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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갈라디아서강해-MR디한

갈라디아서 강해(12)

by 복음과삶 2005. 7. 2.

 

갈라디아서 강해(12)

 

M.R 디한


 

아브라함의 자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갈라디아서의 요지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되풀이하여 이렇게 말했다. 만일 구원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행위에 의존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히 가장 큰 실책이 되어 버린다. 만일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적인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는 이것을 갈라디아서 2:21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에 비추어볼 때,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받은 후에, 다시금 율법 아래로 돌아가 율법에 종노릇하려 하는 어리석음을 보고 놀라고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완전해지려 하느냐)”(갈 3:3)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다

사도 바울은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소개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셨고, 초자연적으로 태어날 아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 아브라함은 복음을 믿었다(갈 3:8). 복음이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이 약속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아브라함은 또한 이삭의 기적적인 출생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이삭이 장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기적적으로 태어난 아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는데, 바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가장 완벽하게 묘사해 주는 기록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갔는데, 이것은 ‘일시적으로나마’ 그를 죽음에 처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삭은 이미 희생제물로 드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행위의 동기를 열납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삼 일 동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거의 죽은 자와 다름없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 사실을 확증하여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히 11:17)


그 다음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 11:17)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기 아들을 드린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 관한 한 이삭은 실제로 죽었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모리아 산으로 출발하였을 때, 그의 생각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생각과, 삼 일 후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브라함은 삼 일 동안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은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이삭은 삼 일 낮과 삼 일 밤 동안 죽어 무덤에 계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놀라운 모형이 되었다. 그 다음에 부활이 이루어졌다.

창세기 22:13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이삭은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삼 일 동안 죽어 있었는데, 이제 다시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부활이었다. 이삭은 삼 일 동안 죽은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제 하나님이
“어린 양을 잡고, 이삭은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로 부활이다. 히브리서 11:17-19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적인 일을 하려고 하신다는 것을 줄곧 알고 믿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이 언약 백성의 조상이 되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삭은 곧 죽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단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셔야 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지키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삭을 다시 살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 일 후에 이삭은 모형과 예표로써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고, 부활의 기쁨이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시게 될 그 산 위에 나타나게 되었다.

오직 유일한 길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다. 이것은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이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라고 말했을 때 언급했던 바로 그 복음인 것이다. 따라서 이 복음은 오늘날에도 똑같다. 아브라함이 이전에 기적적으로 태어난 자기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듯이, 오늘날 우리도 이삭으로 예표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기록을 믿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구원얻는 믿음을 가진 자의 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며, 신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은 자연적인 출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개인적인 신앙에 의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우리의 본이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구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고 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3-25)

사도 요한도 이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9,10)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증거는 어떤 놀라운 느낌이나, 어떤 기이한 흥분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늘로부터 오는 어떤 음성이나 환상이나, 또는 감정이나 꿈이나 어떤 느낌도 아니다. 그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증거를 갖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면,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이 따르게 되며, 때로는 커다란 감정적인 반응이나 행복한 꿈조차 수반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령님이 증거하시는 것,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믿은 결과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 이외에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더 이상의 추가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추가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랑하는 자여, 당신의 감정은 변하기가 쉽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감정이나 느낌을 의지하는 것은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필자는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확신을 얻곤 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실히 한 후에, 그에 대한 증거로서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 설명했으며, 바울 서신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진술 가운데 하나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자기의 논증을 끝마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에 잠깐 인용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우리가 과연 율법의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러나 우리가 일단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그 구원이 보존될 수 있음에 틀림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율법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계속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만 어겨도 당신은 죄가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율법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이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성도가 있을까? 당신은 과거에 한 번도 악한 생각을 한 적이 없고, 성급한 말을 한 적도 없으며,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낸 적이 없고, 어떤 형제에 대하여 한 번도 나쁘게 생각하거나 좋지 않게 말한 적이 없었는가? 그리고 당신은 과거에 수군수군하거나 수군수군하는 말을 듣거나, 또는 당신의 원수들에 대해서 미운 생각이나 쓰라린 마음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는가? 당신은 과거에 한 번도 어리석은 생각을 마음에 품은 적이 없었는가? 성경에는
“어리석은 (자의) 생각은 죄니라”(잠 24:9)고 기록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은 단 한 번의 경우라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소홀히 한 적이 없었는가? 소홀히 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죄가 있는데, 이 때 만일 당신이 율법 아래 있다면, 당신은 그 율법을 어긴 순간 저주 아래 있게 된다.

이제 이것은 얼렁뚱땅 넘길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은혜로써 구원받은 이후,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는데” 한 번도, 단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었는가? 단 한 번이라도 어겼는데, 만일 당신이 율법 아래 있는 자라면, 당신은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계속 언급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다. 오직 먼저 은혜로써 구원받고 - 은혜로써 보존되며 - 은혜로써 가르침 받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고”(딛 2:12)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입었나니”(벧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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