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문제의 심각성 (사1:5-6)

by 복음과삶 2010. 3. 23.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사1:5-6)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당신께서 친히 만드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단지 대표적인 표본일 뿐이며 그들에게 전해진 말씀은 온 인류에게 전해진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가르침의 첫 번째 부분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있는 문제의 원인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술을 받고 있는 어떤 환자라 하더라도 그 수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편한 것을 원하고 구원과 행복을 원합니다. 진찰을 받느라 번거로워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고 검사를 받아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고통을 중단시켜 줄 일을 찾지만 고통은 더 심해져서 심각한 문제가 되기조차 합니다. 무엇이 고통을 야기시키는지를 알기도 전에 중단되기만을 원하지요.

 

성경은 우리의 질병의 원인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성경은 우리에게 치료 방법, 즉 복음을, 구원의 길을 말해 줄 것인데 그 복음이 병을 치료해 주고 고쳐 줄 것입니다.

 

이런 작업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며 기독교회의 지체된 이들도 불신자들만큼이나 죄의 심각성을 깨닫도록 해 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같은 때에 너무 오래 침묵하며 자기만족에 빠져 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부흥을 허락해 주시기를 그분께 힘써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하늘의 창(窓)을 여시고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나라들을 흔들어 주십사고 간절히 간구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 안할까요? 단 하나의 답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도덕적 붕괴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붕괴는 무서운 속도로 진전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한 임하심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절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매주일 근사한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고 즐거운 교제를 나누며 때때로 특별한 일을 하면서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경향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야만 상황을 고쳐 놓을 수 있을 그런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고 바쁘게 움직이며 기구를 조직하였지만, 형세는 더 악화되어 가고 문제는 더 끔찍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를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이사야가 이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런 죄의 심각성에 대한 진리를 결코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고발하는 것입니다. 로마서7장의 바울의 고백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자신의 형국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로 잡는 방법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세상사람들의 대안

 

1. 교육과 지식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의 모든 고통이 교육 부재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몽, 지식. 이성과 논리의 적용, 그리고 또한 상식이며 그런 것이 있으면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2.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거의 오늘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모든 문제는 단지 심리학적인 질병의 몇 종류라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짖는 것을 ‘범죄’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건 ‘병’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정신과 의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 사람에게 친절하고 조용하게 말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은 병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형벌에 대한 견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형벌의 주 기능을 벌을 주는 것. 즉 징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견해는 인기가 없습니다. 형벌의 주목적은 개선시키는 것. 즉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은 교도소(矯導所)가 되었는데, 거기서 사람을 치료하고 가르치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말하기를 세상은 좋아지고 있으며 인류는 개선되어 가고 있고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말합니다. 조만간 사람들은 일종의 완전의 경지에 다다를 거라고 말합니다. 완전하고 분명히 선한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진리를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오늘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세상이 가진 문제가 너무 깊고 심각해서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어떤 것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류의 문제가 너무 무서운 것이어서 그런 식의 개입 외에는 해결책을 주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주어졌지만 그 율법이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 것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육신에 죄를 정하기’(롬8:3)위해 보내셨습니다.

 

5절에서 선지자는 죄의 결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죄의 성격에 대해 무지하듯이 죄의 결과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죄의 결과가 자신에게 어떤 해(害)를 입히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 실상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살펴봐. 자. 너희가 얼마나 얻어맞아서 너희 온 몸이 상처와 곪은 데로 뒤덮여 있지 않니? 헌데 투성인데도 여전히 계속 죄를 짓고 있구나. 그러고도 더 그러고 싶니?’.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죄의 무서운 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점을 우리에게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죄는 삶의 전 영역을 감염시키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죄는 일부만을 감염시키고 부분적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전 존재를 죄로 물들게 하고 죄의 지배아래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배역하며 살게 되는 무서운 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일부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롬3: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것이 다른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그곳에 물론 우리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신이 어떠하든, 조상이 누구이든, 사회적 위치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는 단순히 행동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 생각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잘못되었던 첫 번째 일 중 하나는 그의 지성이었으며, 오늘날 세상에 있는 어려움은 사람들이 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과 느낌, 감각, 우리의 욕구 역시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의지도 포함됩니다-의지도 절름발이가 되어있습니다.

 

이사야가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의 무서운 힘입니다. 그는 죄가 모든 면에서 사람의 삶 전체에 미치는 무시무시한 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거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문제는 죄가 형벌과 고통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왜 너희가 더 맞고 싶어하고 있느냐? 너희가 회초리로 맞았구나, 매를 맞았구나, 전갈로 징계를 받고도 마치 더 맞고 싶어하는 것 같구나. 오. 맞아서 비틀거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계속 나쁜 짓을 하고 있구나.

