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은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사63:1-6)
62장을 생각하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교회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고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그의 반응과, 그것을 지켜 보면서 기도하기로 결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벽에 파수꾼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강권했습니다. 시온이 다시 회복되고 예루살렘이 땅에서 칭송을 받게 될 때까지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며 자신들도 쉬지 말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이것은 행동을 유발하는 요청이요, 상황의 긴박성을 대면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에 전념하라고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고 스스로 맹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예전의 특권과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기만을 바라던 선지자를 잠시 떠나게 됩니다.
이제 이 문단에서 우리는 갑자기 이 여섯 구절 속에서 발견하는 특이한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언뜻 보기에 누구든지 이것은 나중에 삽입시켜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기 쉬울 것입니다. 방금 전에 나왔던 62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선지자의 기도는 7절에서 계속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62장 마지막에서 잠깐 떠났던 것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 문단(사63:1-6)이 그의 기도 중에, 위대한 중보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끼어듭니다. 물론 이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 여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의 일관성을 믿지 않고 이사야서를 다만 띄엄띄엄 주어진 여러 예언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편집자가 그러한 예언들을 함께 모아 끼워 맞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이 문단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되고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용의가 있고, 사실 그렇게 말합니다. 이 환상은 다른 교회의 선지자가 받았던 것인데 불행히도 여기에 삽입되어 그 기도를 어지럽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 통찰력의 결여와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통찰력이 전혀없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빛나는 영광을 놓쳐 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삽입시켜 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특징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선지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며 강권합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실로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려다 보시고, 그들의 연약함과 절망적인 상태를 아시고는, 그들에게 한 가지 위안을 주십니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계속 기도하며 깨어 있을 수 있게 하는 어떤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여섯 구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지자가 받은 환상이요, 궁극적인 것에 대한 안목이었습니다. 그가 나약해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영적인 영역에서 이 큰 싸움을 계속해 나가며 그의 동료들도 계속 할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주어진 비전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힘을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실로 이것은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가장 전형적인 행동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치르는 싸움에서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격려를 시시때때로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전혀 계속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찬송가들은 그러한 격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로 그리스도인이 노래 부를 때 빛이 깜짝 놀라게 하네.
그것은 치유의 날개를 펴고 올라가시는 주님이라네"
윌리엄 쿠퍼(W.Cowper)
주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계속하십니다. 갑자기 구름 속에 틈이 생기고 햇빛이 눈부시게 비칩니다.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대처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것은 유쾌하지 못하고 쓸쓸하며 피곤하고 진력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약해지기 쉬운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이사야 선지자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일을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 기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부단히 스스로 상기해야 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으면, 성경은 본을 보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는 성경의 위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신약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지혜롭게 구약과 신약을 함께 묶어 놓은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때 행하신 그일을 지금 우리를 위해서도 여전히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실하신 백성을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다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기도와 도고에 대한 최대의 격려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능하게 임하시는 이 복락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오직 이 위대한 정경, 이 환상의 의미를 포착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난제를 만납니다. 그런 다음, 기도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격려가 함께 주어집니다. 우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죄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을 살펴보면 그것이 하나의 환상임을 알게 됩니다. 선지자는 갑자기 에돔, 에돔의 수도인 보스라에서 올라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올라온 그는 정말 보기에 기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선지자의 시선을 끄는 한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그의 옷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큰 투쟁과 전투에 참가했음에 틀림없는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선지자는 그가 이긴 자라는 것을 즉시 인식합니다. 그는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겼습니다. 여기서 그는 피에 젖었지만 능한 힘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정말 아주 작은 난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9장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놀라운 주석임을 여러분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같은 일을 언급하는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에돔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의미하고 대표합니다. 에돔은 본래 에서로부터 나온 족속입니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이것은 야곱과 에서를 대조하는 그림으로 볼수 있습니다. 에서는 배역한 사람입니다. 장자권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장자권보다 팥죽을 더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사고방식과, 하나님과 성령께 속한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에돔이란 말과 에돔 족속이라는 말이 나오면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원수들, 하나님의 궁극적인 원수들, 하나님과 그 영광과 그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을 모형적으로 나타내는 성경적 상징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들에 대해 읽어 보면, 정말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대표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도 방해했고, 그 후 그들이 가난안 땅에 들어 간 뒤에도 여러번 대적했습니다. 