는 선교사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열매가 더 많이 나타나는 곳을 가르쳐 달라는 순수하고 좋은 뜻이지만, 혹시라도 열매를 더 많이 맺어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자기 욕심이 없는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

선교사가 어디로 갈 것인가는 자기의 적성과 은사와 그 동안 훈련받은 언어와 마음의 소원 등을 종합하여 잘 판단하면 된다. 선교사의 경우에도 개인적 욕심이 있을 수 있는데 하물며 평신도가 일상생활의 문제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갈까를 묻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자칫 점쟁이 수준으로 격하시킬 수 있다. 물론 기도해서 마음의 평강이 있고 확신을 심어 주는 응답조차 부인하거나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며 무엇이든 기도해야 한다.

자꾸 가시적인 어떤 일의 형태로 드러나야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하니까 자기 마음의 선한 뜻과 부합되고 교회가 확장될 수 있는 방향이라는 판단만 서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밀어붙이고, 그런 와중에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뜻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 예를 든 대로 주일 날 교회 앞 노상에 주차하는 것을 교인 수가 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며, 처음 오는 사람도 있는데 주차 문제로 골치 아프면 다음 주부터 안 나올지 모르고, 영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일이 먼저이므로 하나님도 이해해주실 것이고, 순경마저 교회 일이라 단속하지 않는데 괜찮아 식으로 밀어붙이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근거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뜻을 전도와 교회부흥이라는 일에만 초점을 둔 것이다. 교회가 일만 앞세우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 즉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는 잊게 된다. 새로 오는 사람에게도 저희 교회에 안 나오셔도 좋으니 노상 불법 주차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 그 사람도 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를 먼저 가르치는구나 알 것이며 이웃에 사는 불신자들도 교회와 신자는 역시 다르다고 생각해 더 전도가 잘 될 것조차 모르고 있다.

신자가 고의적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동원하는 것은 신자라고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과 하나님만은 숨은 의도를 알 텐데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미 신자이기를 거부한 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꼭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거나, 둘째는 어떤 일을 하는데 무엇이 더 실패의 가능성이 낮는가 불안해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자더러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성령의 도우심을 매일 간구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과 생태계 문제

인간과 자연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그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연 사이는 도저히 상호 넘나들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EaÐA)이 있다. 자연의 신비함과 그 속에 드러난 신성(aeao)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피조물에 불과한 자연을 신성시(aea¡aE)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것과 그 피조물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찬미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 어디까지나 그 작품에 베어 있는 작가의 정신·혼·의도 등을 발견하고 찬미하는 것이지, 그 작품 자체가 작가 당신은 아닌 것과 같다. 물론 그 작품이 그 작가의 전부 혹은 전 인생을 드러낸 것이라고 찬미할 수 있고, 또 그 작가를 존경한다고는 할 수 있지만 그 작품을 존경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대상을 신격화 혹은 신성시할 때 반드시 그 대상이 인간의 경외·예배, 최소한 존경은 받을 수 있는 인격체이어야 하는데 자연에는 인격이 없다.

하나님은 다른 동식물을 먼저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신 후, 인간의 삶에 구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 1:28, 29). 이 말씀을 자연을 인간이 더불어 벗하지 않고 일차적으로 정복할 대상으로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끔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어지는 말씀에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30)고 하셨다. 만약에 정복할 대상으로 주었으면 다른 짐승들에게까지 하나님이 구태여 식물을 주시며 관심을 보이실 필요가 없다. 정복하라는 뜻은 하나님이 설명한 대로 자연을 잘 다스려 생육시키고 번성시키라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씨를 주셨고 동물에게는 푸른 풀을 주셨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경작해 추수한 것으로 식물로 삼고 다른 동물은 자연에 있는 그대로를 먹으라는 뜻이다. 인간이 다른 동식물의 먹이를 빼앗지 말고 보호하라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인간에게만 경작할 지혜를 주셨다. 피조세계의 모든 주권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속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맡아 식물·동물 다 아끼면서 다스리라는 것이며, 그런 뜻이라면 산을 깎고 강의 줄기를 바꾸고 들판을 갈아엎을 수 있다.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인간의 탐욕이 이 말씀을 정복의 개념으로 바꾸어버렸다. 자연은 정복 내지 말살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경배의 대상도 아니다. 자연을 신성시하기 위해 가만히 태초의 상태로 손을 대지 않고 버려두어서도 안 된다. 어떤 신관이든 자연을 보존하고 가꾸기는 마찬가지다. 생태계를 파괴시킨 것은 탐욕으로 물든 인간의 죄성이지, 특정 종교의 신관이 파괴하라고 부추긴 것이 아니다.

인간이 대신 관리한다고 인간의 마음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관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관리해야 한다. 생태계를 유지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서 자기 자식같이 아끼며 가꾸는 것이다. 흔히들 미국은 신으로부터 축복받은 나라라고 말한다. 풍부한 자원, 넓고 비옥한 땅, 아름다운 자연 경관 등 황량한 아프리카나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좁고 늙은 한국 땅에 비하면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단순히 풍부한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을 물려받아 복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대신 다스릴 수 있는 대상을 풍부히 받았기에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연을 아름답게 잘 보존하고 자원을 이웃과 나눌 수 있기에 미국은 복받은 것이다.

