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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결함 있는 정통 (창 26:17-18)

by 복음과삶 2010. 7. 19.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 26:17-18)

 

우리가 이 대목으로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아비가 팠던 우물에 처넣었던 잡동사니들을 이삭이 제거할 필요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때, 오늘날 교회와 온 세상이 처하게 된 상태의 주된 이유는 지난 100년 동안 점점 더 교회의 특징이 되어 온 무서운 배도에 있음을 주저 없이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잡동사니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중차대한 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교리를 무시하거나 오해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바로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위대한 교리를 다뤄왔습니다. 이제는 다른 교리들, 특히 두 가지 교리를 더 지적하려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인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크게 부각되지 않은 채 부흥이 일어났던 적은 없습니다. 이 교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선함, 우리 자신의 선행, 도덕성, 우리의 모든 행위에 대한 모든 생각을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절망감을 느꼈던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선은 더러운 옷과 같고, 자신들의 모든 의는 전혀 쓸모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갈망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절망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신앙생활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참석에 열심이었다든지, 다른 많은 일을 했던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은 하나님도 선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들의 신앙도 아무 가치가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시기마다 돌출 되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물론 이것이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붙잡으면 사람들은 언제나 즉각 구원받을 가능성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것이 모든 부흥을 특징짓는 사실이었습니다. 골드 스미스의 말을 빌리면 “조롱거리였던 사람이 기도하게 됩니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나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아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견지하지 못하면, 그러한 즉각적인 역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고, 그러한 즉각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는 아직도 행위를 의뢰하고, 구원 문제가 우리가 행한 것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마치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위대한 교리에 대해서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삶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던 것도 그것이었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도, 휘트필드와 웨슬리 형제, 웨일즈의 로랜드와 해리스, 하나님께 그처럼 놀랍게 사용된  모든 사람들이 18세기에 재발견한 위대한 교리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8세기에 일어났던 성령이 물 붓듯 부어진 역사는 사실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중차대한 교리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교리는 중생의 교리입니다. 특히 이 교리는 200년 전의 위대한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리는 다시금 성령의 역사의 절대적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어느 것도 충분치 못하며, 사람이 새로운 본성을 받기까지는 어떠한 일도 의미가 없음을 깨우쳐 줍니다. 그 사람의 본성이 변화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 편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린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 점을 쉽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결심을 하게 하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음을 저는 잘 압니다. 이단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종교들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거짓된 종교들이 잘 자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통을 멀리 벗어난 새로운 종교운동이 열매들을 맺고 갈수록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에 친숙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여러분의 이웃에 널려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들이 성공하고 있고, 대단히 큰 집회를 열고 있으며, 많은 결신자들을 얻고 있습니다. 마음에 어떤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러한 일들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사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든지,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완전히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까? 중생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그 인격 깊숙한 곳에서 역사 하셔서, 새 생명의 원리를 불어넣어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새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흥의 시기나 재각성의 시기에 이 교리는 언제나 나타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한결같이 이 놀랍고 극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던 무력한 사람들, 스스로도 자신을 상실하고, 자기가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며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갑자기 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고, 새로운 유의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중생, 이것은 교회에서 일어났던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다른 말로 해서 부흥에 대한 모든 것은 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고, 역사하며, 어떠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중생의 결과와 효력에 의해서 이 점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또 주요한 교리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본질적이고 중추적인 교리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교리들에 대해서는 논박의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교리들에 대해서 사람들과 다투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리들은 순전히 본질적인 교리들입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나셔서 감동시키기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규정된 정통은 절대적으로 진수가 되며, 이러한 교리들을 부인하는 것은 오류요, 이단이요, 블레셋 사람들의 소행이요, 교회의 역사를 메마르게 하고, 무미건조한 영적 상태를 불러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오늘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요한 국면에서 정통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는 복음적이라고 주장하는 우리 각자에게 특별히 해당되는 몇 가지 사항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확연하게 구분 짓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다음 항목에서 다루는 것을 더 좋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다음 항목에서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분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므로 할 수 있는 한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다음에 다룰 항목은 결함 있는 정통입니다. 제일 먼저 살펴볼 것은 정통입니다. 우리는 주로 정통이 아닌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저는 이제 정통적인 사람들이면서도, 어떤 면에서 결함이 있는 경우들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누구나 다 정통이라고 주장한 개인들과 교회들이, 생명이 없어 보이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러한 복음적인 교회에 임재 하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러한 결함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정도를 벗어난 정통”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항목에 속하는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인격 자신과 관계를 맺기보다는 그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정통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지적하는 잘못은, 우리가 인격에 관한 교리, 참된 교리를 인격의 자리에 둘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인 사람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입니다. 정통적이면서도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교리에만, 어떤 정의를 하는 데만 머물고, 교리의 목적은 그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다만 그 인격을 알게 하고, 이해하게 하며, 그 인격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신약의 많은 곳에서 이 문제를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는 이 점을 매우 분명히 드러내 줍니다.

