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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1:1-2)

by 복음과삶 2010. 4. 10.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의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 하였도다”(사1:1-2).

 

(왜 이 글이 쓰여졌는가? 왜 설교했는가?)

그 때의 백성들이 고통 중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답입니다. 이 백성들에게 모든 일이 잘못되었고 더 나쁜 일들이 닥쳐 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이 설교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사야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과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설명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이사야서가 66장이나 되는 긴 책이지만 책 전반에서 단 하나의 큰 사상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 제1장에서 이사야는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도입부에서 그의 모든 사상을 쉽게 알 수 있는 윤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곤경의 원인과 백성들이 그 곤경을 해결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방법이 틀렸음을 보여 주며 구원의 참되고 유일한 길을 선포합니다.

 

곤경에 처해있는 이스라엘은 언제나 두 종류의 선지자가 설교하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선포의 내용을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선지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선지자도 있었는데, 참 선지자들은 그들은 언제나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늘 있었으며 언제나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선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가능한 모든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선지자들은 계속 외쳤으며 소수로, 때로는 완전히 혼자 남기도 했습니다. 자기들을 반대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의 오래 기간 동안 계속되어 왔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펴볼 구절들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이 질문은 정당합니다. 그리고 물로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내용이 이 이사야 1장이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의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를 아무리 되풀이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논의의 핵심은 우리가 설교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인간의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약성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는 이스라엘 자손은 일종의 견본이 되는 나라, 견본이 되는 민족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모든 나라들 가운데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살피시고 선지자들은 이 특별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이를 기록합니다. 이사야는 유다 나라를 향해, 그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 자손에게 해당되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해당됩니다. 이스라엘이 일종의 견본 같은 민족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뜻에서입니다.

 

(성경은 1세기말에 완성되었고 우리는 21세기에 있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며 사람이 처음 타락한 이후로 결코 변함이 없이 지속되어 온 책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 어느 한 부분을 읽어보면 단순히 고대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느 한 시점에서 이사야에게 설교들 들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현대의 인류와 똑같은 형편에 있음과 그 나라에 해당되던 것은 지금 모든 개개인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늘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지식의 진보나 역사상의 모든 변화, 인류의 긴 역사 내에서 일어난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1. 우리가 그의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이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성경을 왜 읽어야 합니까? 설교는 무엇 때문에 들어야 합니까?” 기독교의 가르침은 현대 사회에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의미가 있다거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많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사야는 무슨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무슨 권리로 자기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그 내용을 기록했습니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전혀 이사야 선지자의 입장이 아닙니다.

 

① 이사야 자신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말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이론을 시화시키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끌어다 붙이는 사람도 아니며 오랜 묵상과 연구 끝에 나온 한 가지 길을 고집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태도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된 선지자 중 어떤 사람도 그런 태도로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 異象, vision)

‘이상‘이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말은 실제로 예언, ’예언적인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책을 ‘이상’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은 연구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그의 책은 ‘이상’입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이상’. 그 사람은 ‘나는 선지자다’라고 말합니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혼동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이사야는 2절에서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특별한 지혜나 통찰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단지 대변인일 뿐입니다.” 세례요한도 이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같은 말을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마3:3; 사40:3). 이사야는 단지 매개체이며 통로입니다. 즉 그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이상(異象)을 잊지 맙시다. 이 세상은 자기 중심적이며 물질적으로 변해갑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존재하며 우리 각자는 결국 그곳에 들어갈 것이며 그 세계가 진짜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해하게 하시며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계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결코 자신들이 뭔가를 알아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자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대하는 이론들과 혼돈의 안개와 구름을 꿰뚫어 보게 하셨습니다. 명석한 판단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대게 그런 방식으로 인도하시고 일종의 하나님의 영감을 주십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있으며 통찰력과 지식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때에 말씀이 주어지지만 어떤 때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스스로 준비하고 있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세부적인 면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모든 것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이사야가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똑같이 말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② 하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통일성과 지속성)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다른 강력한 주장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말한 그대로 글을 썼지만, 다른 때는 때때로 설교한 때와 그 설교가 기록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지났을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와 기록은 다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선지자들은 아주 특이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이었으며 궁중에 출입하는 사람이었고 왕의 친구였습니다. 유대전통에 의하면 그는 귀족출신이었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다른 이 두 사람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모스는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똑같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모두는 같은 근원에서 그 설교의 내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의존하지 않으시지만 이처럼 다른 도구를 사용하셔서 그 도구들이 같은 내용을 쓰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실제적인 가르침이 있다고 제가 강조해 온 이유입니다. 그 가르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사람의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답이 있으며 그 답은 여기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 안에 있습니다. 문제가 다르고 , 양식도 다르고, 관점도 다르고, 어느 한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도 이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차이도 되지 않습니다. 쭉 이어져 오는 큰 흐름, 하나의 가르침, 유일한 가르침이 성경의 모든 책에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믿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써 우리가 제시하는 마지막 근거는 물론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이 갖는 지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당대의 교훈만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 모든 곳에서 인류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③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들어야 합니다.

