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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유일한 설명 (창3:8-9)

by 복음과삶 2010. 4. 20.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9)

 

우리는 지금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章)중 하나인 창세기3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장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교리가 성경 전체의 중심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로 구원에 관한 교과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히 이 3장은 그와 같은 성경전체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세기 3장에 나와 있는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오늘날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3장은 인간과 이 세상이 이렇게 잘못된 이유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이 땅으로 꼭 내려오셔야만 했던 절대적인 이유에 대해 말해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3장입니다.

 

이것은 현재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주 논의되어지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왜 이 모든 것이 지금처럼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우리는 어쩌다 이런 자리에까지 오게 된 걸까요? 왜 현재와 같은 이런 궁지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현시대가 안고 있는 질문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책이나 잡지나 모든 글들이 다 이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사람들이 계속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입니다. 우리가 인생과 우리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할 문제입니다. 이제 창세기 3장, 특히 인간에게 던져진 첫 번째 질문-"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을 공부해가면서 이 질문 전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질문은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무슨 재미있는 토론이나 하자고, 여러분 말처럼 혼자 장광설이나 늘어놓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문제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토론하자고 모인 게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한가한 일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난번에 스무살 난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갑자기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우리도 다 그와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상태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흥미 있는 일이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은 우리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에 불과하며, 이 세상이 이런 상태가 된 것은 바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개개인의 상태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세상"이라 불리는 어떤 것으로 분리해 놓고는, 이 세상은 곧 우리 자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그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주제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이 책 속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는 대로의 견해요, 또 다른 하나는 그 외의 다른 모든 견해들을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다른 모든 견해들은 진화 과정에 대한 일반적 신념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긍정적인 설명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과 이 사회가 이렇게 된 데에 대한 성경적 해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세상이 진화되어 왔다는 설 -즉 인간은 원시 형태의 생명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설, 인간은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 발달하는 과정 속에 있으며 모든 세대마다 자신이 이전보다 좀더 진화되었음을 발견하게 될거라는 설-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고등동물인 것처럼, 어느 세대 사람이나 그 이전 세대 사람보다 더 낫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인간은 이런 진화 과정을 통해 결국에 가서는 완전한 존재가 될거라고 믿습니다.

 