 

실로 오늘날 교회와 교단에서도 정통적이면서도 아주 죽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구원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이지적인 관심, 지성적으로 옳은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참된 교리 자체를 그 인격을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오인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는 설교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물론 비 교리적인 설교는 궁극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과 교리적으로 설교하는 것의 차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뜻은 순전히 이지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교리를 설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리에서부터 출발하여 교리를 강해하고 교리로 끝내 버리는, 교리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의 임무가 아닙니다. 설교의 임무는 하나님에 관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해서, 그 삼위가 각각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끊임없이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강력한 대적인 마귀를 만나 싸워야합니다. 그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고, 우리를 장악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의나 진술에만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합니다. 또는 거기에 머물러 있어, 인격을 아는 지식에는 이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부여받고 영위하는 데도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질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조하려는 다음의 요점 역시 결함 있는 정통 항목에 속하는 데, 그것은 주로 교리 자체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다룹니다. 그것은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며,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경적인 참된 관점이 부족하고,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교리를 나타내는 데도 부족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리에 대해 성경적인 부분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메마르고 쓸모 없어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 무엇보다 교리에 있어서 균형을 잃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즉 진리의 어떤 면을 너무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우리의 모든 관심을 거기에 쏟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저의 견해만이 아닙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틀림없이 이런 오류가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로마서 14장에서 사도가 다루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고기를 먹는 문제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문제를 삼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밤낮 그 문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은 그 문제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나누고 서로 정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를 보십시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여기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요점이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살아 있고,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교리에 관해서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 그러한 교활한 시험을 가져옵니다. 저는 주저 없이 예언의 문제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보인 나머지, 메마르고 쓸모 없게 된 사람들이 매우 많음을 단언합니다. 사실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저 온 시간을 예언에만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들은 만나면 하는 얘기가 “뉴스에서 이 기사를 보았느냐? 그것이 이루어졌음을 보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온통 때와 시기에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예언이 그들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린 체험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이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이라는 인상도 주지 못합니다. 아니, 그들은 때와 시기에 있어서 전문가인 양 행세합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 목적지에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같은 기차를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타임지와 성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 예측이 맞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예언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상세히 말했습니다. 타임지는 성경이 말한 것의 증거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은 온 관심이 예언에만 쏠려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예언에 쏠려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몇 세기 전에 그러한 일들을 말했음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말해 왔으며, 그러므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지금 곧 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소멸하고, 부흥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실례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세례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세례의 특정 양식을 최고의 지위로 높입니다. 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성령의 교리는 온통 방언의 문제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것이 시금석입니다. 만일 방언으로 말하지 못하면 그 사람들은 제외시켜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 질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감독 정치만이 교회의 절대적인 진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로교만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메마른 시기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무서운 시대에 ,교회 정치, 봉사의 양태, 이러한 다른 문제들에 온통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언제나 성령을 소멸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 속한 문제를 우선적이고 중심적인 위치로 높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교리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저는 촉구합니다. 여러분의 교리에 대한 관심이 성삼위의 인격들을 가립니까? 여러분은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사람들을 만날 때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한 교리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그들에게 주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을 하며 교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사람들을 이끄는 하나님의 사랑,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듯이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싶게 만드는 그 사랑이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까?