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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C.H.Mackintosh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 C. H. 매킨토시

by 복음과삶 2009. 9. 8.

빌립보서 3장



우리는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와 모든 환경 가운데서 성경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최고의 교회 안내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빌립보서 3장(章)이 예증하는 대로 기독교의 신성한 아름다움과 도덕적 뛰어남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성경 그 자체이지 성경으로부터 추론된 어떤 특별한 신학체계가 아니듯이, 이제 독자들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이지 인간이 가지는 종교성의 어떤 특유한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인간이나 인간의 체계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신학에서 오류를 범하며 윤리학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기독교는 흔들리지 않으며 흔들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긍휼입니다. 누가 이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신성과 도덕의 완전한 표준을 받는 것은 이루 다 감사드릴 수 없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표준을 성경 안에, 그리고 성경이 밝히는 기독교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신조에서 오류를 범하며 그들의 행위에서 실패할 수 있지만, 성경은 변함이 없으며, 기독교는 변함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은 우리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이 닮아야 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델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 장(章)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장(章)에서 사도로서, 비범한 은사를 받은 자로서, 놀라운 비전을 본 특권을 가진 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3:17에서 듣는 것은 사도인 바울이나 또는 은사를 담은 그릇인 바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바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로서 바울의 화려한 경력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셋째 하늘로 이끌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걸었던 행로를 따를 수 있습니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그 행로의 완전한 모습 뿐 아니라 출발점과 목적지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먼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를,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깊이 생각하고자 합니다. 부디 중요하고 주의를 끄는 이 세 가지 항목을 고찰하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사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두 방면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自己義)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목록으로서, 육체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신분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다소의 사울보다 뛰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으며, 훌륭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규율 있는 지파에 속했으며, 행실에서 흠이 없었으며, 뜨거운 열심과 굽히지 않는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조에 따라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는 유대주의의 기초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새로운 경륜에 의해 공격당하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주의와 기독교가 동일한 단(壇) 위에서 존속하거나, 동일한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였습니다. 유대주의 체계의 한 가지 특성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엄격한 분리였습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한 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친밀한 연합이었습니다. 유대주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나누는 중간 벽을 세우고 고수하였으나, 기독교는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므로 성실한 유대인으로서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는 종교의 본분이었습니다. '그의 민족 중 많은 동년배들보다 더 잘 신봉하던' 종교의 본분이었으며, 그가 심히 열심이었던 전통의 본분이었습니다. 사울은 종교적인 모양을 띤 것으로서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려고 했습니다. 도달해야 할 정상은 무엇이든지 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自己義) - 육체 안에 있는 의(義) - 옛 창조 안에 있는 의(義) - 라는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구하였습니다. 그가 모든 율법의 의(義)라는 매력에 사로잡혔던 것은 하나님의 의(義)라는 더욱 밝은 영광 가운데로 그 매력들을 던져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구절 가운데 있는 두드러진 중요한 사상이 용서를 받기 위하여 자신을 예수님의 피에 바친 죄인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자기의(自己義)를 배설물 같이 버린 율법주의자에 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레 바울이 죄인 -

"죄인 중의 괴수"

였으며, 자신을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바쳐서 용서와 화평을 얻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의 많은 구절에서 쉽게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빌립보서 3장의 주요한 사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익"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인으로서 자신의 곤경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 육체 안에 있는 사람 - 옛 창조 안에 있는 사람 - 유대인 - 율법주의자로서 자신의 이익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죄를 십자가로 가져가서 신성한 속죄제물의 구속하는 피로 씻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른 점을 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자신으로부터 자기의(自己義)를 멀리 내던져 버리고, 그 의(義)를 그리스도인의 의(義), 새창조에 속한 의(義)인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대조를 이루는 가치 없고 추한 것으로 여기는 율법주의자를 봅니다. 바울은 슬퍼해야할 죄를 가졌으며, 자랑해야 할 의(義)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 양심에 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마에 월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것들과 자랑해야 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4∼8이 특별히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고, 범한 죄를 씻고, 수치를 가린 죄인이 아니라, 승리하시고 높여지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참된 영광과 불멸의 영예와 영존하는 의(義)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의(自己義)를 버린 율법주의자요, 명예를 던져버린 학자요, 헛된 영광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자기의(自己義)를 전혀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義)가 필요했던 죄인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계시된 의(義)를 더 선호한 바리새인 바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義)가 다른 것보다 훨씬 뛰어나며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죄인으로서 바울은 다른 모든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서기 위해 의(義)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이 장(章)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심히 원하는 바는 독자들이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가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뛰어남이 나를 그분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는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의(義)를 가졌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던져 버리고 기꺼이 "그분 안에" 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영광스러운 의(義)를 주셨다는 점을 볼 때, 자기의(自己義)를 갖는 것이 내게는 분명한 "손해"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벌거벗었고, 그 결과 그는 자기를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겉옷을 만들어 주신 후 앞치마를 계속해서 착용하는 것은 그에게 "손실"이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이 만든 앞치마 보다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겉옷을 입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담도 그와 같이 생각했고, 바울도 그와 같이 생각하고, 신성한 책에 이름이 기록된 하나님의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사람의 의(義)로 서있는 것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義)로 서 있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할 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것도 긍휼이지만, 우리의 의(義)를 제거하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의(義)를 받아들이는 것도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일부는 그리스도 안에 일부는 율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일부는 규례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주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만약 다른 것이 조금이라도 더해진다면 그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고대의 " 주의(ism)"이거나, 어떤 중세의 "주의"이거나, 근대의 "주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분명한 사실은 만약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신약의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첫 번째 항목을 주목할 것을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권면하는 바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義)이십니다. 그분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 높여지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義)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바른 신분입니다. 그것은 유대주의, 카톨릭주의, 기타 어떤 "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교회, 저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실제적인 기독교의 위대한 기초입니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이제 두 번째 항목인 그리스도인의 목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다시 기독교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내가 그분을 알려 하여"

