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토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인간의 비참한 지경은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 내보내고 대신에 "물질"을 그 마음의 왕좌에다가 모셔 놓은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기에 앞서서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마음의 안위를 얻을 수 있는 유용하고도 아름다운 만물을 준비하셨다.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물건들은 단순히 "만물"이라고 불리워졌다. 그것들은 사람의 소용을 위하여 지어진 물질들로서,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는 외부적인 것이요 사람을 따라가는 것들로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원래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들어와 있을만한 가치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에 계시고, 그의 밖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물이 산과 들과 물 속과 공중에까지 풍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죄가 이 질서에 혼란을 일으키게 한 결과,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 물질들이 인간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요소가 되고 말았다. 즉 인간의 비참한 지경은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 내보내고 대신에 "물질"을 그 마음의 왕좌에다가 모셔 놓은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물질은 마침내 인간의 심령을 완전히 정복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은 본래의 평안을 잃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떠난 뒤의 인간의 심령 속에서는, 어둠컴컴한 도덕이라는 등불 밑에서 온갖 흉악하고 완고한 욕망들이 서로 제일 높은 자리를 다투는 싸움을 그칠 줄을 모르게끔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하나의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심령에 깊이뿌리박고 있는 심각한 실상이다. 타락한 인간의 심장 속에는 얄궂고 악착스러운 물욕, 소유욕의 뿌리가 빈틈없이 뻗어 있다. 그리고 그 욕정은 쉴새 없이 맹렬한 기세를 가지고 물질을 추구하고 있다.
"나의" "나의 것"이라는 말은 얼른 듣기에는 범상하게 들리지만, 이 말이 사용되는 하나 하나의 경위를 깊이 고찰한다면, 이 말이야말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본성을 몇 천권의 신학서보다도 더 훌륭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 심령 속에는 물질욕의 뿌리가 어떻게도 깊이 박혔는지 우리는 그것을 뽑아버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뽑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의심없이 믿을 만큼 현대의 인간은 물질에 의하여 완전히 사로 잡혀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물질은 인간에게 불가결의 것이 되었는데, 그 정도가 처음 하나님께서 의도했던바와는 전혀 다른, 지나친 것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고, 이 터무니 없는 대치(代置)의 결과로 만물의 운명은
"심히 좋던"(창 1:31)
자리에서 "심히 악한"자리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이 참혹한 지경에서 헤매고 있는 인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고 말씀하신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 인간의 참된 생명을 좀먹고 있는 물욕의 폭군(暴君)의 손에서 벗어나는 오직 유일한 길을 제시하신 것이었다.
이 진리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마치 우리는 각자의 심령 속에 우리의 멸망을 원하고 꾀하고 있는 원수를 저마다 하나씩 품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 원수를 "자기" 혹은 "육신"이라 부르셨는데, 이 육신의 중요한 특성이 바로 다름아닌 "소유욕"인 것이다.
우리가 이 원수를 마음 속에 살려 두는 것은 곧 나중에 가서는 우리의 모든 것 ― 육체는 물론이려니와 영혼까지 잃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이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물리쳐버리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은 없고 도리어 모든 것 ― 땅 위의 유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첩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이 원수를 이기는 방편까지 제시되어 있다. 그 방편이란 곧 십자가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길은 모든 물질적 욕망을 부정하고 가난한 심령의 외로운 골짜기 길을 걷는데 있다. 천국을 소유한 복된 사람들이란 모든 외부의 물질적 유혹을 부인하고, 그 중심에서 소유욕의 뿌리를 뽑아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 "가난"이라는 말씀은 그 당시 예루살렘 거리에 방황하는 걸인들이 물질적으로 남루하게 헐벗은 바로 그 모습을 천국의 소유자들은 마음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복된 가난한 자들은 이제는 벌써 물질의 폭군의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저 폭군의 멍에를 꺽어 버렸는데, 그것을 꺽는 길은 곧 모든 것을 버리는데 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모든 소유의 관념을 떠났으되 또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니 곧
"천국이 저희 것이다."
