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7-11)
우리는 12장 끝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스라엘 모습은 말하자면 하나의 예비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기초로 하여,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이 문제의 다음 대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흥의 전체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흥의 진행 과정 중에는 분명한 단계와 경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역사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교회가 엄청난 죄나 실패에서 곧 바로 갑자기 굉장한 부흥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중간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다시 소생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라면, 그러한 중간 단계가 올 때 우리가 그것을 바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다음 단계는 기도와 중보의 단계입니다. 제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33장의 교훈이 여러 면에서 여러 단계와 과정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출애굽기 33:7-11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단계는 12-17절의 내용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로서 18-23절, 곧 출애굽기 33장 마지막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이 대목들과 이러한 특별한 단계들을 조심스럽게 연구할 것을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서 우리가 부흥의 전체 문제를 좌우하는 중추신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일어나는 혼돈은 자주 그들이 이러한 세 단계의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성령의 교리에서 부흥을 완전히 배제시켰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부음을 받을 여지를 조금도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 세례의 교리를 오해함으로써, 부흥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한 예외적인 것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두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 이상의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의 첫번째 단계를 살펴봅시다.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33:7). 여기에 심오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언급된 이 장막에 대해서 분명히 알도록 합시다. 이 장막은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제정해 주신 양식을 따라 만든 장막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신 식양대로 지은 장막에 대해서 많이 듣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전조였습니다. 그런데 그 식양대로 지은 장막은 뒤에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일종의 천막으로, 모세가 이미 만들어 놓고 회중 가운데, 이스라엘 진영중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 회막은 모세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가는 곳이었습니다. 회막-저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생각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의미있고 놀라운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비국교도 선조들은 보편적으로 자기들의 예배 처소를 모임의 집으로 지칭했습니다. 이것은 훌륭한 옛 용어 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은 하나의 장소로서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곳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도 포함되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처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우리의 교회가 더욱 더 만남의 장소가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모일 때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만남의 집, 만남의 장소입니다.
모세가 이러한 특별한 행동을 하도록 분명하게 인도받았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진 중앙에서 이 장막을 걷어내어 진 밖의 멀리 떨어진 곳에 쳤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를 붙드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첫번째 요점은 이것이 모세 자신이 취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야 겠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회의 오랜 이야기 속에 나타난 성령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역사를 읽어 볼 때, 보편적으로 위대한 부흥을 가져오는 첫번째 일은 한 사람이나 어느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한 점을 느끼고, 자기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의 역사를 읽어 보십시오, 그 얼마나 놀라운 운동입니까? 그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기원이 무엇입니까? 그 종교 개혁의 전조들이 있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즉 위클리프와 존 후스등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실제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은, 매우 평범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갑자기 이 짐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딱 한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능한 역사를 교회 안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다른 부흥의 이야기들을 통해서도 이 점은 얼마든지 예증할 수 있습니다. 100년 전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부흥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심하게 했을 뿐만아니라 장로교회 전체의 생명력을 소생시켰고, 북아앨랜드의 다른 교회에까지도 영향을 끼쳤으며, 전체 상황을 변화시켰습니다. 웨일즈나 미국에서도 동시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그 움직임이 딱 한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1857년 뉴욕시의 풀턴가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한 그 사람은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소명감을 느꼈고,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부흥도 딱 한 사람, 제임스 맥퀼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웨일즈에서도 역시 딱 한 사람, 험프리 존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미국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능력을 보고 자기 나라에도 이러한 일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의 강박감을 느끼고 대서양을 건너 웨일즈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교회 역사 속에서 찾아볼수 있는 "로맨틱"한 요소라고 제가 부르기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게 있어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요점을 가볍게 스쳐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서를 읽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의 일은 기독교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지도자들과 위대한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들어 쓰심으로써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사용하심으로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어떤 사람도 그러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원칙은 없습니다. 또한 모세의 경우와 같이 반드시 위대한 지도자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때로 대수롭지 않은 선지자들을 택하여 사용하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기독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누군들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속담이 이르듯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주가 나사렛에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합시다. 우리는 기독교회를 사로잡은 것처럼 보이는 이 통탄할 만한 현대적인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그 현대적인 습관은 평범한 교회 지체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큰 집회의 군중 속에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된다. 그저 두 세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해낼 것이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닙니다. 성경의 교훈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사람이 바로 당신일 수 있습니다. 무명의 교회 성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통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도 그 소명의 짐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그 짐을 느끼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소명의 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상황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었습니까?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여러분을 슬프게 만듭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그러한 소명감이 어느 사람에게나 올수 있다면 어째서 여러분에게는 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여기서 끝내기로 합시다. 그러나 그것이 단 한 사람의 행동일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모세의 이 행동을 주목합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전에 진영 가운데 있던 장막을 옮겨 "진 밖에" 쳤습니다.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말입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여러 요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요점도 오해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진리가 오해될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든지, 강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모세는 기도와 중보의 처소를 세우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는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습니다. 구름 기둥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회개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되찾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 처소를 세운 것입니다.