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어리석고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 부흥의 역사는 사람들이 균형 감각을 잃고 어떤 한 가지에 사로 잡혀 획일화되어 버리면 성령은 언제나 소멸되며, 그 역사는 언제나 방해를 받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균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균형 있는 온전한 정신을 갖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훈련, 균형, 질서.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이제 다룰 문제는 여러 면에서 더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결함 있는 교리를 살펴  봅시다. 저는 정통적이고 복음적인 사람들의 특별한 문젯거리가 이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대신 큰 공적 집회나 모임이 열립니다. 즉 성도들을 모으기보다는 어떠한 큰 운동을 벌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교회의 개념은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저 일반적인 집회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특히 그것들이 큰 집회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각처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버스로 여행을 하고, 토요일이나 다른 날 밤에는 장거리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그것이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일을 위해 준비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것을 권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흔히 지역 교회의 차원에서보다는, 큰 집회와 운동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풍조가 강화 될 때, 부흥의 빈도가 약화됨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진술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모임과 집회를 동일하게 보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교회 안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일반 건물에서 모이자.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 않으니 말이다”하고 말합니다. 좋습니다. 거기까지는 어느 정도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나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나 그 친구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과거에 그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왔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나타냈던 것과 같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임하셨고, 이 사람들이 이상한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들은 호기심에서 그것을 보려고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이끌었고, 그 소식은 온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능력에 의해 이끌림을 받을 뿐입니다. 실로 거리에 있는 사람이 우리의 조직화된 대중 집회에 마음이 이끌리는가가 문제입니다. 오히려 다른 여러 지역에서 온 복음적인 사람들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또 그 모임은 단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큰 대중 집회에 지나지 않고, 여전히 거리에 있는 사람은 밖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잘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단위는 언제나 교회였습니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1859년 얼스터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성도들이 함께 모였던 작은 모임에서부터 부흥이 시작되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는 모인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어서 모인 백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소위 중립적인 대중 집회의 개념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단위는 교회임을 인식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인 곳, 그 백성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모인 곳에 오십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2-3천명은 모여야 한다.”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큰 사업 개념이 우리의 사고와 전략을 주도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까? 오랜 교회역사에서 실증된 신약 자체의 가르침보다 그런 것들을 더 중요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교리 자체에 관해서, 결함 있는 정통의 주된 문제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 영역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이러한 것들을 상세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부흥에 대해서 생각지 못하게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다른 것들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전체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부흥의 필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실제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의 확장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인 일과 관련하여 오락의 요소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주목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예배 순서가 아닌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합니다.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항목들을 주목해 본적이 있습니까? 어떤 집회의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읽어보면서 갈수록 느끼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다채로운 행사들이 더 많이 눈에 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광고에 눈을 돌려보면 심지어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어디 어디 주최” 또는 “어디 어디 후원”, “어느 어느 특집”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광고를 수도 없이 봅니다. -“이러이러한 장소에서 집회가 있다. 거기에 나오는 인물은.....”

 

우린 이러한 용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오락의 개념에서 온 것입니다. 영화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거슬러 올라가서 역사를 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러한 유의 일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육신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찬송을 부르는 것에 주어진 위치도 그러하다고 부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노래 부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시와 찬미와 영적인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노래 부르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노래만 부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말은 속으로 한다.” 그러나 노래 부르는 것은 큰일입니다. 이와 같은 때 이와 같이 섬뜩한 범죄와 포악과 죄와 부패가 난무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혀지고 거룩한 것들이 전복 당하는 이때에, 전 세계의 상태는 노래할 때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때는 전도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워즈워스가 밀턴에 대해서 한 말을 상기합니다. “분명한 삶, 고상한 사상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분명한 말과 고상한 생각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우리에게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래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저 행복한 분위기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지금은 노래 불러야 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시137:4). 시온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데 어떻게 비파를 들 수 있습니까?