이 문제를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자. 이것은 다만 하나의 범연한 가르침으로 생각하여 다른 여러 교리문제들과 같이 우리가 머리 한 구석에 담아두기만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동산의 보다 푸르고 싱싱한 꼴이 있는 초장으로 인도하는 길의 도표(道標)가 되는 이 문제를 우리는 등한히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따르려거든 이 도표가 가리키는 길로 지금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걸음 걸어 올라가야 한다. 한 걸음 쉴 때 그대의 진보는 거기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
다른 경우에도 흔히 그런 것처럼 이 물욕을 떠나라는 신약의 교훈도 그 가장 좋은 예(例)들을 구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적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생활의 극적인 실례를 발견함과 동시에 이 산상보훈의 제일 보훈에 대한 훌륭한 주석(註釋)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났을 때, 그는 나이가 많았다. 이삭의 조부라고 해도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삭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이삭은 그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거룩한 요소(要素)들이 없지 않았다. 즉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하나님의 주신 열매요, 거룩한 계약의 물증(物證)이며, 오랜 동안의 소망에 대한 상급이었고, 메시야를 주시리라는 언약의 성취로서 주어진 아들이었다. 그러나 이삭이 차차 자라서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서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육적 애정은 급기야 위험한 한계선(限界線)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아비와 아들의 두 생명을 아울러 불결한 사랑의 결과로 오는 파멸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여기에 나타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창 22:1,2).
성경 기자(記者)는 이날 밤 브엘세바의 언덕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늙은 아브라함의 고민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경건한 심정으로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데, 그날 밤 별 빛이 잠잠한 하늘 밑에서 이 늙은 이의 구부러진 등은 얼마나 큰 고민을 견디지 못하여 떨었을 것이랴. 아마도 훗일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신 예수님의 고민을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고민을 체험한 인간은 다시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들의 죽음을 대신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다 늙은 그에게 그것은 대단히 합당한 일이었고,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기를 그처럼 오래한 그는 죽는 것이 무방하였다. 그리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오랜 옛날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허락하신 아들 이삭의 늠름한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 일은 그에게는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되었을 것인가.
그런데, 한 걸음 더 나가서, 그의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해서든지 견딘다고 하자. 그러나 이삭을 주시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삭에 대하여 주신 약속의 말씀 ―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
고 하신 말씀과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이 부분간에 발생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어떻게 납득해야할 것인가? 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심은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죽이는 일 자체보다도 더 큰 불시험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불시험들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그리하여 이삭이 깊이 잠들어 있는 장막 위에 별 빛이 아직도 선연한 새벽 미명에 이 늙은 성자의 마음은 결정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대로 아들을 잡아 바치기로 하고.
"그는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다"(히 11:19).
이 믿음이야말로 피흐르는 온 밤의 씨름을 통하여 낮아질대로 낮아진 그의 심령의 산물이었으며, 세상에 속한 일체의 소유욕을 떠나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볼 수 있는 본래의 인간의 성품으로 돌아왔던 그는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계획대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방법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크신 뜻의 비밀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며, 그의 이 마음을 통하여
"나를 위하여 잃은 자는 얻으리라"
는 신약의 교훈은 완전히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다시금 뒷걸음을 칠 수 없는 자리에까지 그를 이끌어 올리신 후에야 그를 금하여 아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 어리둥절해진 노성자(老聖者)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이제는 됐다. 나는 너로 하여금 참으로 네 아들을 죽이게 하려던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네 마음 속에서 그를 제하여 버리고, 나 홀로만이 네 마음을 주장하기를 원한 것 뿐이다. 네 사랑에 깃들인 병폐를 고치려고 한 것이었다. 이제 너는 네 아들을 취하라. 그는 건장한 그대로 있다. 그를 데리고 네 장막으로 돌아가거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6∼18).
이 말씀을 받고 산 마루턱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서있는 노령의 하나님의 사람은 강하고 순결하고 의연하였으며,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특출한 권고를 받는 사람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벗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완전히 순종하고, 철저히 자기를 비웠으며,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의 모든 소유를 사랑하는 독자와 함께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이 일을 행하실 수도 있었지만, 이 때에는 단도직입적으로 맺힌 곳의 중심을 날카로운 한 칼로 쪼개어 단번에 절단수술(切斷手術)을 마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수고를 덜으셨고, 그것이 준 상처는 컸지만, 효과도 따라서 컸다.
나는 조금 전에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늙은 성자는 여전히 부자가 아니었던가? 전에 그가 거느리고 있던 모든 것들 ― 양과 염소와 낙타와 모든 가축의 떼며 전토와 재물을 여전히 그는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으며 친구들과 사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소유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신령한 비결이 있다. 여기에 오직 심령을 비우는 훈련을 받는 자 또는 받은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달고 오묘한 신학이 있다. 조직신학(組織神學)의 책들은 이것을 빼놓지만, 지혜있는 자는 깨닫는다.
그 쓰라리고 복된 경험을 한 후부터 아브라함에게는 "나의", "나의 것"이라는 말은 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말들이 품고 있는 바 소유의 뜻은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서 "물질"은 영원히 떠나가 버렸다. 그에게는 물질들은 외부적인 것이 되었고, 그의 속사람은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던 것이다. 세상은 그를 보고 "아브라함은 부자다"고 말하였으나, 늙은 성자는 다만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자기는 이제는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라고는 없다는 것과, 그의 참 재물은 마음 속에 있으며 그것은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도 아브라함이어야 한다.
