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행9:32-35).
스스로 문화와 학식에 있어서 비범한 수준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도행전 앞부분의 역사적인 가치에 대해서 대단한 의문을 품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왔습니다. 이들은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상당한 정확도가 있는 설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도행전의 앞부분과 요한복음 그리고 여러 서신서들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이 쓴 서신서들에서 주장하는 점들은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씀드린다면, 그들은 단순한 복음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약성경 다른 여러 부분들이 제시하는 부가적인 주장들은 수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태도에 있어서 상당한 일관성을 보여 주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적 현상들은 부인하면서 사도행전 앞부분의 역사적 사실은 받아들인다면 상당히 이상한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께서 신적이며 기적적인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점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연합된 평범하고 소박하며 다소간은 무지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와 동일한 초자연적이고도 기적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비평가들은 본의 아니게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고 있는데, 그 선언이란 다름이 아니라 사도행전이야말로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고양된 주장들 중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주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사도행전의 빛에 비추어서 읽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복음서에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의 증거
저는 오늘날 종교에 관련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의 절반은 그들이 복음서를 읽는 데는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데 반해 사도행전과 이어지는 교회 역사를 읽는 데는 너무 적은 시간을 투자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확신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어왔지만 이해하지를 못했는데 그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앞에 제시된 증거를 고찰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들이 만약 복음의 영원한 신비를 풀어헤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저 교회 역사를 조금 더 연구하려고만 했어도 자기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궁금증을 풀어주는 설명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들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육신의 교리는 영원한 본체가 육체가 되셔서 우리들 사이에 거하신다는 엄청난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인류의 지성은 바로 이 사상으로 인해 크게 당혹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성육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할만한 입장이 아닙니다. 다만 저로서는 제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에 속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실들을 깨닫고 있는데, 이 사실들로 인해서 제가 성육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육신은 유일하게 타당성이 있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위대한 교리를 이해할 만큼의 충분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교리는 너무나도 광대합니다. 제 스스로 속죄의 교리를 이해하노라고 감히 주장하지 않습니다만,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는 속죄의 교리라는 빛에 의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부활의 교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교리는 제 삼일 아침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결박을 끊어 버리시고 무덤으로부터 승리하여 일어나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도 그렇게 엄청난 사실을 측량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한때 술주정뱅이요 노름꾼이었으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아내를 구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게됩니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에서는 인간의 생애를 이렇게도 놀랍게 변화시킬만한 다른 위대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이러한 신앙의 교리들을 기독교 교회 역사의 빛에 비추어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본질적으로 4복음서에 포함된 말씀들을 해석한 책입니다. 4복음서에는 사실 여러분이 사도행전의 초반부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의미가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16:7). 그리고 또 언젠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돌이켜 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가 사도행전의 기록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무의미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의 가르침이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침 보다 실제로 훨씬 더 성공적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도행전이야말로 복음서들에 대한 주석입니다.
모든 장과 그리고 거의 모든 절 속에서 이 책은 교회의 핵심적인 사역이 그리스도의 기억을 영속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달하고 나타내는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역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일하시고 행동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사도행전은 교회가 초자연적이며 본질적으로 신성한 기구임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이며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 기억할 필요가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께 대해 하고 있는 주장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나은 분이라는 점이 아닙니다. 복음서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며 독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았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높은 곳까지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해서 본다면,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내용보다 말씀하신 방식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상상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청중들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서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까? "정말로 박식하기 이를 데 없는 강론이로군요! 엄청난 지식을 가진 분이시군요! 과학적인 사고 방식에 정말로 익숙하십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이렇습니다. "이 분의 말씀은 권세가 있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용보다는 그 방식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독특하신 분이시며 그의 성품에는 초자연적인 본질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스도의 독특하심
이와 정확하게 동일한 주장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에도 해당됩니다. 교회의 진정한 기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지만, 사실 교회의 주요 기능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기적적이고도 능력 있는 사역을 하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어떤 기구와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독특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루는 모든 기적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은 교회가 지금까지 전세기를 통해서 계속 해왔던 그 오래된 기적인데 그것은 죄인들을 성도로 만드는 기적입니다.