이 에돔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전통적인 원수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에돔 족속은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어디에 속한 사람들이며 어떠한 족속에 속한 사람들이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에돔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세력들과 능력들, 바로 그것이 영적인 에돔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그것은 초대교회를 향한 적대감과 반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존재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핍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겠지만 교회를 멸절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그에 대한 놀라운 실례를 발견합니다. 그 밖에도 함께 모여서 초대교회를 꼼짝 못하게 하고 멸하려 했던 다른 세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에돔은 수세기에 걸쳐서 기독교회를 반대해 왔던 세력을 대표합니다. 이 부흥의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연구해 오는동안 다른 것은 전혀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역사의식 만큼은 갖게 되었을 것이라고 전 확신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자기의 생명을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교회가 처음 겪는 일이 아닙니다. 그전에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돔은 여전히 존재하면서 우리를 덮쳐 멸해 버리려고 항상 벼르고 있습니다. 에돔, 영적인 에돔은 언제나 존재했고 때로는 매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빈사상태에 빠져 거의죽은 것 같은 상태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세력과 권세를 이 에돔이 모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둠의 나라, 지옥의 나라, 마귀의 나라, 이 세상의 나라들, 이것이 바로 에돔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처해있는 전체 상황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이사야 당시 버림받고 황폐해진 상태와 똑같은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에돔은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을 아마겟돈 전쟁이란 치열한 전투에서 파멸시키려고 있는 힘을 다해 애쓰며 자기 세력들을 규합하는 세력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돔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내리깎는 모든 세력들이 이 최종적 전투를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열을 갖추고 있습니다. 에돔!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환상을 받은 선지자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과거 수세기에 걸쳐서 교회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애썼고, 멸절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교회가 이 대목을 언급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기도 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원수는 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았고, 교회의 세력은 더 약해지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일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 몰라 마음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자기들을 반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이 구절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그 환상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고 계속 기도하게 됩니다. 이 환상을 다시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러한 효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연약합니까? 좌절감을 느낍니까? 교회와 하나님의 일의 장래에 대하여 절망감을 느낍니까? 우리는 이 적대하는 세력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 저 나라에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수 있습니까? 어느 것이 여기서 우리에게 소망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느끼기 시작할 때, 우리 눈을 계속 떠서 성벽 위에 있는 파수꾼처럼 지평선과 멀리 떨어진 언덕 너머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여기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멀리 바라봅시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적인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력을 규합하고 기도하며 깨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 의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게 누구뇨? 에돔에서 올라온 사람, 보스라에서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온 사람이 누구뇨?" 갑자기 새로운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어둠과 절망과 낙담 속에서 이 사람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이게 누구뇨?" 그러고 나서 그 이야기는 더 진행됩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이 복된 사람을 상기하며 이 사람이야말로 유일한 소망이요 마지막 소망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확실한 소망입니다. "이게 누구뇨........?" 우리는 다함께 그를 살펴봅시다. 우리 주위의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고 그를 살펴봅시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곧 머리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뇨........?" 우리는 공산주의를 살펴보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유물주의나 과학을 쳐다보는 일도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대단히 많이 듣고 말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일도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오는 자가 누구뇨......?" 여기 교회를 위한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와 중보 기도를 할 때에 용기를 얻는 길이 있습니다.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우리의 고통이 이러한 다른 것들을 너무 많이 바라보고, 바로 이분에 대한 진리를 망각했다는 사실에 기인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흥분되고, 열이 달아오르고, 절망과 낙담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선지자가 생각한 첫번째 요점은 이 사람의 영광입니다.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우리는 언제나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걷는"이라는 말은 사실상 "위엄있는"이라는 뜻입니다.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분이 누구뇨? 그분을 자세히 들여다 보십시오. 누구입니까? 선지자는 부르짖습니다. "절망과 낙담에 빠진 백성들이여, 이리와서 이 사람을 보라, 이는 누구인가?" 그들은 그 영광과 당당함과 존엄과 위엄과 능력을 보고서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납니다. 여기 에돔에서 올라온 한 구원자가 있습니다. 큰 싸움이 있었고 그가 이겼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여기에 교회를 위한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곧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하고 겸손한 자는 누구입니까? 목수로 일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배 밑창에서 잠이 들고, 굶주리고 목마르신 분은 누구입니까? 잡히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정죄를 받아 연약한 모습으로 죽음에 넘겨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된 분은 누구입니까? 이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알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로 영광의 왕,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상도들이여,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바로 이 점을 고수하고 언제나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구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이것이 이 선지서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40장에서 그 예언을 이러한 면에서 보며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40:3-5).
