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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부흥 :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 (사64:1)

by 복음과삶 2010. 2. 12.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사64:1)

 

우리는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자기 백성들의 삶과 역사의 이 특별한 시점, 곧 버림받고 황폐한 상태에 있었을 때 드린 위대한 두번째 간구의 제목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러분도 기억하겠지만 선지자는 그 처지를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작정하였고, 예루살렘이 다시 "세상에서 찬송을 받기"까지 하나님을 쉬시지 못하게 하고 자기도 쉬지 않겠다고 작정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의 정확한 기도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기도할지 알았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기도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 때문에 기도는 어렵고, 우리는 가르침을 필요로 합니다. 만일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어느날 오후 주님께 나아가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말할 때 느꼈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전혀 기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위대한 본과 실례와 예증을 갖추어 주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돌아보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알았고, 하나님께서 이제도 하감하사 자기들의 처지를 보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쏟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호의를 가지고 계심을 알고 싶어하며, 그들에게 애정어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친 참된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참된 기도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이 64장에 내포된 또 다른 간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진실로 오직 하나의 기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기도는 언제나 참된 기도를 특징짓는 모든 특성들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 라는 첫 마디를 주목하십시오. 참된 기도는 언제나 그 "오" 라는 말을 사용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소서"(개역 성경에는 "오"라는 말이 없음- 역자주). 이 말보다 갈망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것은 깊은 소원의 갈증을 나타내며, 기진하여 하나님을 기다리고 찾으며, 갈망하는 사람의 울부짓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의 분명한 특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여기서, 이미 보아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간구와 참회가 서로 교차되고, 하나님께 대한 요구와 논증과 논박이 나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참된 기도는 언제나 그러한 특성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사람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추겨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도입니다.

 

단순히 우리 소원을 우발적으로 나타내거나 마지 못해 열의 없이 기도하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야곱의 경우에서 그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기 형 에서를 만나기 전 날, 그 위기의 밤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야곱이 그와 투쟁하며 씨름하는 중에 날이 밝아오자 그 사람이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간청하고 따지며 심지어는 떼를 씁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이사야의 위대한 마지막 간구를 보게 됩니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제가 서슴없이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부흥과 관련된 궁극적인 기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언제나 바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부단히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그 이상으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과, 부흥의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찾아오시기를 구하는 특별하고 긴박한 기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궁극적인 간구를 쿠퍼의 찬송가의 한 소절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이 없습니다.

 

오, 하늘을 가르시고 속히 임하소서.

천의 마음들로 주의 것이 되게 하소서.

 

우리는 수많은 마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자주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쿠퍼는 "하늘을 가르시고 임하소서"라는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실 때 우리는 오순절날과 같이 천 명 또는 삼천 명이 회심하는 것을 족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의 마음들로 주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것은 비상하고 예외적인 것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에게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제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해 주실 뿐 아니라, 직접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말들은 매우 어리석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기이하고 놀라우며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통상적인 일을 행하시는 것과, 특별한 일을 행하시며 강림하시는 것 사이의 현격한 대조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조지 휫필드가 첼텐함에서 설교할 때 일어났던 일을 다시 인용해야겠습니다. 그는 설교 도중에 갑자기 "하나님, 주께서 우리 중에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지 휘트필드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능력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설교하는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첼텐함에서 아주 예외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예외적이어서 그는 그것을 적어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복락을 그전에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전과 달리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설교 도중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 기간동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무든 뜻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백성들 가운데서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나 사역 속에서 접하는 가장 높은 체험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그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누군가가 자기들 가운데 오셨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들은 영광을 알게 되고 한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그것을 규정할 수도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전에는 그와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음을 느낄 뿐입니다. 때때로 그들은 그것을 "지상에서의 하늘의 날"로 묘사합니다. 그들이 하늘에 있다는 느낌을 진실로 가지게 됩니다. 즉 그들은 시간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초월합니다. 시간은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없고 어떠한 실질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인 영역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강림하시고 영광스러운 임재 의식으로 그 장소와 그 사람들을 충만케 하셨습니다. 물론 그 일은 언제나 선지자가 여기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광채뿐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를 주목하십시오.