 

지금은 노래 부를 때가 아니라 전도할 때요, 죄를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악과 모든 어리석은 불법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선포할 때입니다. 나중에 노래 부를 때가 올 것입니다. 부흥이 오고, 하늘의 창문이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으면, 그때가 노래 부를 때입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그러한 방식을 통해, 사람들을 끌 수 있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 교활한 시험을 조심해야 합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 상황이 너무나 놀라울 정도입니다. 제가 어느 종교적인 회합에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열린 가장 큰 복음주의적인 회합이었습니다. 모든 예배 때마다 성경적인 예배가 드려져야하고 교훈과 권면이 있어야 하는데도,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느라 40분을 허비했습니다. 실로폰 솔로, 오르간 솔로, 사람들의 합창, 등으로 40분이나 허비했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짧고 성경을 읽는 것은 거의 없었으며, 메시지를 위해서는 짧은 시간이 할애되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부흥이 일어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찾아오실 때에는 결코 그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묻습니다. 지금이 즐기고 노래할 때입니까? 지금은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쓸 때가 아닙니까? 고뇌 어린 영혼으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것과 노래 부르는 것을 함께 혼합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동일한 문제에 속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복음 전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교회 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다 잘되어 있으니 그저 밖에서부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만 주력하자는 전제 위에서 행동할 수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교회사를 읽어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부흥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일로 시작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시작됩니다. 교회 안에 있지 않은 것을 일으켜 부흥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축 늘어지고 연약해진 생명을 소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순서는 이러했습니다. 어떤 일이 교회 안에 있는 어느 사람이나 어느 부류의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그런 다음 그 결과가 강력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강력한 복음 전도 운동이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다음 밖으로 확산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에너지와 돈과 열심을 복음 전도에만 쏟고 있습니다. 교회가 여전히 이러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에 결국 상태가 더 나빠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이 회복되지 못하고, 외면적으로나 피상적으로만 자극 받으며, 교회가 깊이가 없고, 보다 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역사를 읽어보면 교회, 지역적인 단위, 하나님의 성도들의 모임이 언제나 시작의 장소라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강력한 복음 전도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다만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할 때뿐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역사입니다.

 

결함 있는 정통에 있어서 또 생각해야 할 요점이 있습니다. 지금 저는 직접적으로 교리나 실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기보다는 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교리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바르고 정통적이면서도 영에 있어서는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릇된 영의 표시가 무엇입니까? 첫째 무엇보다도 교만함, 삶의 교만입니다. 거만하고 자기의 출생을 자랑하고, 자기의 신분을 자랑하는 일에 큰 강조점을 두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자리를 차지합니까?

 

야고보서 2장을 읽어보십시오. 여기에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엄히 꾸짖으며,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끼고 오는 사람과 너절하게 차려입은 사람을 다르게 대우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만 -이생의 자랑. 이것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하신 나사렛 예수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생의 자랑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지식의 자랑도 동등하게 나쁩니다. “아 나는 대단히 많은 책을 읽은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교리를 아는 사람이다. 나는 청교도들의 저작을 모두 읽어 본 사람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지식의 교만입니다.