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지 주목합시다. 그것은 섬세하게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떤 진술도 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연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무거운 짐을 느끼며, 전과 같이 진영 가운데에서는 중보 기도를 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 밖으로 옮겼고, 역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곳에 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강조되는가를 보십시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이것은 분명히 겸손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나팔을 불거나 어떤 위대한 선언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행동을 취했을 따름입니다. 중보기도를 드릴 필요성을 느끼며, 어떤 비상한 행동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행동에 자기와 함께하고 싶은 그러한 느낌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런 일을 하도록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행동에 대해서 듣는 바가 그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모든 부흥들의 역사 속에서 그 점을 발견합니다. 제임스 맥킬킨은 다른 두 사람에게 말했고, 그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만이 작은 학교 교실의 좁은 통로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제가 북아일랜드에 갔을 때 그곳을 방문할 특뤈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곳을 보고 싶어, 본래의 여행 목적에서 벗어나 그 곳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코너 마을이나 켈스 마을에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을 밖에 있는 이 조용하고 작은 교실로 왔습니다. 그곳은 평화롭고 고요한 곳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충분히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점에서 강조되는 바입니다.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그들 모두가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느꼈던 것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 진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모세는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로 가고 있다. 자, 우리도 함께 가자, 우리도 가서 모세와 합세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씩 나아갔습니다. 이것은 크게 조직화된 일도 아니었고, 어떤 대단한 선언을 하거나 어떤 시간에 그러한 기도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열겠다고 발표한 것도 아닙니다. 부흥은 결코 그러한 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상태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조직부터 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첫번째 움직임은 어떤 위원회를 세우고 영리하게 광고를 하며 그리고 거대하고 조직화된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보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오랜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부흥의 여러 사례들과 정반대 현상입니다. 성도들이여, 다음 부흥이 올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움으로 임하게 될 것이고, 특히 조직화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에게 놀라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것은 이처럼 떠들썩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조용하게 기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소명감을 느끼기 때문이며, 스스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합세하기 원하며,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들이 회막을 세웁니다.
그 다음 요점은, 모세가 회막을 진 밖에,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교훈이 됩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 필연적으로 이러한 떨어짐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진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는 말하자면 회막을 교회 가운데서 다른데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영 밖의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체험되는 어떠한 부흥도 교회 내의 어떤 공식적인 활동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강한 표현일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교회가 알았던 그 어떠한 부흥도 공식적인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종교 개혁의 위대한 선구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미 언급했던 위클리프나 존 후스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서 말입니다. 언제나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공직의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싫어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에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일은 자기 방에 있던 이 수도사에게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그 일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개혁이 있은 후에도 불만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패턴을 따라 똑같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교도 신앙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아마 메소디즘(우리 나라에서는 메소디즘을 순전히 감리교회라고만 알고 있지만 우리 나라 감리교회는 알미니안적인 신학 위에 서 있는 메소디즘의 한 분파라고 할 수 있고, 휘트필드 같은 사람은 메소디스트에 속하기는 하지만 장로교의 칼빈주의 원리를 따른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자주)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200년 전에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 형제나 휘트필드나 다른 사람들은 영국 국교회의 성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어떠한 일을 하려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진 밖에 홀리클럽이라 불리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사적으로 그저 몇 명의 사람들만 모였습니다. 한동안 어느 누구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생각에 함께 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말하자면 진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킬빈주의 메소디즘과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의 시초였습니다. 플리머스 형제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초기 운동도 역시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 그것은 단지 교회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교단을 세우란 말인가요?" 이것은 이 교훈이 암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것은 모임을 공식화하고,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어 버리고, 조직을 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 안에서 행하기 시작하실 때, 부흥을 위한 길을 마련하고 계실 때,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 말하자면 떨어져 함께 모여서 조용하고 떠들썩하지 않게 모이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소명감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소명감의 부담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가 볼 때 현시점에서 매우 심각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즐겨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후원" 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생각하는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어떤 일을 해야만한다고 느낄 때 후원을 원하고, 그 후원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교회의 지원을 원하며 ㅡ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지원도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후원자를 얻기 위해서 큰 예배당에 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어떠한 후원도 없습니다. 