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 26:17-18)
이삭의 생애에 있었던 이 사건은 부흥의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이삭의 모습은 고통과 난관에 처한 모습입니다. 문맥을 읽어보면 그가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매우 두드러진 방식으로 축복하셨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삭은 주위 사람들의 시기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삭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 가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창 26:16)
이삭은 가족과 모든 종들과 소유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랄 골짜기에 오게 되었고 그곳에 거주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그랄 골짜기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매우 긴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맞게 됩니다. 즉 물이 없었습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물의 부족은 생명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유복한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의 부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막을 칠 수 있는 지역을 찾거나,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지엽적 문제로만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재미있는 일을 찾거나 사치스러운 것을 추구했던 것도 아닙니다. 또 어떤 부수적인 것을 찾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다시 말하면 그것이 없이는 생명을 전혀 지탱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찾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미 지적한 대로, 우리가 오늘날 처한 상황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할 점은 바로 절망적이라는 것입니다. 상황은 정말 긴박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일차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바로 이 순간에 가장 긴급하게 요하는 것이 교회의 생명 자체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방법이나, 어떤 조직이나, 여기저기를 조금 고치거나, 아니면 상황을 약간 보안하거나, 시대를 따라가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기본적인 문제로 내려가야 합니다.
오늘날 사회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매우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삶에 대한 전체적인 사고방식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진지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할 때 깜짝 놀라게 됩니다. 시대와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어느 매우 유명한 의학 권위자는 최근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인생과 삶의 전체적인 추세를 보고, 그는 너무나 섬뜩한 느낌이 들어 그렇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교회가 직면한 상황이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밑천에 의지해서 살아왔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나라의 회중들을 살펴보면, 그 점을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이나 습관이나 관례에 따라서 한동안 일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밑천이 하나도 없을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는 절대적으로 궁극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것에 직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전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삭의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난제는 생명 자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능력과 활력을 교회의 모든 활동에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현재의 전반적인 상황의 추세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철저한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능력과 활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능력과 성령이 진실로 필요한 실정입니다.
교회가 그저 어느 정도의 노선 변경이나 이곳저곳을 조금 조정하면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에 중대 국면에 처한 문제는 3등급 내지 4등급에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인생에 대한 영적 사고방식, 세상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영적인 사고방식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위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삭이 이 특별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은 이삭이 “하지 않은”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는 쫓겨났습니다. 그는 자기 거처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과 소유와 여러 종들과 생축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금방 물을 얻지 못하면 생명 자체가 위험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죽어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 줄 사람을 불러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있는 곳을 알아맞히는 점쟁이를 데려오거나,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찾고 발견해 내는 전문가를 불러오지도 않았습니다. 이 이삭의 행동이 보여 주는 전체 메시지는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를 보편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면 전체 사고방식이 이삭의 사고방식과는 정반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책이나 종교 간행물을 통해서 부단히 읽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책들이나 종교 간행물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원자시대를 위한 메시지, 또는 제 2의 엘리자베스 시대를 위한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같이 진리를 탐색하는 데 전력해야 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찾아낼 자를 불러들이고, 과학자들을 바라보며, 철학에 호소해 봅니다. 또한 심리학도 유용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최근 지식과 학식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최근의 과학과 문화를 원합니다. 그것들이 말하는 전체 개념은, 세상은 매우 심각한 곤경에 빠져 있으니 모든 사람들이 총명을 한데 모으고, 자원을 총집결하여 세계의 여러 종교들을 한데 모아, 세계 종교회의를 소집하는 것이 마땅하며, 어떠한 종교를 믿든지 어떠한 유의 신을 믿든지 간에 모든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편적인 교회 생활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것은 양심이 가지각색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공식이나 신조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어떤 말이나 어떤 메시지를 찾으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원자세대이다. 그에 마땅한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이삭이 했던 대로 하지 않고, 우리는 우물을 팔 사람과 물이 나오는 곳을 신통하게 아는 점쟁이를 찾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계속 존재케 할 수 있는 물의 근원이나 줄기를 어느 곳에서든지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대목의 강조점은 이삭이 그러한 유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행한 것은,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했습니까? 