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 (요일2:3-6)
사도는 본문 3절의 시작 부분에서 자신이 이 서신의 첫 부분부터 언급한 교리들을 적용하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가르치려는 위대한 주제인,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역시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나가는 데 있어서 혹 죄를 짓게 된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우리를 절망스런 상황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은 죄를 아버지 앞에서 대언해 주시는 속죄의 사역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다루어 주신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호해 주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감히 하나님 존전에 설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소모했던 지극히 근본적인 교리인 것입니다. 이 교리야말로 사도가 이 서신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교리를 대함에 있어서 할 수 있는 한 신중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이 교리를 대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교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분의 의로우심 외에 우리가 의지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어떠한 소망이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와 같은 교리를 설명하면서, 대단히 실제적이고 중요한 부분으로 인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이 모든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데 있어서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는데,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을 매우 신중한 자세로 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은 오늘의 본문 3-6절을 통해 이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강조하게 될 것입니다만 어쨌든 사도가 지금 무엇보다도 먼저 이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는 이 문제에 접근하면서 자신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많은 종류의 단어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모든 기자들이 사용한 어휘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나름대로 개성 있는 독특한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찰은 성경의 영감 교리를 설명하는 여러 관점들 중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찰을 근거로 볼 때 기계적 영감설은 그리 타당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기자들 각자의 개성이 기록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나름대로 즐겨 쓰는 어휘들이 있듯이, 그리고 모든 설교자들이 나름대로 자주 반복해 쓰는 용어들이 있듯이, 성경의 기자들도 나름대로 즐겨 쓰는 어휘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이 있었으며 사도 요한도 역시 그랬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도 자신만이 사용하는 어휘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던 단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단어란 본문의 말씀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에서 사용된 "알 것이요"라는 어휘입니다. 이 본문 말씀뿐 아니라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와 다른 서신서들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 단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거하다"라는 단어를 여기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다른 기록 가운데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키다"와 "동행하다"와 같은 단어들도 그가 즐겨 사용하던 어휘들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와 같은 식으로 어휘들을 살펴봄으로써 성경 기자에 대한 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련의 서신서들을 기록한 기자들에 관한 질문뿐만 아니라 복음서들을 누가 기록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공통된 어휘 사용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매우 명확하고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이것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를 읽음으로써 그의 문체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그의 서신서들을 대하면 낯설지 않고 익숙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사도 요한이 이 본문 구절을 통해 가지고 있는 주된 관심은, 복음은 단순히 알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어떻게 접목시키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그가 복음서에서 기록한 어휘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복음서와 서신서와의 재미있는 연관성, 즉 우선적으로 교리에 대해 설명한 후 교리의 실제적 적용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관성 속에서 우리는 좀더 실제적인 내용에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교리에 관한 내용이 삭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교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잇습니다. 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신약성경은 교리와 적용을 분리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이 둘은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결코 아닙니다. 적용은 언제나 교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강을 이루는 요소와 강 자체에 대해 말할 때 어떤 면에서 보면 강과 강을 이루는 요소들은 분리될 수 있지만 엄밀히 보면 이 둘은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라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실제적인 삶, 이 두 가지는 둘이면서도 유기적으로 나눌 수 없는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를 "알아야"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확신에 대한 위대한 교리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의 말씀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베드로후서 1:10의 말씀에서도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표현으로 본문의 내용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 선생이 학생을 칭찬하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선생은, "이 친구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것은, "저 학생은 무엇이든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학생이 자신이 배운 내용에 관한 한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보면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목적은 바로 확신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서신의 마지막 부분인 5:13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계속해서 이 확신의 교리에 대해 언급하고 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교리는 대단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이유로 이 교리를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것들 중 가장 영광되고 소중한 확신의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몹시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보통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삶과 관계된 것들에 대해 확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있어서 매우 어려운 문제 중에 한 가지는, 우리가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축복된 확신에 대해 말씀하는 바를 우리는 죄성으로 인해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와 같이 반대를 하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가정이나 억측이라고 느끼는 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내가 누군데 감히 하나님을 안다고 가정해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극히 온전하고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과 나는 죄로 가득 차고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잇는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권리로 내가 믿고 잇는 분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나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며 우롱하는 듯한 겸손의 모양을 취해 말하곤 합니다.
또 다른 부류는 이 확신의 교리를 믿는 어떤 특정인들에 대해 반항하는 마음가짐 때문에 교리를 대할 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들은 "말만 잘하고 확신의 교리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면서도 자신들이 행하는 바로 그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피상적이고 천박한 자들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 교리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만 하고 자족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이 교리를 따르는 것을 거절합니다.
