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돌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수 4:21-24)
우리는 부흥의 보편적인 특징들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의식,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놀랍다는 의식, 다른 사람들도 그 구원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등이 부흥의 보편적인 특징들입니다. 또한 부흥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성령의 주도권을 인식하게 되고, 모든 공동체의 삶을 주장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알게 됨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흥에 대한 어떤 특별한 요점들을 강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그 특별한 요점들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부흥을 통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부흥의 특징입니다. 나이나 기질이나 지적 다양성 여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부흥을 통해서 감화를 받습니다. 지금 이것을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 요점은 상세하게 다룰 가치가 있으며,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복음적인 회심을 심리적인 차원으로 기각시키려는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제시할 답변 중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흥이란 어떤 특별한 유의 사람들, 소위 “종교적인 유형”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부흥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일 가운데 하나는, 모든 유형의 사람들, 즉 계층이나 나이나 기질이나 다른 모든 것을 기준으로 나누어져 있는 사회의 모든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부흥의 때에 함께 어우러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일은 이상할 정도로 규칙적으로 나타납니다.
또 다른 특징은, 부흥이란 왔다가 잠시 동안 지속되다가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흥미로운 것은, 부흥이 하나님의 한정된 역사임을 강조해 주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갑자기 또는 점진적으로 와서는 어떤 큰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은 갑자기 또는 점진적으로 끝납니다. 여기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요점이 있습니다. 때로 여러분은 부흥이 시작된 날짜와 부흥이 끝난 날짜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은 부흥이 하나님의 역사요, 단순한 심리적 체험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기 때문입니다. 부흥이 단순한 심리적 체험에 불과하다면, 어떤 자극이나 어떤 동인들을 계속 제공하면 계속해서 결과들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요점으로 넘어가 봅시다. 그것은 부흥의 결과로 회심한 사람들은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의 위대한 특징은 그렇게 교회의 삶 속으로 들어온 이 능력에 의해서 회심한 사람들이 계속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마음의 결심을 한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때로 여러분이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후에 가서 보면 거의 모든 복음 전도자들이 기대했던 수치의 10퍼센트밖에는 남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흥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늘지 않는다는 것은 부흥에 있어서 예외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남아서 계속 머물러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문헌을 참고하면 이 점을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았습니다. 또 100여 년 전 여러 사역자들이 묘사한 것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다 같이 이 동일한 요점, 곧 사람들이 서서 그냥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앞 다투어 증거했습니다. 그것은 하루 저녁에만 지속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그 집회를 시험해 보지도 않았고 또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복음 전도 운동과 부흥의 흥미로운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나게 됩니다. 복음 전도 운동을 벌일 때에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들은 앞으로 나옵니다.
최근 콩고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에 동참했던 어떤 사람이 이 점을 잘 지적했습니다. 그는 작은 책자를 써서 자기가 체험한 것을 널리 알렸는데, 그 책자 속에서 이 점을 매우 웅변적으로 설파합니다.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 지역에서 20년 동안 설교해 왔고, 그 때마다 집회를 끝마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내리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일어난 이 부흥의 역사 속에서 앞으로 나오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어려움은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다루는 데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설교하고 있는 데도 앞으로 나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는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부흥의 결과로 얻어진 사람들은 계속 지속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어떤 구체적인 사실들을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수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치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 시대에, 그 수치가 이제는 사실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에 저는 그 수치를 말씀드리기를 망설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수치가 참인지 알아보기 위해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 수치를 선포하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치는 흥미롭습니다. 저는 지금 어떤 집회가 끝나고 나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교회의 일원이 되어 계속해서 열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 사람들의 수치를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듣기로는 1730년부터 1745년까지의 기간 동안 기독교회에 가입한 사람들의 수는 약 5만 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은 조나단 에드워즈나 테넌츠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대각성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1857년부터 1859년 사이에 미국에서 대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때 50만 명이 기독교회에 가입했습니다. 제가 기독교에 가입했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교회에 출석했지만 즉각 교회의 회원으로 허락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시험을 보았고 문답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들은 신입 교인으로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지금 저는 믿음의 결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그러한 유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그러한 것을 당장 뽑아 버립시다. 회심과 중생의 분명한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회의 온전한 회원으로 영입되었음을 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0년 전 미국에서 50만 명이 그렇게 교회에 가입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얼스터에서 교회에 가입한 숫자는 10만명이 되었고 웨일즈에서는 5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수치를 기억하면 이 두드러진 사실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 강조되어야 할 요점은 하나님과 거룩에 관한 대단한 열심이 교회의 성원들이나 이처럼 회심한 사람들 속에 명백히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교회와 관련된 사업이나 관계에 대단한 자극이 가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제2차 복음주의적 각성”에 대한 에드윈 오르의 책을 보면, 이 방면에 있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100년 전 부흥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가지 일들을 소개합니다. 그 부흥은 잠깐 지나가는 어떤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깊고 심오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의 이름과 그 뜻을 위한 열심에 불타올랐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때 있던 교회들이 너무 비좁아 새로운 교회를 많이 지어야 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교회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운동을 벌일 때에는 교회들이 여전히 똑같은 상태로 있습니다.