자연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경배하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을 완전히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경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조물도 피조물대로 더 사랑할 수 있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성신(iieAaøao)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신 4:19). 자연세계에서 가장 경이롭고 신비로운 것은 해와 달과 별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천하만민을 위해 분정하셨기에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한다. 자연 안에 신성 자체가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뜻이 드러나 있다.

지구가 하나님의 몸이라고 하거나 우리를 낳으시고 젖을 먹여 주시는 어머니로서의 지구라고 생각하여 자연을 신격화하자고 덤비는 것은 인간적인 의를 드러내는 값싼 감상주의거나 샤머니즘에 대한 향수, 둘 중 하나다. 즉 자기들만이 생태계의 오염을 가장 많이 걱정하는 듯 내세우거나, 하나님이 염려한 대로 자연의 신비에 미혹되어 초월하시며 전 우주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당신은 잊거나 부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 자체에 신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설사 자연을 보호하려는 의로운 모습일지라도 초월의 하나님을 잊거나 부인하게 만들거나, 피조물과 하나님을 동격으로 만들려는 뜻이 숨겨져 있다면 전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생태계를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잘 보존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을 망친 것은 전통적 신관·초자연 신관·자연신관, 그 어느 것도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의 죄다.

 

신은 존재냐 비존재냐?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한 마디로 잘 설명해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썩지 아니하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이며, 보이지 아니하다는 것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이라는 것이며, 홀로 하나라는 것은 그 존재가 존재하게 되는 근원이 외부에 있지 않고 스스로에게 있어, 자신의 뜻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에도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주의 모든 사물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어떠한 존재도 썩으며, 보이며, 외부와의 관계에서만 그 존재가 존재다워지지만 하나님만은 말 그대로 홀로 하나인 절대자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시공을 초월하는가, 아니면 시공간 안에 내재하는가, 물질인가 아닌가, 영원한가 일시적인가 등은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분석한 외형적 이해일 뿐이지 하나님의 품성까지 포함한 전존재론적 해석이 아니다. 외형적 분석만으로 하나님을 보면 모든 존재(being)란 어쩔 수 없이 시공의 범주에 의해 제약되지만,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자는 모든 존재와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에서 비존재(non-being), 혹은 일반 사물(thing)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no-thing, Nothing으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좀더 따지기 위해선 존재(being)와 사물(thing)의 구분부터 해보자. 사물은 일차적으로 생명이 없어 스스로 생장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이나 동물은 생명이 있어 자라긴 하지만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최소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한 것을 행동에 옮기는 인간이나 그를 넘어서는 어떤 인격체를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존재와 사물을 나누는 기준은 과학적인 분자구조와 질량과 시공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성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런 측면에서 신은 무조건 존재이지 비존재 또는 존재조차 초월한 어떤 것이 아니다. 절대자에게서 인격성을 제외해버리면 기독교 변증학자 오스 기니스(Os Guiness)가 말한 대로 '동양적 신앙 집단인 힌두교·불교·뉴에이지들이 공유하는 궁극적 실체에 대한 공통적 견해는 '미분화된 비인격성(undifferentiated impersonal)' 또는 존재에 대한 비인격적 입장'이 되어버린다.

계를 갖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온전한 이해를 못한다. 인격적 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만 따로 떼어서 내린 인간의 평가와 교설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대신 창 1:1에 드러난 절대자 하나님과 인격적 사랑의 관계에 바탕을 둔 교설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자에 대한 앎이나 체험으로만 그 신앙이 신앙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또 설사 그 앎과 체험이 우리의 이해나 기대를 뛰어 넘는다고 해서 그 관계가 결코 무의미해지지 않는다. 신자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며, 그래서 그분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신자가 된 이후의 모든 체험은 유용하다. 그 체험 중에서 내가 유용한 체험인가 아닌가 따져서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혹 우리의 이해나 인식을 초월하는

미분화된 비인격성의 대표적인 것으로 동양의 음양 이론을 들 수 있다. 분명히 지구에 음극과 양극을 뛴 자성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생존과 감정에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절대로 궁극적 실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을 통해 생겨나는 자연 현상이다. 하나님이 지구 위에 인간을 두고 살아가는 생존 환경으로 만든 한 사물 내지 현상이지 그 자체가 인격성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다. 또 최근 우주를 감싸고 있는 눈에 안 보이는 암흑에너지 내지 기(N¨)를 절대자라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역시 공기·이온·빛·미립자 등이 상호 교차·충돌·연합하는 활동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거나, 하나님이 우주를 존재케 하기 위해 만드신 비물질적 사물이지 그 자체가 절대 신이 될 수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인격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존재가 존재로 성립되기 위해선 인격을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인격이 반드시 존재와 존재끼리의 상호 관계성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 존재끼리의 상호 관계성이 없다면 존재로서의 아무 의미가 없다. 상식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 나 스스로 제대로 알 수도 없지만, 설사 알았다고 한들 만약에 이 땅에 정말 자기 혼자만 존재한다면 그 존재의 인격성은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나는 저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 또는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라고 말할 때만 그 존재가 제대로 의미를 갖는 존재가 되며 그 인격성이 파악된다.

