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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부활의 의미 (로마서 10:9)

by 복음과삶 2010. 6.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9)

 

교회의 달력에 명시되어 있는 이러한 특별한 절기들은 설교보다도 오히려 위대한 사실들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죄의 영향으로 인해 믿음의 핵심들을 망각하기 일쑤입니다. 교회 역사는 우리가 한 때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렀던 위치를 떠나서 그보다 더 친하고 더 불안정한 곳으로 전락하기가 얼마나 쉽고 간단한 일인지를 잘 말해 줍니다. 실제로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 종국에 가서는 전혀 진리가 아닌 것을 신봉하게까지 될만한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쓴 것처럼,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이 믿음의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교회의 달력에 명시되어 있는 이러한 특별한 날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만약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렇게 실행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부활을 어두운 상황을 갑자기 호전시켜 주는 것으로 또는 죽음 뒤에는 반드시 생명이 뒤따른다는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소모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그런 식으로 격려하면서 스스로 낙천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들의 신앙상태에 대해 점검해 볼 수 없을 것이며, 기독교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항상 우리를 대적하는 위험들 중의 하나입니다. 즉, 이 놀라운 신앙을 그저 낙천적 사상들의 집합들로, 또는 다른 수많은 일반적인 사상들에서도 동일하게 제공받을 수 있는 일종의 훌륭한 격려 정도로 전락시키는 위험입니다.

 

철학 그 이상의 것

 

우리의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확실한 요소들에 대한 인식과 그 엄청난 중요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세대에 맞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기해야 될 요소 중의 하나는 기독교가 삶에 관한 사고 체계인 철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이며 그것도 확실한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세상에는 삶을 조명하는 관점, 즉 하나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 종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자들의 첫 번째 강론을 읽으시면, 그들이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 애쓴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을 전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은 대변자였습니다. 바울은 회화적인 문구를 사용하여 자신을 사람들에게 어떤 사실들을 광고하는 광고장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실을 게시판에 공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게시판에 게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첫 번째로 마음에 새겨야 할 사실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보다도 우선 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명백하고도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그의 구원 문제에 결부된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경각 시키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절). 부활은 우리가 대충 건성으로 연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우리를 종국적으로 판단할 중요한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부활을 믿고 안 믿는 여부에 따라 사람의 영원한 미래 전체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줍니다. 부활 문제를 이와 같이 심각하게, 상고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하며 우리의 현 위치를 살펴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내 삶의 영역에서 부활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나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부활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부활은 정말로 내 존재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나의 생활은 부활의 지배를 받습니까? 특별한 날들이 되면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바울 사도에 따르면, 신약 성경에 포함된 모든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부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바울의 시금석은 "그가 부활을 어떻게 믿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시금석에 관한 질문이 들어오면 우리 중의 몇 사람이나 올바르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리 중의 몇몇은 아마 이렇게 얘기할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과 기적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그 사실이 핵심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믿는바만을 입으로 시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부활에의 신앙을 믿음의 시금석으로 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편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다른 것들로서는 충분하지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의 교훈과 기적들은 모두가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습니까?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을 읽으시면서 사도들이 강론 시에 초두에서 강조하는 점이 바로 부활의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순절에 행한 베드로의 강론과 비시디아에서 행한 바울의 강론에서 이 메시지가 강조되어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행 13:30-34)

 

그들이 부활의 사실을 최종적인 시금석으로 내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이 사실, 오직 이 사실만이 밝히 밝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해 주는 것이 바로 이 부활입니다.

 

제자들이 종국적으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부활의 사실 때문이었노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으나, 시간이 지나가자 그 고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만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된 것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을 본 때였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을 때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도마뿐만이 아닌 제자들 전부였습니다.

 

바울만 해도 그는 불신자였을 뿐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온 후로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가 사도라고 불리울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면 그분을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기 어려우시다면 우선 주님의 인격을 바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만 된다면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을 알지 못하고는 그분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부활의 사실보다도 더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것은 달리 없습니다.

 

예언의 성취

 

구약 성경에도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부터 일어나시리라는 예언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편 16편과 110편에는 부활에 관련된 예언들이 있습니다. 동일한 예언이 이사야 53장에도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 오실 것과,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에 대한 예시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이 썩지 않음을 경험할 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또한 우리 주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예언하신 바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흉악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고난받으실 것과 또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언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언하셨고, 그리고 그는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당신의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의 중요성은 나사로의 부활이나, 야이로의 딸의 부활, 또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부활과는 전혀 다른 데에 있습니다. 후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생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생명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곧 이어서 다시 죽고 말았습니다. 일시적인 삶으로 돌아온 소생일 뿐이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돌아와서 다시는 죽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밖에는 없습니다.

 

이 죽음과 삶의 연결에는 또 다른 엄청난 중요성이 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분명히 영화롭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몸은 못자국이 나 있었으며 창에 찔린 흔적이 옆구리에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다른 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문이 폐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무덤에서 나오셨는데, 처음에는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몸은 이미 영화의 과정에 돌입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로부터 저는 하나의 추론을 이끌어 내려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은 부활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서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다. 죽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의 죽음은 사람에 의해서 초래된 그 무엇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시려고만 했다면 죽음을 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악한 의도를 분쇄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을 때에, 저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교리에 눈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었다네

죄의 삯을 치를 수가.

주님 홀로 문을 여셨다네

천국으로 들게 하셨다네.

 

 주님만이 홀로 완전하시고 흠이 없는 제물이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고후 5:21)입니다.

 

확신에 이르는 유일한 길

 

더욱이, 우리는 부활의 빛에 비추어서만 그리스도 죽음의 충족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과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을까? 그 해답은 부활의 사실 안에서만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제가 만약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저는 여전히 저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제가 믿기 때문에 저는 바울처럼 "누가 정죄 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롬 8:34)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판결해 주며 인식시켜 주는 것도 바로 이 부활의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구원에의 필요성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곧이어 부활의 사실로 넘어갈 것입니다. 죄 문제가 다뤄지는 곳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도 오직 십자가만을 통해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활을 첫 번째 위치에 놓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부활의 시금석인가를 살폈습니다. 부활의 사실만큼 분명히 드러나는 것도 없습니다. 혹자는 부활이 역사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증명된 사실이며, 여기에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의 증거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지 그 역사적 시각으로만 만족하면 위험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부활을 믿으며, 역사학적이 아닌 신학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활을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생활을 주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사람들 앞에서 부활을 증거하는 것을 지고의 특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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