 

“나는 위대한 신학자다. 나는 명석한 두뇌와 이해력을 갖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을 포착하지 못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말하는 지식의 교만은 얼마나 추합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합니다”(롬8:1).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주시기 원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대접을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또한 총명의 교만이 있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가졌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분명하고 명료하다. 다른 사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을 두 방면에서 말할 필요가 있음을 압니다. 한 사람은 총명이 부족한 것을 매우 자주 자랑합니다. 저는 이같이 말할 때마다 이전에 만났던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설교하기 위해 주말에 어느 마을에 갔는데 그곳사람이 정거장에 마중을 나왔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중요한 사람에 속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아주 평범하고 비천한 사람입니다. 저는 위대한 신학자도, 위대한 연사도 아닙니다. 저는 기도회에 참석하지도 않습니다. 목사님도 알다시피 저는 그저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설교자의 가방을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자랑하면서 떠벌리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총명을 떠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쁩니다. 교만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럽고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의 문제에 있어서 또 다른 문제들이 있습니다. 즉 비판하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방면에서 많은 잘못을 범합니다. 우리는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권면할 뿐 아니라 책망하라는 사도의 명령을 이행하는 사람과, 비판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판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문제는,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쟁하기 좋아하는 것은 정말 치명적입니다. 부흥의 역사가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부흥이 일어났을 때라도 이러한 정신이 고개를 들어 구원에 절대적이지 않은 교리들에 대해 분쟁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18세기에 웨슬리와 휘트필드 사이에 오고간 논쟁과 또 다른 여러 추종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단시일에 그 일은 평정되었습니다. 웨일즈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다니엘 로랜드와 하웰 해리스사이에 논쟁이 있었는데, 그 논쟁은 1751년부터 176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메마르고 영적 은혜가 없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연합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다시 임하셨습니다. 논쟁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심하십시오. 유다서는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고 말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변론해야 할뿐 아니라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변증하고, 성경적인 교리들을 위해 힘써 싸우는 데 필요하다면 피 흘릴 각오까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경쟁적인 다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치명적인 것은 다투어 파당을 조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그 사람이 속한 파당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쟁이고 다툼입니다. 만나면 언제나 같은 문제를 들추어내는 사람은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강조하지 않았어요.” 그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논쟁하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일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가 모든 일에 낭패를 당하게 하고, 엄청나게 억압하며, 성령을 소멸하는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려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협소한 마음과 다투는 정신과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유의 일들로 흠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이 그런 교회에 임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 들, 작은 교회들이 계속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전체 상황은 좁은 마음과 투기와 시기와 자기를 내세우는 것들 때문에 아주 어려운 상태에 빠져듭니다. 거룩하고 하나님께 쓰일 준비를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고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위대하고 심오한 진지함을 갖는 것만큼 부흥의 시기를 특징짓는 것도 없습니다.

 

 제 말을 듣고 이러한 것들을 생각지 말고 직접 여러분들이 읽어보십시오. 경건한 로버트 맥체인이 던디에서 강단에 올라가 입을 열기 전부터 사람들은 흐느끼며 마음이 깨어지기 시작했던 것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엄숙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나아왔습니다. 그는 가볍게 강단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분위기 맞추기 위해서 한두 마디 농담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광채가 있었습니다. 무서울 정도의 진지함이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믿는다면, 어떻게 사소한 것을 가지고 노닥거리거나 경박하게 말하거나 농담할 수 있겠습니까?

 

부흥의 특징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크고 심오한 진지함을 나타내는 것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없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완전히 정통적이라 해도, 우리의 삶에서 실패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며, 죄를 범하고 계속해서 알고 있는 죄를 범한다면, 우리의 정통은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분 보다 우리의 소원을 앞에 놓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모든 교리와 모든 이해에 있어서 정통적이고 바르다 할지라도 부흥을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부흥이 올 때 사람들은 죄에 대해 심오하고 깊은 각성을 하게 됨을 틀림없이 발견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을 용서하실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그전에도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죄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흥이 임하자 그들은 마치 지옥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갖고 놀라며 무서워합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너무나도 무섭게 느낀 나머지 일어서서 그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죄를 깨닫는 것만을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태든지 죄는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임하는 것을 막는 주요한 장애물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결함 있는 또는 왜곡된 정통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다루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게 하시고, 묵상하게 하시며, 성경에 비추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부흥에 역사에 비추어 이러한 것들을 숙고하게 하여 우리 자신에게 진리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3584/page/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