 

이는 현세대가 배워야할 내용입니다.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 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 주시는 가르침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옛적에는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이젠 당신의 친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보냈고 설교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이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셨지만 사람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무시하고 천대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주신 생명의 길, 주님의 명령 그리고 그분의 복음을 거절한 결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이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13:15절)는 큰 원칙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느끼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늘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을 그렇게 하시고 계시며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 보다 더 큰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손가락을 불에 넣으면 화상을 입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범하면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벌하는시는 방법중의 하나는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가 지은 어떤 죄의 결과로서 양심의 가책, 정신적인 고통, 영혼의 갈등, 수치 등이 있으며 어쩌면 실제적인 고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엄청난 두통, 온 몸에 아픔과 통증, 게다가 수치심과 방탕하다는 느낌, 그리고 무가치하고 부정하다는 느낌들이 그러합니다. 한번이면 충분할 거라고 그런 무서운 느낌을 받았다면 그들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거라도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들이 경험한 일을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모든 죄의 유형과 형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여전히 계속 죄를 짓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 하는 소리들의 한탄을 들어보십시오. 고통과 혼란과 온갖 부도덕한 험담과 자괴감을 높이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이 땅에서 나타나는 형벌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벌과 고통으로도 결코 개선되지 않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왜곡되고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의 권능은 아주 대단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기억력을 무디게 합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직후에 너무 부끄러워서 말하기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다시는 이런 일 안할 거야. 다시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는 그렇게 나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훨씬 더 덜 나쁘게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가준 내에 그 일에서 나쁜 마음은 전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죄는 기억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사실을 왜곡시킵니다. 죄는 사실을 주물러서 죄와 어울리는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죄는 우리의 이성을 주물러서 우리의 모든 논리를 파괴시킵니다. 죄는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여 화려한 일을 상상하게 만들며 장밋빛 환상을 갖게 합니다. 죄는 의지를 마비시켜 유혹이 다시 올 때 우리가 느꼈던 것을 다 잊게 하며 다시 같은 일을 저지르게 합니다.

 

우리는 왜 다시는 이런 죄를 짖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또 다시 그 일을 합니까? 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런 갈등 속에 있습니까? 오직 하나의 답이 있을 뿐입니다. 죄의 힘은 우리의 힘보다 더 셉니다. 죄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셉니다. 거기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힘입니다.

 

▶ 죄의 무서운 힘은 우리를 완악하게 만들어서 벌을 받고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우리를 바로 잡거나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벌과 가르침이 오히려 우리의 죄를 더욱더 악화시키고 더 죄를 짓게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왜곡시켜서 우리를 이전보다 더 나쁘게 만들어서 우리를 죽이게 만듭니다. 죄가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죄 짓는 일을 멀리합니까? 물론 아닙니다. 죄 짓은 일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수록 더 죄를 짓습니다. 성도덕에 관한 책을 읽어서 착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런 것을 읽고 오히려 즐기게 되며 이전보다 더 나빠지게 됩니다. 죄는 이렇듯 무서운 힘이며 인류는 그 죄의 무력한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지성과 마음과 의지와 몸, 그리고 영과 혼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희망은 없습니까? 오직 한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하나님의 힘이며 그 힘이 곧 복음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교육도 아닙니다. 정보도 아닙니다. 의학적인 치료도 아닙니다. 정신과적인 치료도 아닙니다. 사회적인 진보도 아닙니다. 형벌조차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 마음이며 새로운 본성입니다. 즉, 어두움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는데서 벗어나서 어두움을 미워하고 빛을 사랑하는 본성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죄와 마귀의 권능이 모든 인간의 힘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귀를 이기셨으며 자신을 믿는 이는 누구든지 마귀의 힘으로부터, 그리고 죄와 악의 힘으로부터 건져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악에서 건지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죄악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우리를 정복자들보다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신성(神性)을 우리 안에 심으셨습니다. 이 새로운 본성, 이 새로운 생명을 말입니다. 이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있어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날마다 이끌어 가는 그분의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2221/page/11

'생명의 말씀 > 로이드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지 (사1:2-3)  (0) 2010.04.05
죄에 관하여 (사1:4)  (0) 2010.04.01
그리스도를 아는 것 (요일2:3-6)  (0) 2010.03.19
감정적 신앙 (딤후1:6)  (0) 2010.03.18
놀라운 십자가 (갈6:14)  (0) 201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