절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절대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비절대적 존재가 있어야만 절대자가 비절대자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어떤 존재가 절대자냐 아니냐는 인간이 그 신의 존재의 모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논리적으로 절대주의 입장 혹은 상대주의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절대자와 비절대자 간에 인격적인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창조주로서 절대자란 존재와 피조물로서 인간이란 존재가 올바른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성에 관해 외형적·물리적·논리적 전개와 설명은 일체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선포로 시작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 그 인간과 상호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당신께서 인간에게 어떤 존재이며, 인간은 또한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그 이후부터 설명하겠다는 것이 성경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끈다는 의미가 바로 이 인격적 관계가 선행이 되어야 신앙이 성숙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인간 간의 인격적 관계는 인간과 인간끼리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상호 인정하고 원해야만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다. 한쪽에서 철저하게 상대를 무시하면 아무 그 관계란 무의미하다. 즉 인간관계란 항상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없던 절대자가 새로 생기고 상대적인 하나님이 절대적 하나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인간이 그를 안 믿는다고 절대적인 하나님이 없어지거나 상대적인 신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오직 홀로 하나이시다. 이를 인정하고 그분 앞에 나와 겸손히 항복하며 참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진정한 의미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절대자에 대한 인간 나름대로의 이해와 인식은 사람에 따라 굴절되고 왜곡될 수 있으며 그래서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교설 또한 상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격적인 관계가 아직 맺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상태가 상대적·비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 관

 체험마저도 오직 신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나아가 신자도 간혹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욥의 예에서 보듯이 그것 또한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며 결국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다. 자기가 깨닫고 판단하여 자기에게 유용한 체험만 신앙으로 인정하겠다고 덤비면 그야말로 자기가 절대자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다. 기독교는 깨달음이나 배움의 종교가 절대 아니다. 오직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반응만을 요구하는 종교다. 인간의 뜻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전부다.

절대자에 대한 한 가지 절대적 교설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고백이자 그런 관계를 갈망한다는 투정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면, 그 단정지은 것 자체도 이미 절대적인 명제가 되어버린다. 상대적인 인간이 취할 입장이 못 되며 그런 단정으로 기독교의 입장을 비난할 수 없다. 진정한 상대주의란 다음 세 가지 입장을 다 수용해야 한다. 1) 진리가 있다면 예수만이 구원의 진리가 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 진리일 수 있다. 2) 역으로 기독교의 그것만이 진리이기에 나머지 모두는 진리가 아닐 수 있다. 3) 진리가 없다면 모든 것이 진리가 아니다.

지금 어떤 구원의 길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논쟁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고 할 때의 그 의미는, 절대적인 사랑의 하나님과 절대적인 인격적 관계를 갖고자 할 때에 한해 십자가만이 그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종교와 인간은 세 가지로 나뉠 수밖에 없다. 우선 절대적 하나님과 절대적 관계를 맺는가, 상대적 하나님과 상대적 관계를 맺는가로 둘로 나뉜다. 전자는 기독교이고 나머지는 다른 일반적인 종교다. 셋째는 그 중간 입장으로 절대적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절대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종교도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슬람은 숙명적 관계를, 유대교는 선민적 관계를 맺는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절대적 사랑에 바탕을 둔 인격적 관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관계를 가지라고 권유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이 될 수 없다. 인류가 정신사적으로 장년기에 왔으니 그에 맞게 상대적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유치한 수준이다. 정신사적으로 봐도 현대의 모든 철학과 사상이 기실 헬라·로마 시대 이후로 별로 발전한 것이 없다. 이미 선현들이 말한 것을 재탕 삼탕, 그 표현만 조금 바꾸어 고상한 용어를 썼다 뿐이지 그게 그것이다. 그래서 한 일이라고는 일반인들이 그 사상을 제대로 못 알아차리게 만들었거나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적 사랑의 하나님, 우주의 궁극적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한 일말고는 없다. 정말 인간이 비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면, 100% 순수한 상대주의 입장에서 절대자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100% 부인(완전무신론)하거나 100% 시인(절대적 신앙)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지, 그 중간의 회색 지대는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라면 쉽게 알 수 있고 핑계치 못한다.

 

어느 신학자의 신관

인간이 절대자에 대해 절대적인 입장을 취하는가 아니면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측면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나눠 볼 수 있게 한다. 신관이 나이가 들수록 변천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이다.

