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 26:17-18)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부흥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지금 해야 할 급선무는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메운 잡동사니와 흙을 제거하고, 물의 근원을 막아 버린 것을 없애는 것임을 생각해 왔습니다.
부흥에 이르는 길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기도를 강조하기 원하고, 강하게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요점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선결조건들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말을 뱉어 내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접근하려면 어떤 방식, 그리고 어떠한 조건들을 통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조건들을 지키지 못하면 기도하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한다 해도 그 일은 별로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진리에 대해서만 부어질 수 있고, 하나님 자신의 진리만을 높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거짓말을 높일 수 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진리를 부정하는 것을 높일 수 없습니다. 부흥을 맞을 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그 성령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진리를 주신 분이 그분이고 정확 무오한 방식으로 성경이 쓰여지도록 안전하게 지키신 분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성령의 복락을 원한다면, 우리의 입장이 진리와 맞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 성령께서 제시한 조건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성령의 축복을 간구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쳐 넣은 그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나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면서 기도 모임을 조직하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입니다. 성경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제거해야 하는 첫 번째 사항은 믿음의 결정적인 교리들의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제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한 첫 번째 소행은 어떤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교리들을 부인하거나 의심하거나 무시하거나 태만히 여긴 것입니다. 저는 다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많은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진수가 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순전히 진수가 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정교하게 문제를 다루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은 근본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일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리들 중 얼마를 숙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주권성의 교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성경의 권위와 죄 가운데 빠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에 대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가장 본질적인 교리로 인도해 줍니다. 물론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위격)입니다. 그분은 중심이요, 중추적인 존재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분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심을 발견합니다. 구약성경에도 계십니다. 구약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 그가 오실 약속, 그가 오셔서 행하실 일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구약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은 다름 아닌 그분을 밝히고 묘사하는 책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이 복되신 분에 대해서만 쓰여 져 있습니다. 그분이 중심에 있습니다. 성경을 완전히 분석해 보면 성경은 그분에 대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시고 구속하시며 이 위대한 구원을 제공하시는 것은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성령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인식합니다. 또 교회가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도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성령이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요16: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6:14).
그러므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입니다. 역사적인 증거와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부흥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틀림없이 교회 생활의 중심은 그때마다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200년 전에 쓰여 져 상당한 인기를 모았던 위대한 찬송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찰스 웨슬리, 필립 도드리지, 아이작 왓츠, 윌리엄 윌리엄스,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쓴 찬송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찬송가들의 위대한 주제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8세기의 부흥과 각성의 특징을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라는 찬송 가사처럼 잘 표현한 것은 없습니다. 이신론과 철학적인 설교가 판을 치던 17세기 말엽과 18세기 초엽에 바로 이 뜨겁고 열정적이며 중차대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가 행해졌고, 사람들이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찬송가들은 그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난 다른 기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100년 전 부흥이 임했던 모든 나라가 즐겨 불렀던 찬송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간 것들입니다. 오늘날도 부흥의 체험을 하는 곳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에 비추어 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추적이고 중심적이며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거나, 우리의 묵상과 삶과 생각과 기도가 그분을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부흥을 기대할 아무런 자격이 없음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어떠합니까? 많은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심지어 교인들과 신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어 보아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장시간 떠들어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지적하는 것이 결코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회자인 제 경험으로 볼 때 너무나 익숙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제게 와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문제를 이렇게 가늠해 봅시다. 오늘 저녁 당신이 죽어야 한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면전에 섰을 때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아 예, 저는 언제나 선한 삶을 살려고 애써 왔지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죄를 피하려고도 애를 썼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그래요? 아주 훌륭하군요, 그러나 그런데도 당신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 아 그렇지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의 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아, 저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 만일 내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해 달라고 고하면 그분은 나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지요”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을 몰아세우며, 질문과 반대 심문을 계속 해나갑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똑같은 유의 대답을 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요점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용서를 믿습니다. 또 그 필요성도 압니다. 또 그것을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성찬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지 못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그의 죽으심과 흘리신 피를 뜻함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소위 그리스도가 전혀 없는 기독교가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아무 소용없어 보입니다. 또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진수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지워 버린다 해도 이 사람들은 똑같은 입장에 설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도의 수준에서 대부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사실 구약의 성도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했지만,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경우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블레셋 사람들이 한일이 이것이었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는 것, 어떻게 해서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몰아내고 다른 위치에 서게 하는 것이 블레셋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블레셋사람들은 특히 20세기 동안 얼마나 바쁘게 활동했는지요.
내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이요 영원성입니다. 사도바울이 골로새서 1장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한 것을 읽어보십시오.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습니다. 그로 인해 만물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는 영원하시며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이점에 대해서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신성과 영원성과 하나님과의 동등성, 성육신, 한 위격 속에 두 본성(인성과 신성)을 가졌다는 복된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과 다투는 데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부흥의 시기를 되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이 점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했던, 바로 그들의 생명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절대적인 진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의 동정녀 탄생이나, 이적들이나, 문자 그대로 부활했다는 것 등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에 대해서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4,17).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문자 그대로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의 지속성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그리스도는 비록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을 단순하게 논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은 부인하면서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소위 그렇게 전하는 설교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한 부흥을 위해 기도할 자격도 없고, 그것을 기대할 권리도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이는 성령은 부활의 한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점을 어떻게 지적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성령은 이 일들에 대한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가르침과 육체적인 부활의 증인이요, 승천의 증인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증거 하시는 일, 또 성령께서 영화롭게 하시는 바로 그분을 부인하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능력으로 임해 주시기를 어떻게 간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합시다”라고 말해도 이런 일에 명확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블레셋 사람들이 처넣은 그 잡동사니를 제거하기 전에는 우물에 있는 물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부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교회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중심 위치를 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흥은 그리스도께 뜨거운 헌신과 개인적인 헌신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찬송을 하게 하고 찬미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생활의 중심으로 삼게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이 소행을 제거할 필요성을 여러분은 모르시겠습니까?
소위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며, 심지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지 않는 기독교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저는 특히 그리스도의 속죄, 십자가에서의 죽음,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그 일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다시 여러분 스스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순전한 사실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엄청나게 강조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부흥의 시기에 가장 많이 불려 졌던 찬송가들은 보혈에 대한 찬송가였습니다. 저는 그 찬송가들을 여러 언어로 인용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없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1장에서 우리를 위해 그것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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