제가 이사야의 말을 믿는 것은 저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 희망이란 바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듣는 대로 하나님께서 잠시도 거들떠 볼 가치도 없는 미천한 도구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

① 온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상태는 아주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습, 이 순간 우리 각각의 모습은 아주 괴상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사야가 이를 설명하는 방식을 들어보십시오.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그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서 사람들을 보게 합니다.

“너희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니?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고 놀라지 않니? 너희 별들아, 너희는 만들어진 목적대로 움직이고 있구나. 자연의 법칙을 잘 따르고 있구나. 너희에게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이며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구나. 만들어진 목적대로 움직이고 있구나. 자연과 창조의 법칙을 잘 따르고 있구나. 아름답도다! 그러나 인간들을 보라. 그렇지를 못하구나.” 하늘과 땅은 인간에 대해 나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계절과 자연은 규칙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순 덩어리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하늘에도 땅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움직이도록 계획된 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말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고 길렀으나 그들이 나를 배반하였도다.” 사람들만 비정상적입니다. 인간들의 지금의 상태는 풍경화 위에 묻은 한 점 얼룩입니다. 피조 세계와 모순됩니다. 아주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해야 할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지금처럼 되라고 만들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절대로 이렇게 되라고 만든 것이 아니야. 놀라운 현상이야. 하늘아. 땅아. 이 모습을 봐.” 생명 없는 자연이 사람을 보고 놀라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주인이며 그 세계의 최고의 특징이 되도록 계획되었습니다만, 이제는 그 창조 세계 안에서 괴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첫 번째 주장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세상의 모든 것은 잘못되어 있으며 인류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상상할 수 있는 데까지, 할 수 있는 데까지 멀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오직 이 책, 성경만이 줄 수 있는 오늘날의 세계를 향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② 사람들은 오직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전적으로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고 길렀거늘 그들이 나를 배반하였도다” 이것이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들이 혼란에 빠지게 된 이유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일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신문(新聞)이 당신 자신이 가진 곤경의 원인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줍니까? 물론 아닙니다. 심리학자나 철학자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죄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 그 사람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 사람이 ‘죄의 주체라기 보다는 죄의 대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곤경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 탓이라고, 우리가 어리석어서, 우리가 스스로 한 일들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에 살게 되었다고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사람들의 곤경은 환경 탓이 아닙니다. 인류와 각 개인은 단지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닙니다. 저주받은 운명 탓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창조되었으며 그들의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그들 스스로 의도적으로 한 일 때문에, 즉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부하고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지금처럼 되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③ 인류의 곤경의 본질은 죄라고 말합니다.

1:1저에서 죄에 대한 훌륭한 분석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보다 회개를 앞에 둡니다. 우리는 올라가기 전에 내려가야만 합니다. 바로 되기 전에 잘못되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는 죄라는 것을 우리가 범한 여러 가지 죄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아무 나쁜 일을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 됩니다. 죄란 근본적으로 지금 이 선지자가 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즉 죄는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며 반항입니다. 즉,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셨는데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사람을 만드시되 자신을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만들어졌으며 하나님께 복을 받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곤경 중에 있으며 세상이 곤경 중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완전한 피조물들이 일부러 하나님께 대해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고 길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여기에 인간의 모든 병폐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하늘과 땅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법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모순과 혼란이 있게 됩니다. 비참함과 고통, 무정부와 혼돈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언제나 그런 일이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리스도 탄생 800년 전에 이사야가 말하는 바는 그가 처음 말했을 때 사실이었듯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자인데 여러분의 어리석음을 인정할 때까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생명과 여러분의 모든 것을, 여러분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분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으신 그분께 내어놓을 때까지 여러분은 평화를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다”고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말했습니다(삼상15:23).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술취함이나 부도덕보다 더 나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여러분 자신의 삶을 살고 여러분 자신의 사고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분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옥 외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이사야에게 주셨을까요? 왜 이사야는 이 이상을 보게 되었을까요? 그는 무엇 때문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했을까요? 단순히 저주하시기 위함일까요? 아니요.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선지자들을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원하고 계시며 그들의 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되돌아오라고 부르시며 회개하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선지자를 세우기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상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3:16)습니다. 그분은 단지 사람을 세우셔서 그분의 뜻을 전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고 당신의 아들을 하늘에서 보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1:14).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을 떠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것들이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일을 보여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십시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2729/pag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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