이렇게 한 이삭의 지혜는 매우 분명하고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은 자신의 상황은 여기저기를 시굴해 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는 상황임을 알았습니다. 그 처지가 너무 긴박하여 물을 빨리 얻지 못하면 모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그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우리는 시굴을 해보거나 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맞히는 점쟁이를 찾을 필요가 조금도 없다. 내 아버지 아브라함께서 바로 이 지역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내 아버지 아브라함의 특징 중 하나는 물을 찾고 우물을 파는 전문가였다는 사실이다. 만일 여러분이 창세기 앞부분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본다면, 제가 이렇게 진술한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발견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물을 발견했었다는 것을 이삭은 알았습니다. 그는 우물을 파면 언제나 성공했고 물을 넉넉히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확실한 물 공급처를 확보하는 일이다. 우리가 쓸 물을 확보한 뒤에는 더 많은 물을 찾아보기도 하고 여기저기를 더 파 보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 여기저기를 파보는 데 시간을 보내는 자는 어리석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확실한 공급처를 빨리 확인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살아 계속 존재하게 할 그 사활이 달린 원천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 연후에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삭은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아버지께서는 여기에 사셨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우물을 파셨을까? 아버지께서 우물을 파셨던 곳을 파보면 분명히 거기서 물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 자리로 갔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다루는 주제로 돌아오게 합니다. 교회사를 읽고 과거를 연구하는 데 큰 가치가 있음을 하나의 원리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과거의 역사를 읽고, 그 역사가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과거를 무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습니다. 과거를 모르는 사람, 우리가 당한 난제들이 전혀 새롭다고 단정하는 사람, 그래서 과거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세속 역사가 주는 위대한 교훈들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체계를 지배하는 정신구조가 그러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당한 난제들은 새롭고, 매우 독특하며, 교회와 세상이 그전에는 이러한 난제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1959년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올해는 하나님의 성령이 능력 있게 부어졌던, 이른바 미국과 북아일랜드와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와 심지어 잉글랜드의 여러 지역에서까지 체험할 수 있었던 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또한 올해는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 발간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다윈의 책이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상뿐 아니라 안타깝게도 교회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윈의 철학의 본질은 진화의 문제이며, 이것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다윈 자신은 그것에 대해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헉슬리 같은 그의 제자들이, 더 나아가서 스펜서 같은 철학자들이, 이 원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원리는 삶 전체에서 작용하고 있다. 즉 진보와 발전과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일은 앞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떤 지점에서든지 그전보다 더 우월한 입장에 있게 된다.“
이제 교회가 이러한 개념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20세기의 상황은 그전의 어떠한 상황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논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우리는 과거를 무시해야 되고, 잊을 수 있으며,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과거는 지금 우리가 당하는 난제들을 만난 적이 없었고, 과거는 우리가 가진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사람들의 전체 사고방식과 정신 구조는 뒤로 물러가는 것을 반대하고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는” 그러한 일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이것은 모든 기만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십니다. 100년 전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여전하신 분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1000년 전이나 2000년 전이나 아브라함이 살던 때나 그 이전에도 역시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십니다. 그는 전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것은 진리일 뿐만 아니라, 사람도 동일하다는 것 역시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달라졌고 사람도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이 확증될 수만 있다면, 저는 기꺼이 우리의 난제가 독특하니,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단정하는 그 논증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정확히 같은 존재입니다. 성경을 보거나 인간의 역사를 보아도 저의 역설을 한 순간이라도 논박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까? 우리는 비행기로 여행할 수 있고, 원자를 축출해 낼 수 있으니, 그러한 것들을 행할 수 없었던 선조들과는 어딘가 다르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자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 자체는 여전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과,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과, 행동하는 방식을 잘 들여다보면 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이 일차적이고 근본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4000년 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과 행동하는 방식을 잘 들여다보면 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이 일차적이고 근본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4000년 전에 관심을 기울이던 바로 그 일이고, 아브라함 때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도 역시 그것이었습니다. 신문을 읽어보면 인간의 주요 관심거리는 여전히 먹고 마시고 전쟁하며 섹스를 즐기고 다른 여러 가지 유흥을 구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구약에 나오는 것은 모두,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람은 여전히 같은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주요한 사회 난제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성경에 나와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도둑질, 강탈, 폭력, 시기, 질투, 부정함, 이혼, 분리 등, 이 모든 것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들이 예전에도 문제가 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문젯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난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물을 얻는 문제를 갖고 있었고 이삭도 역시 똑같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모든 차이는 피상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동일하십니다. 