참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한 후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들을 하려고 한다면 광고를 해야 합니다. 또 대단한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어떤 마을에서 집회를 가지려 한다면 그 마을의 지도자가 참석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어느 주의 통치자가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지원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주의를 끌 것이고 큰 집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세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행동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비길 데 없는 능력을 의지할 때 사람들의 지원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야 할 후원은 성령의 지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먼저 사신을 보내어 모든 사람으로 준비하게 하고 공적인 큰 집회를 마련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3-4)라고 했습니다. 그는 무엇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함께하지 않고는 감히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모셔야 했습니다.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무엇을 의지합니까? 후원 또는 지원입니까? 성경에는 그러한 지원이 전혀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권세있던 시기나 개혁이나 부흥이 일어났던 모든 시기에는 그러한 지원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몇 사람이 똑같은 소명감을 느꼈기 때문에 함께 나와서 모였을 뿐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또 다른 요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진 밖에 회막을 세우는데 있어서 모세는 또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의 전체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일이 진 중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진은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장막을 걷어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부정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 죄악된 분위게에 떠나야 한다. 우리는 대신 여기에서 함께 모여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다시 저는 여러분에게 주장합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바로 이 요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 중 어떤 사람을 보더라도, 그들의 첫번째 관심사는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200년 전 옥스퍼드에서 시작된 그 작은 움직임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모임의 이름을 주목하셨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홀리 클럽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웨슬리형제와 휘트필드와 그들과 함께 모였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그것을 여기에서 소개하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기독교회는 여전히 기독교회이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매우 무가치하고 죄가 많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신약성경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대해 매우 느슨한 자세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그들은 너무 멀리 나가서 약간은 율법주의적인 데까지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원칙과 규례들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메소디스트(규칙자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기도해야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규칙을 따라 생활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거룩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한 사람이나 몇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자기들이 먼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첫번째 관심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자기들도 거룩해지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영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일종의 구별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기독교회를 분리하려는 겁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회를 분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중 어떤 사람을 다루려 하실 때 이러한 구별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자세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단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상태를 위한 소명의 짐을 느끼기 시작할 때, 그는 즉각적으로 이러한 헌신에 대한 부르심을 느낍니다. 말하자면 그는 "밖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물리적인 면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각한 부도덕성과 불경건과 불신앙이 팽배한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해서 악이 소리치고 거만하게 굴며 떠들썩하게 자랑하는 이 시대에, 어느 지역에 살든지 사람들에게 악이 파급되고 있는 이 시대에,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부류에서 분리되라는 부르심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로서 한 발 더 앞서 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평범한 기독교 신앙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보다 더한 것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래서의 참된 삶과 거룩한 생활을 나타내는 것밖에는 그런 상황을 다룰 수 없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들이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장막을 진 밖으로 멀리 옮겼던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해져야 한다." 제가 이 모세의 행동을 보고 강조하는 또 다른 요점은, 그는 분명히 어떤 비상한 행동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떤 부가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러한 초기 단계에서는 언제나 그러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저 잠깐동안의 흥분이나 흥미나 어떤 기쁨이나 현상들만을 위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대단히 흥미 있는 시간을 맞게 될 것이라는"태도를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모임이나 어떤 흥분이나 어떤 놀라운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되고 진정한 관심의 첫번째 표시는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하며 부정한 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별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어쨌든 일상의 자세를 벗어나 이 장막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비상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던 궤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마음에 인상 깊게 싶어주고싶은 질문이 여기 있습니다. 이같이 엄청나게 악한 시대에 여러분은 예외적인 어떤 것을 하고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일로 만족하고, 어떤 틀에 박힌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물론 교회가 축복을 받고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에 나와 선교회 일을 하고, 주일학교에서도 가르치며, 교회의 일상적인 일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이 시대 때문에 어떤 예외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방면에서 여러분을 구별시키는 의도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주는 위대한 교훈입니다.