 

"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가르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로 뛰어드십니다.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도록" 그가 강림하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영구하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큰 산들, 바람이 불든지 불지 않든지, 비가 오든지 가뭄이 들든지, 태양이 비치든지 구름에 가리든지 간에 언제나 존재하는 큰 산들이 흔들리도록 말입니다. 이 산들은 영구한 언덕이요 산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산들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또 다른 비유를 말합니다. "불이 섶을 사르며." 엄청난 힘을 가진 불을 말합니다. 광석 덩어리나 철광석 덩어리를 보면 얼마나 단단합니까? 그러나 그것을 용광로에 넣으면 녹아 흐르기 시작합니다. 불과 그 세력은 그처럼 대단합니다.

그는 또 다른 비유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물을 끓임같게 하사." 여러분은 물속에 일어나는 움직임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입니다. 그것은 열입니다. 그것은 물을 끓이고 증발시키는 불꽃 속에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러한 매우 생생하고 극적인 상징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인상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시내산에서 하시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습니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 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19:16-20)

 

이것은 일찍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과 그의 영광과 능력의 표증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과 맞서 싸우려는 적대적인 족속들이 있었고 원수들이 합세하여 그들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산들도 진동시키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로 그 사람은 그것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여전히 동일하시고 옛 시대에 행하신 일을 지금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그는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능력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실로 우리의 기도 문제의 절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원수들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거만함과 세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이루어질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그날이 올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도 실수하지 맙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견고한 우주, 이 영구한 언덕들, 여러체질들, 이 모든 것들이 녹아 내리고 용해되며 부스러질 것입니다. 천체도 떠나가고, 하늘과 땅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상기해야 합니다. 그는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히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시선을 떼어서는 안됩니다.

 