스스로 보다 의미 있는 신관을 찾아서 끊임없이 평생을 구도자적인 자세로 사는 것은 평생을 다 보내도 완전한 신관을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과 시간에 따라 자기의 감정과 지성적인 수준과 영적인 상태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신관이다. 변치 않는 신관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린아이 때에 교회의 주일 학교에서 들었던 신관을, 커서도 아무런 반추작용 없이 유지하고 있거나 보수적 교단에서 교리적으로 강요하는 어떤 신관을 맹목적으로 끝까지 완고하게 붙들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를 찾아 구도하고 있던 어느 날 절대자가 자기 삶을 밀고 들어와 도저히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고백을 하게 만들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절대성에 다른 사족을 달 수 없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배타성으로 인해 마치 고착적인 완고한 신관으로 오해한다. 구도자적인 태도를 용납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신관을 목사나 교단에서 주입식으로 강요하듯이 가르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신자가 믿음을 갖게 된 계기는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자면, 믿어져서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노력해서 믿어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의 예에서 보듯이, 회심과 중생의 과정을 통해 시작하지 아무리 진지한 구도자의 자세를 가졌을지라도 지성적·합리적 탐구로는 믿을 수 없다.

 

초자연주의 신관

모태 신앙인으로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교회 그것도 강압적인 교회에 계속 출석한 자의 경우는, 자신의 신관에 대해 갈등을 많이 겪고 어른이 된 뒤 그 신관이 변화되거나 심한 경우 기독교 신앙마저 포기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그런 사람이 상당히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정 개인의 문제이지 성경이 이야기 하는 신관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들이 만났던 목사들이 잘못 가르쳤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그 책임이 제일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 스스로 성경을 제대로 탐구해 보았어야 할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만큼은 어느 누구도 개입될 수 없는 오직 본인과 하나님의 일대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아무리 교회에서 잘 가르친다고 해도 어렸을 때는 제대로 된 신관을 형성할 수가 없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만은 천재가 없다.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이 땅에서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가 무엇인지, 인간관계의 상처와 이 세상의 모순과 왜곡들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전인데 그런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질 수 없다. 비유가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10살도 안 된 아이가 남녀의 성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렴풋이는 알아도 정확하게 다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설사 어느 정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인 양 확신하고 실제 체험해보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범주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신관의 문제도 어려서 완전히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생을 두고 탐구해도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실제로 주일학교에서는 인간의 영적인 성숙도에 맞추어 하나님을 가르친다. 어린이가 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치다 보니 손가락을 옆으로 흔드시는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강조된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많을 때라 아무래도 벌주는 하나님이 어린이의 마음에 제일 많이 자리잡게 된다. 이 또한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엄마에게 사람이 어디서 생기느냐고 질문하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든지, 새가 물어다 주었다든지, 아니면 엄마 배꼽에서 나왔다든지 아이들 수준에 맞게 대답해주는 것과 같다. 어느 누가 그런 엄마를 엉터리로 대답했다고 탓하겠는가? 또 어린 딸에게 만약 엄마의 성기부분에서 아기가 나왔다고 사실 그대로를 말해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일 학교에서는 아무리 해도 로마서의 이신칭의(i¤aaoaeu)의 교리를 알아듣도록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사람마다 자기 고유의 신관을 갖게 되는 과정은 각자가 다 다르다. 아무런 외부적 강요 없이도 의심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 어떤 구도자적 갈등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 기도나 소원도 하지 않았는데 성령 체험을 하는 자, 성경 공부 중에 기독교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사람 등,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는 각 신자마다 갖는 독특한 경험이다. 시간적으로도 순간적으로 믿는 사람, 점진적인 사람,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한 사람 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된 자는 자기가 받은 그 구원이 너무나 확실하고 은혜로워 남은 평생 동안 복잡한 다른 신관에 대해 연구·분석·성찰할 생각도 없이 지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밝힌 대로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작 따져야 할 문제는 어떤 사람의 신관이 어떻게 변했는가가 아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신관이 시대에 따라 변했는가, 또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가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초월하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다. 서로 다른 두 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의 다른 속성을 표현했을 뿐이다. 성경 전체로 보았을 때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 항상 너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더 강조되었으면 되었지 초자연적 하나님이 더 우선이라고 해석될 여지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성경에 강조되어 나타나는 빈도수로 따질 수는 없다. 각각의 상황은 그 상황대로 온전한 하나님을 나타낼 뿐이다.

만약 어떤 아버지에 대한 일대기를 쓴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때는 야단치는 아버지, 또 다른 때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아버지, 심지어 아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해주는 아버지, 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가 나중에야 아버지만의 깊은 사랑의 동기를 발견하는 경우 등 온갖 형태의 아버지가 등장할 수 있다. 이를 분리해서 생각해 서로 다른 아버지로 생각할 수 없고 야단과 격려를 한 횟수로도 비교할 수 없다. 아버지라는 전 인격체를 두고 판단해야 하며 더 나아가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 입각한 아들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성경의 하나님이 야단만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다면 그 까닭은 두 가지뿐이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을 일보다 야단맞을 일을 더 많이 했다는 것과, 둘째 성경을 읽는 독자 자신도 선행보다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이해가 더 빠르고 머릿속에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유치한 어린 시절의 수준에서 하나도 자란 것이 없다. 본인의 신관이 아무리 바뀌었고 또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잘못이었다고 항의해도, 본인의 영적 수준은 자신이 변명하거나 남이 탓할 수 없다. 교회는 잘못 가르칠 수 있지만 성경은 잘못 가르치지 않는다.