이 위엄에 차고 영광스러운 분은 다름 아닌 영원하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선지자들이나 시편기자들은 예언의 순간에 모두 다 이것을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깊은 절망과 낙담 속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돕는 힘을 능력있는 자에게 더하며"(시89:19). 그들은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살피고 있느냐? 어째서 너희는 너희 원수들만 보느냐? 그를 보라, 그가 돕는 힘을 능력있는 자에게 더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3:16). 우리는 세상을 둘러봅니다. 시편 기자가 8편에서 하늘과 달과 해와 별들에 대해 말하고 나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둘러보면서 "우리는 만물이 사람 아래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데"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데, 현재 그 교회가 처한 상태를 보라. " 에돔 사람들에게 공격받고, 원수들에게 습격당하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이것저것에 의지하는 교회의 상황을 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것 같고 우리가 황폐하여 버림을 받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우리가......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니"(히2:9)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해답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소유물을 다 탈취해 가고 우리를 죽음으로 끌어 넣고 몰살시키거나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분이 거기 께시니 우리도 거기 거할 것입니다. 그는 베일에 감추어진 닻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존귀와 영광으로 관쓰신 것을 봅니다. 그가 존귀와 영광으로 관쓰신 것을 볼 수 있고,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기도와 중보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밖에 없습니다. "이 자가 누구뇨...?" 그는 영광의 왕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혼자 내버려둠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편입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의 진영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에 대한 다른 것들을 숙고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제가 어떤 사람들처럼, 나사렛 예수가 한 인간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아니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도록 애써야 한다고 믿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저야말로 가장 소망이 없고 가장 비관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교회 문을 닫읍시다. 이제 우리는 다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왕이시고 영원하고 불멸하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찬란한 영광과 위엄과 당당함과 위대한 능력을 갖추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의에 대해서 계속 읽어나가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답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이 자가 누구뇨?"라고 묻습니다. 그가 대답하십니다.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여기에 그의 위대한 특성이 있습니다. 그는 의의 왕이십니다. 세상은 거짓과 기만과 허영과 수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거룩하십니다. 그분은 완전하고 의로운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와 불의가 들어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의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삶의 열망이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의 때문입니다. 그는 의의 가지, 의로운 가지로 묘사됩니다(렘33:15).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죄는 무질서와 불의요, 불법이요, 배역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의를 되찾기 위한 것입니다.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5-26). 구원의 전체 목적은 의의 회복이요,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의를 회복시키는데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평화가 강같이 흐르고 공의가 파도처럼 넘치는 국가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나는 의로 말한다. 이것이 나의 처사다. 이것이 나의 삶의 태도다. 이것이 나의 사고방식이니, 모든 것은 의와 관계가 있다."
그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의미도 있지만, 저는 매우 위안이 되는 다른 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분은 의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의 말에 일구이언이 없고 확실치 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약속을 주셨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계획을 발설하셨고, 두려워떠는 그의 백성들에게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약속하신 것을 틀림없이 이루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비는 영원하고 언제나 충실하며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요한계시록에서 그에게 주어진 여러 칭호들 가운데 하나가 "충신"입니다. 그는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충실하십니다. 낙담한 백성들이여,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는 약속하셨고, 말씀하셨으며, 그것을 확실히 이루실 것입니다.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그러나 더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종합적인 묘사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묘사한 이런 여러가지 표현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시간을 다 소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거듭 말하고있는 다른 것을 언급하시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주목하다시피, 분노와 맹렬함이 거듭 반복됩니다. 선지자는 묻습니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뇨"(2절).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3-4절,6절). 이보다 더 위안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의 노와 분이 에돔을 향해 쏟아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위안과 소망입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5절). 그는 홀로 이 무서운 세력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분이 나를 붙들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분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무든 뜻인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평범한 말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의와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열망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바로 그분이 하늘로부터 온것도 그 이유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존귀를 변호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제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의 위대한 동기는 마귀와 죄로 인하여 일그러진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재건하러 오셨습니다. 그는 악에 대해서 분노하셨습니다. 그의 분노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쏟아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으로 삼키운 바 되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
