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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14)

by 복음과삶 2005. 7. 2.

 

갈라디아서 강해(14)

 

M.R 디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 3:13∼15)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주셨을 때, 이미 아무도 그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죄인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리라고 기대하지 않으셨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써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율법은 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율법은 거룩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죄인이 율법에 의하여 정죄를 받는다. 또한 율법은 공의롭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다. 만일 율법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율법의 공의로움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율법은 오직 죄의 본성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여 말하기를,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량받다

이제 다음의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율법의 저주는 율법의 형벌인데, 곧 죽음(사망)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죽으심으로써 율법을 어긴 데 대한 형벌인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셨다. 형벌이 부과되지 않는 법은 힘이 없다. 율법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형벌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율법이 범죄에 대해 처벌하지 않는다면, 즉 형벌인 율법의 저주가 없어진다면, 율법은 더 이상 범죄자를 제재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입법자들은 “법에 이빨(무서운 벌칙 규정-역자 주)을 넣어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형벌을 엄격하게 규정해 놓음으로써 사람들이 법규를 잘 지키도록 강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법)에서 형벌을 제거해버리면, 그것은 마치 사자의 입에서 ‘이빨’을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모든 신자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형벌이 구세주에 의해서 이미 충족되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 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율법의 저주와 그 정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영생(ETERNAL LIFE)을 얻는 것이다.

중대한 질문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다시 한 번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고 보존된다면, 그것은 부주의하고 방탕한 삶을 조장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만일 신자의 구원이 확실하고 다시는 구원을 잃지 않는다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도 아무런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형벌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성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신자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추궁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범죄에 대한 구실로 삼는 사람은 거듭난(중생한) 사람도 아니고, 은혜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잘못 실수해서 범죄한 성도들을 위해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셨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리고 요한일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또한, 갈라디아서 6장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처럼 죄를 회개하는 신자에게는 완전한 용서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범죄에 대한 구실로 삼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달리 취급하신다. 주님께서는 신자가 살아가면서 범한 죄를 간과하시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지 않고 그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은 틀림이 없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고의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약함과 병듦

바울은 육신에 속한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의 삶 가운데서 죄를 깨닫거나 분별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는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30,3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그러니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삼아 제멋대로 살아가도 된다는 생각은 완전히 버리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은혜가 풍성하니 죄를 짓자(롬 6:1 참조)”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조만간 하나님은 약함과 병듦과 징계를 통해 당신을 다루실 것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고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죽임을 당케 하심으로써 자기 자녀의 반역적인 행동을 끝내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주 엄중한 방법으로는 자기 자녀들을 다루지 않으실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에 경각심을 고취시키실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다!(히 10:30 하반절)

신자가 죄에 대한 이러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여(분별하여)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이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의 죄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구원은 은혜에 근거한 것이지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것이나, 우리의 기쁨, 확신, 축복, 상급 등은 우리의 신실함(행위)에 근거한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강조했던 진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우리는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이 위대한 사실을 예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역사를 다시 한 번 거론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17에 주목하기 바란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들어온 후로는 더 이상 율법이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을 다룬 다음에,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이 율법 아래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이, 그 이전에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체결되었던 은혜 언약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다음의 말씀에 주목하기 바란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7, 18)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예로 들고 있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아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도 은혜 언약 아래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그 언약이 폐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을지라도,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무효화되지는 않았으며, 현재에도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우리를 위한 예표로 주어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은혜로써, 오직 은혜로써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근거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 구원은 우리의 느낌에 의존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느끼신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신실함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나, 우리에 대해서나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당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때에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일향 미쁘시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 신자가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사실을 과거 2,500여 년 동안 체험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 유대 땅에서 쫓겨나 세계로 흩어졌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언약의 백성이며, 다시 한 번 그 유대 땅에 모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역시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지만, 우리가 상급을 받는 것은 행위로 말미암는다. 당신이 영생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당신이 행한 그 어떤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이 위대한 진리를 마지막으로 확증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율법의 언약에 관한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 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

봉사에 대한 동기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영원하지만, 그 교제는 때때로 단절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범한 어떤 죄 때문에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제는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 관계는 영원히 끊어질 수 없다는 바로 이 진리가 순종의 거룩한 삶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우리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은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행한다. 은혜는 우리의 교사이다. 은혜는 범죄에 대한 구실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를 막아주는 방패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

이러한 도전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들어보라.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또한 디도서 2장 11,12절에서의 바울의 말을 들어보라.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모든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이세대에) 살고”(딛 2:11,12)

하나님의 은혜는 참된 거룩함을 가르쳐준다. 한 번 디도서 2:11,12에서 ‘은혜’라는 말 대신에 ‘율법’이란 말을 대치하여 읽어보라.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를 양육하시되 모든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 과 경건함으로…’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디도서의 말씀을 위와 같이 읽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알고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양육하여 거룩함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율법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이 해낼 수 없는 것을 은혜가 해냄이 분명하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고, 보존하지도 못한다. 인간을 구원하거나 보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이 일순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행위로써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율법은 육신과 인간 본성의 전적인 타락(부패)을 드러내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졌으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공의가 아닌 자비를, 정죄가 아닌 용서를 얻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을 무시하는 말이다”라는 비난들을 끊임없이 대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율법을 높이는 말이다! 즉 율법의 요구하는 바가 지극히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를 위해 그 율법을 성취하러 오셨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율법을 파괴한다고 비난하면서 마태복음 5장 17,18절을 인용하곤 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물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루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이 율법의 형벌(사망이라는 죄 값)을 다 치르셨음(지불하셨음)을 입증하셨다. 율법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율법 아래에서 실패한 사실을 입증하셨다. 율법은 여전히 완전하며, 여전히 ‘의롭기’ 때문에 여전히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다. 율법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완전한 요구로서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죄인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은 그를 정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 따라서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신자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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