 

흔들리는 신관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교회 주일학교에선 의도적으로라도 초월하시고 권선징악적인 하나님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여 착하게 사는 자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보상해주는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 나쁜 짓을 하면 당연히 벌을 받는다는 것을 대조하여 가르친다.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내용의 한 가지 주제와 궁극적인 도착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인데, 어렸을 때부터 이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맛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 사랑은 반드시 죄를 벌하시는 공의가 성취되어야 완전해지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면 벌 주시는 하나님도 함께 강조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이 율법주의적 신관이나 초월주의 신관 등 한 쪽으로 치우치는 신관에 빠뜨릴 위험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정의로서 특별히 어린 자녀들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설명할 재간이 없다. 다 큰 어른도 십자가 복음을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기독교 복음과 구원의 교리는 인간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간섭과 거듭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어떤 면에선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교리는 복음이 실현되는 외형적 과정과 구원 이후의 의미에 대한 설명에 그치는 것이지, 구원이 전개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가르쳐 줄 수도 보여줄 수도 없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거듭나고 기독교의 구원관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끝나는 신비다.

따라서 구원의 성사 여부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정교성·심오성¡¤°i¸ACO¿¡ AOAo ¾E°i,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진정으로 믿느냐에 달려 있다. 성경은 율법주의 혹은 초자연주의 식으로 한 쪽으로 치우친 신관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인되면 자동적으로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이지 가르침과 깨우침의 문제가 아니다. 가르치는 교회나 배움을 받는 교인이나 가장 먼저 찾고 의지하고 믿을 것은 그리스도다. 이것을 등한시하면 어려서부터 신앙이 편향되어질 수밖에 없으며 지성과 인격이 성숙한 성인이 되어도 아무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치우친 신관이란 그 자체로 이미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결국은 흔들림에 빠지며, 또 그리스도 앞에 되돌아오지 않는 한 아무리 탐구해도평생 방황할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는 신관이란 자신의 지성과 종교성을 동원한 탐구의 과정을 거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셔야 비로소 생길 수 있다. 여러 신관을 비교 연구하였더니 그 중에 이것이 가장 맞는 것 같아 하나를 택하면, 그 택함이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변할 수 있다. 초월주의 신관이 틀려서 이신론자나 무신론자가 되겠다든지, 무신론이 틀렸기에 초월주의 신관을 붙들기로 했다는 것은 본인만의 문제이지 절대자 하나님과 아무 연결 고리가 없다.

신관은 어디까지나 신관이어야지 자신의 사상관이 되어선 안 된다. 신관에 한해선 바르고 온전한 출발을 해야 한다. 출발점이 잘못되면 아무리 중간에 잘 닦인 도로를 간다고 해도 도착지는 달라지며, 그 동안에 열심히 다녔던 그 여정이 전부 헛된 낭비가 된다. 신관에 있어서 바른 출발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다. 신은 신이라는 것이다. 신이 신이 아니면 믿을 필요도 없다. 이 너무나 간단한 진리를 사람들은 외면한다. 일부러 외면하고 부인하려 든다. 신을 신으로 보지 않는 것은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본인의 사상과 철학은 될지언정 신관은 아니다. 사람을 동물로 보면 인간관이라고 불리어질 수도 없고 올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신은 신이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칼 바르트가 말한 그대로 신은 '절대타자'로 초월적인 절대적 존재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아니다. 그리고 신의 이 절대성이 신의 편재성¡¤무소부재성과 충돌되거나 부인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다. 초월적 절대성이 전제가 되지 않고는 편재성과 무소부재성은 성립할 수 없다. 절대적 존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떤 영역에서도 그 절대성을 잃지 않을 수 있지만, 절대적 초월자가 아닌 그 어떤 존재도 절대 편재하거나 무소부재할 수 없다. 절대 타자는 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으나 내재된 한정된 존재가 초월로 뛰쳐나갈 수는 없다. 나를 알고 선택하여 사랑으로 찾아오시고 영원히 땅끝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초월하는 절대타자뿐이며, 그분이 먼저 찾아 오셨다는 뜻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다. 그 은혜를 입은 자는 초월적 절대자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순간 그 절대 타자가 우리 안에 내재하게 되며 비로소 그 신관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인간 스스로 깨우쳐 이해할 수 있는 신이라면 신이 아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절대 타자만이 신에 대해 우리를 깨우치게 해줄 수 있다. 예수님 당신이 우리를 깨우치게 해주시는 분이지 예수님을 따라 한다고 깨우쳐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자의 깨우침 조차 절대적 은혜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1, 12).

