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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A.W.Tozer

온유와 평안

by 복음과삶 2010. 10. 2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인간의 심성과 행위와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려면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을 거꾸로 뒤집어서 말하면 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인간의 생활과 행위는 그 보훈에서 말씀한 미덕과는 정 반대인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계시하셨던 그 덕성들의 어느 하나도 오늘의 세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보는 대신에 언어도단의 오만과 불손이 횡행함을 볼 뿐이요, 애통하는 자를 만나는 대신에 안일과 향락을 구하러 헤매는 자들을 만날 뿐이다. 온유 대신에 거만을, 의에 굶주린 자 대신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하는 자들을 만날 뿐이다. 자비 대신에 가혹함 뿐이요, 청결한 마음 대신에 부패한 심정 뿐이요, 화평케 하는 자 대신에 노기가 충만한 자들뿐이다. 또한 오늘의 세상은 해를 받고도 기뻐하는 자 대신에 손에 닫는 온갖 흉기를 휘둘러 반항할 줄밖에는 모르는 자들뿐이다.  
이와같은 비도덕성 위에 오늘의 문명사회는 기초하였다. 이 악기(惡氣)를 머금고 포화상태에 있는 공기를 우리는 분초마다 호흡하고 있다. 영아들까지라도 어미의 젖에서 이것을 빨고 있다.  

교육과 문화는 이것에 대하여 하등의 개선을 주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문학은 이와같은 세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실로 그 진상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이 교육, 문화, 문학은 본시 인생을 향상시키는 사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도리어 그것이 인생의 부패를 조장하는 것이 되어 있는 사실이다.  

인생의 모든 번민과 육체적 고통의 대부분은 직접 우리의 죄의 결과이다. 교만, 허식, 분노, 부패한 심리, 증오심, 탐욕 ― 이런 것들은 그 어떤 가혹한 질병보다도 더 심각한 고통을 인간의 영육에 주어 오고 있다.  
이와같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던진 말씀 속에는 하늘의 특이성과 신실성이 가득차 있다. 이렇게 말씀할 이는 그밖에 없고,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음이 실로 복된 일이다.  

그 말씀은 진리의 진수이다. 그것은 의견이 아니다. 예수는 의견이라는 것을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추측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알았고, 지금도 안다.  
그의 말씀은 솔로몬의 말과 같은 깊은 지혜의 결정체도 아니요 날카로운 관찰의 기록도 아니다. 그의 말씀은 그에게서 충일하는 그의 신성의 발현이며, 진리 자체이다.  
그는 복이 있나니? 하는 말을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할 수 있었던 오직 하나의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그는 인간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위로부터 내려온 복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일찍 땅 위에서 행하여졌던 어떤 다른 사람들의 행동보다도 가장 투철한 행동에 의하여 실증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예수의 어태(語態)에서 우리가 항상 찾아보는 바이지만 여기에
"온유"라는 말씀은 지극히 간단명료하게 쓰여 있다. 이 말의 뜻을 그는 그 후에 다음과 같이 좀더 풀이하여서 우리의 생활과 연결시켜 놓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28-30).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개념 ― 무거운 짐과 쉼, 멍에와 평안이 결부되어 있음을 본다. 이 무거운 짐은 결코 어느 일부의 인간에게만 국한된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 인류가 지고 가는 멍에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압제라든가 빈궁이나 노역(勞役)의 고통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멍에는 그런 고통보다도 훨신 혹독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한가지로 겪는 것으로서 재물이나 안일로써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이 지고 가는 멍에는 무겁고 애닮다 예수께서 말씀한 인생의 멍에는 마침내 기진하여 쓰러질 때까지 지고 가는 짐이다.  
쉼이란 이 멍에를 벗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무엇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행하기를 멈춤으로서 벗게 된다. 예수의 온유가 곧 쉼이다.  