이제 이 관찰을 완성시키기 위해 저는 모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관심있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한 두사람이 진영을 벗어나 기도하러 그 회막으로 나아가곤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여기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고작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함께 진 밖으로 나와 하나님을 만나는 그 회막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거나 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모세가 그 장막을 진 밖에 세워 놓고, 그와 몇몇 다른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그 곳을 찾아간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장막 문 앞에 서서 모세가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그가 무엇을 하며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것은, 장막을 위한 바른 장소는 그 진영 가운데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장막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사를 읽어보면 이 점을 거듭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소명을 느껴서 스스로를 구별시킵니다. 그러면 사른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그들의 장막 문에 서서 쳐다봅니다. 그들은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오, 만일 온 교회가 움직이기까지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온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방식은 개인들을 들어 사용하여, 급기야는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그들은 다만 어떤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희미한 의식을 가지며, 모세와 그와 함께하는 몇 사람의 행동을 뜷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할 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그러한 위치에 있음을 생각하면 저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즉 저는 이제 우리가 한 고비를 넘겼다고 믿습니다. 어떤 지역의 교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역 교회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저는 보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살아계신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충분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들이 도처에서 몇 사람씩 생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들은 상직적으로 말해서 진 밖에 세워 놓은 이 장막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 전체에서 희미하게나마 이러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행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는 9절부터 11절까지에 잘나타나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인정하시고, 그 행동을 장려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는 그 행동을 기뻐하신다는 표를 주십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하나님께서 그 구름 기둥을 철수시키셨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표증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행동의 결과로 인해 구름 기둥이 그전과 같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의 표증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부흥의 첫번째 조짐은 언제나 교회 생활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소생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교회의 예배가 더 뜨거워지고, 사라졌던 것이 되살아나며,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자극과 격려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도속에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기대감, 새로운 자유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바로 구름 기둥이 돌아온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합니다. 무정함과 겉발림은 적어지고 새로운 부드러움과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고뇌의 표증이 나타납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떤 나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즉 그들이 교회의 기도 모임에서 고대하고 있었던 것은 "오(oh!)"의 요소요, 곧 갈망과 고뇌와 기다림의 "오"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올 때 그것은 곧 구름 기둥이 다시 돌아왔다는 표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행동을 기뻐하신다는 매우 분명한 몇 가지 표증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라보시며, 사람이 그 친구와 말하는 것처럼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무엇보다 먼저 그 소명감을 느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곧 응답해 주실 거라는 암시를 주십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서 이 사람들은 한동안 고뇌의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느낌을 가지는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증을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은 장막 문에 서서 모세와 다른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가는 모습만 바라보던 이 사람들 속에서 한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구름 기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장막 문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 전체가 영향을 받고 그 영향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서적으로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드시 그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11절에 이르게 됩니다. 이 구절은 매우 놀라운 구절입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얼마나 큰 격러가 됩니까? 또한 이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그 모든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여러분도 아셨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니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실 거라는 암시를 받고 진영으로 돌아가 백성들에게 보고하려 했습니다. 즉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으며, 구름 기둥이 다시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며 그 얼굴을 백성들을 향해 돌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을 보고하려 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세가 얼마나 영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인가를 보게 되고, 그가 하나님의 길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은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종 여호수아를 그 장막에 머물게 하되 자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머물게 하였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모세는 더욱더 많은 것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올것 중 어느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 알리러 나가 있는 동안 그 회막에 여호수아를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더 행하려 하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초요 하나의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로, 우리가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부흥이 어떠한 것인가를 진정으로 일지 못한 것이라고 저는 주저없이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예비 단계요, 준비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고대하는 마음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수아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보고하러 가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더 많은 계시를 주실까 하여 장막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무모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리인, 자신의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면전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학수고대하는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으며, 어떤 비상한 일이 곧 일어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계의 연구를 마치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그 단계에 도달했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장막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습니까? 긴박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라는 부르심을 아십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요점은, 거룩과 수많은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욱 더 많은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122/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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