바울 역시 이것을 그의 방식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제한할 수 없는 특성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이러한 철학들과 이데올로기와 모든 정치 문제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 즉 반 하나님 운동들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하고 있습니까? 어째서 온통 원수에 대해서만 말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렸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바로 하늘을 가르시고 산들을 요동케 하며, 주전자 물을 끓이듯이 바다를 끓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 선지자는 바로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그것입니까?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습니까? 어째서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해야 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면 안됩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긴 교회사 가운데서 특정인들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째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느끼지 못합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어째서 우리는 이와 같이 기도해야 하는가?"라고 묻겠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두번째 문제로 삼읍시다. 선지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기도하는 이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기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지자는 녹이는 불이 타올라서 물을 끓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2절).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이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첫번째 이유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하나님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도록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주의 대적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째서 우리의 대적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해도 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을 범하는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인간적인 제도로 여기기를 고집합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 투쟁하고, 문을 계속 열어 두려고 노력하며, 교회를 계속 유지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위원회들을 세우고 조직들을 확대시키곤 합니다. 우리의 대적들, 우리가 싸우고 있는 대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대적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 뒤를 볼 수 없다면,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가장 단순한 초심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악의 나타남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경은 악의 근본적인 원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싸움은 단순히 라디오나 텔레비젼이나 자동차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싸움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대적하지도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6:12)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들이나, 사람들이 행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혈과육에 대적하여 씨름하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습니까?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가 보는 것들은 단순한 졸개들이나 앞잡이들이나 도구들이나 통로에 불과합니다. "주의 대적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귀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게서 강림하시기를 기도하는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대적들 가운데 알려지고 인정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세상의 고통거리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기까지는 기독교의 메시지에 결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는 소경이었습니다. 교회는 50여년 동안 사람들을 끌어보려고 애를 썼고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나 음악이나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을 꾀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습니다. 당연히 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알기까지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안 다음에야 올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들이 그것의 큰 표증을 보기까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강림하시고 임하실 것을 기도합니다.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셔서 이 대적들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 밖에는 그들로 듣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다 해보지 않았습니까? 교회가 조직에 있어서 현재처럼 그렇게 뛰어났던 때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교회는 세상이 사용하고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비참한 결과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교회 협회들은 연이어 교인 수가 심각하게 하락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입니다. "하늘을 가르시고 그 이름을 알리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열방들로 "주님 앞에서 떨게"하시고, 주의 이름을 알고 주를 두려워하여 죄짓는 일을 그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시편 99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죄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통치하십니다. 사람들은 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 계시고 영존하시며 하나님이시요, 모든 만물을 장중에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 그를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극이여, 이 나라들과 백성들과 그를 멸시하는 통치자들의 거만과 교만이여! 만일 그들이 그 영광을 조금이라도 불수 있다면 그 앞에서 두려워 떨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흔드실 것이며, 그들의 세계를 요동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용해되고 사라질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6장 말씀을 보면, 땅의 임금들과 귀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보고 바위와 산들을 향하여 울부짖기를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16절)고 합니다. 주께서 통치하십니다. 열방들이 그 앞에 떨어야 마땅합니다. 시편46편 기자는 그것을 상세히 말하면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10절) 라는 위대한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다투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는도다(9절). 물론 그는 그렇게 하십니다. 그는 원하시는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하실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빛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시요, 땅끝까지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 하나님, 어찌하여 강림하셔서 주의 대적들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떨게 하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이 이와같은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소위 학식의 거만함과 문화적이라고 외치는 모든 것들의 뻔뻔스러움을 보고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화려한 옷을 걸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잠잠케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면전에서 두려워 떨도록 하기위해 그의 능력의 일부만이라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까? 바로 이 사람이 그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흥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때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사람이 기도하는 마지막 이유가 이사야 64장 마지막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세계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마지막에 놓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도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을 아프게하는 대적들입니다. 그는 주께서 강림하사 저들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주 앞에서 낮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사64:9-12).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주님의 교회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시고, 전에 우리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하시며, 주님의 산업인 교회를 생각하사 다시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이유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로 이와 같이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저는 다만 몇 가지 제목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궁구해 보십시오. 그러한 기도를 드리도록 격려하는 첫번째 요점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3절에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전에 주께서 행하신 일을 다시 해주시기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의기소침한 심령을 북돋워 주는 가장 좋은 치료제는 교회사를 읽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사를 읽어 보십시오, 교회사는 무디가 영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몇 세기 전 부터 시작됩니다.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서 옛적에 행하신 일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처럼 기도하도록 자극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그 점을 얼마나 흥미롭게 표현했는지 보십시오.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이 사람은 사실 이 기도를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과거에 주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셨나이다. 그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던 애굽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강력한 바로와 그 군대, 그의 병거의 세력권 안에서 노예로 있었을 때 말입니다. 그들은 칼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감독자들은 불쌍한 그 백성의 등을 후려 갈겼습니다. 그들이 무든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바로는 그들을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곧 그를 움직이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여러 가지 재앙을 보내셨습니다. 이 제앙, 개구리 재앙, 강물이 피가 되게하는 재앙등등 그를 겸비케 하는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땅바닥에 내던지셨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홍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가르셨습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이러한 일들을 볼 때, 이 분은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메마른 광야인 사막에서는 바람이 일고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로부터오는 떡을 주셨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갈하여 죽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가 반석을 쳤더니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우리의 생각 밖에 있던" 일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그런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다음 요단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강을 건넜고,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홍수로 범람하는 요단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우리 하나님께는 요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 요단강을 가르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 땅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수많은 구원을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이것이 바로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선지자 이사야가 받았던 것보다 더 큰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서 나게 하셨을 때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사람과 함께 거하실까요? 그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가르시고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이 영광의 구름에서 내려오사 동정녀의 태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일, 우리가 바라지 못했던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는 원수들에게 졌고, 붙잡혀서 정죄를 받아 죽음을 당하지 않았느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는 죽었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의 끈을 풀고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이 우리 뒤에 있습니다. 그는 부활의 하나님이시요, 죽음을 이기셨고, 무덤은 그 힘을 잃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가 하늘로 돌아가신 후 평범하고 무식한, 소위 사도들이라고 부르는 열두 제자들만을 남겨 두셨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들을 대적하는 유대교가 득세하던 세상에 그러한 열두 사람만을 남겨 놓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교도들과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반대하고 모든 지옥이 그들을 대적하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다. 이 열두사람과, 그들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오순절날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강림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그 집을 채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겠습니다. 그는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성령을 보내셨고, 그 이후에도 보내셨습니다.