인간의 심령을 좀먹는 사악한 성벽(性癖)들 중에서 이 물욕이야말로 제일 큰 해독을 인간에게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극히 자연화(自然化)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좀체로 그것이 악한 줄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에 가장 큰 것은 그 드린 것이 안전할까 하는 의심이다. 특히 이것은 내 자신의 몸이나 사랑하는 자들의 일생을 주의 일에 맡기려고 할 때에 우리들이 부딪히게 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주님은 세상을 멸하고자 오신 것이 아닌,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주께 드리는 모든 것은 안전하다. 오히려 드리지 않은 것들이야말로 정녕 위태로운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재능까지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재능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니 우리는 결코 그것을 내 것으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하고 성경은 말씀하셨다(고전 4:7).
자신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는 신자라면 그는 자기 속에 깃들어 있는 이 소유욕의 고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그의 안에서 간절할 때에는 그는 이 고질을 그대로 버려두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일 먼저 우리는 내 자신의 눈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일체의 자기방어(自己防禦)와 자기변명을 그만 두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려 할 때에는 결국에 가서 그는 무력한 자기를 발견하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으되, 만약 하나님 앞에 무방어(無防禦)의 태도를 가지게 되면 그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그의 방어자가 되어 주시는 것이다.
실패와 동요가운데 있는 신자들은 마땅히 자기 자신의 안정성없는 계책(計策)들을 던져버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순결하고 솔직한 관계를 가지도록 힘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는 이 일이야말로 거룩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불성실하고 지구성(持久性)이 없는 수단들로서는 만족한 결과를 바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락하시리라는 반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것을 구하라.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취하시고, 내 중심에서 "물질"을 제하여 버리시고, 하나님만이 친히 좌정하시고 주장하여 주실 것을 간청하라. 필요하거든 물건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아뢰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대로 순종하라. 만약 그대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데에 과감성을 발휘하기만 하면 그대는 여러 십년 걸릴 길을 불과 수일 내로 단축시킬 수도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우물대며 제자리 걸음만 치고 있는 동안에 순식간에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진리는 물리학(物理學)의 공식을 암송하는 것과 같은 기계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깨닫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심령이 아브라함의 경험한 바와 같은 가혹하고 쓰라린 체험을 거친 후라야만 그 뒤에 따라오는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법이다.
인류의 심장을 원시시대로부터 움켜쥐고 내려오는 이 죄악의 뿌리는 그렇게 쉽게 뽑힐 리가 없다.완악하고 악착스러운 이 욕심쟁이는 우리의 말 한마디에 순순히 물러가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초목의 뿌리와도 같이 우리의 심장에서 뽑아 내야 하는 것이다. 생 이(齒)를 뽑듯이 억지로 잡아 뽑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돈 바꾸는 자들을 채찍으로 성전에서 몰아내신 것같이 이 물욕은 완력으로 축출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욕정의 간교한 애원에 대해서도 강철같이 대해야 하며 자기연민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악가운데서 가장 큰 죄악임을 분명히 알고 용감히 이를 물리쳐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깨달으며 그 깨달음이 날로 자라기를 원할진대 우리는 이 초월의 길을 걸어 나가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결심하고 나설 때, 조만간에 하나님게서는 이 시험을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통과한 바 그 시험은 당시에는 아브라함 자신도 무슨 뜻인지를 분명히 몰랐지만, 그러나 그 때에 만약 아브라함이 순종 이외의 다른 길을 취했더라면 구약 전체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 다른 사람을 찾아 내실 수도 있었을 것이나 아무튼 아브라함이 받은 바 손해는 비극적이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한 사람씩 이 시험대 앞에 서야 하며, 그것은 언제일른지 우리는 모른다. 그 시험장에서는 우리 앞에 다섯가지 여섯가지의 선택의 길이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단 두 길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며, 우리의 전체 미래의 운명은 그 택한 길에 의하여 좌우된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알기 원하오나 내 약한 마음이 이 장난감들을 버리기를 두려워 하나이다. 내 마음에 피흘림이 없이는 나는 그것들을 버릴 수 없사오며, 그것들을 버리는 두려움을 나는 아버지 앞에서 숨기려 하지 아니합니다. 내가 이처럼 오래 사랑해왔고 지금은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이것들을 내 마음에서 뿌리채 뽑아주시고, 그 후에 아버지께서만 홀로 나의 마음 속에 계시옵소서. 그리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발등상을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그리하면 내 심령에는 햇빛이 필요하지 아니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마음의 빛이 되심이요 내가 다시는 어두움에 행치 아니하오리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출처 : http://www.christi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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