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고전 16:13)
긴장된 주제 속에서 끊임없이 브레이크를 거는 방식에 있어서는 바울만큼 두드러지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영감이 그로부터 나오기 시작하는가 싶다가도 갑자기 바울은 전혀 예외인 듯한 것을 끼워 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삽입 구절들을 음미해 보면 그것들이 일정 불변하게 완전한 논리를 띠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도 이와 동일한 것을 봅니다. 바울은 기초를 닦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웁니다. 그런 다음 거기에다가 무엇인가를 첨언합니다. 그의 전술은 짜여진 계획에 의해서 매우 명확하게 펼쳐집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그 첫 번째 시도를 맛보실 것입니다.
"깨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다른 번역본들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추천해 드릴 수 있습니다. "깨어"라는 말씀은 "일어나서" 또는 "정신을 차리고" 등으로 바꿔 읽어도 좋겠습니다. 또는 군사 용어를 사용해서 "차렷"이라고 해도 어색하진 않을 것입니다. 사도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독자들을 부각시키고, 경성 시켜서 경계 태세를 유지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의 이 권고의 말씀을 구약 성경의 경보를 울린다는 표현을 빌려서 번역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는 이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셔서 사도는 나팔수로 하여금 기상 나팔을 불어서 군대가 기상하게 하고 제복을 착용하며 각자 위치로 가 서서 경계할 것을 실제로 명령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겠습니다.
"깨어!"
"깨어"라는 표현은 신약 성경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까지도 관통하여 흐르는 전형적인 언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다양한 강론들을 읽으시면서 주님께서 '깨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권면은 복음서의 마지막 책의 특징일 뿐 아니라 서신들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는 다른 어느 주제들보다도 두드러진 주제입니다.
깨어서 경계하며 감시하라는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청각을 곤두세워야 할 것을 말해 주는 권면입니다. 이런 권면이 성경에 빈도 높게 등장하는데 그 때에는 언제나 틀림없이 긴급함을 알리는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깨라는 말씀을 반복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 백성들이 직면할 위험을 직감하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준비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오늘날만큼이나 이 말씀이 긴요한 경우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영적 혼수상태가 있었습니다. 과거 역사에도 교회가 다소간 퇴폐적이었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이 오늘날의 상황만큼이나 절실하게 요청되었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깨어야 할 이유
이 강력한 그리스도인의 장군이 우리에게 깨어서 경계하라고 명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투쟁의 생활이라는 단순한 이유가 바로 우리가 경성 해야 할 것에 대한 신약 성경의 직접적인 대답입니다. 우리는 이 사상에 거의 생소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투요 전쟁이라고 생각합니까? 또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교회가 하나님 자신께서 여기 이 땅위에 세우신 전투하는 군대라는 생각을 합니까?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성경이 제시하는 이 사활이 걸린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감명을 회복한다면, 우리는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것을 잃게 된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 자신을 추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최근 수년 동안 신앙으로부터 초자연적인 속성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는데, 이것이야말로 분명히 그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날도 역사하고 있는 사단과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들의 능력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우리가 삶의 영적 속성에 대한 시야를 놓치게 되는 날이면 우리는 영적 투쟁의 필요성을 잃게 되고 맙니다.
바꿔 말씀드린다면, 기독교를 한낱 삶에의 소망, 즉 철학 정도로 밖에는 간주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기독교가 삶의 전 영역과 전반적인 면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철학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철학으로부터 어떤 역동적인 힘을 기대하지 않듯이 기독교에서도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노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살아내야 할 삶이라는 정도로만, 매우 현실적인 그 무엇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요즈음 복음의 사회적 적용을 강조하는 것을 숙고해 봅니다. 우리가 만약 복음을 이와 같은 현실적인 용어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과 악, 하나님과 사단 그리고 천국과 지옥 등과 같은 신약 성경의 특징적인 가르침인 영적 투쟁이라는 사상에의 필요성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바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의 이완된 수동적인 상태로만 간주하는 경향 때문에 그 삶의 투쟁적인 면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투쟁의 삶
신약 성경이 오직 한 가지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투쟁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생의 종말을 맞으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씨름하는 삶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우리의 대적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가장 두드러진 메시지는, 말하자면 이 세상과 인류를 위한 영적 권능들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런 면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기독교 문학에서 충분히 증거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것을 시험해 보시기 위한다면, 특별히 영적 각성의 시대에 저술된 작품들을 보시면 그 속에서 영적 투쟁의 사상이 변함없이 강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예를 들어서 우리는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서 원수들에게 포위된 순례자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 영혼이라는 도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싸워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전투적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바로 이 한층 더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싸워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복당할 것이며 원수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경계해야 할 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선, 우리는 자신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특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햇병아리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누구를 경계하기 이전에 여러분 자신을 경계하십시오.
"저는 저의 어떤 점을 경계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실 겁니다. 무엇 보다도 우선, 자신의 저하된 기강을 경계하십시오. 교회와 교회의 메시지에 대해서 다소간 소망이 사라져가는 느낌을 갖기 시작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제쳐둔 채로 어디론가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도덕적인 분위기가 점차 열등해져 가는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 봅니까? 우리는 과거 한때처럼 영적으로 예민하게 깨어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삶에 있어서 열등한 기준을 취할 위험이 계속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명확함을 추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라고 여긴 것들이 있었습니다. 정직한 순결에 관한 한 우리는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도덕적 표준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죄에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혹시 자신 속에서 죄와 타협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변명하는데 전문가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고 만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기준의 저급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능률이 저하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훈련을 규칙적으로 합니까? 우리는 유혹을 만났을 때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어렵지 않게 거기에 대처하는 자신을 발견합니까? 자신에게 치명적인 유혹이 몰려 올 때에 거기에 대처할 만한 비축된 능력이 있습니까? 영적 기능에의 훈련을 게을리 함으로 인한 저하된 능력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점들을 잃어버린 채로 그저 세월만 보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생활이 이처럼 분요 다망하고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시간이 없노라고, 그리고 영적인 것들을 묵상할 시간이 없노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태를 너무나도 쉽게 변명하곤 합니다.
우리 자신을 경계함과 동시에 우리는 또한 우리의 적을 경계해야 합니다. 원수를 경계함 없이 자기 자신만을 경계하는 일은 무익한 일입니다. 원수에 대해서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그의 능력과 힘입니다. 영적 전체가 육체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우리의 투쟁이 강력한 영적 세력들에 대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원수의 능력보다 더 주의해야 할 점은 원수의 교활함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로부터 끌어내려고 스스로 빛의 천사처럼 실제로 가장할 수 있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오늘날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험은, 곁길로 들어서서 전적으로 부수적인 것들을 중대시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읍시다. 예언을 해석합시다. 성화를 이해합시다. 기독교 교육에 관심을 가집시다.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십시다. 교회의 우선적인 사업과 기능이 사람들을 회개케 하고, 모든 문제의 근본인 죄와 악을 폭로하며,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가르치며, 그리고 부패한 인간성을 다루는 일이라는 점을 언제나 명심하십시다.
경계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제 경계해야 할까요? 우리는 언제나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에만 경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 경계해야 합니다.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영적인 휴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경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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