 

돌아가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이야기를 읽어 보시고 200년 전 런던과 여러 다른 지역들과 다른 나라들에 영향을 끼쳤던 능한 부흥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1859년으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다시읽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무엇입니까? 하늘을 가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시고, 그 백성들 속에 오셔서 능력과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격려는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여기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상기시키면서

또 다른 격려를 해주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자도 없었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격려입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 하는가?"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9절)

 

여러분은 그러한 가능성을 인식했습니까, 아니면 거기에 여러분의 아주 작은 한계를 그어 놓았습니까? 바울은 그런 것들에는 끝이 없고, 사람은 그것에 대해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으며, 아무리 높은 상상을 할지라도 거기에 미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3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았습니까? 그는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구원받고 죄 용서함을 받은 것을 알며 선한 사람이 되고 훌륭한 교회 구성원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이 점에 대해서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게 하려고 더 나아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 가능성의 분량입니다.

 

존뉴턴이 "내 영혼아, 네 탄원을 준비하라. 예수께서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시네"라고 시작되는 찬송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임금께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나아오라. 그의 은혜와 능력은 너무나 커서 아무도 너무 많이 구했다 할 수 없네. 우리의 나약한 기도들을 생각하니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에 한계를 긋다니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다 1859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18세기나 종교개혁 시대나 오순절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의 난제들과 야박한 세상을 보고 말해 보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현대인은 "하늘이 한계선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보다 더 높이 계신 분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소서, 한계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여러분을 격려하려 합니다. 5절에서 발견하는 말씀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는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간구하는 것을 주실 것을 어떻게 압니까? 여기에 대답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만나신다는 말을 "선대하신다"고 번역하고 있음-역자 주) "주께서 선대하시도다." 이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만나 주십니까? 의를 행하고 의를 행함을 즐거워하는 자를 만나십니다. 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들을 모두 만나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점에 대해서 어떤 의문도 가지지 마십시오. 야고보의 말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 이것은 사실이며, 확실합니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여러분은 그를 찾으셨습니까? 그를 만나셨습니까?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을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물론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을 찬미하리로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5절에 있는 이상한 표현으로 인해 어리둥절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런 뜻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범죄하여 주께서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쾌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분과 노를 쏟으시나이다." 이 사람은 자신도 그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감히 무엄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오 하나님, 주께서는 아십니다. 실로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그와 같이 진노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이사야는 "기쁘게 의를행하는 자"를 선대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 표현을 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는 잠정적이요, 그의 긍휼은 영구합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인휼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더 깊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것들을 붙잡습니다.

 

시편기자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언제나 밤만 계속되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침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은 언제나 꾸짖지 아니하신다고 시편 103편 기자는 말합니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9절). 그러나 긍휼과 사랑과 인휼과 자비는 영원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붙잡고, 그것들 안에 계속 거하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주여, 주의 긍휼은 영구하여

자손의 자손들이라도

주의 약속의 말씀이 확실함을

언제나 보리이다.

아이작 왓츠

 

오, 기도하도록 부추기는 그 복된 격려들이여! 하나님의 성품, 그의 능력과 권세와 영광만이 아니라 그의 긍휼과 인애와 자비와 은혜가 죄인 중 가장 비열한 자들에게도 넘치나이다.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 죽어 있고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되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교회의 죄악과 배도와 반역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보시고 노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진실로 회개하고 진실로 그분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울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4:29). 그분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부추겨 그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그분을 붙들고 여러분의 아버지요, 여러분을 만드신 자요, 여러분의 토기장이요, 여러분의 안내자요,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그분에게 간청하십시오. 그분 자신의 약속을 들고 나가십시오. 그분에게 울부짖으며 "오,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소서"라고 말하십시오.

 

오, 하늘을 가르시고 속히 임하소서

천의 마음들로 주의 것이 되게 하소서

윌리엄 쿠퍼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606/page/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