교회가 이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에 대해 한 가지 사건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이 사건에서 베드로를 통해서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교회의 온전한 기능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행9:32-35). 베드로가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32절)습니다. 베드로가 룻다를 방문해서 "거기서 애니아라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으로 상위에 누운지 팔년"(33절)이 되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이 상위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제가 이 사람 애니아에 대해서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애니아가 게으르다거나 걷고 싶지 않다거나 또는 일하기를 싫어해서 병상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애니아의 고통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니아는 불구로 인하여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애니아에 대해서 말씀 드릴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이것입니다. 애니아의 생각과 지능은 완전히 정상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주목을 끄는 일반적인 일들에 대해서 애니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서 걷는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대화 중에 애니아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대해서 자기 심정을 털어놓았을 것이라는 점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애니아는 걷고 싶었습니다. 애니아는 걸으려고 노력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뇌와 근육 및 사지 어딘가가 무기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신경 조직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 뇌에서 일으키는 완전하고 정상적인 충동이 결과적으로 그의 사지까지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이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반은 정상이고 반은 비정상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은 조정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애니아의 반쪽은 움직이기를 원하는데 나머지 반쪽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육체에 일어난 현상이 그의 영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지 망설여집니다. 조정 능력의 결여라는 것이 소위 죄의 상태를 일컫는 적절한 설명이 될 수는 없을까요? 무엇을 해야할지는 알지만 그것을 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 인류의 비극이라 한다면 정확치 못한 표현일까요? 선과 악의 차이는 누구든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알고 있는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그 무엇이 자기 본성 안에 있다는 점을 사람은 의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이 거리를 거닐다가 지금가지 다투어 왔던 사람이 길 저편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년 동안이나 서로 대화를 거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갑자기 마음을 진정시키고 길을 건너가서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면서 "당신보다 저의 잘못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 서로 용서하고 잊어버립시다"라고 말하는 큰 일을 해내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왜 내가 굽히고 들어가야지? 왜 항상 내가 져야만 하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화해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맙니다. 충동이 왔지만 그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공통적인 경험이 아닙니까?
우리들 모두 생활하다 보면 더 나아져야 하고, 집에서도 더 상냥해져야겠으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어떤 충동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이 영적인 중풍병, 행실을 막고 있는 것이 바로 인류가 갖고 있는 질병입니다. 현대가 안고 있는 고통은 해야할 일을 모른다는 데에 있지 않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할 일은 사람들에게 능력을 연결시켜서 정의를 실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그리스도
어떻게 교회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등장한 이 사건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문단속에서 제가 첫 번째로 읽은 것은 베드로가 와서 애니아를 발견했다는 점입니다(33절). 사람은 산상보훈을 일련의 사회적 복음의 기초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바로 그 순간 자기 자신이 중풍병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애니아가 어떻게 해서 마비가 되었는가만을 알려고 한다면 여러분 스스로의 힘만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애니아가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드로가 애니아를 발견했으며, 애니아를 해방시키는 말씀을 했으며, 그래서 애니아를 걷게 했습니다.
교회도 항상 이렇게 해 왔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부침(浮沈)의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 출신의 어떤 합리주의자들은 기독교는 끝장났으며 자기들이 상대할만한 가치도 없게 되었노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의 죽은 몸을 위해서 조사를 읊조리고 있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존 웨슬레를 통해서 베드로를 보내셨으며 거의 빈사 상태에 있던 교회를 통하여 부흥의 능력과 재각성을 일으키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이 있어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베드로를 보내십니다. 또한 보편적인 교회에 해당되는 이 진리는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항상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 추구 끝에 성도들은 마침내 빛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34절).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저는 이 특별한 사건에 내포되어 있는 시간적인 요소에 대해서 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 설명에 따른다면, 애니아는 즉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의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애니아가 많은 책을 읽었다든지 여러 집회에 참석했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일학교나, 성경 연구반에서 많은 시간과 관심을 끌어오곤 했던 케케묵은 논란을 기억합니다. 즉, 회심이 순간적으로 발생하느냐 아니면 점진적으로 발생하느냐에 관한 것인데, 항상 양쪽이 대립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회심이 순간적이냐 아니면 점진적이냐가 아니고 당신이 회심했느냐, 당신의 생활이 온전하냐,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과 접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간단하게 말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교회가 해야할 모든 일은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자유케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 > 로이드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지혜 (야고보서 1:5-8) (0) | 2010.11.25 |
---|---|
한 소녀의 증거 (왕하 5:2-4) (0) | 2010.10.07 |
참된 회심의 성격과 복음이 계시하는 것들 (창 32:34) (0) | 2010.09.30 |
부흥의 장애물 (창 26:17-18) (0) | 2010.09.15 |
십자가를 전파함 (고전1:23) (0) | 2010.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