사람도 역시 동일합니다. 문제의 해결책도 역시 동일하다고 신약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그러므로 제가 볼 때, 현대인이 거만하고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이러한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절망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기는 무언가 다르고, 자기의 난제들은 새로운 것이며, 모든 선조들이 당면했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삭의 지혜를 눈여겨보십시오, 그 처지의 긴박성을 보고, 아브라함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과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원리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단번에 교회사가 평탄했고, 한결같이 어떤 업적을 기록한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굴곡이 심한 역사였습니다. 겉만 봐도 이것이 드러납니다. 과거의 역사를 읽어보면 생명력과 활력과 능력이 충만했던 시대가 있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시대의 통계 숫자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몰려왔으며, 누구든지 교회에 속하기를 열망하고 열심을 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교회는 생명력으로 가득 찼습니다. 교회는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권위 있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고, 날마다 주간마다 회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청중을 기도회로 끌어 모으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사람들을 그 기도회에서 쫓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온 밤을 새워 기도하곤 했습니다. 온 교회가 살았으며 능력으로 넘쳤고 활력으로 충만했습니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풍성한 체험과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놀라운 체험과 자기들을 감격하게 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 곧 그들을 감동시켜 온 세상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귀하다고 느끼게 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을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 전체의 삶의 양상이 영향을 받았고 변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예를 한없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을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200년 전에 일어났던 복음주의적 각성입니다. 많은 세속 역사가들마저도, 프랑스 혁명 때 프랑스가 겪었던 일을 영국이 당하지 않도록 한 것은 휘트필드나 웨슬리 시대의 복음주의적 각성이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합니다. 교회는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여 사회 전체가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복음주의적 각성이 지난 19세기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실로 100년 전, 제가 언급하였던 바로 그 부흥의 때에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부흥이 있을 때마다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바로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가 언제나 오늘날과 같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력과 활력과 능력이 충만했던 그 엄청난 시대에 대해 책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또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에 뒤를 돌아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지만, 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시기, 재각성의 시기는 참으로 엄청나게 메마르고 죽어있고 무감각하며 생명 없는 시기 뒤에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위대한 봉우리를 발견할 때마다 굴곡을 발견할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취하여 세상과 사회의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래서 생명력과 활력과 능력과 증거와 이에 따른 모든 것에 있어서 참으로 부족했던 때가 있었음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전에도 그러한 일이 정말 여러 분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절망적이고 긴박한 영적인 궁핍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령이 높이 들려지고 능하게 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난제만을 보면서 “자” 이러저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우리의 방식을 개선하고,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지 않고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할 훌륭한 이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이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이 무서운 굴곡이 있었다는 것과 교회가 그 깊은 구렁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두 번째 원리는 이것입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그저 건성으로 읽더라도 이 원리를 충분히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이러한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능력 있는 시대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이전에 얻었던 것으로 다시 돌아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영광스러운 세대마다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되돌아감을 발견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부흥할 때마다, 교회는 이삭이 했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이전에 있었던 일로 되돌아가고, 그것을 재발견하며, 옛 원천을 다시 파는 것입니다. 이 원리만큼 교회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세기에 걸쳐 교회에 부어주신 그 위대한 부흥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언제나 거의 정확하게 동일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시험해 보십시오, 즉 이것을 역사적으로 시험해 보았으니, 이제 지리학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잉글랜드나 대영제국에서 일어난 부흥의 이야기, 미국이나 아프리카나 중국, 만주나 한국이나 인도 등지에서 일어난 부흥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거기가 어디든지 여러분이 원하는 이른바 부흥이 일어난 지역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곳이든 그 지역의 특수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 경우마다, 언제나 그러한 경우에 일어났던 것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궁핍에 처한 오늘의 현실, 생명과 능력을 긴급하게 필요로 하며,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여기에 과거로부터 우리에게까지 내려온 위대한 기록과 증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러한 경우를 그렇게 처리하셨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활용하고 얻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유용한 샘 근원이 있습니다. 바로 그 메시지입니다.
