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명의 말씀/C.H.Mackintosh

그리스도인의 거룩함 (2) - C. H. 매킨토시

by 복음과삶 2009. 9. 15.

죄인이 그리스도께 나와 그분을 믿는 순간, 그는 자신이 서 있던 옛 본성의 터전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그를 얽어매던 옛적의 모든 법적 지위나 그에 따른 모든 부속사항들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더 이상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게 됩니다(롬 8:9).

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하나님은 그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실 따름이며 심지어 그리스도처럼 보십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영원토록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하나님의 가족 중에 있는 매우 연약한 아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절대적인 지위와 안정되고 영원한 위치를 누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지체들에게는 한 가지 지위만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지식과 경험, 능력과 은사, 지성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동일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의로움과 거룩함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빚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완전한 거룩함을 얻지 못했다면 필연적으로 완전한 의로움도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신다고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이 말뜻은 우리가 의로움과 “어느 정도의” 거룩함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그래야만 한다면 ‘의로움’ 앞에도 “어느 정도”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느 단어 앞에도 이 말을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이 둘은 모두 완전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둘 다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절반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절반의 의로움이란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절반만 거룩하다는 말도 어불성설입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가족 혹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되어 온전히 의로워지긴 했는데 거룩함은 반밖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반대되며, 신적인 본성에 따라 주어진 감각들은 여기에 모두 저항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신다

성화와 관련된 대부분의 오해는 실질적으로 매우 다른 두 가지, 즉 우리의 위치와 행실, 혹은 우리의 지위와 상태 사이의 차이를 혼돈하는 데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도의 위치는 완전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행실이 매우 불완전하고 이리저리 요동하며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얼룩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위치는 변함없고 절대적이지만, 육체에 거하면서 날마다 온갖 종류의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보면 자신의 도덕적 상태는 날마다 영향을 받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는 여러 불완전한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행실에 따라 위치를 평가되고, 상태에 따라 지위를 가늠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신다고 생각할 것이고요.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결론으로 이끕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이 아닌 내 안에 있는 자신을 통해 가치를 결정한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상당히 주의깊게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생각하는 관점보다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훨씬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떠 있는 빛나는 천체가 지구에서 까마득히 먼 것처럼, 내 생각과 내 길은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길과 아득히 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그들의 행동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위치에 근거하여 보십니다. 그분이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절반만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 하나님께 큰 불명예를 안겨드리는 것이 되듯이 절반만 거룩해졌다고 한다면 하나님께는 동일한 불명예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는 우리의 위치

이런 일련의 생각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권위 있고 결정적인 말씀에 의해 또 다른 유력한 증거를 만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의 영감어린 구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앞에서 사도는 타락한 인간들이 행하는 두려운 모습들을 나열하고 고린도 성도들도 이전에는 그와 같았다고 분명히 지적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사도는 그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본성은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타락했다는 진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외친 ‘그러나’를 기준으로 얼마나 극명한 대조가 이뤄지는지 한번 보십시오. 한편에는 인간의 도덕적 타락의 상태가 모두 나열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의 절대적 완전함을 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비교입니다. 영혼은 한편에서 다른 한편으로 순식간에 옮겨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were) [그러나] …하심(are)을 받았느니라.”

자, 지금은 확실히 뭔가 다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순간 그들은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

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적합한 자들이 되었고,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작품에는 큰 오점이 남을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네. “깨끗함을 받으라.”
이 말씀에 어떤 의심이 있으리요?
주님의 말씀은 신실하시니,
그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다네.

이 말은 참으로 사실입니다. 이제 갓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도 그가 뭔가를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깨끗함을 받습니다.”

물론 그는 진정한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더욱 알고 경험하면서 성장해갈 것입니다. 그는 실제적인 거룩의 능력을 접하여, 습관과 생각, 감정, 정서, 여러 관계들, 말하자면 자신의 전반적인 삶의 행로와 품행, 인격에 하나님의 거룩이 어떤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시는지 이해하고 그것을 밝히 드러내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결된 순간, 하나님 보시기에는 완전히 거룩해졌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 임재의 빛살 안에 거하면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집중적으로 발산되는 영광의 빛을 반사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활동영역이나 생활환경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광야의 불모지 위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성소로 난 황금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욕된 몸이 아닌 영광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 위치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완전해지며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이 모든 일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순간 확실히 결정됩니다. 앞으로도 이 위치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고린도전서 6장 11절을 통해 우리가 자연스럽고 의심할 여지없이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