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왕하 5:2-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잊어서는 안 될 매우 중대한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세계를 향하여 기독교 특유의 메시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현재 상황에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분쟁에 개입되어 있는 국가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국가들의 현재 상황을 숙고하기도 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그런 일반적인 상황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능은 그리 광범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현대에 전해지고 있는 많은 강론들과 연설들은 기독교의 독특한 특징이 결여되어 있어서 차라리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한 말이었다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순전히 세속적인 일들에만 관계하는 사람들이 얘기할 만한 부류의 것이라면 그것은 기독교 고유의 성질을 가진 메시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노라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전했던 메시지는 그 당시 세상이 알고 있던 그 무엇과도 완연하게 달랐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또한 당시의 메시지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세상이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상태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하게 다르고 구별되어야 할 그 무엇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주어지고 있는 괄목할 만한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보면 특별한 기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인들에게 제시되는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때야말로 바로 그 기회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 밖의 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현대 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없을까 하고 마지막으로 기독교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제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인간 영혼의 욕망을 채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이 사람들이 만나 보도록 인도하는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고 있습니까?
평범한 사람의 지혜
이와 같은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제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미 잘 알려진 나아만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여기서 저는 나아만이 아니라 나아만의 집안 일을 거들었던, 우리가 그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는 어린 소녀를 특별히 주목하기 원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연약한 것을 들어서 강하고 능한 것들을 물리치시는 방법에 대한 간단한 실례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무너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그는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경 속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마침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뛰어난 세상의 지혜보다도 더 위대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천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가장 위대한 속인보다도 뛰어납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린 소녀도 비록 가장 천한 일을 하고 있긴 했지만 아람의 위대한 군대 장관조차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노라면 매우 하찮은 사람들이 위기 상황에서 지식과 지각을 가진 사람들로 부각되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정하실 때에도 왕의 궁정에 초대받지 못하는 평범한 어부들과 노동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런 불학 무식(不學無識)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능력 있는 기적들을 이루어 냈는가 하는 것은 산헤드린과 왕실에서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경이였습니다.
그의 위대함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의 생애는 근본적으로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정말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문둥병이 그의 생을 지배하여 모든 것을 망쳐놓았습니다. 그가 현재 얼마나 영광스러우냐 혹은 그가 미래에 어떤 영예를 얻을 수 있느냐 등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문둥병자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쓸모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적용되어야 할 좋은 비유입니다. 이 시대에는 폐해, 즉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이러한 질병이 있는데 이것이 삶 속으로 들어와서 인간을 더럽히며 결국은 인생을 폐허로 만들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인류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잇다 해도 그가 만약 자신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이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는 참담하고 불행한 사람일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놀라움은 그가 죄라고 불리는 이 문둥병에 관계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바로 이 지식이 문둥병에 있어서의 치명적이고 기독교의 기능은 이 생애의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만약 자신의 역할이 이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자기 기능을 소흘히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깃든 비참함과 비극의 궁극적인 원인은 현대에 벌어진 전쟁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 궁극적인 원인은 죄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소유할 수 있는 영광은, 비록 우리가 거대한 국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없다 하더라도, 마치 어린 소녀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한 비결을 알고 있었듯이, 우리도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증거 하는 것
더욱이 이 놀라운 지식은 가장 천하고 낮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잇는 것입니다. 어린 소녀는 문둥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소녀는 나아만을 고칠 수 있는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녀는 엘리사에 관한 소식을 증거 했습니다.
어떤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전도자의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그와 같은 소명들이 있고, 따라서 그런 소명들에 해당되는 은사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천하고 낮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영혼들에게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알려 줄 수 있으며 사람들을 죄의 압제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제가 좀 사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이 기회를 개인적으로만 누리려고 합니까?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전달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에 관한 비판의 소리와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한 절망적인 생각들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습니까?
자기 주인의 문둥병에 대해서 들었을 때 어린 소녀는 동정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에 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주인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부담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둠과 절망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슬픔을 느낍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즐기며 만족해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그들의 삶이 죄로 손상되었고, 그 손상은 우리가 적당한 때에 말 한 마디만 해주면 치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어린 소녀는 신성한 동정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백성들은 나아만과 나아만의 군대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아만이 그냥 고통받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나아만이 그냥 고통받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그녀는 모든 것을 용서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정신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이 어린 소녀가 엘리사의 능력을 얼마나 확신했는지요. 이제 우리는 선지자 엘리사보다 무한하게 위대하신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능력을 소유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측량하실 수 없는 죄의 깊이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구속하시고 구출하실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이 절호의 시기에, 그들을 모든 두려움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새로운 삶을 주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내적인 끓어오름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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