이제 저는 다음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삭은 지혜롭게 뒤를 돌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쓸 물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들에게 명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옛 우물로 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우물에 가 보니, 아브라함이 죽은 후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들을 메워 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14-15절에 바로 이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옛 우물로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은 그 속에 있었지만 그물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물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정경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깊은 곳에 내려가면 옛 신선한 물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자 물이 깊은 곳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그 물을 길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어째서 우리는 물을 보지 못하는가? 어째서 물을 퍼 올릴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웠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흙과 여러 잡동사니, 쓰레기들로 그 우물을 메웠습니다. 그래서 물이 그 깊은 곳에 있기는 했지만 물을 이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볼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 원리가 제가 강조하고 여러분에게 더 인상 깊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오늘날 교회의 상태는 한 가지 방식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한 일을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물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물을 볼 수 없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그 물을 마실 수 없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흙과 여러 오물로 그 우물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때로는 나로 하여금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드는 한 가지 사실은, 교회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이 사실을 직면해 보려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다 더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심지어 복음적인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것을 대면해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다.” “나는 긍정적인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 우리는 친절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비평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니 우리는 모두 함께 서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 우리는 모두 같은 우산 속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유의 사고방식과 정신 구조에 빠져 있는 한 문제는 더욱더 악화될 것이라고 저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블레셋 사람들이 한 일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함으로써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난제는 우리가 처한 새로운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러한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 그 말에 신물이 날 정도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자동차, 현대인에게 제공되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이런 것들이 문젯거리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몰아가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마땅한 전투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전문가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그 어느 것을 따져 보아도 별로 문제의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형태는 다르나 언제나 그러한 일들이 존재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00년 전에 있었던 복음주의적인 각성 이전의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처럼 텅 비어 있었고 심지어 그보다 더 했습니다. 복음 설교를 듣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다른 것들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텔레비전이 없었어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닭싸움과 카드놀이를 대단히 즐겼습니다. 그들은 도박을 좋아했고 술을 대단히 즐겼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에 나가지 않기 위한 구실을 찾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사고 구조는 괴이할 정도로 피상적입니다. 쾌락의 형태가 변했으므로 전체 상황도 새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이 시대의 난제와 우리를 거스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지옥과 마귀에 대하여 듣기를 언제나 싫어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이 메시지를 증오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어째서 그 메시지를 들려 하지 않는지 그 구실을 대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구실들은 정말 하찮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기다리시오,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200년 전의 죄악에 대해서나, 4000년 전의 죄악에 대해서는 당신 말이 옳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겠소? 여기에 우리의 난제가 있고 현대에만 해당되는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이오. 1870년에 법안이 통과되어 모든 대중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소, 만일 당신이 이것을 무시한다면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것이 되오, 오늘날은 누구나 다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소, 그러므로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 과학과 원자에 대해서 하는 말을 청종하고 있소, 오늘날 사람들은 깨어 있고 매우 현학적이어서 그러한 모든 노선을 따라 대단한 진보를 이룩하였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와 상황이 이전과 여전히 똑같다고 믿으라고 말할 수 있겠소?“