비록 이렇게 지나가는 말로 급히 말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아직도 현재의 입장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감안해 볼 때, 오늘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진보되었으며 인간도 더 나아졌다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인간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보다 완전한 모범적 인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 을씨년스러운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비극적인 사실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런 개념과 이론들에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이론들에 매달려 있을 것이 아니라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상세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점과 본질적인 상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쇠는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대답해 주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항상 악의 기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이에 대해 우리가 줄 수 있는 답변은 우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이 뱀은 누구냐? 그는 어떻게 해서 그런 존재가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창조 이전에 일종의 우주적인 타락 같은 것이 있었다고 대답하겠지요. 좋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우주적인 타락이 가능했느냐는 질문이 여전히 남게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도 모른다는 것이 우리의 답변입니다. 우리는 한가지 사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악의 기원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아주 특이한 설명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진지하게 고려해 볼 가치가 있을 만큼 그렇게 사실들과 꼭 들어맞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낙원이라는 곳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두셨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살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아주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그런데 이 3장에는 또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타락 이전의 이런 인생에 대해 말해 준 다음, 하나님을 피하려 애쓰며 자기들을 따라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도망쳐 자신들의 비참함과 불행 속에 숨으려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 땅에 임한 저주-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이 더하여 진통을 겪고 자식을 낳을 것이고 남자는 수고하여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시와 엉겅퀴와 질병과 사망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말해 줍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생의 모습이, 그 다음에는 타락한 후 변화된 인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함께 고려하고있는 그 입장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과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경이 이 두 가지 모습만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전자가 후자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소위 죄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성경은 인간이 어떤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고 말해줍니다. 여러분과 제가 유산을 받아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도 바로 그 때문이요, 이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철학은 다음 두 가지 표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문제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성경에 관한 한 이것은 아주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외의 다른 모든 견해들은 이와 정반대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기회만 주면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환경에 대해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여건만 만들어지면, 인류는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즉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제는 그의 환경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맨 처음부터 이런 이론과 개념들이 실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은 완전한 환경 속에서 출발했습니다. 인간은 그가 소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으며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낙원이 광야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 그처럼 완전한 낙원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이와 똑같은 주제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 메시지를 보여 주는 성경의 방법이 거의 아이러니컬하게 보여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아주 경건한 아버지를 둔 아들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뿐 아니라 자기들이 소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으면서도 이 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가장 못된 사람이 되어버린, 그런 아들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그가 처한 여건이나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3장이 선포하고 있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제가 굳이 이것은 현대 세상에서 절대 직면할 수 없는 큰 일이라고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만일 세상이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변화를 위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첫걸음을 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하고 자명하게 봅니다.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명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모두 다 죄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가 발생한 첫 번째 비극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이세상의 비극은 인간이 이와 똑같은 실수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러나 이런 계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태초에 범한 그 실수를 여전히 계속 범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이 메시지를 듣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 괴로운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런 식으로 봅시다. 여러분은 에덴 동산에서 무언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몹시 부끄러워하는 두 남녀. 비참하고 불행한 남녀를 봅니다. 그들은 시원한 저녁 바람을 쐬며 동산을 거닐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소리를 듣고 겁이 나서 숨어버립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전하는 전체 메시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여기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담이 그렇게 불행해진 이유가 무엇이지 알아낼 수 있다면. 인간이 오늘과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된 이유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들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생각입니다. 여기 하나님에 의해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어 완전한 주변 환경과 여건 속에 놓이게 된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계속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왜 나무 뒤에 숨게 되었으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역병과 질병과 사망을 체험하게 되었을까요? 뭐가 잘못된 걸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에 두신 다음에 "자, 너는 이제 내가 일러 준대로 살아라. 내가 네게 엄청난 자유를 주마,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은 금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행복해질 것이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되고, 영광스러운 창조계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고, 어려움이나 사망에 절대 직면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서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인간을 제한하고 계신 것이요, 부당하게 대하고 계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인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불신하고 그 법을 경멸하며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지식과 정보를 얻을 뿐 아니라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나은 삶의 길이 있다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거짓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바로 그 한가지 사실- 즉 하나님이 살라고 명하신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대신 자기들의 생각을 앞세운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무법성- 때문에 모두 비참함과 가련함과 사망과 세상의 모든 문제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너무나 간단해서 거의 유치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분명한 사실이 아닌지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회문제, 경제문제, 정치문제를 논하기 위해 개인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얼마나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온 세상은 이 세상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좀더 진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소란들을 떨며 대화니 회의니 토론이니 하며 모이지만 막상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점 한가지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기는 이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명하신 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저는 여기서  이 문제를 국가적 또는 국제적 상황과 관련지어서 토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보다 개인적인 의미에서 아주 진지하게 토론하고 싶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급히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무엇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모든 일이 다 잘되어가고 있습니까? 어떤 수치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아픔이 없다고 말할 수 잇습니까? 혹시 더 나은 것을 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안에는 다른 종류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수치심-쇠사슬에 묶여 속박되어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과 영광스러운 삶 사이에 무언가 놓여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좀 더 넓고 크며 거룩한 분위기를 원하는 내적인 울부짖음 같은 것-을 체험하게 되어있다는 묘한 느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아담이 오래 전에 범한 이 오류를 우리도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책에 비추어 인생을 직면하는 대신 인간의 생각들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문제는 환경 탓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철학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십계명 속에, 도덕법 속에서, 산상수훈에서, 사복음서와 신약서신들에 나온 모든 가르침 속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온 세대와 온 세기를 통해 교회가 가르친 가르침,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라는 그 부르심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지금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질병과 고통이 발생하게 된 최초의 원인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보다 낫다는 생각, 즉 우리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치명적인 생각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사실 아무리 생각 없는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모두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이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의 인생 철학을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계시해주신 그 기초 위에 내 인생을 탄탄하고 철저하게 확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담이 부끄러워하며 하나님을 피해 나무 뒤로 숨어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이런 자기 성찰을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계속적으로 고통 당하는 두 번째 이유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심판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직면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본문에 나온 이야기 속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동산에서 살아라. 너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금한 그 한가지를 행하는 날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로서 그렇게 하실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인간을 법 아래 두셨고 그에게 그 법을 어기면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인간에게는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말씀드린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 중 일부를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를 법 아래 두셨고 그에게 책임을 물으셨으며 심판이 있을 거라고 공표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그렇게 비참한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을까요? 그 대답은 뻔합니다!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다가와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너 설마 그 모든 사실을 진짜로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 말만 들어, 그럼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테니까. 어떤 결과가 오든 전혀 두려워할 필요 없어. 하나님이 너를 겁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 뿐이니까. 내가 말하는 대로 해봐. 그러면 너는 더없이 행복해질 뿐만 아니라 놀라운 지식과 총명도 갖게 돼. 하나님처럼 될 거야." 인간은 사탄의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심판이 임했고 그후 지금까지 인류는 그 심판의 결과를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십시오.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경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조롱하며 심판이 있을 거라는 말을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아는 100년이 넘도록 설교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결국 심판이 임해 홍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좀더 가봅시다. 그러면 롯이 그 당시 사람에게 간절히 부탁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그 말을 조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심판이 선포되고 결국에 가서는 심판이 임하고 맙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다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종들을 통해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법을 어기는 자(한글개역 성경에는 '궤사한 자'로 되어있음)의 길은 험하니라"(잠13:15)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하셨느니라"(사57:21)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으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결국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약으로 가 봅시다.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심판이 가까웠느니라"고 힘써 전파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도 그와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3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경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그의 종들을 보낼 때 사람들이 그 종을 얼마나 푸대접했습니까?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보내리라. 내가 저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저들이 내 아들을 공경하리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내 아들 말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그들을 멸할 것이다." (막12:1-9참조)이 아들 되신 주님이 정말 그들에게 와서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범했던 잘못과 똑같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결국 A.D.70년에 로마 군인들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도처로 내어쫒겨 지금까지 그 상태로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도 신약에 나오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으십시오. 심판이 진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늦기 전에 그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그러나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모든 것이 여기 창세기 3장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창세기 3장은 여러분을 위해 성경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개인적인 말로 하자면 아마 이런 뜻이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비록 그 능력과 위엄이 전능하시고 절대적이며 무한하시고 끝이 없으시지만, 우리 개개인을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으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다는 것,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편재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다 알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처럼 이 하나님의 말씀은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히4:12) 우리는 이런 분과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 앞에 훤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이런 말을 믿지 않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런 설교를 여러 해 전에 하셨어야만 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걸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 제가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이 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생애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 음성은 바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혼을 주시고 우리 안에 이 놀라운 성향들을 집어넣어 주신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네게 준 인생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내가 네 안에 둔 영혼은 어떻게 되었느냐? 아담아, 나는 네게 이 위대한 가능성들을 주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너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아담이 나무 뒤로 숨었다가 에덴 동산 밖으로 쫓겨나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만나는 등, 비참함과 불행 가운데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가 이 심판 교리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것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심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두 번이나 일어난 이 세계대전을 심판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모든 지혜와 우리가 이루어 낸 그 모든 문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왜 이 모양입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비참하게 실패하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네가 나를 떠나 사는 동안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 그렇게 오래 전에 이미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온 세기를 통해 그토록 자주 확인된 사실을 믿지 않겠다고 거절하다니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입니까!