또한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대단히 많이 증가했습니다. 부흥의 기간에는 언제나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보다 보편적으로 말해서,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세상에서까지도 도덕적인 추세나 수준이 눈에 띄게 영향을 받아 높아집니다. 당국이 경찰이나 다른 사정당국을 통해 음주나 다른 여타 일로 검거한 사람들의 숫자 통계를 보면 그것은 정말 의아할 정도입니다. 또한 어떤 지역이나 고장 사람들의 삶을 특징지었던 악한 습성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 주는 유명한 실례가 있습니다. 150년 전 존 엘리아스라는 한 위대한 설교자가 북웨일즈에 살았습니다. 그는 방탕함과 사악과 죄와 악행으로 유명했던 한 박람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사람의 설교로 그 유명한 박람회가 다시는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 박람회를 사라지게 했고 그 박람회는 다시 소생되지 못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여러분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유의 일입니다. 그러나 큰 복음 전도 운동이 벌어질 때, 여러분은 온 나라가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는 기사를 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악행과 범죄의 통계 숫자를 보게 되면 그 복음 전도 운동으로 인해 통계 숫자가 하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날 때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마저도 감화를 받고 영향을 받습니다. 전체 사회 생활 속에 진지함이 파고들고, 부흥의 보편적인 결과가 그 부흥이 끝난 후 몇 년 동안에도 지속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부흥의 현상을 보편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부흥의 경우에 대해서,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시기에 나타났던 특별한 변화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경우마다 부흥이 지니는 보편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우 흥미롭고 매혹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다양성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부흥이 시작되는 방식에서 여러 차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흥이 갑작스럽게 올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그 부흥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부흥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관심을 같고 기도했는데 수개월 또는 수년 뒤에 그러한 부흥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관심과 책임을 가지고 부흥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 사람들이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 사실들을 읽어보면 이러한 요점들 중 몇 가지의 실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흥이 임하는 집회 형태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회,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불과 몇 사람만이 모여 기도하는 작은 모임을 통해서도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불과 세 사람이 정규적으로 함께 모여서 기도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 사람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00년 전 뉴욕의 그 유명한 정오 기도회에서 한동안 혼자서 기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흥은 어떤 기도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설교 예배를 통해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복음 전도자가 일련의 정규 집회를 관장하고 있을 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 전도운동을 계획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부흥이 되고, 그 사람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방식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이란 마을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갑자기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죽음이 하나님께 부흥의 “동인”으로 사용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재난이나, 어떤 이상한 일이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나서 이 세상 삶의 덧없음을 인식하게 만드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날 수도 있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나 다른 것에 매이지 않는 분입니다. 성경은 그 실례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는 소수, “남은 자들”과 관계 있습니다. 또 많이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규칙과 법칙을 정해 놓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 그런 식으로 부흥이 일어났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역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적 체계의 법칙에 대해서 잘 못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방식은 끝도 없이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사람의 유형도 매우 다양합니다. 이것도 매우 매혹적인 주제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일차적으로 종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그의 저작을 계속 발간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200여 년 전 뉴일글랜드 주에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유용하게 사용된 사람입니다.