이제 공정한 입장에서 살펴봅시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자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주장하는 바와 부합하는 행동과 인격을 나타내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와 같이 확신의 교리에 대해 대적하는 자들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다른 어떤 연약한 자들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확신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극히 논리적으로 그리고 확신 있게 여러분에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을 좋아하니까 또는 싫어하니까 등의 이유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면 여러분은 그 어느 것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곳에든지 항상 여러분이 싫어할 만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므로 여러분은 어느 정당이나 어떠한 단체에도 속해 있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은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대답은 어떤 사람이 뭐라고 하든 간에 신약성경은 교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교리를 담은 말씀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신약성경은 이 세상에 거하는 자들의 삶에 대해 매우 우울하고 어둡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6에서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환란과 시련과 핍박에 대해 준비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8:38,39의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축복된 내용을 확신함으로써, 또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으로써 모든 환란과 시련과 핍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금방 살펴본 로마서 8:38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위로와 위안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말년에 감옥에 들어가 앉아 있는 한 노인으로서의 바울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이와 같은 어려움들을 극복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 대답은 디모데후서 1:12의 내용과 같습니다. "이를 인해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는 말씀과 같이 저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신약성경은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확신의 교리를 떠나서 다른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확신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요한 사도는 매우 간결하게 묻고 있습니다. 그의 질문이란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입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중요한 답변을 해 줍니다.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매우 명확히 해야만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어떤 것을 알아야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신"분이십니다. 따라서 요한은 여기에서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것에 대해 알아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항상 질문의 형태를 취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분에 대해 어떤 부분을 알고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기로 출생한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소년 시절 성전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목수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었기 때문에 그가 행한 기적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지식들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식들을 요한이 지금 말하고 잇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안다"라는 단어는 좀더 개인적이고 직접적이며 상관이 있는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매우 강하게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그리고 외형적으로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개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가까이 접하고 관심을 가지는 관계입니다. 그 이하로는 해석할 수 없다고 봅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과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그"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앞에서부터 쭉 설명하고 있는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면서도 아울러 아버지에 대한 지식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자신에게 질문해야만 될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 질문이란 "나는 과연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소원과 두려움과 포부와 열망의 기도만 올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확실하게 하나님이 보좌에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실재하는 분으로 계시는가?"와 같은 것들입니다.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분에 대한 어떤 내용들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실제로 이것이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테스트를 통하여 자신을 점검해야 되겠습니다. 과연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대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또한 그분과 교제하며 연합된 삶을 견지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요한이 두 번째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여기서 요한이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교리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 속에서 잘 아는 것으로 멈추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그분과 하나로 연합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믿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연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구절은 신약성경에 있는 매우 위대한 구절들 중 한 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장에서 독자들을 향한 자신의 관심을 열거한 일련의 내용 중에서, 그는 저들이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들임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을 신약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고린도전서 12:27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했듯이 우리 몸의 각 부분이 그분의 몸 안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추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형태로 완벽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는 생명력이 있는 유기적인 관계입니다.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접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으로서 접목되어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나무로서의 삶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유기적인 연합이 그리스도인과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요한은, 주님과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이 생명력이 있는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그분 안에 거하며 또한 그가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중생에 대한 신약성경의 위대한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여러 가지 의견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저 단순하게 의견들을 주장하고만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용서에 대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와 같은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도 하면서 살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있어서도 다른 질적인 내용,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 안에 하나님 아들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의 삶에 들어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한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을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이와 같이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계십니까?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이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요지인데 여기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경험에 대한 신빙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관한 한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지만, 사도가 이 구절을 기록할 때에는 나름대로 염두에 두고 있는 특정인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서신의 첫장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언급할 때, 초대 교회시기에 있었던 영지주의에 대해 다루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당시 특별한 지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미 신비적인 것을 추구하는 종교들이 있었는데 기독교의 분파 가운데에도 철학과 신비적인 요소를 가미한 동양 종교들과 이상야릇하게 혼합된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상스러운 모습의 기독교 분파는 초대 교회 시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종교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신비적으로 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에는 이 같은 사실이 모순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순된 일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종국에는 알 수 있게 됩니다. 이해력이 뛰어난 철학자들은 이성적인 생각과 논리를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펴 나갑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인생의 전반적 의미를 찾아내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무엇인가 해결해 나아가는 것같이 보이다가도 언제인가는 제대로 그 의미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들은 "여태까지 해 놓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늘상 그러했듯이 결국에는 이와 같은 인생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한가운데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과해 지나가 버리고는, 철학에서 신비주의로 직접 넘어가곤 합니다. 이성을 갖고 노력하다가 참복음을 망각하고 이상한 신비주의적인 경험으로 이끌려 가 버리곤 합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초대 교회 시대에 있었으며 이러한 자들을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신비적인 진리를 우선적으로 소개받습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이러한 것들을 가르침과 아울러 계시를 받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항상 자신의 신비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자세히 조명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와 같은 문제를 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경험을 꼭 테스트해 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험이 다 진리가 아니라 잘못된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해 참인가 거짓인가를 가려내야 될 것입니다. 모든 영들을 다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영들 중에는 적그리스도의 영도 있고 거짓 영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광명의 천사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자입니다. 그는 능히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짜 경험을 하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많은 경우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경험을 하셨다면 그 경험을 엄밀하게 시험하고 검증해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신비적인 체험을 하였다고 우기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시험할 수 있습니까?"