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호흡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그분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목표입니다. 고대 철학은 지지자들의 귀에 끊임없이 어떤 금언(金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금언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기독교는 고상한 목표를 가리키는 더 높은 금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금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라 - 그분을 우리의 목표로 삼으라 - 오직 그분만을 진지하게 바라보라" - 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입니다. 다른 목표를 갖는 것은 결코 기독교가 아닙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우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이지 그리스도인들의 길이 아니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목표가 무엇인가에 좌우합니다. 만약 목표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바는 항상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는 말씀 안에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것, 돈을 벌고자 하는 것,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것, 가족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 명사(名士)나 부자나 인기인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목표로 삼는 것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義)로 알지 못하는 자가 스스로 의(義)를 이루어내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의(義)가 실제로는 손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목표에 관한 문제에서도 정확히 동일합니다. 문제는 "그것에 어떤 해(害)가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이냐?"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천한 풍조가 유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에게서 시선을 떼어 어떤 천한 목표에 시선을 고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속한 단순한 사람, 곧 본성 안에서 또는 옛 창조 안에서 단순히 자기의 지위를 보는 자에게는 매우 훌륭한 목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보다 천한 어떤 목표에 자신을 드리는데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지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청소부이거나 군주이거나, 아니면 이 둘 사이에 있는 많은 계층 중에 하나에 속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참된 유일한 목표라면 모두는 같습니다. 그에게 성품을 주는 것은 지위가 아니라 사람의 목표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가 한 곳에 머물러 있든, 여행을 하든, 복음을 선포하든, 불을 지피기 위하여 나무 조각들을 모으든, 교회를 세우든 아니면 장막을 만들든, 그의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집이든 밖이든, 바다이든 육지이든, 혼자든 동료와 함께 하든,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는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열심히 일하는 사도인 바울이거나 또는 셋째 하늘로 이끌림 받은 성도인 바울이 아니라, 살아있고 활동하며 행하는 그리스도인이며, 우리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고 말하는 바울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보다 못한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실패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참된 목표를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필사(筆寫)를 하는 학생과 같이, 눈을 표제에 고정할 때만이 필사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본성적으로 바로 앞에 쓴 줄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매번 다음 줄이 앞줄보다 나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복되고 완전한 표제에서 눈을 떼어 차츰 자신과, 자신의 작품, 자신의 성품, 자신의 이익, 자신의 명성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한 목표, 곧 그리스도를 향하여 계속해서 시선을 고정하는 대신에, 차츰 자신의 원칙, 자신의 고백, 자기 입장과 일치하는 것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어디서 목표를 발견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계층 가운데서 목표를 발견해야 한다면, 실로 매우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빌립보서 3장에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장(章)에서 참된 기독교의 모델을 봅니다. 우리 모두 오직 그곳을 목표로 삼읍시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을 따를 경우, 그것들을 심판합시다. 표제와 우리의 줄을 비교하고, 열심히 원본에 충실한 복사본을 만듭시다. 비록 계속되는 실패에 슬퍼해야만 할지라도, 계속해서 우리의 바른 목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며, 우리의 성품을 형성해야 합니다. 성품을 형성하는 것은 목표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돈이 나의 목표라면, 나의 성품은 탐욕스러울 것입니다. 만약 권력이 나의 목표라면, 나는 야망에 차 있을 것입니다. 만약 책이 나의 목표라면, 나는 문학적일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나의 목표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생명과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실제적인 기독교에 관한 문제입니다. 만약 누가 그리스도인에 관한 단순한 정의를 묻는다면, 즉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오늘날 슬프게도 수많은 이들이 세상적인 일들을 마음에 두는 때에, 부디 우리가 그 권능 안으로 들어가서, 보다 건전하고 활기 있는 제자도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소망에 관하여 좀 더 언급한 후 이 광범위하고 중대한 주제에 관한 대요(大要)를 마치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은 다른 두 가지 특성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목을 매우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들 세 가지 사이의 관계는 얼마나 아름답게 완전한가요! 나의 의(義)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나의 목표로서 그분을 알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열심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내가 그분이 계신 것 같이 그분을 볼 때에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의(義)와 완전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에 단지 한 가지만 더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은 이 목표를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끝내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이 세 가지 항목을 함께 놓으면 참된 기독교에 대한 완전한 견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항목 가운데 한 항목도 상세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항목은 그것을 완전히 다루기 위해서 많은 분량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에게 각자 이 놀라운 주제를 추구하기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부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불완전함과 불일치를 딛고 일어서서, 이 장(章)에서 모델로 제시된 사람의 삶과 성품 안에 구현된 기독교의 도덕적 위엄을 응시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들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 내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이 이 사랑스러운 모델이 항상 내 마음을 만족시키고 있다. 나는 내 눈을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돌이켜서 오로지 그리스도만 바라보겠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나의 의(義), 나의 목표, 나의 소망인 나의 모든 기쁨을 발견하겠다." 부디 예수님을 위하여 필자와 동일한 마음을 갖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