절대타자를 부인하는 곳에는 아무리 심오한 깨우침이 있어도 거기에는 이미 신이 없기에 신관이 아니다. 인간 자신이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는 존재인데, 스스로 깨달은 신관이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대타자의 은혜가 없는 깨우침은 자기의 사상과 철학과 종교적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남들보다 더 똑똑하고 심오하다는 자랑이 되어 버린다. 삶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며, 그래서 절대자 앞에 절대적으로 겸비해지지 않고는 올바르고 흔들리지 않는 신관이 생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의 모습으로만 확인된다.

 

초월이냐 내재냐

예수님만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선언은 하나님이 타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몇천 년간 암흑 속에 살아가도록 방치했고,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것이 백 년밖에 안 되었는데 그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은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말인가 하는 의심과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과 양립 불가능한 교리라는 결론을 내린다. 누구는 떡을 주고 누구는 매를 주는 하나님이라면 그 공평성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평성이란 반드시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질적인 판단을 정확하고도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좋은데도 점수를 박하게 매기거나 나쁜데도 후하게 주거나 동일한 조건인데도 차등을 주어 취급하면 공평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공평성을 따지려면 그 질적인 분석과 심사를 정확하게 했는가를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받은 대우가 많거나 적은 것은 이차적인 문제로 대우가 좋고 나쁜 것은 어디까지나 그 판단에 근거한 것이지 대우가 좋고 나쁜 것에 따라 사람의 질적 수준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했을 때, 일반인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었는가 아닌가, 즉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했는가 아닌가를 인간 구원의 판단근거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을 질적으로 분석할 때 예수를 믿은 자는 점수를 후하게 주고 안 믿은 자는 박하게 주었다고 오해한다. 정말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 사람이 예수 믿기 이전에 이미 다 심사해서 판단해 놓았고, 그 심사 결과에 따라 상급과 형벌의 대책으로 예비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를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가 인간 심사의 기준이 아니었다. 이 전후관계를 모르면 평생 가도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제대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심사 결과에 따르면 어느 한 사람도 더하고 덜한 것이 전혀 없었다. 점수로 따지면 모두가 마이너스 무한대에 해당하고 그 점수로는 죽음이라는 형벌 외에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테스트한 리포트에 적힌 내용이다. 하나님의 공평성을 따지자면 바로 이 판단을 따져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를 믿는 자를 구원하겠다는 것은, 그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대우하고 보상하는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확하고 공평한 판단에 의한 공평한 보상은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하지만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대신 죽여 그 죄값을 감당하게 했다. 예수를 구원의 길로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그 판단이 완전히 옳고 공평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모든 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특별히 자신이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이 대신 죽은 것으로 그 죄 값을 다 갚게 되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태를 평가함에 있어서나, 또 그 평가한 결과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전혀 불공평함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가 유일한 길임을 믿는 것이다. 정말 공평하게 하자면 모두가 죽어야 함에도 예수의 보혈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오직 은혜일 따름이지 불공평이나 차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에 반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을 문제삼았다는 뜻으로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 하자가 있다고 불평한 것이다. 특별히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고집한 것이다. 남은 몰라도 자기는 아니며 인간에게는 질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 차이에 따라 대우도 마땅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성을 따지기 이전에 인간 사회의 불공평성을 강조하는 말이며 그 불공평성에 맞게 하나님도 불공평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평가할 가능성이 많으니 내가 확실히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남들보다 내가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테니 절대 죽고 난 뒤에 딴 소리 하기 없기로 합시다라고 하나님과 내기를 하는 꼴이다. 감히 하나님의 공평성을 못 믿는 참으로 완악하고 교만한 모습이다.

이 문제는 절대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편애나 편가름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 구원의 판단 근거를 종교의 우월성의 비교에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에 두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죄인이라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완전히 공평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판단을 공평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몽땅 동일한 벌을 주든지, 아니면 전부 동일한 사면을 해주든지 둘 중 하나뿐인데 그 중에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세주(I­a|n≪:하나님이 택하신 세상을 구원할 공평하고도 유일한 길)라 시인하면 몽땅 구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공평한 방법이 어디 있는가? 은혜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구원이 아니고는 공평도 은혜도 절대 만족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기독교를 편애하여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불공평한 것이 되려면, 예수를 믿는 자에게 특별한 상이 주어지고 믿지 않는 자에게 특별히 무거운 벌이 부과되어야 맞다. 예수님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18¡­21)고 하셨다.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따로 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 그래서 어둠 속에서 죄 가운데 그냥 거하는 것, 죽어서 받는 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지내는 것들이 벌이지 하나님이 예수 안 믿었다고 따로 준 벌이 없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AuEn¸| ºI²o·?¿i ¿a½E¿¡ ³≫¾i ¹o·A μI¼IA¸´I¡| ¶CCN AuEn°¡ ¸¶A½¿¡ CI³ª´O μI±a¸| ½E¾iCI¸A CI³ª´O²²¼­ AuEn¸| ±× ≫o½CCN ¸¶A½´e·I ¹o·A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므로…"(롬 1:24, 26, 28).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만한 마음대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벌이고, 신자는 예수를 알고 그 빛 가운데서 사는 것 자체가 상이다. 그럼 죽은 후의 구원과 심판은 무엇인가? 그것도 따로 추가로 부과된 상과 벌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아무런 절대적·인격적·사랑의 관계가 없었던 자는 당연히 죽어서도 계속해서 그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있었던 자는 그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에게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과 '죄인인 줄 아는 죄인'의 두 가지 종류의 죄인밖에 없다고 했다. 인간의 불공평성이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보게 된 원인이지 하나님이 불공평해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공평하셔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의 이 구원의 진리를, 하늘에 계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라는 일방적이고도 독단적인 방법을 유일한 길로 정해놓고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혹자들은 비난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의 산물에 불과한 성경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믿는 기독교의 보수주의자들이 순전히 자기 고집으로 우긴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독단적이요, 기독교인들도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된 까닭은 초월적인 초자연주의 신관을 가졌기 때문이니까, 초월 대신 내재하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런 예수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기독교를 초월만 믿는 종교로 까지 몰아붙인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인간이 자신을 죄인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자신을 남들과 동일한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비춰질 뿐이다.