휘트필드라는 사람 역시 위대한 사람이었고 대단한 웅변가였습니다. 존 웨슬리 역시 어떤 방면으로 보더라도 뛰어난 사람이었고, 조직의 명수였으며, 매우 유능한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18세기의 이 모든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 속에 위대한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같은 사람들만 사용하지는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때론 그처럼 위대한 사람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하나의 법칙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루터나 칼빈 역시 타고난 위대한 사람이었고 존 녹스나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처럼 재능 있는 사람들만을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100년 전의 양상은 전혀 다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미국에서 뿐 아니라, 얼스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제임스 맥퀼킨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분이 여러분 중에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100년 전 북아일랜드에서 쓰임 받았던 사람입니다. 제임스 맥퀼킨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고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웨일즈에서도 정확히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은 데이비드 몰간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복음 사역자였지만 매우 평범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역자였고, 어떠한 은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붙잡고 사용하셔서 거의 2년 동안 그 사람을 사자처럼 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점을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것은 원리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일 수도 있고, 매우 보잘 것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부흥이 일어나고 부흥이 확산되었던 지역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매우 지역적이어서 그 지역에만 머물러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방을 벗어나 전 지역으로 파급될 수도 있습니다. 온 나라 전체가 그 부흥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100년 전과 2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러 나라들이 동시에 그러한 부흥의 열기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진정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현상을 심리학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심리학자들의 공격을 생각할 때 특별히 더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나중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시끄럽게 논의되는 한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때로 어떤 부흥이 일어나는 기간 동안 뚜렷이 나타나는 소위“현상”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도 대단한 다양성이 있습니다. 때로 어떤 부흥은 매우 강력하면서도 다소 조용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깊고 매우 심오한 감정이 따를 수 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회심하지만 아주 조용하게 회심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흥 시 어떤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은 거의 부흥의 법칙처럼 보입니다.
즉 그 현상은 사람들이 단순히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해 고뇌함으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과 구주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심지어 육신적으로 아픔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영혼의 고뇌를 체험합니다.
여러분은 존 번연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는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거의 18개월 동안 어찌나 죄의식의 고뇌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지 들에서 먹이를 찾고 있던 기러기가 부럽기까지 했었다고 토로합니다.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고뇌, 이 무시무시한 죄책감,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러한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혼의 고뇌를 하며 애통해 합니다. 그들은 울부짖고 흐느끼며 다른 이들에게 들릴 정도로 고뇌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거기에만 머물다 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어찌나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성령의 권능을 어찌나 강하게 느꼈던지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질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경련을 일으키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고, 일종의 실신 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그와 같은 상태로 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들은 다양합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부흥이 일어날 때, 여러분은 이러한 노선을 따라서 어떤 것을 얻게 됩니다. 뒤에 가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부흥이라는 전체 개념을 일반적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비평가들이 바로 이것을 문제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 돌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해 왔습니다. 1859년에 바로 이러한 유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그러한 유의 일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특징들과 경우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특징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교회 역사상 때때로 일어났던 이 걸출한 사건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일 그것들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들의 진정한 성질이나 특성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본문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어느 날, 옛 길갈을 지나는 사람들이 거기에 세워놓은 돌들을 보면서 묻습니다. “이 돌은 무슨 뜻이냐?”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이 돌들은 사실들, 이적적인 사실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만일 그 돌들이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이제까지 일어났던 모든 부흥도 역시 동등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흥은 하나의 이적입니다. 그것은 이적 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길이요, 능하신 주님의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부흥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나 간섭이라고 해야만 바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를 수 있었던 분은 하나님뿐이셨습니다. 하나님만 이 요단 강물을 가르셨습니다. 이 일들은 이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들 가운데서 독특한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부흥도 역시 그러한 범주에 속합니다.
제가 그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사람들이 산출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복음 전도 운동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인간이 산출할 수 없고 또한 산출했던 적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여러 번 그러한 부흥을 시도했습니다. 또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원할 때마다 부흥할 수 있다고 가르친 찰스 피니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온 교회를 어지럽혀 놓았습니다. 해답은 영구히 “아니다”입니다. 이것은 제 견해가 아니라 사실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산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을 알고 또한 그들이 한 일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피니의 모든 방식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피니가 가르친 대로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고백시키려고 애를 써보았습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한 마음을 가지게 하려고 애써 보았습니다. 피니가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해보면서 그 열매로 부흥이 나타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정말 지탱하기 힘든 큰 압력을 넣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흥이란 정의상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입니다. 또한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부흥은 이처럼 독립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십니다. “이 돌들을 세우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일은 주님의 능하신 손으로 행하신 것이라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사람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려 온 모든 상세한 사례들은 이것과 부합되고, 이것을 예증해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흥을 산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부흥을 설명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정의 형태로 제시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이 주권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은 부흥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부흥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부흥이 이적에 속한 일임을 압니다. 만일 이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이적은 더 이상 이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은 진리이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할 때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책의 저자는 구약의 이적들이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것을 증거하려 합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유의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점을 보여 주기 위해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 물이 나왔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러한 일을 가지고 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우리는 지금 매우 행복한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로 이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무슨 근거에서 믿는다는 것입니까?