우리의 멍에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심적 원인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내심에서 발하여 우리의 영과 육을 쏘는 것이다.  
첫째의 멍에는 교만이다. 자기 중심이라는 짐이야말로 참으로 무거운 것이다. 그대 자신을 고요히 반성해 보라. 그러면 그대의 번민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그대를 과소 평가했다는 데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는 우상을 우리 마음에 모셔 두는 한 그 우상을 모욕하기를 좋아하는 대적은 항상 우리 앞에 있다. 따라서 심령의 평안이란 바랄 수 없게 된다. 사소한 비평에도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애써 제어하는 노력과, 친구와 대적들의 비방에 일일이 마음을 써가며 대비책을 세우는 것은 곤욕 중에도 큰 곤욕이다. 이런 마음의 암투(暗鬪)는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며, 그것은 점점 더 격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두움의 아들들은 이 멍에를 끈기있게 메고 나간다. 그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한마디 한마디에 반항하며, 사소한 비평마다 애간장을 태우며 머리를 쥐어뜯고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잠을 못잔다.  
이런 멍에는 메고 갈 필요가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 멍에를 벗는 방법을 제시하셨는데, 그 방법은 곧 온유한 심령을 가지는 일이다.  

온유한 사람은 누가 나보다 크냐 적으냐를 관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의 평가라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안정된 마음으로 미소를 흘리며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줄을 안다.  

"오오, 자네가 무시를 당했단 말이지? 그래, 그들이 자네 대신에 그 사람을 뽑았군 그래. 그들이 자네는 보잘 것 없는 자식이라고 수군거렸단 말인가? 허허, 그래서 자네 자신이 바로 어제 자네에 관해서 한 말을 오늘은 세상이 했다고 해서 심사가 불안하단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바로 어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먼지 속에 기어 다니는 벌레보다도 못한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도 자네는 신실성이 빈약한 사람인가? 자, 겸손하세, 남의 말을 근심할 것이 무엇인가?"  

온유한 사람이란 비굴한 열등감에 눌려서 남의 말을 듣고 일희일우(一喜一憂)하는 졸장부가 아니고, 사자와 같이 대담하게 삼손과 같이 힘차게 자신의 도덕적 긍지를 지켜 나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해 줄 이는 하나님뿐임을 믿고 있으며, 자신의 교만이나 남의 평론에 의해서 경거망동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그는 자신이 극히 미약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눈에는 천사보다도 귀중한 자신임을 그는 믿는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시듯이 세상은 자기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평가를 개의치 않는다. 자기의 진가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는 완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마침내 만물이 각기 그 정가표를 붙이는 날이 오는 것을 그는 믿고, 초조해하지 않고 그 날을 기다린다. 그 날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그 날을 그는 흔연히 기다린다.  

동시에 그는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게 된다. 온유한 걸음을 걷는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도록 기꺼이 몸을 내어 맡긴다. 자신이 자신을 지키려던 옛 노력은 끝났다. 그러므로 그는 온유가 주는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허식의 멍에를 벗을 수 있다. 허식은 위선과는 좀 다르다. 허식이란 내 내적 빈곤을 감추기 위해서 나의 제일 좋은 면만을 내세우려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말한다. 죄가 인간의 심리를 기형화한 여러 가지 부자연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은 수치에 대하여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남의 앞에서 소위 체면이란 것을 꾸미지 않고 자기 그대로를 나타내는 남녀를 만나 보기란 어렵다. 오늘 세상에는 자기의 정체가 폭로되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심장을 조리고 사는 사람이 허다하다. 소위 품위가 있다는 사람은 어느 때이건 자기보다 더 높은 품위의 인물을 만날 일이 두려워서 전전긍긍하며, 유식한 사람은 나보다 더 유식한 사람을 대하게 되는 은밀한 불안을 늘 면치 못한다. 부자는 어느 날이건 자기의 옷차림, 자동차, 주택이 다른 어떤 부자의 그것에 비해서 빈약하게 보일 일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식은 땀을 흘리곤 한다. 또 낮은 계급은 낮은 계급대로 역시 같은 허식의 집단들을 이루고 있다.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이를 일소하지 말라. 이 멍에는 심각한 것이며, 이 부자연한 생활 방식은 점진적으로 희생물의 목을 졸라 들어가는 괴물인 것이다. 오늘의 심리학이란 이와같은 인간의 변태심리를 기준하여 꾸며졌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온유라는 것은 꿈과 같은 비현실적이며 하늘의 별같이 머나먼 것으로 무시되고 있다.  