 

여러분도 아다시피, 궁극적인 비극은 인간이 그 고통과  비참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기 생각이 낫다고 생각하고 심판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자-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 그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모든 비극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인간은 타락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은 무가치한 존재라는 의식이 마음속에 가득 찼을 때, 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친구로 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가서 다만 "하나님,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기만 했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죄를 짓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자 본능적으로 더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꼭 필요로 할 때 자신이 지극히 창피하고 비참할 때, 자신을 정말로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인 하나님을 피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비극입니다.

 

그럼 누가 이런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여간 큰 영광이 아닙니다. 인간은 비록 삼중으로 어리석은 짓을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를 좇아오시고 부르시어 정죄 하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말씀하시고 은혜로운 약속까지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란 인간이 비록 이렇게 잘못을 범하여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파멸시켰지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과 싸우시기 위해 이 세상으로 들어오시어 정복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이 선포된 것입니다. -뱀의 머리가 상할 거라는 약속이 선포되었습니다! 온유하신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의와 온전함으로 옷입혀 주시고 그들을 다시 받아 주실 날이 올거라는 사실도 암시해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궁극적인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심판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생각지 않으려는 어리석음, 이것이 궁극적인 비극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불행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려져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쾌락 속에서 행복을 맛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이 지금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런 비극적인 어리석음을 범한 사람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에 있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바 여러분의 고통은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자기 몸에 지시고 갈보리 언덕에서 그것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그분의 말을 듣고, 그분의 메시지를 믿으며, 그분에게 여러분 인생을 굴복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 아담이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축복들을 유업으로 받게 될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오 하나님, 저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저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볼 수 있게 해주소서. 그리고 저희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사망과 심판을 향하고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명철을 주시옵소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져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으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명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3185/page/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