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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13)

by 복음과삶 2005. 7. 2.

 

갈라디아서 강해(13)

 

M.R 디한


 

율법의 저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성령님의 이같은 확실한 말씀으로 바울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누구든지 어느 한 순간이나 또는 정도에 관계없이 그리고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은 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으며, 잃어진 바 된 사람이고, 정죄 아래 있으며, 소망이 없는 자이며, 율법에서 정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자이다. 위의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고,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는가?”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의 삶 가운데 율법의 세부적인 사항 중 그 하나라도 어긴 적이 있어서 율법 전체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면, 위의 확고한 말씀에 의거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으며, 율법의 형벌인 당신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과 영원한 사망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으셨던 예수님 한 분 외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었고, 또 그러한 삶을 살수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 순간의 부정한 생각이나, 한 마디의 성급한 말이나, 하나의 작은 거짓말이나, 우리 삶의 단 한 순간이라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것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죄가 된다. 그리고 솔로몬은 “어리석은 (자의) 생각은 죄라” 고 하였다. “그러면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다윗은 시편 14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시 14: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셨을 때, 발견하신 사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그 다음절에 나와 있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나의 친구여,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인에 대해 선포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당신과 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자연인들은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1).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은 우리 모두를 정죄하고 있다.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일 당신이 이에 대해 보다 더 자세한 것을 알기 원한다면,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 주의 깊게 읽어보기 바란다. 로마서의 첫 3장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언으로 끝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제 잠시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가 보자. 이 하나님의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율법은 율법을 온전히 지킨 자에게만 축복할 수 있다. 그리고 율법은 그외 나머지 모든 사람을 저주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친구여, 이제 당신은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과 율법의 저주 아래로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절망 가운데 빠뜨리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도록 무기력하게 한다. 우리는 죄인이다. 따라서 거룩하며 거짓말할 수 없는 율법은 우리 죄인들을 영원한 사망으로 정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만을 주셨다면, 우리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한 채, 필경 영원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혜가 주어짐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놀라우신 은혜의 메시지를 주신다.
율법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고, 의롭게 하거나, 거룩하게 할 수가 없다. 율법은 죄인을 성도로 만들지도 못하고, 죄사함을 줄 수도 없고, 마음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지도 못하며, 우리를 어떠한 죄악된 행실에서 벗어나도록 하지도 못한다. 오직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은 형벌과 공의를 요구하고,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우리의 더러움과 무가치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 영원한 사망으로써 저주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유일한 기능이다. 율법은 결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을 때, 율법이 결코 한 사람의 죄인도 구원하지 못하며, 결코 한 사람도 더 의롭게 만들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죄인도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이며, 더군다나 하나님이 지키도록 명령하신 율법을 받은 그 백성들조차도 결코 지킬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러면 왜 율법을 주셨는가?

당신은 즉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인가? 과연 율법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다. 율법은 결코 무능력하지 않다. 율법의 능력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며, 그 능력은 또한 우리가 범한 죄로 인해서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다. 참으로, 율법은 매우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죄인을 구원하거나, 또는 성도를 거룩케하는 일에 있어서는 완전히 무기력하다. 그러한 일은 결코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아니다. 만일 율법이 죄인을 구원하거나 성도를 거룩케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필요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8: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 구절의 첫 번째 마디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율법이 … 할 수 없었던 그것을!” 율법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결코 율법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으셨던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율법이 죄인을 의롭게 하지 못하며, 죄인을 구원하거나 죄를 용서하거나, 구속함을 줄 수도 없으며, 죄인을 개선시키거나 그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도움을 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율법이 약하거나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히려 율법이 너무도 강력하나, 인간의 육신과 마음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이처럼, 율법이 죄인을 저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이다. 죄인의 육신은 부패되어 있으며, 심지어 성도의 육신조차도 더럽고 부패되어 있다. 그러나 율법은 거룩하고 완전하고 의롭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

이제 영광스러운 계시가 임했다. 즉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하기 위해 오셨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율법 자체로부터 구하기 위해 오셨다. 율법은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우리를 죽이려 하는 사형 집행관이며, 노예 감독관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을 하셨다.
첫째로, 예수님은 33년 반 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써 온전하고 거룩하며 무죄한 삶을 사셨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의(義), 즉 율법의 적극적인 의를 이루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둘째 일도 이루셨다. 즉 에수님은 갈보리 산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서 정한 형벌인 죽음을 당하셨고, 삼일 후에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음을 입증하셨다.