그렇습니다. 저는 그러한 모든 거대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이러한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으라고 촉구할 수 있습니다.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방면에서든지 새로운 지식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말을 듣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 행해 오신 일, 아직도 행하고 계신 일을 이제 막 발견하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은 하나님께 어떠한 차이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어떤 방면에서든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 문제를 건드리고 영향을 미칠 만한 어떤 조짐이나 희미한 그림자가 현대 지식 속에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영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조짐이라도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이며 그가 행하신 일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현대의 지식이 무슨 영향을 끼쳤습니까? 이러한 지식 중 어떤 것이 그것과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가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상기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대 지식에 대해, 마치 그것이 전체 상황을 바꾸어 버린 것처럼 말합니다. 250여전 전의 교회 역사를 읽어보면, 이신론(자연신론)의 시기가 있었으며, 이 시기 이후 위대한 복음주의적 각성이 있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린바와 같이 이신론의 세대에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지식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늘날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17세기 중엽에 과학적인 대각성이 있었습니다. 아이작 뉴턴과 다른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았고, 하비는 피의 순환과정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왕립협회가 찰스 2세 즉위 초기에 세워졌습니다. 온 세상은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분위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합리주의와 맞서 싸워야 했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17세기 말엽과 18세기 초엽에 사람들은 오늘날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이해를 들고 나왔습니다. 물리학, 천문학 이 모든 것들이 부각되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동일한 논증에 맞서 싸워야 했다는 것이 문제의 진상입니다. 그 이전의 여러 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로 그 논증은 별 의미가 없고 무모합니다.
자 이제 교회가 제시하고 있는 또 다른 논증을 언급하겠습니다. 우리의 특이한 환경이나 이러한 새로운 지식 뿐 아니라, 분리된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것이 “문제다”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물론 상황이 절망적이고, 어떤 일이 금방 일어나지 않으면, 실로 교회의 모든 장래가 위태롭다고 강조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대한 이유는 딱 한가지다, 교회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교회 연합의 필요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큰 하나의 조직 속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난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나누어져 있는 한 어떠한 축복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교회가 나누어져 있는 동에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그들은 진술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또 다시, 대답은 교회사에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사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을 읽어보았더라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입관 때문에 눈이 멀어 분명한 역사적 사실들을 부인합니다. 그중 첫 번째는, 과거에 교회가 첨예하게 나누어져 있을 때, 심지어 오늘날의 상황보다 더 첨예하게 나누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복락을 그런 때에 맛보았습니다. 100여 년 전에 미국과 북아일랜드의 교회는 수 도 없이 나누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려 주셨고 성경을 부어 주셨습니다.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은 복락을 얻어 누리지 못하는 한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나누어져 있을 때도 복락을 내려 주셨고, 부흥이 임한 곳에 두 가지 중요한 효과가 나타났음을 역사가 분명히 보여 주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부흥은 실제적으로 모든 교단들에게 복을 주었고, 어떻게 나누어져 있었든 상관없이 한동안 기이한 연합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부흥처럼 영적인 연합을 촉진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부흥은 늘 또 다른 효과를 발합니다. 그것은 새롭고 생소한 또 하나의 분쟁을 야기 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락과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자연히 하나가 되고 함께 모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전혀 싫어하고 비평하며 정죄하고 또 배격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납니다. 존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소디즘이 출현해야 했으며, 그래서 영국 국교회에서 축출 당했습니다. 이 분쟁은 부흥으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어느 때나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을 생각해 보십시오. 루터는 로마교회를 나누고자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의 축복은 로마 교회를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으로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순전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의 한 가지 장애물은 교회가 나누어져 있는 상태라고들 말합니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측입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잡동사니와 같은 말입니다.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와 우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물줄기를 막고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주장들을 일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장애물이 아니며, 이러한 것들은 문제가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삭이 알아냈던 것처럼 문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이 악질적인 소행이 그 우물을 막고 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과 하나님의 축복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분명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한 소행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숙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직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명백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확신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증거와 임재하심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정직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사실 그대로 대면하게 하시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을 안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삭이 보인 본을 실행에 옮길 수 있고, 블레셋 사람들이 처넣은 잡동사니를 깨끗이 소제하여 다시 하나님의 옛 물줄기를 만나고, 한 성령의 능력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비상한 복락의 시기를 맞고 강력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유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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