이 생명을 잠식하는 악성의 질병에 신음하는 모든 인간을 향하여 예수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마 18:2-5).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비교하지 않으며, 그들은 그들의 가진 것을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려 하지 않고, 가진 그것에서 직접 기쁨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키가 자람에 따라서 죄가 그들의 심성을 휘저어 놓는 결과로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시기심이 눈을 뜨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아이가 나보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가졌을 때에는 벌써 전과 같이 내가 가진 것에서 기쁨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이 얄궂은 멍에는 인간의 영혼을 내리누르기 시작하며, 예수께서 그것을 벗겨 주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벗지를 못한다.  

또 하나의 멍에는 기교를 부리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건 뜻하지 않은 사이에 내 속마음을 친구들이나 원수들이 들여다 봄으로서 자기의 내적 공허가 폭로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한 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소위 말재주가 있다는 사람들은 혹 어쩌다가 실수를 해서 평범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할까 두려워서 수시로 긴장해 있다. 견문이 넓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혹시 다니다가 자기가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본 일이 있는 마르코폴로를 만날까 해서 두려워 한다.  

이 모든 부자연한 현상들은 우리가 물려 받은 죄로 인한 슬픈 부산물들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우리의 전체 생활면에 이것은 너무나도 깊이 뿌리를 뻗고 있다. "광고술"이라는 것은 다름아니라 인간의 이 가장하는 성향을 응용한 것이다. 나 이외의 것으로 보이려는 인간의 이 욕망에 영합(迎合)하여 무수한 책, 화장품, 의류가 팔리고 있다.  

이 가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온유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만 우리의 어깨에서 벗어져 떨어지는 저주받을 멍에다. 일단 이 멍에를 예수 앞에 풀어놓은 후 부터는, 우리 심령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를 추구하려는 생각이, 전에 사람의 눈, 귀를 두려워하던 모든 생각을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가 내 전체가 되고, "어떻게 나타날 나"는 우리의 관심권내에서 멀리 사라지고 만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우리가 가장을 하려는 심성은 오직 허세를 부려보려는 악한 욕망에서 오는 것이다.  

이 교만과 허식의 멍에 밑에서 이 세계는 바야흐로 쓰러져 가고 있다. 이 위경을 면하는 길이란 예수의 온유로 돌아오는 길 외에는 없다. 엄격한 도덕 생활이 극히 적은 효과를 줄 수는 있으나, 그러나 이 죄악은 비상하게 뿌리깊기 때문에 한 쪽 모를 누르면 다른 모가 튀어 나오고 만다.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을 향해 부르신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가 계시하시는 평안은 온유의 평안이며, 또 그 평안은 우리의 가식을 그치고, 솔직히 나 자신을 받아들일 때에 얻어지는 즐거운 해방인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약간의 희생을 요하는 듯 하지만, 그러나 이 멍에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소 같이 메어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충족한 은혜 속에 묻히게 된다. 예수는 이 멍에를
"내 멍에"라 부르셨고, 우리와 어깨를 가지런히 하여 이것을 메고 가신다.  

주님, 저를 어린 아이와 같게 하소서. 지위, 권력, 명예, 이익을 얻으려는 고통에서 저를 건지소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꾸밈없기 원합니다. 허영과 가식을 버리게 하소서. 자아 중심적인 저를 용납하고 도우사 육신을 부인하게 하시고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참 평안을 얻게 하옵소서. 주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기를 원하여, 주 앞에 겸손히 엎드리나이다. 그것을 짊어짐으로써만 제가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온유의 멍에, 주님의
"쉬운 멍에"를 제게 지워 주소서" 아멘 ■

 

 

출처 : http://www.christi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