대체적으로 배운 것이 많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초월보다 내재를 강조한다. 그 반대의 사람은 비교적 초월 신관에 기우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초월의 하나님과 내재의 하나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내재하시는 초월자이다. 전자는 자신은 남에 비해 우월하니까 세상은 공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자신은 남에 비해 죄인이니까 어떤 벌이라도 심지어 불공평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을 많이 따지는 사람일수록 세상은 공평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은 몰라도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하나님에게 응분의 보상을 당당하게 요구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할 말인가? 그들은 또 기를 쓰고 예수를 부인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인정하면 자신이 꼴보기 싫어하는 놈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절하되어, 하나님에게서 불공평하게(?) 취급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의 흉악한 강도가 단지 예수를 받아들인 것만으로 자기들처럼 멋지고 고상한 사람만이 가야 할 천국에 함께 간다면 자기는 죽어도 안 가겠다는 뜻이다.

 

초월도 내재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에 입각한 '냐냐주의' 혹은 '이것만 저것만'을 강조하는 '만만주의'로 따질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아가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내재와 동시에 초월을 함께 강조하는 '도도주의(both/and)'적 입장도 엄격하게 따져 볼 때에 맞지 않다. 우리말 표현상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면 마치 각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속성중의 하나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설사 정확하게 둘 다 맞다라는 영어식 표현(both)이 강조되었다 한들 신을 한마디로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없다는 약점은 여전히 남는다. 또 '도도'가 되면 항상 두 개 중 어느 것이 우월한지, 혹은 동격인지 가치 비교가 필수적으로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앞에서 지적한 대로 초월은 내재를 동반할 수 있지만 내재만으로는 초월로 나아갈 수 없다.