그는 여기에서 이러한 경험들을 시험할 수 있는 첫 번째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특별하게 경험하는 것들을 자신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심지어는 불행하게 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들은 불덩어리를 보았다거나 온 방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거나 하는 등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까지도 의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이와 같은 특별한 환상 같은 것들을 체험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약성경이 저들에게 베풀어주어야만 하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들을 빼앗겨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요한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매우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 요소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사도 요한을 신비주의적인 자라고 묘사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개중에는 사도 바울은 싫어하면서도 요한은 좋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너무 논쟁을 많이 하며 너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반면, 요한은 사랑과 신비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비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요한이, 우리의 경험을 테스트하고자 할 때, 어떤 신비적인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삶 자체로 검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입니까? 이상야릇하고 신비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는 말씀이 바로 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표현하자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느낌이나 감각이나 환상이나 기도에 대한 놀라운 응답이나 흥미진진한 것이나 어떤 특별한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이와 같은 일들에 매우 익숙합니다. 실제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경험들을 체험해야만 그리고 항상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확실하게 주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분명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우선적으로 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며 또한 안전한 것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는 당연히 체험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경험하였으면서도 언급하기를 두려워하였던 것과 같이 드물게 오는 체험들이기는 하지만, 저는 이와 같은 체험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나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체험들을 최고의 우산 순위에 놓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테스트해야만 할 것은 "당신의 삶은 과연 어떠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와 같은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과연 당신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고 계십니까?"와 같은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그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금지 명령에 관한 목록들을 벽에 걸어 놓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 큰 목적은 바로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하기를 그가 원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구약과 신약성경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저에게는 적용시킬 수 있는 십계명의 말씀과 산상수훈의 말씀이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저에게는 신약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모든 가르침이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가르침들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이며 우리가 지켜야 될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매우 솔직하게 여러분들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에 참으로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또한 만일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인생을 살면서 이루고 싶은 귀중한 소망이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자신이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안다는 말은 그분이 걸으실 때 함께 따라서 걷는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이 이전에 걸으셨던 발자취까지도 더듬으면서 따라 걸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지금 사도 요한이 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자주 우리의 인생을 걷는다 또는 행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창세기 6:9에서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17:1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해 완전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8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하다 또는 걷는다는 표현을 통해 주어지는 말씀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너무나도 멋있게 묘사하고 있다고 봅니다. 긴 여정을 주님과 더불어 걷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여기에서 매우 간단하게 어떤 설명 없이 "만일 여러분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분이 걸으셨던 대로 따라서 걸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발자취와 그분의 행실들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차근히 들여다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만일 여러분의 삶이 그분의 삶 안에 거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와 같은 자들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필수적으로 포도나무의 특성을 자신에게도 담아서 그 특성대로 살아야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의 생명을 취한다는 말은 그 무엇인가가 지니고 있는 것들을 나타내고 보여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참으로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분께서 걸으셨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걸으셔야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4복음서에서 보여지는 주님의 삶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겸손과 온유의 모습입니다. 이사야 42:3에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라고 그분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29에서 주님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살펴볼 때 우리들은 주님의 모습에 접근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간증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자주 강한 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보여지는 능력 같은 것에 대해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 수 있는 귀한 사실은,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해지도록 격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걱정되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까지도 겸손하게 되는 것을 격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따라가려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고 주장하는 자들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연약하고 나약한 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거칠고 힘센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에 대해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온유와 겸손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10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님의 겸손하심과 온유하심에 대해 가르칠 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어리석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고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교회는 설교자에게 힘있고 탁월한 자가 될 수 있도록 몰아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얼마나 다른지를 볼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가 걸으셨던 발자취대로 걸을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가지셨던 최대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이 그분의 모든 목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비애를 잘 알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죄 때문에 통곡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죄가 그분을 상하게 하였으며 그분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의 답답한 현실로 인해 슬퍼하고 계시는 그분의 슬픔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고 있는지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4에서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는 과연 탄식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는 죄악들 때문에 짐 진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 살고 있습니까? 이와 같은 삶이야말로 우리 주님이 걸으셨던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그분의 발자취를 밟아 가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동정과 연민과 인내와 자애로우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테스트입니다. 어떤 흥미진진함이나 환상 같은 것들에 의해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그분과 똑같아지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나 그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고 싶은 소원이나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더듬어 걸어보고 싶은 소원이나 그분의 계명들을 다 지키고 그분의 말씀들을 다 이루고 싶은 소원에 의해 우리 자신을 테스트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테스트는 사실상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삶을 산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식으로 살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생명을 소유하셨다면 그 생명은 스스로 드러내 보여져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그분처럼 되려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그분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우리도 모르게 저절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표현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안전한 테스트로 주어진 것은 어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이상하고 신비적인 가르침 같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과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이 걸으셨던 길을 좇아서 걷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그분을 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이 그분을 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만일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관심사라면 여러분은 그분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저는 제가 그분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782/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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