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향해서 말씀하신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참다운 계시가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그 모든 효력도 오직 믿음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된다. 죄사함과 성결과 중생과 성령과 그리고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도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며, 믿음으로써만 받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이 믿음의 도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순한 가르침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이는 복음의 교리이다.
믿음은 우리의 소망의 관건이요 모든 갈망의 성취를 좌우하는 필수의 요건임으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함부로 생각해 버릴 수는 없다. 믿음에 속한 어떠한 일이든지 우리의 화복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곧 믿음 여하에 따라 우리를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 극단으로 멀리 갈라놓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문제를 소홀히 취급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믿음의 참 진리에 대해서 결코 모르고 있어도 안되겠고 잘못 알고 있어도 안되겠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소위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곳에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대해서 오랫동안 염려하여 왔다. 정통적 교파나 교회에서는 다들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근심하는 것이다. 특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오늘의 대다수 신자들의 견해가 성경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즉 오늘날 사람들은 복음이란 말을 성경 기자들이 뜻했던 것과 같은 뜻으로는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불안의 구체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복음을 가졌노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거의 신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사실
2. 중생했다고 하는 그들의 행위나 생활 전반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의 흔적이 희박한 사실
3. 지도자 자신들부터 복음의 참뜻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올바로 가르칠 수도 없는 사실
4. 배운 교리에서 유익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어떤 만족할 만한 체험을 얻어보려는 많은 열심에도 불구하고 허다한 성도들이 비참히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
5. 수많은 성도들이 오늘날 중대한 위험 아래 놓여 있다. 그 위험이란 그들이 거짓 가르침을 진리로서 신봉하고 있는 사실이다. 곧 믿음에 관해서 그들이 아무런 비판도 없이 받아들여서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교리들은 실상 허위의 가르침인 것이다.
6. 순종으로서 믿음이 실증되어야 할 마당에서 믿음을 순종의 대용물로 쓰며, 혹은 현실 도피수단으로, 혹은 강건한 사색을 회피하며, 약한 성격을 은폐하는 방편들로서 믿음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가치한 물질적 허세(실속없는 수다를 떨며 서둘고 다니는 것)나 터무니없는 낙관주의(그저 막연히 자기는 예수를 믿으니 안심이고, 세상은 그럭저럭 잘 되리라는 생각)나 천박한 종교적 감상주의나 혹은 공연히 찡그리고 심각한 체 하는 태도 등을 신앙이란 이름으로서 잘못 부르고 있다.
7.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의 실제생활에 실질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아무런 변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 그들이 불신으로부터 신앙으로 들어 왔으나, 그들의 실생활에는 아무 별다른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번번히 보고 있는 바이다.
우리가 먼저 거짓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그로부터 자연히 참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믿음이란 것은 단순히 우리의 생각에 옳다고 믿어지는 그 어떤 주장을 믿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에게 제시된 증거가 그럴듯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어코 그 일을 믿으려고 한다. 이것은 그 본성이 그렇게 변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면 그 증거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일 때는 여하한 방법으로서도 그를 믿게 할 수 없다. 협박으로도, 징벌로도, 명백한 증거 없이는 인간의 마음에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
물론 이렇듯 이성을 바탕으로 한 믿음도 믿음의 일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믿음은 아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비록 훌륭한 증거들이 따르겠지만 그러나 윤리와 영적 생명은 거기에 없다. 이와같은 이성적 믿음은 실상은 매우 허약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그 바탕이 인간의 영혼이 아니고 생명없는 외부적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한 사람이 결과적으로 보아서 틀림이 없었던 어떤 증거를 보고 끝까지 믿었다면, 그가 이런 증거를 좇았다는 허물 하나만 가지고서 그를 정죄함은 부당할 것이다. 동시에 어떤 죄인이 명백한 증거를 좇아서 행동했다고 해서 그가 옳았다고 인정한다면, 결국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런 구원은 바울이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가룟 유다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를 자발적으로 신앙하는 자리에서 옮겨서, 인간의 타산을 좇는 자리로 떨어지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온전하신 하나님의 성품 자체 뿐이다. 즉 참 믿음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의 완전무결하신 윤리성 이외의 다른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이 말이 진실한 말이라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이 비록 우리의 이성과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모든 논리상의 법칙들과 상반되는 것이라도, 믿는 사람들만은 여전히 믿는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다 할지어다"(롬 3:4). 이것이 참 믿음의 사람의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신다. 이러한 믿음은 사소한 증거들 위에 높이 솟아 오르는 믿음이며, 하나님의 품 안에 쉬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우리의 영혼의 응답이다. 그리고 이 응답은 우리 마음 가운데 미리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움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믿음은 회개한 인간의 영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감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인간이 찾아내는 여러 가지 증거자료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똑바로 그의 행위에 나타나지 않는 어떠한 믿음도 진정한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믿음 이하의 그 무엇에 불과하다.
믿음과 도덕은 마치 동일 물체의 겉과 속과도 같은 관계에 있다. 참으로 도덕은 믿음의 핵심이요 믿음의 완성이다. 무릇 어떠한 믿음이든지, 만약 그 믿음이 그의 생활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순종으로 이끌어 가지 않는 것이라면 결국에 쓸데없는 것이다. 설사 대단한 희생을 그 믿음을 위해서 드렸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믿는 자는 동시에 순종할 것이다.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참다운 믿음이 없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믿음을 주셨다. 만일 믿음의 효력이 이런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믿음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참 믿음은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참다운 회개가 있는 곳에는 또한 순종도 있다. 진정한 회개란 지난 실책에 대한 한갓 슬픔만이 아니라, 앞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받드는 생활을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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