이처럼, 율법에서 정한 형벌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치뤄졌으며, 죄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죄한 삶을 통해 완전한 의를 이루셨는데, 이 완전한 의(義)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의 두 가지(형벌을 치르심과 의를 이루심)를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은혜로, 자기의 행위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그가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거저 제공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힘으로써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시인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들을 행하신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그 죄인에게 전가시킨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어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모든 형벌이 다 집행되어졌는데, 이 형벌이 다 치뤄진 것이 그 죄인에게 전가되어진다. 따라서 그는 이제 죄값을 완전히 지불한 구속함을 받은(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이 용서받은 죄인에게 자신의 완전하고 죄가 없는 의 - 예수님이 친히 무죄한 삶과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입증하시고 이룩하신 의 -를 전가하신다. 그럼으로써 이제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그리스도 자신의 의로써 옷입은 자가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신자는 율법에 대하여 빚지고 있는 그 죄 값을 치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의해 신자는 그리스도 자신의 완전하고 무죄한 의로 옷 입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마치 전 생애 동안에 단 한 가지의 죄도 짓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 사람처럼 설 수 있게 되었다.

친구여,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justification)” 이며,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진리이다. 성도는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용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율법은 ‘자비’라는 것을 모른다. 오직 율법은 심판만을 알 따름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여기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의)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이것은 “율법의 의가 우리에 의해서(by us) 이루어지게 하려”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in us) 이루어지게 하려”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율법의 의’는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 즉 우리에 의해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고, 갈보리 산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에 죄를 담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이 장 서두에 제시된 갈라디아서 3:10로 되돌아가서, 바울의 말을 상기해보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바로 이것(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는 것)이 율법이 요구했던 바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없고, 어찌할 수도 없으며, 심판아래 있으며, 더럽고 추하며, 정죄받은 죄인으로 서있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그것을 주 예수님께서 행하셨다. 그리하여 갈라디아서 3:13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구원받았으며, 영원히 율법에서 벗어났다(롬 7:6). 율법은 두 번 다시 정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제 율법과는 영원히 이별한 셈이다. 신자들은 이제 율법에서 벗어났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며(갈 2:19),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롬 8:2). 아,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이 놀라운 구원과 이처럼 경이로운 구속을 기뻐하라! 그러므로 필자는 다시 말한다.

“…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하)
여기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지키거나 어느 짧은 기간만 순종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써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끊임없이,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항상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직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채 천국과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한 생활을 하고, 교회에 출석하며, 종교의식을 행하고, 예의 바르게 처신하며, 최선을 다해 율법을 준수하기만 하면 장래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이러한 것이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우리는 모두 어그러진 길로 치우쳤으며, 모두가 다 그릇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힘으로써는 절대로 이룰 수 없었던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몽학선생으로서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쳐주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율법을 ‘거울’에 비유했다.

우리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울은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비춰본 후에는, 거울을 떠나 오직 자신의 보혈로써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충족되어졌다는 확신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당신에게 전가될 것이고, 예수님이 치르신 죄값을 당신이 당신의 죄에 대한 값을 직접 지불한 것으로 인정해주실 것이다. 그후에야 당신은 우리와 같이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에서 자유했네, 아, 기쁘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죄 용서함 받았네
율법으로 저주받고 타락하여 멸망 가운데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구속하셨네,

단번에 영원히, 아, 의심하는 자여
이것을 믿으라.
단번에 영원히, 아, 죄인이여
이것을 믿으라.
십자가로 나오라. 죄짐이 풀리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구속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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