2차 대전 기간 중에 어떤 하사관의 휘하에 있던 여러 병사들이, 어느 지점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하사관의 마음에 들게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사관은 “그 곡괭이 이리 줘봐”라고 말하더니, 곡괭이를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산기슭에서 바위 흙을 파내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바위를 쳤을 때 물이 솟아났음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적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처로운 일이 아닙니까?
만일 여러분이 어떠한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적이 아닙니다. 이적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주권적이며 즉각적이고 초자연적인 행위입니다. 그 이적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은 부흥에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부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흥에는 방법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방법을 사용하면 결과를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어떠한 일을 한다면 어떠한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광고주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방법을 정확히 사용하면 결과를 즉시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속기 쉽습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을 원하든지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전의 시대, 암시에 걸리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에는 어떠한 방법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부흥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많이 모인 사람들도 없고, 밴드도 없으며, 상가대도 없고, 그밖에 어떤 것도 없습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광고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흥이 일어납니다. 특별히 사용된 방법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런 방법의 차원에서는 부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부흥을 위해 사용하신 사람들을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4장에 묘사되어 있는 일들이 부흥의 때에 얼마나 자주 일어납니까? 이 문제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누구나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성전 미문에 앉아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했습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40여 세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바로 문제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식하고 학식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이적을 부인할 수 없다.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수수께끼가 있다. 무식하고 학식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일을 해냈다. - 어부들이 말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가? 그들은 배운 것이 없었고, 어떤 수련도 받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그것에 적용된 능력과 정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사용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1858년과 1859년, 1904년과 1905년에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드린바 있습니다. 1904년과 1905년의 부흥은 영국 제도에서 일어난 큰 부흥이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사람은 에반 로버츠라는 사람인데, 그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의 차원에서는 부흥을 설명할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논증을 취해야 합니다.
그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보십시오. 사도들을 생각해 봅시다. 오순절 이전에 그들은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 현격한 능력으로 충만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겁 없이 자기를 대적하는 무리들과 정면으로 대결합니다. 자기를 사형에 처할 권세를 가진 당국의 지도자들 앞에 서는 그 용기를 보십시오.
존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이전까지만 해도 목회에 완전히 실패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존 웨슬리를 보십시오. 똑같은 사람이요, 가진 재능이나 힘도 같았고, 모든 것이 다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웨슬리의 차원에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적입니다.
100년 전 북아일랜드와 웨일즈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몰간이라는 사람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평범한 목회자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럭저럭 목회 해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능력이 그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2년 동안 그는 사자처럼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에 그 능력이 물러가 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옛 데이비드 몰간으로 돌아왔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사람의 차원에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설명은 한 가지 뿐입니다. “능하신 주의 손”입니다. 그 손은 없는 것들을 취할 수 있고, 있는 것들을 흩어 버릴 수 있으며, 그것들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부흥이 일어났던 장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 그것은 큰 도시에서 일어날 때도 있지만, 한 마을이나 작은 부락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큰 도시에서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거창한 방식으로 그 일을 해내며 그것이 성공에 가장 중요한 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1857년에서 1859년 사이에 일어난 부흥을 생각해 볼 때 “신적 유머”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 때 그 부흥이 어디서 발생했습니까?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 보지도 못한 코너라는 작은 마을에서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유다의 여러 성들 가운데 가장 작은 성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가끔 능한 일들이 베들레헴이나 코너와 같은 작은 마을들,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러한 마을에서 일어납니다.