수학에 필요(Necessary) 충분(Sufficient)조건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명제 P가 참이면 명제 Q도 반드시 참일 때 명제 P는 명제 Q를 유도한다고 하며, 이때 Q를 P이기 위한 필요조건, P를 Q이기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절대타자로서 초월성이 있어야만 모든 신자의 마음 안에도 내재할 수 있지만, 우리 생각만으로 깨닫는 신은 초월적인 절대자가 될 수 없기에 이때 내재성은 초월성의 필요조건이 되고 초월성은 내재성의 충분조건이 된다. 인간의 신적인 체험이나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은 하나님 그분이 절대자이기에 가능하며, 또 오직 그분의 주권적 은혜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아무리 지성적으로 똑똑하고, 영적으로 신령하고, 구도자적 자세가 열심이고, 신학적 지식이 풍부해도 그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두 명제 P와 Q가 서로간에 필요충분조건이 되면 그때는 완전히 동치(OOo·)가 된다. 초월과 내재에서 '도도주의'가 되면 어떤 위험성이 따르는가 하면 완전히 초월이면서 완전히 내재가 되는 상태, 즉 범재신론에 해당할 수 있다. 그림으로 따지면 두 개의 원이 중심과 반경 등 모든 면에서 일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언뜻 보아 특별히 틀릴 것 없는 것 같으나 초월과 내재성을 상호 분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내재하는 하나님만으로 필요 충분하다고 하거나 초월하는 하나님만으로도 필요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일부 기독교에서 과거 초자연적 하나님만 강조한 잘못이나, 동양종교에서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의 신관이 바로 그런 오류다. 범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범재신론에서도 인간 자신의 느낌과 체험과 깨우침을 신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 하나님의 유신론적 신관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초월성의 하나님의 커다란 원 안에 내재성의 하나님이 작은 원으로 동심원(OOaye­) 형태로 포함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내재라는 뜻 자체가 피조물에 불과한 일개 연약한 인간의 개체 안에 있는 하나님이므로 당연히 그 원의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둘이라는 뜻도 아니요, 두 속성 중에 꼭 초월이 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라 몇 번 강조한 대로 초월은 내재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지만, 내재는 초월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기독교 하나님의 초월성이 내재성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간극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영이시다. 물질이 아니다. 영과 물질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영은 물질에 들어 올 수 있어도 물질이 영계에 들어갈 수 없다. 돌·물·공기·풀·나무에 영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영이 들어갈 수 없다. 영은 생명과는 다르다. 식물은 생명이 있지만 영은 없다. 또 영은 지·정·의와도 다르다. 동물의 경우 비록 낮은 수준이긴 해도 분명히 지성·감성, 심지어 의지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동물을 두고 영적인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르다. 특이한 존재다. 형체론적으로는 물질이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지정의가 있고 또 영이 있다. 피조세계에서 유일하게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 특별히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영성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지정의를 동원해서 사물을 파악하는 차원을 넘어 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각·감각·의지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를 뛰어 넘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간만이 영으로 감지할 수 있고 나아가 절대자 하나님과 상호 교통할 수 있다. 돌고래의 아이큐가 80¡­120의 수준이 된다고 하는데 그들은 아무리 인간만한 지성을 동원해도 하나님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정도의 아이큐만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얼마든지 인식하고 대화할 수 있다. 돌고래는 영이 없고 인간에게 영이 있기 때문이다. 영의 세계는 영으로만 알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한 모든 피조세계는 본질적으로 당연히 존재론적 간극이 있고, 인간도 예외가 아니지만 하나님 대신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에게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그 간극을 넘어 상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의 본질이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또 다른 간극은 품성적인 것이다. 존재론적 간극이 인간과 하나님의 물질적·외형적 성질의 차이라면, 이것은 인격적·내면적 성질의 차이로 사실 이것이 더 본질적인 간극이다. 죄에 찌든 인간이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도저히 맺을 수 없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본 자는 다 죽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실체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심술이나 감히 인간인 주제에 건방지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았으니 벌을 받으라는 독선의 뜻도 아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진선미의 결정체로 어떠한 죄나 더러운 것과 불완전한 것들과는 공존할 수 없다. 죄에 찌든 인간이 그 상태로 그분 앞에 서는 순간 그 거룩성 앞에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린다. 마치 블랙홀이 엄청난 중력으로 그 근처에 있는 어떠한 물질·에너지·빛도 흡수해 삼켜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구약에는 항상 하나님 당신이 직접 인간 앞에 나서지 않고, 천사나 사자를 보내거나 어떤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 인간이 소멸되는 것을 하나님 당신이 막으셨다. 대표적인 예로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불은 불이되 타지 않는 불이다. 불이란 항상 타 없어지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이 불은 불 자체는 타고 있지만 타야 할 대상물 떨기나무는 타지 않고 있다. 불 자체가 스스로 타는 대상이 되었다. 피조물로 물질에 불과한 떨기나무는 하나님이 임재하면 타 없어져야 함에도 나무가 타지 않고 불이 혼자 타고 있다. 하나님 당신이 혼자 타고 있다는 뜻이다. 죄와 공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죄와 공존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스스로 그 죄를 감당해 내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 외는 하나님이 인간을 대면하고 제대로 된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는 전혀 없다. 죄를 지어 타 없어져야 할 대상인 인간을 소멸시키지 않고 인간의 죄를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죄와 함께 소멸되어 인간이 소멸되는 것을 막으신 것이다. 마치 블랙홀이 자기 근처에 오는 모든 물질이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블랙홀 스스로 자신을 흡수해서 소멸시킨 것과 같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이요 은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품성적 간극을 메우기에는 인간 쪽에선 절대 무력하고 오직 하나님 당신만이 메울 수 있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그 초월성을 스스로 벗고 인간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만 그 간극이 메워진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임재를 체험하며 그분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체험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행해지든지 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모든 행위의 발단과 전개와 결과 모두를 주도하시고 책임지는 이는 하나님이다. 동작의 주어는 언제나 하나님이며 문장 형태는 능동태이다. 인간을 주어로 바꾸려면 문장이 자동적으로 수동태로 바뀐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을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가 있는 더러운 상태에서는 만나주지도 않고 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심리적·인식론적·존재론적으로 제대로 따지려면, 인간은 완전한 죄인이며 하나님은 완전한 절대자라는 관계를 가장 먼저 인정해야만 한다. 현재 서구 사회에서 내재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동양 사상이나 종교에 영향을 받는 자들이 많이 늘어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죄의 문제를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가치 중립적·상대적·인간의 지정의에만 바탕을 둔 관계는 그것이 어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든 그 속에 참다운 사랑과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 특별히 하나님과는 그것으로는 절대 어떤 관계조차 맺지 못한다. 저들은 하나님 내재의 실제 체험도 없고 또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초월의 절대자 하나님을 가능한 부인하고픈 것이다. 그래서 가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자신을 그것으로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오직 절대적 가치에 입각한 영적인 교제, 그것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은혜를 베풀 때만 가능하다.

 

출처 : http://www.nosuchjes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