저는 이보다 더 큰 위안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들과 현대 에돔의 힘과 분을 우리는 어느 정도 볼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일이 행해질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것을 소멸시키고 통제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을 조직화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심각하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은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악이 모든 것을 이기고, 지옥의 세력에 대해서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습니까? 여기에 저의 유일한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십시오. 그는 신적이고 거룩한 혐오감으로 그 모든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분의 진노가 그 위에 쏟아집니다. 그는 그것을 파괴하고 진압하고 멸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그 백성들이 구속받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가 강조하는 요점은 그의 정복입니다. 비록 피로 얼룩져서 마치 포도즙틀을 밟은 것 같았지만 그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살육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멸하셨고 진압하였습니다. 또 다른 강조점은 그가 혼자 그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그는 혼자 포도즙틀을 밟으셨습니다. 잠시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구원에 있어서 이것이야말로 위대하고 중심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전체의 위대한 주제는, 구원사역은 전적으로,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어느누구도 그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습니다. 모두 다 혼자서 행하셨습니다. 성경은 첫번째 예언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창3:15). 이 한 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에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의 본 주제를 벗어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렇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한 분에게 이르게 됩니다. 이 복되신 분은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분으로, 천사들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분만이 그 싸움에서 우리의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그가 그것을 얼마나 자주 언급하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고독한 가운데 홀로 행하셨습니까? 요한복음 7장 끝에는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라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 문장은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는 갈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혼자 남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를 거의 마쳐갈 즈음에 충성을 장담하는 자들에게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열두 제자 가운데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택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따로 데리고 올라가셨지만 그 무서운 고뇌의 순간에는 그들과 떨어져 혼자 계셨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를 기억하면서 기도하며 자기와 함께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그는 혼자 계속 고뇌하셨습니다. 혼자서 이 궁극적인 문제, 잔을 마시는 문제를 앞에 놓고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도 돕는 자 없이 그는 혼자서 잔을 마셨습니다. 혼자서 말입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베드로도 그를 부인했습니다. 대담하고 충동적이고 자기 확신에 넘치던 베드로, 죽는데 까지 그와 함께 가겠다고 버티던 베드로도 달아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혼자서 포도즙틀을 밟으셨습니다. 그는 혼자 죽으셨습니다. 그는 혼자서 자신의 어깨에 세상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것은 그 후에도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5장에 이렇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여러 인으로 봉인된 역사의 두루마리 책에 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개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5:2-6)
하늘이나 땅에서 다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오직 한 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그분 만이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 만이 책을 펴실 수 있고 인을 떼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에게 가까이 갈 때는 더러운 옷과 같은 여러분의 의의 검불이나 조각들을 가지고 나오지 마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자신의 선함과 노력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게 감사드립니다.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그분만이 그것을 하실수 있고, 또 홀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셨습니까? 구약성경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이기셨습니다. 스테반은 그의 위대한 설교에서 그는 교회와 함께한 천사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는 위기의 순간에 여리고 성 밖에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던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요, 이스라엘 군대의 장관인 바로 그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계속 살피면서 그를 보고 그가 행하신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십자가로 나아갑시다. 거기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위대한 싸움이, 위대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지옥의 모든 세력들이 그를 대항하여 맞서 싸웠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는 죽으심으로써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를 끝장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있는 것을 모두 다 동원했습니다. 싸움은 계속됐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마지막 무기도 다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이기셨고 쳐부수며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홀로 말입니다. 아무도 그를 돕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홀로 외로운 죽음을 통해서 사망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이제 끝으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그분을 살펴봅시다. 그분은 운명하십니다. 그들은 그 몸을 내려 무덤에 가둡니다. 그들은 돌로 그 무덤입구를 막습니다. 군인들이 보초를 섭니다. 거기에 그는 누워 계십니다. 그는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잠시 기다리십시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이 밤중에 고기 잡으러 갔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그 새벽에 해변가에 갑자가 나타나시니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 해변에 누군가가 계셨습니다. 누구입니까?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함께 모여 방문을 잠갔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입니다. 갑자기 어떤 이가 그들 가운데 섰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는 사망과 무덤을 이기셨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려내고 불멸케 하셨습니다. 그는 죽음과 무덤을 바라보시며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아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받은 주를 보라
영광스런 그 모습
승리하고 오실 때에
만민 경배하리라.
켈리(C.Kelly)
여러분은 그분을 보았습니까? 성도들이여, 머리를 들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영광의 왕이십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24:7). 오, 하늘로부터 영원한 영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바로 그가 그 일을 해내셨습니다.