200년 전에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노샘프턴이란 작은 마을에서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하웰 해리스가 갑자기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된 것도 웨일즈의 트레베카라는 작은 마을에서였습니다. - 그곳들은 여러분이 한 번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그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 다음에 일어나는 부흥은 저나 여러분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은 마을에서 발생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내버려두시고 별로 알려지지 아니한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작은 무리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능한 일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동시에 그것은 인생을 그처럼 로맨틱하고 소망스럽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임을 다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사람들은 그 부흥을 주도할 수 없습니다. 시작도 갑작스럽고 끝나는 것도 갑작스럽습니다. 여러분은 부흥의 기간 동안 변화를 받으며, 사람들은 전적으로 무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며 성령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모든 법칙과 조건을 다 지키기만 하면 부흥을 산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진리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흥을 자기 손에 쥐고 계십니다. 부흥의 시작과 과정과 마지막을 다 주관하십니다. 부흥의 모든 것은 모두 성령과 그 권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부흥의 압도적인 성격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이 돌들이 거기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의 손이 능하심을” 말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처럼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웬일인가?”라고 말하게 됩니다. 부흥은 선풍과 같이 옵니다. 그것은 밀려오는 조수나 홍수와 같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제가 가장 서정적이고 가장 놀라운 예를 한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300여 년 전 스코틀랜드에 존 리빙스턴이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존 리빙스턴의 생애에 참으로 놀라운 날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는 매우 평범한 설교자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630년 6월이었다.....” 그는 셔츠라는 곳에서 성찬식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읽어보십시오. 바로 기기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예배는 주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회를 마친 후 주일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임에서 서로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설교를 부탁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묵상하기 위해서 들에 나갔습니다. 갑자기 그는 설교할 수 없으며, 자신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설교자로서 부적합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자기의 심령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도망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아니하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는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는 에스겔 36장을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한 시간 반 가량 설교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내 메시지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 메시지를 적용하기 시작할 때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고 그는 한 시간 동안 이 적용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졌고, 그 예배에서 500명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여, 불행히도 존 리빙스턴은 그 모임을 잘 분간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저는 500명이 예배가 끝날 때 앞으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러한 유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500명이 죄를 깨닫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땅바닥에 쓰러져 실려 나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뇌 가운데 신음하며 나갔고, 여러 날 동안 이러한 고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의 결과로 500명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 500명의 사람들은 참되고 영구적이며 확실한 회심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부흥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련한 존 리빙스턴은 이러한 유의 일이 딱 한번 또 다른 경우에 그에게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의 긴 생애 동안 이러한 날들이 두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날은 얼마나 놀라운 날이었습니까? 리빙스턴이 일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이” 리빙스턴을 통해서 리빙스턴 안에서 일하신 것입니다.
또 웨일즈의 래니돌즈라는 작은 마을에서 설교하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듣습니다. 그 사람도 한 번 설교했는데, 다음 6개월 동안 이 작은 마을 주변에 있는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했습니까? 그것은 “능하신 주님의 손”입니다. 오순절에 방언으로 말하는 일과 다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드러나는 양상은 다양합니다. 언제나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능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적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인간의 지혜로 알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실로 여러분이 그러한 기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찾아가 물어 본다면 그 사람들은 똑같은 얘기를 할 것입니다. 리빙스턴과 같이 그들은 갑자기 자신에게 임하는 권능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가졌던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능력이 임한 때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가 버린 때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휘트필드나 웨슬리나 또는 다른 여타의 사람들의 일기를 통해서 그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은 그 점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바로 이것입니다.
끝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부흥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흘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하고 급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나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한 바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설교자나, 기도회나,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주님의 손, 이 손은 능하신 손입니다.
성도들이여,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이것을 믿고 있습니까? 그 사실들을 믿고 있습니까? 이적의 가능성을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우리가 할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으며 통제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일들을 행하신다고 믿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일들을 알기를 갈망합니까? 오늘날 그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랍니까? 그러한 성령께서 찾아오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까? 제 말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한 일을 다시 행하신다면, 그 현상은 교회가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와서 주목하여 듣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현재 그들이 행하고 있지 않은 방식으로, 그들 스스로 내버려 두면 도무지 그렇게 할 엄두도 내지 못할 방식으로 행해야겠다는 중압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돌들의 의미입니다. 제가 여기서 부흥에 관심을 쏟으라고 요구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다시 그러한 일이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우리가 어떤 체험을 하거나 흥분하기 위해서보다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알려지고 그의 위대한 이름이 영화롭게 되며, 사람들 가운데서 높아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2727/pag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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