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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로이드존스

십자가를 전파함 (고전1:23)

by 복음과삶 2010. 8. 24.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전 1:23)

 

최근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진리에 관해서 저에게 질문이 주어진 일이 있습니다. 질문자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십자가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가장 중요하고 사활이 걸린 문제를 묵상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를 모두는 종국에 가서 하나님의 면전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국가들의 운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 기독교의 전파는 언제나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히 십자가를 상고하고, 그 증거들을 재검토하며, 또한 십자가를 확신하는 이유를 상기해야 하는 특별한 기회들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 전체를 그 원천과 기원과 연결시키기를 잊어버리는 행위, 즉 우리 영혼의 닻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표류하게 될 위험은 항시 존재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구든지 단 한 번의 강론으로,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방대한 주제를 정확하게 언급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신약 성경에서 이 전반적인 문제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를  제시해 주고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어떤 기본적인 공리들에 대해서 상기시켜 준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에서, 특히 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는 말에 더욱 중점을 두고 강조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이 말은 합리적인 사고를 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대할 때 합리적인 사고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신약성경이 주는 교훈의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강론자에 대해서 논란 할 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그 강론자의 견해는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대해서만은 매우 건전하더군요." 생각해 보건대 십자가에 대해서 상당부분을  언급할 때만큼은 견해가 정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죽음을 수동적인 저항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죽으심에서 그 이상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교리들 보다도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 갈 때에 더욱 더 깊은 사고와 이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의 교훈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 이유는 많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선적으로 계시의 문제이지 경험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험만으로는 십자가가 어째서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리만이 깨달음과 이해를 줄 수 있으며, 이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근거해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길이 십자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면서도 하나님께 접근할 때에는 철학적인 용어들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진정한 본질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모든 것은 배제하고 오직 경험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경험이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그 경험을 무너뜨리려고 애쓰는 악한 자 마귀에게 자신들이 현혹 당했음을 발견할 날이 올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교훈은 성경 어느 부분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행전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초기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전파를 설명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전파한 강론에서 베드로는 우리 주님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행2:23)것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로마 정부에 넘겨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단지 인간적인 도구였을 뿐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영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이며 하나님께서 관련되신 문제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교훈을 연구한다면 바울이 이와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바울의 방편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구절들이 사도행전 17장에 들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저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2,3절) 고 말했음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 본문은 알고 있지만 메시야에 대한 이해에는 혼동이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거침돌이 될 것임을 말해주는데,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의거해서 추구하던 메시야가 죽으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서신들의 핵심 교훈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나는 십자가의 강조는 그의 교훈에만 있는 특수함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서신들과 여타 다른 서신들을 구별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모든 사도들이 동일한 내용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금이나 은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았다고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쓰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관련된 가르침은 요한계시록에서도 역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서에서는 어떻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최근 수년 동안에 다음과 같은 사상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즉 복음서에는 혹 있다 하더라도 십자가에 관한 가르침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주의자적인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단순한 교훈에 유대인들의 어떤 율법주의적 견해를 몰래 첨부시킴으로써 그것을 일종의 신화적인 것으로 번경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에 대한 대답은 이중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에 관한 가르침이 사도행전이나 서신들에서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복음서에서도 발견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언젠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

  

이것이 다른 여러 가지가 아닌 오직 한가지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주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고, 예외 없이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은 부활이전까지도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노상에서 두 사람과 합류하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고난을 받아야만 인류를 위한 구속이 완성된다고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복음서로부터는 십자가에 대한 직접적인 교훈을 그렇게 많이는 발견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복음서에는 십자가에 대한 상당히 많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신학적인 증거에 관한 한 마가복음10장에 나오는 말씀보다 더 직접적인 것은 없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절)

  

이 가르침은 신약성경 속에 나타날 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직접적인 예언이나, 모형이나 또는 예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더 합당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피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가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전조를 배제한 채로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겠습니까? 성막에 관련된 의식과 상세한 지시사항들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양한 종류의 절기 특히 유월절이라는 절기에서 갈보리를 젖혀둔 채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십자가가 성경 전체에 두루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십자가만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이 십자가의 교훈을 받아들이면, 그 순간 그는 이 교훈을 지지하는 수많은 근거들을 자기 자신 속에서부터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성과 이해력의 측면에서, 계시를 믿고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죽게 허락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현대의 물러터진 사고 방식에 의하면 용서라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바울에 의하면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조차도 비상한 문제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의로우시면서도 불경건한 자를 또한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동시에 죽음으로 이끄는 죄를 범하실 수 있으실까요?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징벌을 받으시고,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것은 갈보리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갈보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거래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한 저의 추론은 계시를 더욱 공고하게 해 줍니다.

 

죄의 증언

  

하나님 편에서의 본질적인 것이 십자가라면, 십자가는 인간 편에서도 역시 본질적인 것입니다. 죄를 분명히 알고 이해하는 유일한 길을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는 결단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표적을 빗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를 그 능력의 범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으셔야만 했을 정도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의 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선행을 가지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노력에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만약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었다면 결코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도 볼 수 있으며 그분께서 우리를 영접하심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권능에 대해서도 이 진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 해답 역시 십자가 안에서 얻어집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타락으로부터 지켜주시기에 능하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으며 유혹의 때에 우리를 굳게 붙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제가 죄를 증오하기를 배운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라는 값을 치르고 사신바된 존재이며, 그러므로 저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는 것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요구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저 위대한 사도와 하나가 되어 겸손하게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라고

 

 

출처 : http://lloydjon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