교회의 내력이나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는 같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교회가 죽어가고, 끝장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분이 나타나자 원수들이 흩어지고 교회는 다시 소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 뜻하는 바입니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새롭게 하심을 얻는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뜻하는 바입니다. 교회는 또 다른 비젼을 보게 됩니다. 그분을 본 교회는 원수들을 보고 미소지으며 비웃을 수 있습니다. 부흥은 언제나 그분의 사역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혼자서 포도즙틀을 밟습니다. 물론 그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칼빈이든 루터든 웨슬리든 휘트필드든 그 어느 누구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분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십니다. 그분이 치료하기 위해서 일어나실 때 원수들이 패배당하고, 교회는 소생합니다. 언제나 그분 홀로 하십니다. 부흥은 영광 중에 계신 그분을 보고, 그분에게 돌아가고, 그분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그러나 잠시 기다리십시오. 위대하고 중대한 날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광과 기이함을 초월하는 그 날이 옵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시는 분을 뵈올 날이 옵니다. 사람들은 "저기 오는 자가 누군가?"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대답은 같습니다.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오시는 그 위엄에 찬 분은 왕 중 왕이시요, 주의 주시요, 마지막 싸움을 위해 오셔서 지옥에 속한 모든 것들을 궁극적으로 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이것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의 입에서 이 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고"(13-15절). 그는 왕 중 왕이시요, 주의 주이십니다. 그는 모든 원수, 자기를 반대하는 모든 것을 영원히 멸하려고 오십니다.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제국들이 모입니다. 공산주의, 유물주의, 과학주의, 그 밖에 모든 "주의"들이 모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탄 자의 입으로 나우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계19:19-21)
여러분은 이러한 것이 올것을 믿습니까? 이런 일이 올 것입니다. 이 소망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은 오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현재의 원수들과 대적들에 의해서 놀라 떨고 있습니까? 그가 그 입의 말씀과 광채와 재림의 영광으로 그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땅에 만연한 것 같은 가공스러운 공포가 완전히 파멸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 일을 위해서 오십니다. 베들레헴의 아기, 목수, 마리아의 아들로 오셨던 그분이 이런 영광과 온전한 위엄을 갖추고 오십니다. 온세상,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그를 때리고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왕들과 세상의 위대한 자들이 비천해지고 자지러질 것입니다. "영광의 날이 점점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은 그를 보았습니까? 그로 인하여 깜짝 놀랐습니까? 놀라서 "이분이 누군가? 나를 구원하신 이분이 누구신가? 나의 영원을 보증하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교회의 주가 누구신가? 라고 부르짖었습니까? 그 대답을 아십니까? 그 나라의 시민이 되어 그러한 구주에게 속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존 뉴턴(J. Newton)
다시 그러한 것들을 경멸조로 바라봅시다. 그러한 것들을 비웃으며 조롱합시다. 마귀를 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합시다. 그러면 그가 여러분을 피할 것입니다. 그러한 왕에게 속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그의 승리가 확실하며 그의 이김이 철저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요 위안이요 격려가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같이, 그분을 바라봅시다. 그분께 가서 아뢰고, 그분께 우리를 찾아와 달라고 간청합시다. 그가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한 한 표본을 보여 주시고, 그 동안에 격려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원수들을 쳐부수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주님의 능함과 권능으로 우리를 강하게 해달라고 구합시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반면에 그에게 속하지 않은 것보다 더 무섭고 섬뜩한 일이 있을까요? 오, 세상에 속하고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속하지않은 사람들의 비극이여! 세상을 위해 살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며, 세상을 기뻐하고, 기독교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으로 마음이 가득 찬 그런 사람이 바로 그 비극의 주인공이 아닙니까? 만일 그와 같이 살다 죽는다면, 포도즙틀의 포도처럼 그의 발밑에 밟혀 으깨져 그의 임재의 영광과 복된 교제의 즐거움으로부터 떨어져 멸절될 때가 올 것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여. 모든 불신자들의 운명이 그러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영을 압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을 놀라게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종들에게 큰 능력을 입혀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부흥을 위해셔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들이 그 발 밑에서 파쇄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 영혼이 강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쉬지말고 기도하고, 그의 복음을 힘있게 해달라고 구하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소생시키고, 이 능하고 항거할 수 없는 권위를 우리에게 허락하사 그들이 임박한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마땅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린양의 진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진노에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선지자에게 주어진 격려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전히 그것이 우리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보았습니까? "이분이 누군가?" 하고 물었고, 지금도 묻고 있습니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 나의 구속주, 나의 모든 것 되시는 분, 바로 그분입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116/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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